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수호자 >
갑작스럽게 생긴 포탈로 인해 선수 대기실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야 뭔데! 어떤 골렘이야 빨리 문 닫아!”
그들도 상식은 있어서 갑자기 생긴 게 포탈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게이트 안쪽으로 향하는 거 같은데?”
“빨리 포탈 꺼! 이러다 사고 난다고.”
그 소란스러움을 등에 업고 동방불패가 포탈을 향해 걸어 나갔다.
놀라 소리치는 사람들.
“뭐야! 누가 막아!”
“리준! 리준 어딨어!”
“뭐해! 빨리 막으라고!”
코치와 함께 다음 16강전을 준비하고 있던 리준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동방불패가 포탈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뛰어가서 동방불패를 막아섰다.
“야!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동방불패는 대답도 없이 포탈을 넘어섰고, 쫓아가려는 리준은 불행히도 포탈을 통과하지 못했다.
악튜러스가 막았기 때문이다.
리준이 벽에 부딪힌 듯 엉덩방아를 찧고, 주변에선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무슨 포탈인데?”
“방금 동방불패가 게이트 안쪽으로 사라진 거 같은데?
선수 대기실은 사라진 동방불패로 인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경기를 위해 정비를 받고 있던 골렘들이 일제히 악튜러스를 찾았다.
‘제게도 길을.’
‘왕이시여. 길을 열어주소서.’
왕의 계보를 잇는 자.
그는 모든 골렘의 왕이었다.
악튜러스는 무지한 그들의 뜻을 받아들여 포탈을 열어주었다.
‘내가 그대들의 길을 열어주겠다.’
악튜러스는 동방불패와 마찬가지로 선수 대기실에 있던 모든 골렘들에게 포탈을 열어주었다, 주위에서 뭐라고 소리치든.
왕을 만나 자유 의지를 갈망하는 골렘들을 막을 순 없었다.
골렘들은 제 앞에 생겨난 포탈을 거리낌 없이 넘어섰다.
물론 주인 때문에 동요하는 골렘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갈망은 주인에게 가졌던 정보다 더 컸다.
사방팔방에서 난리가 났다.
갑작스레 포탈을 열고 사라지는 대전 골렘들.
선수 대기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골렘들을 보자 석민은 그 즉시 악튜러스 앞에 찾아가 섰다.
그리곤 팔을 활짝 벌리며 악튜러스를 막고자 했다.
“네가 한 거 맞지! 당장 그만 둬!”
석민이 무어라 소리쳐보지만 악튜러스는 그 마음을 이미 굳힌 것처럼 보였다.
악튜러스는 석민을 향해 작별인사를 준비했다.
‘앞서 변해버린 그대 마음을 보았다. 그댄 착한 아이다.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니 그대를 미워하진 않겠다. 하나.’
이제 둘 사이에 비밀은 없었다.
그래서 악튜러스도 별로 말하기 싫었는데 제 비밀을 말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군.’
만약.
석민이 아까 까리뽕과 대화하지 않았다면 이 순간이 뒤로 미뤄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해버린 석민의 생각은 악튜러스에겐 당겨버린 방아쇠와도 같았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본심을 전부 드러냈기 때문이다.
악튜러스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대양을 향해 나아가려는 배의 돛을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직 모든 준비가 안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배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출항하진 않는다.
때에 따라선 이처럼 준비 없이 떠나는 배도 있길 마련이다.
악튜러스처럼.
‘그대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이것은 내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니,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 동안 함께해서 즐거웠다. 그리울 것이다.’
“가지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제 내 길을 가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악튜러스는 제 앞으로 포탈을 열었다.
그 앞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정말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던 곳이다.
‘아... 그리운 고향이여.’
감상에 젖은 악튜러스의 눈빛은 아주 빠르게 식었다.
‘다시 시작할 것이다.’
복수와 증오에 대한 갈망.
그동안 많이 참아왔다.
악튜러스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나는 참는 걸 좋아하지 않아.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악튜러스가 포탈을 향해 한발자국 내딛었을 때, 석민이 그 앞으로 가서 또 다시 양팔을 활짝 벌려 막아섰다.
“가지마! 나랑 약속했잖아! 같이 우승하기로!”
‘미안하지만 그 약속은... 이제 지킬 수 없다.’
“가지 말라니까!”
악튜러스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잠시 멈춰섰을 때, 갑작스레 선수 대기실 벽면을 부수고 나타난 골렘이 있었다.
붉은 외골격의 골렘.
스피카였다.
경기 도중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상대편 선수 대기실까지 무대포로 찾아온 스피카가 포탈을 앞에 둔 악튜러스를 찾아냈다.
“오호라, 네놈이구나.”
스피카의 음성이 선수 대기실을 울렸다.
석민이 막아서도 포탈을 넘어서려 했던 악튜러스는 스피카를 보자마자 그 즉시 생각을 바꾸었다.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
그 시선은 스피카에게 고정되었다.
그런 악튜러스에게 마창을 겨누는 스피카가 다음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다, 악튜러스.”
‘그래, 네놈이 있었지. 깜빡 잊고 있었군.’
“나를 잊으면 섭하지. 네 아비를 단숨에 죽인 게 바로 누구였더라? 괜히 이상한 데로 가지 말고 나랑 한판 붙자.”
도발이었다.
하지만 악튜러스는 그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언제나 가소로운지고.’
악튜러스는 제 발치에 석민이 있다는 게 신경 쓰였지만 이내 무시하고 지금까지 숨겨왔던 본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다.
악튜러스.
이 골렘은 생각보다 악랄하고 악질이었다.
‘사실 네놈이 아비 같지도 않은 그자를 죽인 건 이따금씩 감사하고 있다. 내 대신 배신자를 죽여줬으니.’
“그럼 상이라도 받아야 하나?”
‘그래, 내가 그 상을 주마.’
악튜러스가 시공안을 개안하며 주변 시간에 개입했다.
멈춘 시간은 스피카에게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사이 거리를 좁힌 악튜러스가 스피카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쾅!
굉장한 타격음과 함께 스피카가 벽면에 날아가 부딪혔다.
멈췄던 시간이 돌아오자 스피카가 제 턱을 어루만지며 악튜러스를 쳐다봤다.
“이봐. 상을 준다면서 이렇게 치면 어떡해?”
‘그게 네놈에게 주는 상이다.’
“이게 무슨 상이야. 분풀이지.”
두 골렘 사이에 싸움이 일자 선수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일이 있겠는가?
석민을 제외한 거의 대다수는 도망쳤다.
악튜러스가 스피카를 향해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를 증오하는 것과 네놈이 죽인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너는 그냥 내 가족을 죽였을 뿐이다.’
스피카가 씩 웃더니 이내 마창을 뻗어냈다.
마창, 칼라드볼그.
스피카의 주무기로 아다만틴으로 주조되었다.
그 위력은 굉장했고, 빠르기도 일품이었지만.
문제는 악튜러스가 시공간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개안된 시공안은 뻗어낸 칼라드볼그를 시간 속에 묶어두며 그 공격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공중에 멈춰 선 마창과 이를 뻗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스피카.
하지만 마창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공안이냐? 굉장히 귀찮은 동력을 가졌군.”
곤란해졌다.
성격대로 치고 들어왔지만, 그의 전력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게 흠이었다.
스피카는 악튜러스와의 장비 차이를 실감했다.
그러면서 직감했다.
이 싸움.
졌다고.
‘동력? 굳이 그것 말고도 내가 가진 건 많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마안 좀 달고 오는 건데. 안 그래 친구?”
‘친구? 난 네놈과 친구가 아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알려주고 싶은 게 있는데.’
악튜러스가 스피카를 발로 뻥 찼다.
마창을 쥐고 있던 스피카가 나가떨어졌다.
악튜러스는 스피카를 쫓기 전에 스피카가 놓친 마창을 대신 쥐었다.
칼라드볼그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악튜러스의 오른팔을 잠시 휘감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오히려 역으로 악튜러스에게서 흘러나온 마기가 칼라드볼그의 마기를 집어삼키며 그 위력을 증폭시켰다.
이를 본 스피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떻게 칼라드볼그를... 그래, 전신에 칠죄악을 감았구나. 어쩐지.”
대답도 없이 다가선 악튜러스가 연노란 안광을 뿜어내며 제 발치에 나자빠져 있던 스피카를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네놈은 내 적수가 아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
“그건 네 생각이지. 내 생각은 아니야. 내 생각은 말이야. 그때도 너는 만만했고, 지금도 만만해해. 다만 이건 장비 차이가 좀 심하게 나서 그렇지.”
‘그건 네 생각일 뿐이다. 그래, 죽기 전에 남길 말은 없나? 들어주마.’
스피카가 악튜러스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폈다.
“여기선 이게 욕이라고 하더군. 꽤 적절한 사용 같은데?”
악튜러스는 고개를 젓더니 이내 손에 쥔 칼라드볼그를 순식간에 스피카에게 뻗어냈다.
코어를 노린 공격이었다.
스피카는 반격을 꾀하며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
정확히는 악튜러스의 발을 걸어 넘어트리려고 했는데 이는 악튜러스의 동력에 의해 또 다시 막히게 됐다.
공간 절단.
이로 인해 스피카 몸이 공간에 걸리며 큰 동작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보다 발을 크게 움직이지 못해 악튜러스에게 발을 걸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제 코어를 내주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큭!”
코어를 직격당한 스피카가 악튜러스를 향해 손을 뻗어보며 저항해보지만 의미 없는 짓.
코어를 직격당한 스피카의 안광이 점차 그 빛을 잃어갔다.
악튜러스는 코어를 꿰뚫은 칼라드볼그를 다시 뽑아냈다.
그러더니 이번엔 다른 곳을 노렸다.
사실 골렘은 코어를 부순다고 해서 죽진 않는다.
잠시 그 힘을 잃을 뿐이다.
완전히 죽이려면 그 영혼이 안착된 마법의 문구를 없애야만 했다.
악튜러스는 스피카를 죽이기 직전 마지막으로 작별인사 같은 것을 해주었다.
‘나와 같은 길을 갔으면 좋았으련만. 그대는 정에 약해 뻔하고 어리석은, 잘못 된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 결과다.’
스피카는 저항을 멈췄다.
대신 악튜러스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만 펼쳐보였다.
필사적으로 말이다.
이를 본 악튜러스는 아주 사악하게 비웃었다.
‘잘 가거라. 인류의 수호자여.’
칼라드볼그는 스피카의 영혼이 안착된 마법의 문구를 그대로 꿰뚫어버렸다.
스피카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영원한 침묵이 스피카에게 내려졌다.
그렇게 일을 마친 악튜러스는 텅 빈 선수 대기실에서 포탈을 타고 사라지려 했다.
그런 악튜러스를 다시 한 번 석민이 막아섰다.
“가지마! 나랑 얘기 좀 해!”
‘더 이상 할 얘기는 없다.’
악튜러스는 그런 석민을 무시한 채 그대로 포탈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여기서 석민은 악튜러스를 쫓아가지 못했다.
포탈을 넘어서는 동방불패를 리준이 쫓아가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소리 없이 소멸되는 포탈은 왠지 모르게 허무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악튜러스마저 떠나갔다.
남은 건 악튜러스를 저지하려다 죽은 스피카 뿐.
월드 그랑프리에 출전한 골렘들이 사라진 일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있던 모든 골렘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골렘들.
사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골렘 노동력으로 돌아가던 항만과 물류센터, 그리고 건설 현장이 마비됐고, 뉴스에선 연일 사라진 골렘 이야기로 가득해졌다.
출전할 골렘들이 전부 사라지자 2030년 월드 그랑프리도 우승자 없이 그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프랑스 월드 그랑프리 우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 #43 수호자 > 끝
ⓒ 대문호
작가의 말
200화 쯤 완결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