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화 (프롤로그) (1/360)

1화.

프롤로그. 사자심

아소륵은 장막의 천을 걷어 젖히고 먼 서쪽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는 서쪽 대지는 푸르무레하고 누르스름하게 물들었다.

어른들은 모두 아소륵을 이상한 아이라고 했다. 보통 아이들처럼 양치기나 말타기를 좋아하지도 않고 작은 활을 등에 메고 초원에 가 참새 사냥을 즐기지도 않았다. 아소륵은 바람 없는 오후의 새파란 물결이 남실거리는 해자(海子)처럼 조용했다. 호수는 너른 바다의 아들이기 때문에 만족(蠻族)은 호수를 해자라고 불렀다. 아소륵은 언제나 조용히 앉아서 양떼가 하얀 구름처럼 천천히 산비탈을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거나 모닥불이 밤중에 조금씩 피어올라 하늘을 찌를 듯 맹렬한 불길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풀이 자라고 꾀꼬리가 날아가는 것도 보았다.

‘사자왕(獅子王)’이라 불리는 남자는 사냥에서 돌아오면 늘 사나운 말을 몰고 아소륵의 등 뒤로 다가가 넋을 놓고 있는 아이를 붙잡아 말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조용한 아이가 어찌 미래 초원의 대군이 되겠느냐? 네 녀석은 꼭 용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녀 같구나! 내 딸 누구라도 널 데려다가 신부로 삼을, 용사 역할을 할 수 있을 게다. 맘에 드는 아이를 말해 봐라! 내 그 아이더러 널 보쌈해 가라 일러둘 테니.”

석양빛에 구름이 엷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구름 사이로 금색 실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흘러가던 구름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모양이 바뀌었다. 수사자, 사나운 범, 거대한 용이 구름 사이로 어렴풋하게 나타났다. 곧이어 준마 떼 한 무리가 맹렬한 기세로 드넓은 하늘을 질주했고 그 뒤를 붉은 구름 물결이 뒤쫓았다.

마침내 해가 지고 초원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가륜첩은 아소륵 주위를 맴돌며 분주히 움직였다. 그녀는 쇠고리를 엮어 만든 갑옷을 짧은 솜옷에 붙여 그의 몸에 단단히 묶었다. 겉에는 두꺼운 비단으로 지은, 소매통이 넓은 옷을 걸쳐주고 바람을 막아줄 여우 갖옷1)을 입혔다. 문득 고개를 든 그녀는 아소륵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본 중에서 가장 맑고 투명한 눈이었다. 석양빛이 비친 두 눈은 유달리 아름답고 고요했다.

가륜첩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가볍게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흰색 표범 꼬리를 아소륵의 손목에 묶어주었다. 빨간 실로 단단히 동여매고 풀 수 없는 매듭까지 짓고서야 그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돌려 시선을 맞췄다.

“세자. 잊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표범 꼬리를 풀면 안 돼요. 누가 해치려 하거든 손을 들어서 보여줘요. 세자는 미래의 대군이고 하늘이 정한 지배자예요. 초원의 누구든 감히 세자를 해치려 한다면 반달 천신의 칼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자의 머리를 벨 겁니다. 알겠어요?”

아소륵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땅으로 떨궜다.

가륜첩은 그에게 걱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소륵은 근심을 잘 숨기지 못해 마음속 생각이 눈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내 장막 안에 갇혀 있는 그였지만,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느 정도는 알아챘을 터였다. 어젯밤 전장의 사내들이 불더미 앞에 둘러앉아 마종금(馬鬃琴)을 켜며 부른 웅장하고도 처량한 노래가 사방에 밤새도록 울려 퍼졌다. 아소륵이라고 어찌 못 들었겠는가.

“유모. 나 때문이야?”

아소륵이 불쑥 물었다. 깜짝 놀란 가륜첩이 그의 손을 꼭 붙잡으며 대답했다.

“아뇨. 아니에요. 세자는 착한 아이잖아요.”

“9왕의 대군이 이곳을 공격하러 왔다고 하던걸. 초원에 9왕은 딱 한 사람. 여표은 숙부뿐이잖아.”

아소륵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서. 전부 우리 청양인이 죽인 거라고 하던데.”

가륜첩의 마음속에서 씁쓸함이 솟구쳤다. 아소륵은 무척 똑똑했지만 너무 여리고 연약했다. 이래서 어떻게 오래 살 수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은 마세요.”

가륜첩이 아소륵의 머리를 정돈해 주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른들의 일은 세자와 상관없습니다. 북도성의 대군과 우리 주군 모두 세자를 좋아하죠. 세자는 착한 아이잖아요.”

아소륵은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못하잖아…. 난 쓸모없는 사람이야.”

아소륵이 다시 장막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널따란 군영은 황폐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 잇닿아 있는 장막 사이에는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멀리 내다보아도 말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양은 장막 천을 뜯어 먹고 있었고 적갈색 사자 깃발은 바람 속에서 무력하게 나부꼈다.

가륜첩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날이 구부러진 작은 칼을 뽑아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전부 몸에 칼을 지니고 있었는데 잘 갈린 칼날은 눈부시게 빛났다. 진안부의 여자들은 남자처럼 성격이 강직해서 적이 군영을 공격해 오면 칼로 자기 목을 그었다. 살아서 능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가륜첩이 칼을 가는 소리가 장막 안을 가득 채웠다. 아소륵은 잠자코 칼날의 서늘한 빛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작게 기침을 몇 번 뱉었다.

“춥죠? 곧 날이 어두워질 거예요.”

가륜첩이 장막의 휘장을 닫으려 다가갔다. 그런데 장막 밖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군영 내에 말이 남아 있을 리 없었기에 가륜첩은 다소 의아했다. 밖을 내다보자 장막 밖에 야윈 암말이 서 있고 말의 배 아래에는 허리에 칡 주머니를 비끄러맨 나이 든 여인이 반 무릎을 꿇고 앉아 젖을 짜고 있었다. 가륜첩은 안심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소륵은 몸이 약해 저녁 전에 신선하고 따뜻한 말젖을 한 잔씩 마셨는데, 그 우유를 제공하는 암말이었다. 가륜첩이 늙은 여인의 등 뒤에 서서 말했다.

“철감. 내가 할게요. 다른 사람들과 장막 안에 가서 쉬어요.”

“제가 마저 하겠습니다. 주군께서 명하셨어요. 죽기 전까지 매일 잊지 말고 세자께서 마실 수 있게 말젖을 짜서 바치라고요.”

갈라지고 힘없는 철감의 목소리에 가륜첩은 마음이 선득했다. 철감의 늙은 갈색빛 얼굴 옆으로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바르르 떨렸다. 말의 젖을 틀어쥔 두 손은 힘없이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마지막 지푸라기를 쥔 듯한 모습이었다. 철감은 원래 손놀림이 매우 빠른 사람이었다. 집에서 기르는 암말에게서 짠 젖이 신선하고 좋았기에 주군은 철감에게 매일 저녁 세자에게 젖을 짜서 바치라 명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후 철감의 남편과 아들 넷이 모두 죽고 막내아들의 시신이 반밖에 남지 않은 상태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어미 늑대처럼 밤새 목 놓아 울었다. 가족을 잃은 철감에게 남은 것은 늙은 암말 한 마리뿐이었다.

새하얀 우유가 구리잔을 가득 채웠다. 철감은 허리를 구부리고 말젖을 가륜첩에게 올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사람처럼 가륜첩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더니 말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 목덜미에 몸을 엎드려 기댔다. 흐느끼는지 두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으나 울음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가륜첩은 말젖을 받아든 채 머뭇거리며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말의 목을 꼭 끌어안은 철감은 점점 더 심하게 몸을 떨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휙 돌리더니 가륜첩에게 달려들어 구리잔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졌다.

새하얀 말젖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황한 가륜첩이 소리쳤다.

“내 말젖을 청양의 늑대 새끼에게 먹이고 싶지 않아요! 청양인은 모두 흉악한 자들이에요! 그들이 내 남편과 아들들을 죽였는데 내 말젖을 배은망덕한 짐승 새끼에게 왜 먹여야 하죠?”

철감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벌겋게 부은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차라리 죽이면 죽였지, 저 녀석에게는 먹이지 않겠어요!”

철감은 허리 뒤에서 칼을 뽑아 무작정 암말의 몸을 내리찍었다. 고통을 느낀 말은 길게 울부짖었으나 감히 주인을 발로 차지는 못하고 다친 다리를 끌며 재빨리 한쪽으로 피했다. 가륜첩이 온힘을 다해 철감을 부둥켜안았지만 철감은 소처럼 힘이 셌다. 철감이 울부짖으며 말했다.

“놔요! 이거 놔! 당신들이 저 자식은 못 죽이게 하니까 차라리 내 말을 죽이겠어. 죽여 버릴 테야! 내 말을 죽여 버릴 거라고!”

여인들이 소리를 듣고 뛰쳐나왔고 힘이 센 몇 명이 간신히 철감을 제압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자 철감은 실성한 듯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끝내 그녀의 울부짖음은 목멘 소리로 변했다.

가륜첩의 시선이 장막 한쪽에 닿았다. 장막의 갈라진 틈이 조용히 닫히고 있었다.

가륜첩은 등잔을 들고 장막으로 들어갔다. 바깥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다.

아소륵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두 팔로 다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럴 때 가륜첩이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침대에 데려가 재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도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철감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맴돌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가륜첩은 아소륵 옆에 앉으며 둘 사이에 등잔을 놓았다.

한참 정적이 흐른 뒤 가륜첩이 나직하게 말했다.

“정말 세자의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 왜 청양부에서 태어났을까?”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철감의 막내아들이 기억나…. 내게 풀로 왕잠자리를 만들어줬어.”

혈색 좋던 그 아이가 기억난 가륜첩은 자기 다리를 꼭 끌어안고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다른 사람들도 기억나. 다들 내게 잘해줬어. 날 밖에 못 나가게 하지만 나도 알아. 점점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죽은 거겠지. 파막로가 생각나. 대나무 호각을 불면서 붉은 말을 데리고 장막 앞을 지나가던 그가 보고 싶어. 하지만…….”

파막로. 가륜첩은 그 이름을 듣기가 겁났다. 그녀는 파막로의 시신도 보지 못했다. 돌아온 것은 춤을 출 줄 알던 붉은 말뿐이었다. 스물넷인 가륜첩은 파막로 같은 사내에게 시집을 가고 싶었다. 파막로는 늘 붉은 말을 타고 멀찍이 서서 그녀에게 직접 만든 이상한 노랫가락을 휘파람으로 불어주고는 하얀 이를 씨익 드러내며 웃었다. 가륜첩은 파막로에게 주려고 만든 장화를 매어두는 가죽 허리띠 두 개를 아직도 품에 지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시는 꺼낼 기회가 없을성싶었다.

“내가 청양 대군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 내가 그만 싸우라고 하면 다들 싸움을 그만둘 거 아냐. 철감의 아들도 계속 내게 왕잠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었을 테고, 파막로도 붉은 말을 타고…….”

“그만! 그만 말해요!”

가륜첩이 돌연 소리를 지르며 아소륵의 두 어깨를 힘껏 붙들었다.

“그만! 됐다고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에요? 세자는 청양 대군이 아니에요. 그저 어린아이일 뿐인데 뭘 할 수 있어요? 지금 청양의 철기군(鐵騎軍)이 전쟁터에서 우리 진안부 사람들을 죽이고 있어요! 세자가 누구를 구할 수 있죠?”

가륜첩은 고개를 숙인 채 마구 머리를 흔들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굴 위로 눈물이 흘렀다.

“그만 얘기해요!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가륜첩이 흐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아소륵의 작은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소년은 그토록 조용히 슬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가륜첩이 힘껏 아소륵을 껴안았다.

“유모. 다들 떠나갔어. 유모는 날 떠나지 마.”

“세자. 무서워 말아요. 누가 이기든 세자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곧 세자의 가족이 데리러 올지도 몰라요. 내가 세자와 함께 있을 수는 있지만 지켜줄 수는 없어요. 세자는 청양부의 세자이자 미래 이 초원의 주인이에요. 반달 천신이 세자에게 축복을 내려주었으니 누구도 세자를 해칠 수 없어요.”

가륜첩이 살며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이 아이를 사랑했다. 비록 신분이 비천해 존귀한 세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언젠가 자기가 아이를 낳으면 아소륵을 닮았으면 하고 바랐다.

“유모. 날 떠나지 마.”

아소륵이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내가… 지켜줄게!”

어둠이 하늘의 마지막 한 줄기 빛을 집어삼켰다.

불타는 듯하던 구름은 점점 흐릿해지고 어두운 잿빛 그늘이 하늘의 절반을 뒤덮으며 캄캄한 밤이 다가왔다.

철선강의 물은 이미 붉게 물들었고 전쟁터에는 사자기(狮子旗)와 표운기(豹雲旗)가 한데 뒤엉켜 있었다. 멀리 내다보아도 온통 시체뿐이었다. 요행히 살아남은 전사들은 미친 듯이 포효하며 칼을 휘둘렀다. 번쩍이는 칼 빛에 사람들은 베어진 풀처럼 쓰러져갔다. 하늘을 찌를 듯 풍기는 피비린내에 썩은 음식을 먹는 흰머리 독수리가 하늘을 빙빙 돌며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울어댔다.

전투는 해질 무렵 시작됐다. 진안부 병사들은 철선강을 건너 미리 파두었던 도랑에 매복하고서 청양부의 기병이 강가로 와 말을 풀어놓기를 기다렸다. 황급히 칼을 뽑아들고 도보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청양부의 건장한 기병들은 진안부의 맹공에 완전히 제압됐다. 양쪽 병력이 끊임없이 전쟁터에 투입됐다. 청양부는 날카로운 기세를 잃었고 북쪽으로 1리쯤 밀려났다. 양측 모두 무수한 시신만이 남았다.

철선강의 남측 산비탈, 만족 무사가 사자기 아래 말을 세우고 서서 멀리 바라보았다. 옆에는 화족 갑옷을 입은 청년이 나란히 서 있었다.

“우리 진안부가 이길 수 있겠소?”

만족 무사가 고개를 돌려 청년에게 물었다.

“양측 모두 힘이 다 빠진 상태이니 군의 사기가 먼저 무너지는 쪽이 패자가 되겠지요.”

“마지막 부대까지 공격해 버립시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다시 적진으로 돌격하려면 철선강을 건너야만 하는데 그러면 강물에 퇴로가 막힐 수 있어요. 청양부 진영 뒤에 매복이 있다면 우리가 강을 건너는 틈에 밀고 내려와 공격을 가할 겁니다. 그럼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는 상상도 할 수 없겠죠.”

“척후병이 보고하기로는 청양부 9왕의 기병대가 이곳에서 2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소. 그들이 서둘러 달려오면 상대할 방법이 있겠소?”

“9왕 여표은이 호표기(虎豹騎)를 이끌고 온다면 아무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가 원군을 데리고 철선강 전쟁터까지 밀고 내려오지 못하길 바라야지요. 어차피 200리나 떨어져 있어서 여표은도 우리에게 남은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모를 겁니다.”

청년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먼 곳의 전쟁터를 주시했다.

“화족. 그대는 안 무섭소?”

청년이 웃으며 고개를 돌려 만족 무사를 보았다.

“진안부의 주군도 겁내지 않으니 저도 겁낼 필요가 없겠지요.”

무명옷을 입은 만족 무사는 진안부의 주군 용격진황이었다. 초원 사람들은 그를 ‘사자왕’이라 부르며 경외했다. 그를 직접 본 사람들은 평범한 유목민 같은 모습에 놀라곤 했다. 몸이 다부지고 과묵했으며 술에 취하면 덩실덩실 춤을 추고 크게 노래를 부르며 껄껄 웃었다. 그는 무명으로 지은 투박한 군복 한 벌만 입었는데 하도 빨아서 하얗게 바랬다. 타고 다니는 얼룩말의 갈기는 불에 타 일부가 벗겨졌고 그래서 더욱 궁색해 보였다. 말안장 위에 내놓은 군도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수수하고 고풍스러우며 묵직한 칼이 스산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용격진황이 칼자루를 매만지며 청년에게 물었다.

“내 줄곧 묻지 않았소만. 왜 우리를 돕는 거요?”

“진안부의 맛있는 술이 좋아서요.”

청년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는 진안부 사람이 아니었고 용격진황은 심지어 그의 이름도 몰랐다. 야윈 말 한 필을 몰고 유랑하다가 진안부 군영까지 흘러들어온 화족 청년은 용격진황이 군사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자 진안부를 돕겠다며 자발적으로 나섰다. 원래 화족은 멀리 동륙에 살았다. 동륙은 농업과 상업이 번성한 곳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곳은 누각이 구름에 맞닿아 있고 곳곳에 황금이 있다고 했다. 통상적으로 만족은 화족을 믿지 않았다. 교활하고 말재간이 좋은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만족을 속이고 원하는 것을 가져갔다. 그러나 이 청년은 달랐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단 하나, 좋은 술만 원했다.

진안부는 이 청년의 포진술(布陣術)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철선강 방어선을 한 달째 지킬 수 있었다. 이곳은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철선강을 넘으면 평탄한 초원에는 더 이상 수비할 요새가 없어 진안부 사람들은 청양 군사의 칼날 아래 사냥감으로 전락할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그냥 해본 헛소리입니다. 사실은 이것 때문입니다.”

수갑(手甲)2) 아래 청년의 엄지가 반짝였다. 엄지에는 푸른 빛깔의 넓은 쇠고리가 하나 끼워져 있었는데 표면에 희미하게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매가 새겨져 있었다.

“활시위를 당길 때 쓰는 각지(角指)요?”

“제 스승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표식을 가진 자들을 천구(天驅)라 부릅니다. 제 스승님은 평생 동륙 제후들의 위협에 저항하는 북쪽 고원의 만족을 도우셨지요. 저도 진안부 사람들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어느 천구 무사라도 그렇게 할 것이고요.”

“천구? 그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소?”

“많이 있었지만 다 죽었습니다.”

“그럼 그대의 스승은…….”

“돌아가셨습니다. 7년 전 진국(陳國)에서 거열(車裂)을 당하셨지요.”

“거열?”

“제후국의 형 집행방식입니다.”

청년이 손짓을 해가며 설명했다.

“형구에 사지와 목을 굵은 밧줄로 옭아매고 장치의 힘으로 잡아당깁니다. 사람은 몸이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채 조리돌림을 당하지요. 거의 죽을 때가 되면 망나니가 사지를 자릅니다. 두 팔을 먼저 자르고 두 다리를 자른 다음 마지막으로 목을 베지요.”

청년은 기억을 되짚는 듯 고개를 떨궜다.

그가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그때 저도 군중 속에서 스승님의 죽음을 직접 봤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우리는 다시 돌아올 거라고 크게 외치셨죠. 제게 하신 말씀이란 걸 저는 압니다.”

“용감한 무사를 만나보지 못한 것이 아쉽구려…. 한데 스승이 그리 살해되는 것을 보고서도 천구의 각지를 받아들인 거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언젠가 스승님처럼 죽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용격진황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드시겠습니까?”

청년이 허리춤에서 백동 술병을 떼어내며 물었다. 용격진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마시겠소. 우리 병사들이 전사했잖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지요. 그들과 함께 술 마시던 때를 생각하며 술을 마실 겁니다.”

술병을 어루만지던 청년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그는 술을 물처럼 마셨다. 만족의 독한 술이 흘러들어가자 뜨거운 단도로 벗겨내기라도 하듯 목구멍이 얼얼해졌다.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은 급히 술병을 내려놓고 북쪽을 보았다. 검은 말 한 마리의 형상이 철선강 맞은편의 초원 비탈을 따라 매우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철선강으로 뛰어들었다. 말발굽 위로 물보라가 튀었다. 병사는 아랑곳 않고 말을 몰아 진안부 본진으로 곧장 달려왔다.

청년은 바짝 긴장하며 저도 모르게 술병을 쥔 손을 떨었다. 용격진황이 말을 끌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진안부 척후병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는 젊은 병사였다. 청년은 늑대 사냥 대회에서 그의 실력을 본 적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말을 타고 젊은이들 사이를 종횡무진 달리며 흉악한 늑대의 목숨을 빼앗고 소녀들의 마음을 훔쳤다. 그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그저 자랑스러워하며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지금은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혼신을 다해 용격진황을 쳐다볼 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청양부의 9왕이냐?”

척후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표기가 왔느냐?”

척후병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용격진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척후병의 얼굴에는 홀가분한 기색이 어렸다. 그는 말 등에서 휘청하더니 새빨간 피를 한 움큼 토하고는 그대로 풀 더미에 고꾸라졌다. 등에는 세 개의 검은 깃털 화살이 나란히 꽂혀 있고 흘러내린 피는 이미 시커멓게 굳어 있었다.

“호표기!”

백동 술병이 땅에 떨어졌다. 동륙 무사는 부들부들 떨며 그 이름을 되뇌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청년은 이번 전쟁이라는 도박판에서 패했다. 자신의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그가 이 판에 건 것은 진안부 전체 병사와 후방 진영에 있는 여자와 아이들의 목숨이었다. 격노한 북도성의 청양 대군이 마침내 전 초원을 휩쓰는 호표기를 보내왔다. 청년은 ‘청양의 활’이라 불리는 여표은을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청양부 전투 공적에서 으뜸가는 친왕으로 위험한 전쟁에 수도 없이 출전했으며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적의 깃발을 빼앗고 장수를 베어 승세를 확정지은 자였다. 그런 그가 하루 만에 청양 9왕의 군대는 200리를 내달려 왔고 그의 활이 마지막 순간 전쟁터로 쏘아졌다. 철선강이 함락되면 더는 방어할 요새가 없었다. 남은 것은 청양부 정예병들의 유린과 학살뿐이었다.

별은 이미 떠올랐고 밤바람이 스치는 초원은 온통 스산했다.

마지막 고요함이었다. 용격진황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등 뒤의 군사 천 명을 바라보았다. 용격진황에게 겨우 남아 있는 병마였다. 그들은 훈련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다. 열서너 살 된 소년도 있고 오륙십 대 노인도 있었다. 마지막 남은 진안부 사내들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자루가 나무로 된 보잘 것 없는 긴 창을 손에 든 채 바닥에 흩어져 앉아 쉬고 있던 그들은 일제히 일어나 용격진황만 쳐다보았다.

용격진황은 소리 없이 웃었다.

“미쳤습니까? 제가 부대를 이끌고 앞서 나가 호표기를 막을 테니, 주군은 가십시오! 저기 푸른색 별이 보입니까? 그 별을 따라 남쪽으로 쭉 가십시오. 천척협을 지나 동륙에 도착하면 안전해질 겁니다. 그럼 훗날 다시 돌아올 기회가 생기지만 지금 주군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정신을 차린 청년이 자신의 긴 창으로 용격진황의 말머리를 누르며 그를 제지하려 했다.

“미치지 않았소. 다만 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용격진황은 차분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대는 내게 동륙의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잖소. 줄곧 생각해 봤는데 세상 사람들은 대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거요, 아니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거요? 우리 만족에 이런 노래가 있소. ‘사자는 늑대를 잡아먹고 늑대는 사슴을 잡아먹으며 사슴은 풀을 먹노니. 풀은 억울하도다.’ 큰 동물은 작은 동물을 잡아먹고 사슴마저도 풀을 먹어야 하오. 한데 누가 이 풀들을 불쌍히 여겨준단 말이오? 사람도 마찬가지인 거요? 큰 부락은 작은 부락을 집어삼키고 작은 부락은 더 작은 부락을 집어삼켜야 하오? 대체 이유가 무어란 말이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해치려 한 적도 없는데!”

용격진황은 청년을 보았다. 그는 손을 흔들어 자기 뒤편의 마구잡이 병사들을 가리켰다.

“우리 진안부가 작은 부락이기는 하지만 정녕 살 수는 없는 것이오?”

청년은 멍하니 용격진황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유목민 같은 초원의 주군이 진지하게 그를 응시했다. 용격진황의 눈빛은 흡사 길 잃은 어린아이 같았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청년은 힘껏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사람을 지치고 절망케 하는 생각은 마음속에서 쉽사리 떨쳐지지 않았다.

스승의 몸이 형구에 묶여 갈가리 찢기는 장면이 다시금 눈앞에 떠올랐다. 그 일이 있기 1년 전, 야북(夜北)에 흩어져 있던 만족 부락이 마침내 진국 군대에 굴복했다. 그들은 모피와 준마, 노래와 춤에 능한 소녀들을 바치고 진국의 비호를 얻었다. 그러나 선혈이 낭자했던 스승의 죽음 뒤 빈곤했던 유목민들의 삶은 더 나아지지도 않았다.

“나는 도망칠 수 없소. 내 성은 용격이고, 저들의 주군이오. 저들은 내가 그들을 부강하게 해줄 거라 믿고 있소. 내가 어디를 가든 그들은 나를 따를 것이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요. 나는 저들과 함께 싸울 거요. 내가 이해하지 못한 문제는 청양 대군에게 남겨두겠소. 청양은 사자이고 우리 진안은 하찮은 잡초이니까. 하지만 잡초라 해도 우리는 이 초원에서 살고 싶다오!”

용격진황은 칼을 뽑아들고 천천히 말을 몰아 움직였다. 병사 천 명이 소리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청년이 뒤쫓아 가려는 순간 용격진황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내 딸을 동륙에 데려다줄 수 있겠소? 나 대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오. 그리고 아비가 많이 사랑했다고도 전해 주시오. 전에는 이 말을 꺼내기가 왜 그리 쑥스럽던지. 참 어리석었구려.”

한참을 침묵하던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격진황이 웃으며 말했다.

“계속 묻고 싶었소. 이름이 무엇이오?”

“사규라 합니다. 규표(圭表)할 때 규를 씁니다.”

“만나서 반가웠소, 사규. 천구… 천구 무사.”

용격진황은 무거운 칼을 들어 올리며 맹렬하게 전방을 가리켰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예리한 무기가 휘익 밤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과 함께 노인과 소년들이 긴 창을 높이 쳐들고 주군을 따라 드넓은 전쟁터로 달려 나갔다.

그것이 사규가 마지막으로 본 용격진황의 모습이었다. 사자왕은 그에게 어둠 속 뒷모습만을 남겼다. 사규는 용격진황이 노호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진짜 사자처럼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지평선 끝자락. 어슴푸레하게 먼지가 말려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호표기가 도착했다.

군영 전체가 불탔다. 커다란 불이 밤하늘의 절반을 붉게 물들였다.

9왕 여표은은 말을 몰아 한쪽에 선 채 불빛에 비친 머리 하나를 뚫어져라 보면서 망자의 마지막 표정을 음미했다. 수년간 전장을 누빈 그였지만 이토록 평온한 시신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죽던 순간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있었는데 계속 보니 약간 애처로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호표기의 백부장(百夫長) 하나가 주홍색 함을 바쳤다. 9왕은 들고 있던 머리를 함에 넣으며 말했다.

“사자의 머리다. 대군께 보여드려야 하니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라.”

그는 자신의 옆에 말을 세우고 서 있던 귀족 무사를 쳐다보았다.

“비막간. 네 아우는 아직도 못 찾았느냐?”

그의 옆으로 청색 준마를 탄 사내는 청양부 여씨 파소이 가문의 장자 여소우였다. 상당히 호방하고 소탈한 청년이었다. 여표은은 그를 늘 만족 아명(兒名)인 비막간이라 불렀다. 그의 당숙이기에 그렇게 부를 자격이 되었다.

여소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호표기가 군영을 포위하지 않고 그대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아소륵도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9왕은 잠시 침묵하더니 백부장에게 나직하게 외쳤다.

“모든 장막을 샅샅이 수색하라 해. 시신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세자를 찾아내야 한다!”

귓가는 온통 울음소리와 말발굽 소리로 가득했다. 불빛 속에서 인영이 번득였다. 검은 갑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탄 기병들이 장막 사이를 쉴 새 없이 질주했다. 그들이 텅 빈 막사에 횃불을 던져 군영이 불바다로 변했다. 이런 장막들을 전리품으로 북도성에 가져가기에는 갈 길이 까마득한지라 그 자리에서 불태웠다. 그렇게 진안부는 어느새 지나간 역사가 됐다.

9왕은 하늘에 외로이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호표기 군사 하나가 여인의 머리채를 끌고 불타는 막사에서 말을 달려 나왔다. 여인은 두 다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젊은 여인이었는데 가죽 장화도 신지 않은 상태였다. 치마 아래 뽀얗고 매끄러운 종아리는 바닥에 끌려 온통 피투성이였다. 너무 심하게 발악하는 통에 군사는 희롱할 흥미가 가시자 칼을 내리쳐 그녀의 머리를 베었다. 선홍색 피가 쏟아져 바닥에 흥건하게 고였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든 채 말을 몰고 갔다. 여인이 품에 넣고 있던 팔이 풀썩 떨어져 나왔다. 손에는 날카로운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9왕이 소리쳤다.

“명령이다! 남자는 세 살 이상은 모두 죽이고 여인은 절반만 남겨라. 노인은 남겨두지 마라.”

백부장이 말 위에서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모조리 죽이려고요? 숙부! 7만 명이나 됩니다!”

숙부를 제지하려 뻗었던 여수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9왕이 그의 팔을 누르며 말했다.

“비막간. 내 말 들어라. 일을 처리할 때는 적을 먼저 생각하면 안 된다. 이 전쟁에서 호표기가 몇이나 죽었는지 생각해 봐라.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선 군사들이다. 그들은 재물도, 가축도 여자도 원한다. 승리했으니 기분 좋게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려무나.”

“그래도 살려는 주는 것이…….”

“마음 약해지지 마라. 큰일을 하려면 큰일을 하겠다는 결심이 서야지. 이자들은 우리에게 쓸모가 없다. 피에 눈을 흐리지 말고 미래를 내다보렴. 진안부 멸족이라니.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해낸 것인지 너는 아직 모른다.”

9왕이 진한 술 냄새라도 맡은 것처럼 코를 벌렁거렸다.

“바람 냄새를 맡으니 철심왕이 초원을 누빌 시대가 절로 떠오르는구나. 만족의 새로운 태평성대가 곧 시작되겠어.”

여수우는 순간 멍해졌다. 바람에는 온통 짙은 탄내와 피비린내뿐이었다.

* * *

[역사]

역사상 요나라 말기, 섭나라 초기는 비통한 시대였다.

영웅들이 막 강철 요람에서 태어났던 그때. 세상은 술렁였고 전쟁에 몸부림쳤다.

북륙의 한주 초원은 원래 만주 7대 부락의 통제 아래 있었고 7개 부족의 맹주인 청양부는 북륙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초원을 군림했다. 광대한 동륙은 유구한 역사와 고귀한 신분을 지닌 윤 왕조에 속해 있으며 16개 제후국이 철통처럼 신성한 수도를 수호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대는 끝났다. 동륙의 황제든 북륙의 대군이든 광대한 국가를 유지해 나갈 수 없었다. 왕권은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갔고 야심가들은 난세 속에 자기 자리 하나 차지하기 위해 앞다투어 전쟁에 뛰어들었다.

대윤 희제(喜帝) 2년. 진안부에 보내진 청양부 세자 여귀진·아소륵은 온난하고 습윤한 남쪽 초원에서 요양한다.

겨우 3년 후 진안부는 청양부가 장악한 부족 의회인 고리격 대회(庫裏格大會)에서 탈퇴하고 대군의 통치에 반대하는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막강한 군대가 북쪽에서부터 쉴 새 없이 내려왔고 청양의 호표기가 남쪽의 등가아 초원을 피로 물들였다.

희제 5년 4월의 이른 봄. 청양의 9왕 여표은 액로의 군대가 진안부의 마지막 진영을 무너뜨렸다. 진안부 주군, ‘사자왕’ 용격진황 백로합은 반군 속에서 스스로 목을 베었다. 진안부의 멸족으로 초원의 7개 부족 중 가장 약했던 하나가 영원히 사라졌고 청양의 주인인 여씨 파소륵 가문은 다시 한번 피로써 대군의 존엄을 지켜냈다.

같은 달. 동륙의 중주에서는 적조처럼 붉디붉은 기병 부대가 대윤 수도 천계성 성문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태청궁까지 그대로 돌진한 동륙의 수사자, ‘남만(南蠻)’ 출신의 리국 제후 영무예는 계단 아래에서 무릎도 꿇지 않고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700년 만에 처음으로 황제는 칼 앞에 굴복했고 신하 손바닥 안의 꼭두각시가 됐다.

썩은 나무가 꺾어지듯 옛 시대가 무너지고 전사들의 시신과 여자, 아이들의 피눈물 위에 새로운 시대가 세워졌다.

45년 후. 섭나라의 역사서 <대섭하한서(大燮河漢書)>에는 당시의 난세가 이렇게 묘사돼 있다.

초, 황제가 지위를 잃고 시국이 변했다.

공적(功績)을 중시하고 인명을 경시하는 강자가 3척 길이의 검 하나로 천하를 정벌했다. 목숨을 부지하고 전란을 끝내고자 했던 약자는 황야에서 피를 흘렸고 백골은 켜켜이 쌓여갔다.

그때 세상은 용광로가 되고 만물은 땔나무가 되었으며 그 안에서는 피눈물이 들끓었다.

그리하여 난세를 비통해 한 영웅들이 위세를 떨치며 요동치는 정세를 평정하고 남조와 북조를 세워 천하의 권력을 장악했다.

* * *

1) 짐승의 털가죽을 안에 덧댄 옷.

2) 손에 착용하는 갑옷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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