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파이트-145화 (145/173)

< #42 일레븐 스타, 베가 >

회상이 끝나고 그 배경이 걷히자 그곳엔 악튜러스가 서 있었다.

회상 자체는 길었으나 흘러간 시간은 불과 몇 초 남짓.

석민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악튜러스의 과거를 보았다.

회상에서 벗어난 후유증으로 석민이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고 있을 때, 악튜러스 음성이 석민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교단에서 날 배신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킬제덴으로부터 무사히 도망쳤던 게 문제가 됐던 모양이다.’

“그게 왜?”

‘그들이 생각하기엔 무사히 도망친 내가 킬제덴이 놓아준 첩자 정도로 보였기 때문이겠지. 실상은 내가 죽기 살기로 도망친 거지만, 그들이 보기엔 아니었던 거야.’

“그런 일이 있었어?”

‘아무리 세상을 올곧이 살아도 그게 정답은 아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악독해져야한다.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되며, 믿을 건 오직 자신 밖에 없다. 만약 그 당시 내가 교단을 믿지 않고 그대로 도망쳤다면 지금쯤 나는...’

말끝을 흐리는 악튜러스가 전음을 멈췄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석민은 그런 악튜러스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믿지 마?’

석민은 지금 이 순간 악튜러스의 든든한 후원처로 있는 코리아 일렉트로닉스가 떠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악튜러스 이야기를 들어보니 코리아 일렉트로닉스라는 곳이 불현듯 떠올랐을 뿐이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악튜러스가 보여줬던 회상이 나름 도움이 됐는지, 석민은 머잖아 다가올 뒤통수에 대해 대략 눈치 챌 수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반드시 일어날 일을 말이다.

‘그 애가 1000조를 말했었어. 하지만 나는 거절했지.’

그럼 그 1000조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하면 그는 그 천문학적인 돈을 거절할 수 있을까?

1000조란 돈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세상 모든 돈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돈 앞에서도 석민은 의리를 지켰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대기업이라면 더더욱.

*  * *

코리아 일렉트로닉스 본사.

회장이 전속비서로부터 악튜러스 일을 보고 받았다.

“뭐? 코어가 없어?”

“네, 회장님.”

“빌려줄 코어가 우리도 없나?”

악튜러스 승전보는 가장 먼저 회장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그만큼 회장이 악튜러스에게 갖는 관심은 적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공장 가동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AA 등급 코어가 있긴 합니다만... 이걸 빌려준다면 베트남 공장 전체가 올 스톱하게 됩니다.”

“그건 좀 곤란한데...”

하지만 악튜러스 일도 중요했다.

우승만 하면 돈방석이었으니까.

“시간당 손해는 얼마야?”

“베타고가 추정하기론 시간당 대략 1300억씩 피해액이 누적됩니다.”

“안 돼. 다른 코어는?”

“A등급 코어가 두 개 더 있는데 하나는 현재 자사에서 시험 운영 중인 데빌즈 항공모함의 발전용으로 쓰이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한국 공장을 돌리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몬스터 심장이 고작 그것 밖에 없나?”

“그 외에도 26개의 A등급 심장이 있지만, 악튜러스 요구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보고에는 제외시켰습니다.”

회장이 의자를 돌려 뒤통수를 보이더니 이내 검지를 치켜들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게이트에서 웬 황녀 한 마리가 기어들어오지 않았나? 라시타컴퍼니에서 파는 심장 매물은?”

그 물음에 있어 전속비서는 막힘없이 대답해주었다.

“라시타 컴퍼니 말씀이십니까?”

“그래, 게이트 부산물은 그쪽이 많이 가지고 있잖아.”

“그게... 생각보다 영악한 무리입니다. 시장경제를 이해하고 있는 모양인지 다수의 매물을 확보한 채 그 매물들을 일절 풀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심장 가격이 고공행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제국에서 심장 물량을 풀지 않는 것도 한 몫하고 있습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꼴에 수작을 벌이고 있었군. 그런데 그걸 그냥 놔둬?”

“제국과 전쟁할 생각이 없다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대놓고 배짱 장사를 하고 있군. 하긴 말릴 사람도 없으니...”

“눈꼴 시린 곳이지만 저희에겐 중요한 거래처입니다.”

“나도 알아. 근래 게이트 부산물은 죄다 그쪽에서 사들이고 있으니까.”

등장과 동시에 1경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자산을 만들어낸 라시타 제국의 황녀.

그 배경에는 혜성처럼 등장한 라시타 컴퍼니가 있었다.

회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전 세계 모든 게이트 경제가 제국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어.”

나라의 입장에서 제국의 등장은 위기였지만 대기업의 입장에선 기회였다.

각국의 헌터들이 개 같이 뛰어다녀도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공급량을 제국이 대신하면서 자연스레 그들은 게이트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제국 세력이 등장한지 불과 몇 개월 사이.

전 세계의 게이트 경제는 제국이란 거대한 판매처 없이는 돌아가는 게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첫 등장 만에 1경원을 만든 제국 황실.

그들이 어디까지 독주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게이트 부산물만이 아니다.

현재 라시타 제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황금의 양만해도 그 가치가 현 시세로 100경원을 넘어선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일반인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막대한 황금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제국이었다.

“그놈의 제국이 문제야.”

회장이 제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 전경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황녀 똥구멍을 살살 긁어주면 떡고물이 제법 많이 떨어지겠지.”

“안 그래도 라시타 컴퍼니에서 회장님과의 만남을 원하고 있습니다.”

라시타 컴퍼니.

게이트 너머 제국 세력들이 지구의 각 나라들과 무역하기 위해 세운 거대한 무역업체다.

라시타 제국은 오직 라시타 컴퍼니를 통해서만 무역을 하니, 라시타 컴퍼니가 취급하고 있는 무역량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당연히 대기업 입장에선 현존하는 무역 업체 중 갑 OF 갑.

그들의 말에 딴죽을 걸 정도로 어리석은 대기업은 단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만남을 제의했다.

“무슨 일로?”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국의 황녀가 회장님과 만남을 원하는 건 확실해보입니다.”

“그래?”

회장이 의자에 늘어지게 앉았다.

그러다 씩 웃는다.

“뭔가 있는 모양이군. 안 그러면 나 같은 늙다리에게 그런 싱싱한 년이 관심을 보일 리가 없지.”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악튜러스에 대한 악감이 상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몇 차례 차석민 선수를 찾아가 악튜러스 매수 조건으로 1000조라는 말도 안 되는 액수를 제시한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차석민 선수가 거절했죠.”

“1000조? 누가 들으면 그 1000조가 개집 이름처럼 들리겠군.”

회장은 꽉 조인 제 넥타이를 살살 풀어내며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아... 제국이라면 좀 다르겠군. 거기서 1000조를 준다고 하면 마냥 거짓말은 아닐 거야. 주고도 남지. 가지고 있는 황금만 100경원이라고 하는데.”

제국이 보유하고 있는 황금 자산만 100경원이란다.

회장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냥 허황된 거짓말인줄로만 알았다.

제국에 찾아간 헌터들이 100경원의 가치를 지닌 황금 도시를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잠깐만.”

회장이 의자를 원위치 시키며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악튜러스를 싫어한다? 그럼 그 싱싱한 년이 날 보려는 이유야 뻔하겠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언제 온다고 했는데?”

“이 일과 관련해서는 곧바로 시간을 내는 게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회장이 또 웃는다.

그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당장 만나자고 해. 어디 그 싱싱한 년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전속비서는 그 즉시 라시타 컴퍼니에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라시타 컴퍼니 측에서 즉각 답장을 보내왔다.

전갈을 받은 전속비서가 바로 일정을 조율했다.

그리하여 회장에겐 이렇게 보고 됐다.

“회장님, 제국 황녀와의 만찬은 오늘 저녁으로 잡아놨습니다.”

“오늘? 프랑스에 있는 거 아니었나?”

프랑스는 아니더라도 한국을 제외한 세계 어딘가에 있을 황녀다.

그런데 그녀가 오늘 저녁에 보잔다.

“제 추측이긴 한데, 아무래도 마법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들어보니까 한 시간 만에 지구 반대편에서 모습을 보인 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마법이로군.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제국에선 가능한 마법인가 보죠.”

“그럼 왜 헌터들은 못하는데?”

“실력이 안 되나 봅니다.”

“음... 그렇군. 실력이 안 되는 거로군. 좋아. 저녁에 보도록 하지.”

약속 시간이 되자 회장은 리무진을 타고 약속 장소인 서울 롯데 타워에 도착했다.

최정상층에 위치한 초고급 레스토랑.

약속 시간이 되자 검은 정장 차림에 문신을 한 이국적인 사내들이 레스토랑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어 등장하는 제국 황녀.

어린애 주먹 크기의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상단에 박힌 지팡이를 짚고 등장한 제국 황녀가 미리 자리에 앉아 있던 회장을 찾아가 섰다.

둘은 초반부터 기세 싸움이 대단했다.

회장은 자리에 일어나지도 않았고, 황녀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맞이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1분이 지나자 인내심 좋지 못한 황녀가 입을 열었다.

“기본이 안 됐구나. 아니면 그 엉덩이가 매우 무거운가 보지?

손을 닦던 냅킨을 집어던진 회장이 라시타 황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입가를 길게 찢었다.

회장이 일어서더니 그녀에게 허리를 살며시 수그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하.”

“그대는 너무 건방진 게 사람을 대하는 예의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뒷배로 제국을 두고 있으니 콧대 높은 황녀는 두려울 게 없었다.

상대는 일개 회장 따위.

절대 같은 눈높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황녀가 박수 두 번을 치자, 회장 앞에 놓여 있던 식탁이 전부 치워졌다.

그러면서 황녀가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짐은 천민 따위와 같은 눈높이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

그 말에 회장이란 사내의 입은 더 길게 휘어졌다.

그녀에 대한 말들은 정말 많았지만, 만나보니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더 못하진 않았다.

“전하. 그럼 어떻게 할까요? 같이 굶을 까요?”

여기서 전하라는 호칭은 나름 조롱이었다.

왜냐면 전혀 쓰지 않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므라두앙느 황녀는 그가 붙이는 호칭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러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대가 악튜러스를 후원하고 있다고 들었다.”

회장은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므라두앙느 황녀는 서두 없이 본론만 꺼내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부터 말하겠다. 후원을 끊어라.”

“후원을 끊어라?”

사실 이 만남 자체는 둘 다 악튜러스 후원을 끊기 위한 자리가 맞았다.

회장은 끊는 조건으로 몇 가지를 챙길 생각이었고, 황녀도 그 조건을 맞춰줄 의향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어긋난 게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도가 넘는 황녀의 태도에 있었다.

회장은 어린 황녀와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감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 반감은 둘의 대화가 진행될수록 아주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황녀는 제 아랫사람 다루듯 회장을 능숙히 하대했다.

“보아하니 근래에 그대 회사가 라시타 컴퍼니에 주문한 물량이 꽤 늘었더군.”

“많이 늘었지. 굼벵이 같은 헌터들보다 그쪽 회사에 주문하는 게 더 빠르고 양이 많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대 회사는 우리 없이는 물건을 만들 수 없다.”

“그건 아니지. 그냥 좀 더뎌질 뿐이지. 물건 자체는 만들 수 있어.”

“흥. 라시타의 이름으로 명하겠다. 앞으로 제국과 지속적인 관계를 원한다면 그대, 악튜러스의 후원을 끊어라. 이건 부탁이 아니라 그대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같이 있던 전속비서가 말렸으나, 이미 회장의 뚜껑은 열린 상태였다.

회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섰다.

“이 버러지 같은 년이 듣자듣자 하니까 아주 지랄났군.”

“뭐라?”

회장이 다소 껄렁한 자세로 품에서 꺼낸 시가를 물었다.

그 시가에 불을 붙인 회장이 씩 웃는 얼굴로 황녀를 내려다보았다.

거만하기 짝이 없었고, 황녀 입장에선 매우 불쾌한 행동이었다.

“편해서 물건 좀 사주니까 세상이 아주 다 네꺼 같지?”

므라두앙느 황녀는 곱지 못한 시선으로 그를 지그시 노려봤다.

하지만 회장은 적당히란 게 없었다.

그는 물고 있던 시가를 바닥에 던지며 자리에서 미련 없이 떠나갔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전속비서가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회장님. 좋은 자리였는데 너무 성격대로 가신 것 같습니다. 조금만 참으셨으면...”

그 말에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협상이란 것도 모르나? 자네는 가끔 보면 바보야. 하긴 그런 자리가 낯설었겠지. 어떻게 해야 잘 협상하는지도 모를 테고.”

“예?”

“가만히 있어봐. 곧 그쪽에서 연락이 올 테니까. 우리야 아쉬울 거 없어. 아쉬운 건 그쪽이니까.”

그가 말한 대로 황녀 측에서 곧바로 연락이 왔다.

이래나 저래나 급한 건 황녀 쪽이었던 것이다.

전화를 끝낸 전속비서가 회장이란 사람을 쳐다보자 그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거래를 할 때는 말이야. 절대 상대에게 얕보여선 안 돼. 그건 호구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다음 날 황녀가 직접 회장 집무실까지 찾아왔다.

“어제 일은 짐이 좀 경솔했던 것 같다. 그대는 내 백성도 아닌데 말이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길 바란다.”

여기서부터 회장이 말한 협상이란 게 시작됐다.

회장은 라시타 컴퍼니와의 거래 물량을 전보다 더 늘리는 조건으로 악튜러스에 대한 모든 후원을 끊기로 황녀와 약속했다.

물론 그전에 악튜러스를 괴롭히는 건 덤이다.

상석에 앉은 회장이 다리를 꼰 채 시가를 물었다.

“앞으로 좋은 관계가 되어 봅시다.”

볼일을 마치자 황녀는 그와 별로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남자였으니까.

황녀가 어제와 다른 지팡이를 옆구리에 끼며 시선을 흘겨 그를 보았다.

“그대만 믿고 있겠다. 부디 짐과 라시타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괜한 걱정일랑 붙들어 매시길.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시고.”

황녀가 떠나가고 남은 곳에서 회장은 최고급 시가를 아주 멋들어지게 피워댔다.

< #42 일레븐 스타, 베가 > 끝

ⓒ 대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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