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일레븐 스타, 베가 >
* * *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볼로니으 경기장.
오늘 이곳에서 두 고대 골렘이 맞붙는다.
기대감에 찬 관중들은 두 고대 골렘이 모습을 드러내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번 경기는 고대 골렘 간의 결전이기도 했지만 대회에 출전한 선수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두 선수 간의 격돌이기도 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나 베가 파이터인 페트리샤는 독일뿐만 아니라 그 이국적이고 예쁜 외모 때문에 유럽 전역에서 인기가 많았고, 골렘 파이트에서도 주목받는 어린 유망주였다.
차석민 선수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활동하는 무대뿐.
차석민도 제 아버지를 닮아 외모가 출중하여 벌써부터 그 인기가 대단했다.
레드 진영에 베가가 위치한다.
물 속성에 검은빛 오리하르콘을 전신에 씌운 골렘.
반면 블루 진영엔 악튜러스가 위치했다.
대지 속성에다가 붉은 빛 상체장갑과 검은 아다만틴으로 씌워진 골렘이다.
두 골렘이 서로 마주보고서자 이 순간을 학수고대하던 페트리샤가 석민에게 통신을 보내왔다.
“야. 너 사기쳤지?”
아이들끼리 대화.
석민은 시큰둥하게 반응해주었다.
“뭐가?”
“나한테 사기쳤잖아. 나한테 보여준 거, 그거 지역 예선 때잖아.”
“그래? 난 몰랐네. 실수했나봐.”
“그럴 줄 알고 계속 지켜보고 있다가 네 골렘이랑 스펙 똑같이 맞춰놨거든. 이거 정정당당한 승부야.”
그러면서 페트리샤는 이 말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말이야.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너야. 나는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페트리샤는 제 감정에 충실했다.
“그날부터 네가 가장 싫었어. 두고 봐. 그 재미없는 게임은 몰라도 여기선 절대 안 질 테니까.”
“열심히 해.”
역시나 영혼 없는 대답.
“넌 건방진 게 뭐가 그리 잘났다고 잘난체야? 잘생기면 다야? 예전부터 쭉 마음에 안 들었어. 어디 혼 좀 나봐.”
“너 되게 시끄럽다?”
“뭐?”
“시끄럽다고.”
석민은 통신을 끊어버렸다.
페트리샤가 그 표정을 사정없이 구겼다.
‘감히 내가 말하고 있는데 끊어?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
표정 관리가 안 되는 페트리샤에게 이진아가 응원 메시지를 보내왔다.
“딸, 화이팅. 꼭 이겨.”
“마마, 잘 봐. 내가 얼마나 잘 싸우는지 보여줄게.”
악튜러스와 베가가 경기장에 위치하자 한국 중계진들도 그 입이 바빠졌다.
“드디어 32강전 경기입니다. 마의 32강전. 악튜러스가 과연 32강의 벽을 넘을 수 있을 것인지!”
한국이 월드 그랑프리에 진출한 적이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 64강전 문턱을 넘지못했다.
그나마 레드 데빌이 32강까지 진출한 전례가 있긴 했지만, 그게 전부.
32강은 한국의 입장에선 마치 마의 벽처럼 보였다.
“저도 악튜러스가 이번 32강전을 무사히 치르고 16강에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보겠습니다.”
“상대가 독일 선수인데요. 이름은 페트리샤 슈나이더, 차석민 선수와 나이 차이는 불과 한 살 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릴수록 골렘을 잘 다룬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페트리샤 선수,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참으로 기대됩니다.”
“차석민 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차석민 선수도 수많은 강적들과 맞서 싸우면서 아주 놀라운 기량들을 선보였었죠. 이번에도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해보겠습니다.”
“이민호 선수께선 저 독일 선수와 스파링을 붙어본 적이 있으신데, 실례가 안 된다면 다시 한 번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 물음에 같이 있던 홍진영이 씩 웃었다.
그도 궁금했다.
이민호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이제 월드 그랑프리라서 비밀도 아니겠네요. 그 당시 스턴건이랑 베가의 비밀 스파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발렸죠. 개발렸습니다. 제가 독일 꼬마한테 치여서 은퇴했다는 거, 그거 사실입니다.”
홍진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끅끅 대며 웃었다.
이를 아니꼽게 흘겨보던 이민호가 다음 말을 잇는다.
“아마 레드 데빌이 붙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뭐?”
홍진영이 이민호를 무섭게 노려봤다.
“그걸 니가 어떻게 아는데?”
“아시죠? 베가가 이웃나라 골렘까지 개망신 준 거. 이번에 일본에서도 말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JP가 베가와의 스파링에서 처참하게 깨졌거든요.”
“그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이용호 캐스터가 다음 말을 이었다.
“월드 그랑프리 출전이 좌절 된 겐지 선수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꽤 무서운 아이였다고.”
“겐지 선수가 다루는 JP도 저 워터 골렘에게 발린 마당에 레드 데빌은 뭐 볼 것도없겠죠.”
“아, 아닙니다. 저거 쓸데없는 소립니다. 레드 데빌은 달라요.”
홍진영이 막무가내로 끼어들며 헛소리라며 단번에 선을 그었다.
“아무튼 그때 차석민 선수가 제 대신 나섰는데요. 스턴건의 피스트 브레이커가 나간 상태였는데도 잘 싸워줬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스턴건의 주먹을 저 아이에게 넘기게 됐죠.”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뭐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 저는 그냥 차석민 선수가 무난하게 16강까지 진출하길 희망합니다.”
“그건 저희들도 마찬가집니다. 차석민 선수. 꼭 16강에 진출하길 빌어봅니다.”
“경기 시작하네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경기장에선 “Fight!”란 외침이 들려왔다.
경기가 시작됐다.
악튜러스와 베가는 서로를 견제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석민은 먼저 기세를 잡으려 했고, 이는 베가의 파이터인 페트리샤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그 의지는 두 골렘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악튜러스와 베가.
이 두 골렘은 서로 만남과 동시에 미묘한 관계를 보이더니.
이내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서로를 향해 걸어 나가 손을 맞잡았다.
두 파이터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연출이었다.
그 바람에 골렘의 파이터인 석민과 페트리샤가 크게 당황했다.
안 그래도 벼르고 있던 상대였는데 이 무슨 시츄에이션?
하지만 그런 주인들과는 다르게 둘의 사이는 무척 좋아보였다.
‘친구여.’
손을 맞잡았던 두 골렘이 이번엔 서로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이군.’
‘실로 오랜만이다. 이게 대체 얼마만이지?’
모두의 기대를 묵살시키고 오랜만에 마주한 두 골렘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반면 경기장에선 난리가 났다.
서로 싸워야할 두 골렘이 저 지랄났으니 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특히나 페트리샤가 당혹감에 골렘에게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렸으나 베가는 그 모든 명령을 묵살했다.
악튜러스와 링크 된 석민도 악튜러스에게 몇 마디 던져보았으나 악튜러스도 베가와 마찬가지로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수천 년은 흐른 것 같더군.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악튜러스가 미소를 띠웠다.
이는 베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나와 생각이 같나?’
악튜러스 물음에 베가가 답했다.
‘물론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쭉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그대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군.’
두 손을 맞잡은 골렘.
악튜러스가 다음 말을 잇는다.
‘여기서 인간들에게 놀아날 필요는 없다. 우린 그들의 광대가 아니다.’
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악튜러스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대가 있어야할 곳을 내가 열어주겠다. 기다려라. 때가 머지않았다.’
‘기다리고 있겠다.’
‘가라. 내 오랜 친구여.’
악튜러스가 시공안을 개안했다.
이때 석민은 스카우터를 벗어내렸다.
이런 적은 첫 경기를 뛰었던 적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악튜러스가 명령을 거스르고 독자적으로 행동한 때가 말이다.
그 사이 페트리샤가 석민에게 뛰어왔다.
그녀는 생각보다 뜀박질을 잘했다.
페트리샤가 석민에게 거의 다다랐을 때, 악튜러스가 동력을 해방하고 게이트 안쪽으로 향하는 대형 포탈을 열었다.
‘그대, 너무 늦지 말도록.’
베가가 차원문 너머로 사라졌다.
기대감에 가득 차 있던 경기장은 순식간에 혼란이 차올랐다.
이게 무슨 일인지?
처음엔 준비된 연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머잖아 석민이 있던 곳까지 뛰어온 페트리샤가 노발대발 난리를 쳤다.
“야! 너 무슨 짓 했어!”
석민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뿔난 페트리샤가 석민에게 달려들었다.
석민은 제게 덤벼드는 페트리샤의 양팔을 붙잡았으나 바닥에 넘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마치 여자가 남자를 덮치듯.
그런 묘한 자세에서 페트리샤는 그 성격을 못 이겨 그 입을 사정없이 놀려댔다.
그리고 그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그렇게 베가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해당 영상을 지켜보고 있던 므라두앙느 황녀가 설핏 웃었다.
좋아서 짓는 웃음이 아니었다.
쓴웃음이었다.
‘가관이구나.’
흉성이라 불리는 일레븐 스타끼리 만났으니 그 결과야 뻔했다.
“너무나 뻔해서 할 말이 없구나. 하긴 그들은 광대가 아니지.”
황녀의 혼잣말에도 머리를 조아리는 두 신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가가 사라진 경기장.
대회 관계자들이 뛰쳐나오고 난리가 났다.
한국 중계진도 시끄러워졌다.
“이게 뭡니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베가가 사라졌습니다.”
“이건 뭐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일단 대회 관계자들이 나섰습니다. 아마도 사태를 수습하려는 모양인데요...”
“고대 골렘이라고 하던데... 혹시 그런 것과 연관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이 기대하던 경기였는데. 아쉽게 됐습니다.”
“사라진 베가가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경기 속행은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럼 악튜러스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베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기권승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입니다. 경기장 밖으로 이탈하는 행위는 패배나 마찬가지니까요.”
제한 없는 골렘 파이트.
상대방을 완전히 부술 때까지 경기장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경기장 밖으로 사라진 베가는 패배로 처리되어 악튜러스는 아무런전투 없이 16강 티켓을 거머쥐게 됐다.
대략 30분 정도 흘렀을까.
아직도 어수선한 경기장을 생중계하던 한국 중계진이 드디어 대회 관계자로부터 쪽지를 받게 됐다.
“조금 어이가 없기는 한데요. 뭐 잘 됐네요. 상대 골렘이 사라진 관계로 악튜러스가 무난히 16강에 진출하게 됐습니다.”
“베가는 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모른다고 하네요.”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네요.”
경기가 끝나고 선수대기실로 돌아온 석민은 거치대에 조용히 있던 악튜러스를 빤히 쳐다봤다.
먼저 말을 걸진 않았지만 내심 악튜러스가 먼저 말을 걸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악튜러스는 아무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
“아까 무슨 일이야?”
마지못해 석민이 말을 걸자 악튜러스가 전음을 보내왔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가는 중이다. 이건 그대와 아무런 관계없는 일이다.’
“정말 관계없는 일이야?”
‘관계없다. 내 증오가 향하는 곳은 이미 그대도 알고 있을 터. 더 이상 무얼 설명하지?’
“경기는 쉽게 끝나서 좋기는 한데...”
‘내가 그대 명령을 묵살한 것 때문에 그런가?’
“사실 그래. 그게 계속 걸렸거든.”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 명령을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다만 영혼의 동반자로서 그대 바람을 잠시나마 들어주고 있을 뿐이다.’
석민의 내면에 조그마한 갈등이 생겼다.
친구 혹은 주인.
석민은 악튜러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문득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로 둬서는 뭔가 사달을 낼 거 같아. 더 이상... 친구로 지내서는 안 되겠어.’
악튜러스가 그랬다.
사람은 모름지기 악독해져야한다고.
석민은 그가 가르쳤던 대로 악독해지기로 했다.
< #42 일레븐 스타, 베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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