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4화 (4/360)

4화

제1장. 만족의 주인 (3)

“이번 출정에서 크고 작은 결전이 총 열두 번 있었습니다. 우리 쪽 사상자는 4만 7천600여 명이며 참수된 진안부 역당들은 25만 9천여 명입니다. 전리품으로 말은 5만 4천여 필, 큰 수레는 7만 3천여 량을 가져왔으며 소와 양은 아직 정확하게 세어 보지 못했습니다. 장막은 대부분 오래되기도 했고 휴대하기도 불편해 전부 그 자리에서 태웠습니다. 진안부의 용격진황 이하 귀족 장수 60여 명 중 달아난 자는 한 명도 없으며 귀유, 가리길, 납목독은 전부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9왕이 전투 결과를 하나하나 상세히 보고했다.

여수우는 부친의 얼굴에서 기뻐하는 기색을 찾아내려 흘끔거렸으나 대군은 내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진안부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했지?”

“이번 전쟁에서 남쪽 초원을 완전히 평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래서 오래 고민한 끝에 선조들의 관례에 따라 처리했습니다. 세 살 넘은 사내는 죽이고 여인과 아이는 살려서 노예로 만들어 가축을 기르도록 북방에 보낼까 합니다.”

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격 가문의 자손도 다 죽었느냐?”

“방계 친족들은 대부분 징벌이 두려워 자진했고 나머지 너덧 명은 반항해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용격진황은 아들이 없어 그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어 데려왔습니다.”

“백로합에게는 딸이 셋…….”

대군이 순간 멈칫했다.

9왕도 놀라 넋을 놓았다. 용격진황 백로합, 진안부 주군의 전체 이름이었다. 북륙의 귀족들은 가족과 친척,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만 만족 이름을 불렀다. 용격진황의 신분상 그를 백로합이라 부를 사람은 이제 극소수였지만 대군은 여전히 그 이름이 입에 익었다.

“제가 한발 늦었습니다. 진안부 군영을 뚫고 들어갔을 때 벌써 누군가가 차녀인 용격민을 구해갔더군요. 평민으로 위장하고 달아나려던 장녀 용격심과 막내 용격응만 찾았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대군이 불쑥 물었다.

“반역자 용격진황은 죽었느냐?”

“네. 용격진황은 제가 이끄는 군사에 포위됐고 끝내는 두 다리가 부러졌는데 살 방도가 없자 칼로 자진했습니다.”

“그래? 전쟁에서 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로군.”

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9왕이 몸을 돌리자 호표기 전사가 주홍색 나무함을 올렸다. 9왕은 허리를 숙이고 나무함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대군에게 바쳤다.

“용격진황의 머리입니다.”

나무함을 받아 든 대군은 뚜껑을 열어보지는 않고 어루만지기만 하며 한참을 침묵했다.

호표기 대오의 뒤쪽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어 웅장한 구리 나팔 소리에 심금을 울리는 북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지며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안정룡은 의아했다. 구리 나팔과 모우 피막을 씌운 북은 만족의 예악(禮樂)이었기 때문이었다. 출정한 군대는 모두 우각 나팔 소리를 명령으로 삼았고 오직 성대한 자리에서만 일제히 북과 나팔을 울리며 연주했다. 질서정연한 호표기 대오가 갑자기 갈라지며 2장(丈) 너비의 곧은길을 냈다. 용맹한 흰 말이 느릿한 걸음으로 나타났고 붉은 옷을 입은 노예들이 구리 대야를 들고 맑은 물을 뿌리며 두 줄로 그 뒤를 이었다. 그 뒤로 한참 조용하더니 큰길 멀리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왔다.

대합살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인파를 뚫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모두가 머리를 빼고 멀리 내다보느라 사방이 물샐 틈 없이 막혀 있었고 결국 그는 빙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청양의 어린 주인이 돌아왔군요.”

9왕이 대군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세자를 호송하는 부대가 도착했습니다. 형님께서 분명 세자의 안위를 걱정하실 터라 특별히 큰 수레를 만들어 군대 행렬의 뒤를 따르게 했지요. 반달 천신께서 보우하사 세자께서는 무사합니다. 이 아우, 형님의 당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안정룡은 그제야 이 웅장한 의례가 청양의 세자, 미래 만족의 대군을 맞이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장장 3년 만에 세자는 북도성으로 돌아왔다. 만족은 화족과 달랐다. 화족은 장자가 가업을 잇지만 만족은 선대 조상들이 남긴 제도에 따라 성년이 된 아들은 영토를 지키고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이 부친의 장막과 노예를 물려받아 새로운 가문의 주인이 되었다.

여수우의 ‘1왕자파’와 여응양의 ‘3왕자파’가 정권 쟁탈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지만 여숭의 정통 계승자가 막내아들 여귀진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여귀진의 만족 아명인 아소륵은 ‘장수(長壽)’라는 뜻이었다.

세자는 건강이 좋지 않아 여섯 살 때 남쪽의 따뜻한 지역에 요양차 보내졌다. 당시 진안부와 청양부는 전쟁을 하던 때가 아니었고 진안부 주군 용격진황은 대군의 생질(甥姪)이었다.

대군과 칸을 제외한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사위가 온통 고요한 가운데 큰길 위로 흰색 인영이 점차 가까워졌다. 두 줄의 흰옷을 입은 여자 노예들 사이에서 나이 많은 하녀가 고개를 숙인 소년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늙은 하녀는 벌벌 떨며 대군 앞에 섰다. 사람들은 마침내 소년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말 목 높이만큼 키가 컸고 달처럼 하얀 비단옷을 입었으며 신발도 흰색 가죽 장화였다. 그리고 손목에는 흰색 표범 꼬리를 휘감고 있었다.

북소리가 멈추고 여자 노예들과 하녀는 모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하녀는 붙잡고 있던 소년의 손을 놓았다. 소년은 잠자코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신발 끝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세자! 대군이십니다!”

당황한 하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서 대군께 인사드리셔야죠!”

소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군이 탁탁 손뼉을 치고는 두 손을 뻗었다.

“이리 와라! 아소륵, 아비에게 오거라!”

여전히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하녀가 대담하게 소년을 잡아당기자 세자는 그 힘에 이끌려 무릎을 꿇고 묵묵히 이마를 땅에 대고 절을 했다. 그의 움직임은 다소 굼뜨고 흐리멍덩했다.

“아소륵. 고개 들어봐라. 아비를 몰라보겠느냐?”

소년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때 안정룡은 처음으로 세자를 보았다. 외모는 빼어나지만 유약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만족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말을 타고 활을 쏘았기에 대부분 망아지처럼 건장했다. 그러나 세자는 예외였다. 얼굴은 다소 창백해 보였고 두 눈은 비 온 뒤의 하늘처럼 투명했다. 언뜻 보면 여자아이 같은 느낌도 들었다.

대군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는 응당 부친에게 달려가 부자간의 정을 나눠야 했다. 부친이 그를 진안부에서 구해내기 위해 수만 명의 정예 기병도 출동시켰지 않은가.

살짝 망설이던 9왕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난군(亂軍) 속에서 세자를 구해낸 터라 조금 놀란 듯싶습니다.”

대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군. 우매한 제가 우선 세자를 돌보겠습니다.”

늙다리 대합살이 마침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왔다. 쓰개도 다 벗겨졌고 긴 외투도 비뚤어져 있었다. 위풍당당해야 할 대합살이 이런 모습으로 뭇사람들 앞에 나타나자 안정룡은 자신이 다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대합살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더니 귀한 보물이라도 건진 것처럼 소년의 손을 움켜쥐었다.

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합살.”

9왕이 매우 공손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했다.

“출정 전에 나는 이미 9왕이 승리하고 돌아올 것을 알았소. 9왕은 반달 천신께서 보살피는 무사이고 북극성도 9왕을 위해 동운산 위로 떠올랐으니까.”

“대합살의 인도에 감사드립니다.”

9왕이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다시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것이라고는 늙은이의 뒷모습뿐이었다. 대합살은 그가 건진 보물을 잡아당기며 한쪽 인파를 뚫고 들어갔다. 안정룡은 알았다. 스승이 또 9왕에게 아무 소리나 지껄였다는 것을.

“아소륵! 아소륵, 합살이다!”

대합살이 소년의 얼굴을 꼬집으며 말을 이었다.

“대군은 잊었다 쳐도 이 대합살은 분명 알아보겠지?”

존귀한 세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대합살을 쳐다보았다. 순간 투명한 눈동자가 반짝 빛나는듯하더니 이내 어두워졌다. 대합살은 기쁘게 그를 끌어안았다. 안정룡은 신기한 눈으로 세자를 쳐다보았다. 고요한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근심이 일었다.

“용격진황의 두 딸도 세자와 함께 데려왔습니다.”

9왕이 손짓하자 두 명의 호표기 병사가 각각 한 명씩 데리고 성큼성큼 대군 앞으로 왔다. 그들이 신발 끝으로 무릎 뒤를 차자 그녀들은 먼지 속에 무릎을 꿇었다. 체형으로 보아 성년이 되지 않은 소녀였다. 예쁘고 화려한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칼은 헝클어져 얼굴을 가렸고 손목에는 줄에 묶여 생긴 멍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벌써 이렇게 컸구나…….”

잠시 조용하던 대군이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붉은색 통이 넓은 치마를 입은 소녀가 머리를 홱 흔들자 긴 머리칼이 흩날렸다. 빛나는 눈동자는 날카로운 칼 같았다. 소녀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 멍해졌다.

“미인이네!”

여복이 여수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여수우는 대답이 없었다. 살며시 입이 벌어진 그는 넋이 나가 있었다. 온통 먼지를 뒤집어썼음에도 소녀의 미모는 감춰지지 않았다. 옥처럼 맑고 아름다운 얼굴, 가지런히 놓인 조개 같은 윗니로 사리문 입술, 화난 그녀의 얼굴에서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불어온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이 날렸다. 흔들리는 머리칼에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덩달아 떨렸다. 그들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여수우가 입을 뗐다.

“오는 내내 꾀죄죄했거든. 북도성에 다 와서 숙부가 옷을 갈아입고 때를 벗기게 해줬지.”

대군이 그녀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용격진황의 장녀 용격심이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대군이 직접 안아보기도 했다.

“형님. 풀어주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고리격 대회에서 큰 부락의 주군들이…….”

9왕이 낮은 목소리로 환기시켰다.

“그럼 칸들의 장막에 노예로…. 아니, 왕자들 장막에 노예로 보내라. 풀어주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보내서도 안 된다.”

“여숭 곽륵이, 굴복을 바라지 말고 차라리 죽여라! 우리 용격 가문의 딸들은 절대 원수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이다!”

용격심이 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두 명의 호표기가 달려들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으나 간신히 제지할 뿐이었다. 병사들이 용격심의 머리를 내리누르려 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는 죽일 듯이 대군을 노려보았다. 호표기 병사가 세게 내리치는 손에 맞아 얼굴 반쪽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고 결국 병사들이 그녀의 두 볼을 틀어쥐고 채찍 자루를 입속에 밀어 넣었다. 그제야 용격심의 호통은 목구멍 속의 거친 숨소리로 변했다.

대군은 마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말한 대로 해라. 욕보이지도 말고.”

“형님. 저 자식들에게 양보하지 말고 우리가 뺏어옵시다.”

여복이 입술을 깨물며 불안한 듯 손바닥을 비볐다.

여수우는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서둘러 앞으로 다가갔다.

“제 장막에 마침 사람이 몇 명 부족합니다. 아버지, 제게 보내주십시오. 소자 박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군이 여전히 망설이자 9왕이 여수우의 말을 이어받았다.

“비막간이 이번에 저와 함께 큰 공을 세웠으니 다른 상을 내리실 게 아니면 이 소녀들을 주시지요. 녀석은 인자한 주인이니 푸대접하지는 않을 겁니다.”

여수우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몰래 9왕을 쳐다보았다. 9왕은 그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둘 사이에 긴말은 필요 없었다.

“그것도 좋지. 그리 해라.”

대군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여수우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앞으로 성큼 나아갔다. 그는 용격심을 붙잡고 있는 호표기에게 손을 떼라며 눈짓을 했다. 이제 용격심은 그의 여자였다. 아리따운 얼굴과 고운 피부 모두 그의 것인데 어찌 거칠고 난폭한 손이 그녀의 몸을 붙잡고 있게 둘 수 있으랴. 온몸에 힘이 빠진 용격심은 풀밭 위에 옆으로 쓰러졌다. 거친 숨결에 가슴팍이 급격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여수우는 표정을 바로 하고 말했다.

“오늘부터 내가 네 주인이다. 내 명을 잘 따르면 고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을 향한 말이었지만 시선은 용격심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피부는 말젖처럼 뽀얗고 야들야들했으며 입술은 봄날 화사하게 피어난 야생 양귀비처럼 고왔다. 붉은 치마 아래 몸의 곡선은 새끼 양의 등처럼 유연했다. 다만 그는 용격심의 눈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는 그녀의 눈빛에 두려움을 느꼈다.

“왕자는 정말… 저를 원하십니까?”

용격심이 떠듬떠듬 말을 이어 갔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눈동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파란색으로 물든 것 같았다.

여수우는 입술과 혀가 바짝 말라 견딜 수 없었다.

“당연하다. 내 절대 고생시키지 않으마.”

용긱심이 그를 쳐다보았다. 서서히 그녀의 표정이 누그러워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1왕자…….”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여수우는 그녀가 중얼거리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리가 똑똑히 들리지 않자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다가갔다.

“멈춰!”

그의 등 뒤에서 9왕이 외쳤다.

여수우가 화들짝 놀랐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용격심이 돌연 몸을 곧게 세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여수우에게 바짝 붙어선 그녀는 그의 가슴에 걸려 있던 작은 칼을 슥 뽑아 들었다.

“여숭!”

용격심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날카로웠다.

“대군을 보호해라!”

9왕이 손을 뻗어 허리춤의 칼을 뽑으려 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몸에 지니고 다니던 칼은 말안장의 옆 주머니에 놓여 있었다.

그는 몸을 옆으로 틀어 대군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까닭인지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던 대군은 9왕의 어깨와 부딪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용격심의 붉은 치마가 한 덩이 불처럼 보였다. 그녀는 작은 칼을 휘두르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대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와 대군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철익이 칼자루를 쥐고 가로질러 나갔다. 작은 칼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흔들리는 것을 보았지만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비막간!”

9왕이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순간 여수우는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칼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몸을 틀며 뽑아 든 칼을 가로 그었다. 선득한 빛이 번쩍였다. 여세를 몰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그는 자신의 칼이 사람의 몸에 파고들어 등뼈를 벤 것을 똑똑히 느끼면서 그대로 칼을 밀어 넣었다. 뜨거운 피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용격심은 힘없이 휘청거리며 뒤로 쓰러지려 했다. 새끼 양처럼 매끈하던 그녀의 등이 갈라졌다. 여수우는 칼자루를 놓고 망연하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용격심은 뜻밖에 웃고 있었다. 그녀는 신랄한 미소를 지은 채 사력을 다해 입술을 뗐다.

“진안부의 딸들은…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는다!”

그녀는 여수우의 두 팔을 확 밀쳐내고는 둔중하게 풀밭 위로 쓰러졌다. 칼자루가 땅에 닿으면서 칼날이 그녀의 앞가슴을 뚫고 나왔다. 그녀의 치마 색처럼 붉디붉은 피가 풀밭 위로 어지럽게 흩뿌려졌다.

정적이 흘렀다. 먼 하늘의 매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여수우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묻어난 용격심의 피는 아직도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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