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7화 (7/360)

7화

제1장. 만족의 주인 (6)

밤이 깊어 고요해지자 영씨 부인도 자러 갔다. 장막에는 안정룡과 대합살만 남았다.

대합살은 양반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아 한타 고기로 만든 수육 한 점 집어먹고 술 한 모금을 마시며 초원의 유목민들이 자주 부르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조금 취한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았던 안정룡은 장막 입구에 기대 생각에 잠겼다. 맑고 깨끗한 눈을 가진 세자를 떠올렸다가 또 벙어리 소녀를 떠올렸다. 북극성이 떠오른 일을 생각했다가 대군이 9왕에게서 받아든 붉은색 함을 생각했다. 생각에 생각을 잇던 그는 산가지1)를 늘어놓고 북극성의 궤적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셈을 할수록 복잡해졌다. 매번 뭔가가 빠졌는지 수식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풀이 죽은 그는 산대를 발로 헤집고는 장막 천을 걷고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그때 갑자기 나직한 사람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어렴풋이 들리는 말이 세자에 관한 얘기 같았다. 또 ‘현일(玄一)’이라는 두 글자도 들린 것 같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점성술사에게 현일은 금기어였다. 몰래 다가가 보니 영씨 부인의 여자 노예들이었다. 밤중에 마지막으로 말에게 건초를 주려고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등잔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면서 세자의 장막 쪽을 흘깃거렸다. 등잔불에 그림자가 뒤로 가늘고 길게 늘어지며 빠르게 흔들렸다. 흡사 어둠 속에 나타난 도깨비불 같았다.

등 뒤로 영문을 알 수 없는 한기가 스쳤다. 안정룡이 장막 천을 내리려는 찰나 곧 잠들 것 같던 대합살이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비틀비틀 쓰러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표범처럼 사나워져 있었다. 그는 장막 안을 한 바퀴 돌더니 가장 굵직한 마봉(馬棒)2)을 집어 들고는 발로 장막 천을 걷어차며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안정룡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도리어 곤두박질을 당했다.

“스승님! 안 돼요!”

안정룡이 그를 쫓아나갔다.

그는 아연해졌다. 마봉을 든 대합살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는 듯한 자세로 자신의 백마 옆에 서 있었다. 삼베 두루마기의 앞섶은 다 벌어졌고 등불이 비친 몸에는 한 겹의 붉은빛이 아른거렸다. 그는 두어 번 휘청거리더니 트림을 하고는 말안장의 철 등잔을 집어 들고 마봉으로 힘껏 두드렸다. 금속의 울림은 사람의 정수리 뼈를 쪼개기라도 할 듯 어둠 속에서 유난히 날카롭게 울렸다. 잠들었던 양 떼가 놀라 깼고 뒤편에서는 말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여자 노예들은 놀라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들은 앞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대합살은 마봉을 내던지고 장막으로 돌아왔다. 안정룡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합살은 침대 위에 앉아 느릿느릿 부시를 비볐다. 주둥이가 녹색 옥으로 된 담배통에 불을 붙이고 길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모락모락 피어오른 담배 연기가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대합살이 이토록 엄숙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에 안정룡은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대합살은 고개를 숙인 채 담배통의 명멸하는 붉은빛을 보며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리 와라!”

대합살은 안정룡에게 옆으로 와 앉으라면서 침대 옆을 탁탁 쳤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또 한참을 침묵했다.

“아마칙. 너는 내 제자고 만족의 미래는 어쩌면 너와도 관련이 있을 테니 몇 가지 이야기를 해줘야겠구나.”

그가 맨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마. 우리 만족의 역사부터 말이다.”

대합살이 모닥불에 마른 장작을 몇 개 더 집어넣자 은은하던 불길이 되살아났다. 불빛에 그의 앙상한 얼굴이 비쳤다.

“어쩌면 너는 사람들이 마종금을 켜며 부르는 손왕 이야기나 흠달한왕의 이야기를 듣고 그게 우리 만족의 역사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몇천 년간 우리 만족에 손왕이나 흠달한왕 같은 영웅이 몇이나 있었느냐? 진짜 역사는 한주 초원의 매 한 포기 풀 아래에 있다.”

“이 땅이 구주라 불린 것이 얼마나 오래전인지는 알 수 없다. 전설에는 어떤 비범한 황제가 온 세상을 통일하고 아홉 개 주로 나누어 그리 이름 지었다고 하지. 그러나 그 비범한 황제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북륙에는 상주, 한주, 청주 이렇게 세 개 주가 있다. 누군가는 북륙이 고대에 한 마리 거대한 용이었다고 하더구나. 오랜 세월을 살다가 마침내 죽어 바다 밑에 가라앉았고 그것의 뼈 위로 진흙과 모래더미가 쌓여 북륙이 되었다는 게지. 상주는 용의 머리고 그곳에서 태어난 과부족은 키가 크고 덩치도 크며 야수처럼 사납다. 청주는 용의 꼬리이며 그곳에선 우족이 태어났다. 가볍고 유연하며 하늘을 날아다니지. 그리고 우리 한주의 초원은 용의 가슴이다. 가슴에서 태어난 우리 만족이 가장 용감하다.

화족들은 우리를 야만하다며 만족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는다. 초원에서 만(蛮)이라는 글자는 용기란 뜻이거든. 우리 전사들은 도끼와 커다란 월(鉞)3)을 들고 마구를 메운 말을 몰았다. 화족들은 우리 병사들을 보자마자 꽁무니를 내뺐지. 그들의 검과 갑옷은 우리보다 뛰어났지만 승리는 언제나 우리 만족의 차지였다.

사실 초원은 몹시 추운 지역이라 들풀만 잘 자랄 뿐 경작은 할 수 없다. 동륙의 완주에서는 쌀을 심는데 1년 내내 경작한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우리 남쪽 초원에는 불을 지르고 화전을 일궈 밀을 심어도 풍년인 해에 고작 한 계절 생산할 뿐이지. 먹을 것이 부족하니 사람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해서 남의 식량을 빼앗지 않으면 애초에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었지.

그래서 대대로 가장 강한 전사만이 살아남았다. 강건한 아비가 강건한 아들을 낳아 대대손손 초원의 호걸이 되었지. 하나 이런 용기로도…… 안 되는 일이 있었다.”

대합살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한참을 침묵했다.

“화족 무사들은 쓸모없었다. 하지만 몇백 년 전에 장미 황제가 태어났지. 대단한 황제였어. 우리 대군보다 더 대단했다. 그는 동륙의 네 개 주를 통일하고 대윤이라는 제국을 세웠다. 그들은 우리 만족을 몹시 두려워했어. 용감함에서는 우리 군사가 화족 군사보다 월등했으니까. 그들은 만족 기병이 동륙 땅을 밟는 순간 자기네 땅이 우리의 목장이 될 것임을 알았지.

그러나 천척협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우족에게 항해 기술을 배운 장미 황제는 동륙의 제후들에게 수많은 배를 만들게 해 수군으로 천척협을 통제했다. 우리 만족의 말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날개가 없으니 바다를 건널 수가 없었지.

초원에 일곱 개 부락이 있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일곱 개가 아니구나. 진안부가 멸족됐으니…. 남은 것은 우리 청양과 양하, 삭북, 란마, 사지, 구남 이렇게 여섯 개구나. 장미 황제가 대윤을 세웠을 때만 해도 초원에는 수백 개의 부락이 있었다. 서로의 소와 양, 여인을 빼앗았지. 매년 봄마다 양식이 떨어지고 양들이 굶주림에 가장 말랐을 때 전쟁은 시작됐다. 수백, 수천 명의 유목민들이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갔고 곳곳이 시신 천지였다. 란마의 부락명이 가진 본래 의미는 ‘객병’, 다른 곳에서 온 병사라는 뜻이다. 당시 란마부에 먹을 게 없어 남자들이 활을 메고 나가 황양을 사냥하러 나간 틈에 다른 큰 부락인 탑격부가 마을을 약탈했다. 란마부의 남자들이 돌아왔을 때 젊은 여인들은 탑격부의 사내들이 돌아가며 강간해 절반이 회임한 상태였지. 여자들이 자진하려 했지만 남자들이 못하게 막고 아이를 낳게 했다. 그들은 태어난 아이들을 란마라 부르며 야생말의 젖을 먹여 키우고 말타기와 궁술을 가르쳐 가장 용감한 무사로 만들었어. 나중에 그들은 탑격부를 공격해 사내란 사내는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런 북륙이 큰 배도 만들어내는 화족과 어찌 영토를 다툴 수 있겠느냐? 목숨이나 부지하면 다행이지. 후에 우리 북륙에도 마침내 영웅이 탄생했다. 너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

“손왕!”

안정용이 소리쳤다.

“그래. 손왕이다.”

대합살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왕 아감제는 노예였다.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지. 태어난 그는 주인의 가축을 방목했다. 그것도 가장 혹한의 지역에서. 그곳에서 방목을 하는 사람은 서른을 넘기지 못했어. 그러나 손왕은 살아남았지. 그가 얼어 죽어가고 있을 때 설숭강을 지나가던 신녀(神女)가 자신의 젖을 마시게 주고 반달 천신의 축복도 내려주었다.

이 얘기들은 다 전설이란다. 신녀가 바로 손왕의 아내 아감달이라는 사람도 있지. 손왕은 인내심이 강한 영웅이었다. 그런 사람이 초원의 패권을 잡게 돼 있지. 그는 자기 아내인 아감달을 호색한인 의부에게 인질로 보내며 3천 명의 용감한 병사를 빌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3천 명으로 초원을 쓸어버렸다. 복종하지 않는 부락은 공격해 무너뜨렸고 그러자 더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기를 원했지. 결국 수백 개의 부락은 일곱 개의 큰 부락으로 통합됐고 손왕은 첫 번째 고리격 대회를 소집했다.

고리격 대회는 ‘모두 앉아서 하는 회의’란 뜻이다. 이 대회에서는 부락의 규모와 상관없이 모두 앉아서 회의를 했고 그 후로 지위 고하의 구분이 없어졌지.

손왕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 만족은 한 가족이다. 반달 천신이 내려주신 초원을 공유하며 더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초원의 중심인 삭방원에 성을 한 채 지을 것이며 모든 노약자는 성안에서 편안히 살 수 있다.’

지금 네가 머무는 곳이 바로 그 성이다. 우리 만족의 유일한 성, 북도성이지.

한데 이 성에는 다른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너는 모르겠지만 ‘패도성’이라고도 한다. 우리 만족은 그 단어를 쓰지 않아. 그 말은 우족들이 지은 것인데 ‘잘못된 도시’란 뜻이다.

북도성이 완성된 첫날. 우족 하나가 청주에서 급히 왔다. 너도 아는 이름이다. 고풍진. 존칭까지 더한 전체 이름은 ‘사달극 성방의 영주 대인, 고풍진 소덕랍형’이다.

“고풍진!”

안정룡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동륙과 북륙을 아울러 점성술사라면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지. 고풍진은 그들에게 종사(宗師)이자 주재자였고 심지어 점성학의 황제이기도 했어. 그는 점성학 역사의 기초를 다지는 두 가지 법칙을 도출해냈고 ‘황극경천’이란 이름의 학설을 창시해 별하늘과 대지를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후대의 점성술사들이 점을 치는 데 토대가 되었지. 그가 자주 사용하던 5식 및 7식 연산법을 풀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후대에도 그의 업적에 육박하는 이는 나오지 않았어.”

대합살이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그의 동경 어린 눈빛에는 아련함도 섞여 있었다.

“고풍진은 정말 경외할 만한 사람이야. 500년이나 지났는데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리면 벅차오른다니까.”

* * *

1) 일정한 방법으로 늘어놓으며 수를 셈하는 데 사용하는 막대.

2) 나무막대 끝에 마름쇠를 단 것으로 유목민들이 수렵 및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몽둥이.

3) 도끼와 비슷하게 생긴 종류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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