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5화 (5/360)

5화

제1장. 만족의 주인 (4)

바람 속에서 줄 한 가닥을 튕기는 듯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용격 가문의 막내딸 용격응이 엉엉 울며 제 언니의 시신을 향해 기어갔고 여수우는 일어나 힘없이 몇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용격심을 끌어안고 흘러나오는 피를 막으려 등을 더듬어 상처 부위를 눌렀다. 피가 흐르지 않으면 그녀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그녀의 작은 손으로는 어떻게 해도 지혈할 수가 없었다. 용격응의 품에서 용격심의 시신은 차츰 식어갔다. 그녀는 절망적인 눈으로 피가 잔뜩 묻은 자신의 두 손을 보고는 용격심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고요한 가운데 울음소리가 잔지러졌다. 그녀는 훌쩍거리면서 어버버했다. 제 언니에게 뭐라 말을 하는 듯했으나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벙어리였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안정룡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난해 죽은 자기 집 암말이 떠올랐다. 망아지는 바람과 눈 속에서 제 모친의 주위를 돌며 시체를 핥았다. 그러다가 완전히 절망한 후에야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제 모친이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마디 소리도 내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여봐라! 여봐라! 끌어내라! 전부 끌어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9왕이 대군 앞을 가로막고 선 채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이마에는 푸른 힘줄이 툭 불거져 나왔고 안색은 무서우리만치 시퍼랬다.

십수 명의 호표기 병사가 대오를 뚫고 나오자 귀족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수행 무사들도 앞다투어 달려 나가 대군을 에워쌌다. 어수선한 가운데 누군가가 말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말들이 길게 울부짖으며 충돌하기 시작했고 한바탕 혼란이 일었다. 수많은 인영이 눈앞에서 번득이는 통에 안정룡은 뒤로 밀려났다. 호표기 병사들의 손에 들린 예리한 장도(長刀)를 본 안정룡은 달려 나가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군을 모독하면 그게 누구든 죽을죄였다.

“아소륵! 아소륵!”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돌아와라! 돌아와!”

대합살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안정룡은 대합살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 인파 속을 두리번거렸다.

순간 안정룡은 놀라 멍해지고 말았다. 뭇사람들도 잇따라 조용해졌다. 호표기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버버버 흐느끼는 소녀에게서 1장 남짓한 거리에 있었지만 머뭇거리며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세자가 그들 앞에 섰기 때문이었다. 대합살이 목소리를 낮추어 소리쳤다.

“돌아와라! 돌아와!”

모두가 이 이상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세자는 용격응의 앞에 섰다. 야윈 체구가 갑자기 커진 듯했다.

아소륵이 힐끔 돌아보았다. 대합살이 필사적으로 그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후끈한 바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의 눈빛에 안정룡은 불현듯 온몸이 선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호표기의 칼을 마주했다. 그는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펼쳐진 양쪽 소매는 작은 매의 날개 같았다. 그가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용격응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감히 제 아비와 반역자 사이를 막아선 것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소년의 소맷자락이 가볍게 나부꼈다. 그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호표기 병사들은 소년이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실 더 두려운 쪽은 그들이었다. 아소륵은 세자였으니까.

“세자를 보호해! 역당은 생포해라!”

9왕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호표기 병사들은 대범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선두에 선 백부장이 칼을 들고 으름장을 놓으며 팔을 휘둘러 세자를 품에 안으려 했다. 그의 칼은 이미 용격응의 머리를 내리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방금 전 9왕이 건넨 눈빛은 극도로 냉혹하고 매서웠다. 지금은 군의 위엄을 세워야 할 때였다. 세자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칼날을 보면서 손을 뻗어 칼을 쥔 백부장의 팔을 감싸 안으려고 했다. 당황한 백부장이 온 힘을 다해 칼을 거뒀지만 몸에 균형을 잃고 그만 세자와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칼이 풀밭에 떨어졌다. 두 사람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세자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무릎을 꿇은 채 비실비실한 몸으로 소녀를 막았다. 그가 격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침이 소녀의 앳된 얼굴에 튀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것은 새빨간 핏방울이었다. 세자는 소녀의 얼굴에 튄 피를 손으로 닦아주고 이마의 앞머리도 떼어내 주었다. 그러고는 버둥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맨 처음 그대로 두 팔을 벌려 용격응의 앞을 막아섰다.

군중 속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고 대군의 얼굴은 무서우리만치 어두워졌다.

“비켜라!”

9왕이 소리치며 호표기를 물렸다. 그는 말안장에서 칼을 꺼내 들고 늠름하게 소년 앞에 섰다.

“세자! 진안부의 역당은 네 아버지를 모해하려 했다. 그녀는 우리 청양부의 적이야. 자중할 줄 알아야지!”

9왕은 칼을 들고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며 싸늘한 눈초리로 세자를 주시했다. 철익 같은 무사도 9왕의 눈빛을 보면 등골이 서늘해졌다.

세자는 더욱 심하게 몸을 떨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대합살도 세자처럼 덜덜 떨었고 수염도 바들바들 떨렸다. 안정룡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세자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모두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세자가 다시 일어났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는 허리를 숙인 채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세자의 두 팔이 땅으로 축 늘어져 있었는데 손에는 칼 한 자루를 쥐고 있었다. 불효막심한 세자는 칼을 줍기 위해서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호표기 병사가 떨어뜨린 칼이었다. 소년은 어설프게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고 9왕에게 맞섰다. 놀란 사람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모여 낮은 외침으로 변했다. 세자가 칼을 겨눈 이는 그의 숙부였다. 안정룡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서툴게 칼을 든 소년의 자세는 평소와 다르게 고집스러웠다. 지금 이 순간 호수처럼 맑고 깨끗하던 소년의 눈이 갑자기 타오르는 태양빛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불이 붙을 것 같았다.

안정룡은 여귀진 아소륵 파소이가 이런 눈빛을 드러내는 것을 난생처음 보았다. 그는 무심결에 소년의 눈에서 보고 말았다. 바로 사자의 웅지(雄志)를!

9왕은 다음 걸음을 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뻣뻣하게 멈춰 섰다.

“모두 멈춰라!”

대군의 포효가 적막을 깨뜨렸다. 그는 마치 무형의 칼 빛이 사방을 쓸어버리는 듯한 시선으로 주위를 훑었다. 눈동자 속 흰 반점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밝게 빛났다. 대군은 앞으로 성큼 나아가 9왕의 손에 든 칼을 잡아채고는 그의 손을 잡고 같은 말 위에 올라탔다.

“별것도 아닌 일에 소란은! 역심을 품은 계집 하나에 이렇게 놀랄 일이냐! 묻어버려라.”

그는 용격심의 시신을 흘끗 쳐다보고는 용격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아이의 여동생은 세자의 장막에 두고 세자를 보필하게 해라. 이 일은 그렇게 처리하지. 더는 이 얘기를 듣고 싶지 않으니 누구도 입에 담지 마라!”

대군은 제 아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9왕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액로. 함께 지하 궁전에 가 조상님들께 제를 올리자꾸나.”

귀족들도 말에 올라타고 대군을 뒤쫓아 성안으로 돌아갔다. 성 밖에 주둔하는 호표기 대군(大軍)은 우각 나팔 소리가 울리자 하얀 깃발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남은 것은 짓밟힌 초원뿐이었다. 사람 수는 줄어들고 바람은 거세지기 시작했다. 안경을 써 모래바람을 차단한 안정룡이 대합살과 함께 세자 옆으로 모여들었다. 귀족들이 멀어지며 작은 소리로 수군댔다. 안정룡은 어렴풋이 세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을 뿐 자세한 내용까지는 듣지 못했다. 그저 사람들이 몰래 주고받는 눈빛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대합살은 세자에게 다가가 칼을 쥔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낸 뒤 칼을 한쪽에 던졌다. 그는 말없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까부터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화려한 복장의 귀부인을 가리켰다.

“아소륵. 나와 성으로 돌아가자. 앞으로 영씨 부인이 네 유모다.”

안정룡은 영씨 부인을 알고 있었다. 그는 청양의 명장, 목려 장군의 아내였다. 대군이 세자의 유모로 이렇게 존귀한 신분의 부인을 보낸 것을 보면 상당히 세자를 총애하는 듯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총애하는 세자를 부모에게서 멀리 떨어진 진안부에 보냈을까.

소년은 고개를 들어 인자한 영씨 부인을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소륵. 기억 안 나니? 네가 태어날 때 널 받아주신 분이란다. 그때 넌 새끼 고양이만 했지.”

대합살이 그의 손을 붙잡은 채 새끼 고양이의 크기를 손짓해 보였다.

이번에도 소년은 머리를 가로젓더니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모두를 외면했다.

영씨 부인과 대합살은 난감해졌다. 대합살은 속절없이 자신의 맨머리를 긁적였다.

“유모는 죽었어요.”

소년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유모는 죽었…….”

안정룡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어쩐지 저 말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소마… 소마…….”

소년이 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는 진안부 소녀를 향해 돌아서며 그녀를 아명으로 불렀다. 그는 소마가 흘린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그녀의 얼굴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소녀의 눈은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제 언니의 시신을 품에 꼭 끌어안고 물러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갑자기 소마가 세자의 손바닥을 매섭게 깨물었다. 대합살은 “아이고.” 하더니 둘을 떼어내려고 달려 나갔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새빨간 피가 세자의 손바닥 가장자리로 뚝, 뚝 흘러내리는데도 세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심지어 아픈 기색조차 없었다. 그는 조용히 용격응 소마를 바라보며 나머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세자의 하얗고 넓은 소맷자락에 떨어진 핏방울이 서서히 번져갔다.

“소마. 나야…. 무서워 마. 내가 지켜줄게…….”

아소륵은 몇 번 휘청대더니 그만 맥없이 풀밭 위로 고꾸라졌다.

* * *

[역사]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청양 소무공 여귀진 아소륵 파소이는 금색 장막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앞둔 소무공은 자신의 시호(諡號)를 상의하는 학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합살 안정룡의 손을 잡고 말했다.

“청양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겠다고 맹세했었지만 그러지 못했네. 내가 너무 오만했어! 사실 내 능력으로는 몇몇 사람 정도만 지킬 수 있을 뿐이었는데 말이지. 애석하게도 그들은 하나씩 나를 떠나갔구나.”

말을 마친 소무공은 의식을 잃었다. 가주(家主)들이 논의해 결정한 시호 ‘소무’를 금색 장막으로 전해왔을 때 그는 다시 한번 눈을 뜨고 역사상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겼다.

그러고 나서 그는 눈을 감았다.

안정룡은 난생처음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바닥에 힘이 풀린 것을 느꼈다. 어느새 나이가 든 대합살은 오래전 작열하는 태양 아래 그 소년이 떠올라 그만 참지 못하고 목 놓아 울었다.

“내가 널 지켜줄게.”

사실상 이 말 한마디를 위해 평생을 살아온 소무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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