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파이트-144화 (144/173)

< #42 일레븐 스타, 베가 >

홍진영을 만나러 갔던 한미라가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오자 한성철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빌려준데요?”

모두의 시선이 한미라의 얼굴에 모아진다.

한미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빌려준데.”

“어떻게 빌렸어요? 아까 가실 땐 안 빌려줄지도 모른다면서.”

“우리 진영이가 생각보다 많이 착한 것 같아. 내가 그 동안 잘못 봤나봐.”

강준이 흘리듯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그래도 같은 소속사인데 돕고 살아야죠. 그나마 다행이네.”

석민도 기분이 좋은 모양.

“와 홍진영 아저씨 최고다. 진짜 빌려준다고 했어요?”

“그래 빌려준데. 너보고 잘하라고 하더라. 진영이 걔도 츤데레야 츤데레.”

한미라가 안 빌려줄 수도 있다고 했기에 대다수는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괜한 기우였다.

홍진영이 그렇게 치졸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레드 데빌 코어가 어떤 거였죠? 지금 악튜러스 거랑 비슷한 건가?”

여기에 대해선 석민이 잘 알고 있었다.

“A- 노멀 드래곤 하트에요. 일단 드래곤 하트니까 임시방편은 될 거예요.”

그러자 어른들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뭐? A-?”

“에게 겨우 그것 밖에 안 됐어?”

“네.”

“그럼 여기서 써먹기는 좀 그렇잖아. 악튜러스가 이전에 쓰던 코어만 해도 A+ 등급이었는데. 그 A+도 출력이 안 돼서 무리하다가 그 지경 된 거잖아.”

“A-면 다음 경기가 너무 어려워지겠는데?”

A+ 코어도 오버하트로 무리하다가 맛탱이가 가버린 지금 이 상황에서 A- 코어는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강준이 모두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데서 어떻게 못 구해요? 당장 내일 모레면 32강인데 어떻게든 구해봐야죠.”

누누이 말해왔지만 악튜러스 우승은 비단 석민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른들이 더 난리였다.

“일단 거기 회사 쪽에서 좀 알아봐줘요. 이걸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한성철이 코리아 일렉트로닉스 관계자들에게 주문하자 기술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일단 저희도 알아보겠습니다. 아마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일단 물어보고요.”

“부탁 좀 드릴게요. 우승은 못하더라도 16강은 가야할 거 아니에요?”

“아이 그거야 당연하죠. 걱정마세요. 일단 전화 좀 하겠습니다.”

기술팀장이 전화를 걸 때, 한미라가 남은 사람들에게 말을 던졌다.

“잠깐만. 그럼 레드 데빌한테 빌린 거는 어떻게 해? 그냥 놔 둬?”

그 물음에 있어서는 석민이 나섰다.

“지금 코어로는 오버하트가 안 되니까 일단 가져오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여차하면 그걸 달고 32강에 출전해야하거든요.”

“알았어. 그럼 레드 데빌 코어는 모레까지 어떻게든 가져와볼게.”

한미라도 핸드폰을 꺼내들며 자리를 피했다.

이렇게 두 어른이 핸드폰을 들고 코어 매물을 찾기 시작하자 멀뚱히 서 있던 한청설과 강준도 무안했는지 저마다 말을 뱉어내며 핸드폰을 들었다.

“나도 한 번 빌릴 데가 있나 알아볼게.”

“어디보자 연락할 애가 있던가...”

그렇게 근처에 있던 모든 어른이 핸드폰을 들었다.

석민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악튜러스가 32강에 장비하고 갈 코어에 대해 생각해봤다.

‘아그니한테 맡긴 코어가 있기는 한데...’

레드 데빌과 싸웠을 당시 악튜러스가 썼던 BB- 등급의 쌍둥이 가고일 심장이 있긴 했지만 석민은 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같은 출력이면 싱글 코어가 무조건 좋으니까 그건 놔두자.’

만약 레드 데빌이 코어를 안 빌려준다고 했다면 아마 그 코어라도 가져와 썼을 것이다.

참고로 악튜러스가 쓰다 남긴 장비들은 죄다 게이트 안쪽에 있는 아그니에게 몰아줬다.

이렇게 석민과 악튜러스 관계자들이 코어 문제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다음 32강 상대가 될지도 모르는 페트리샤가 석민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그녀가 이 대회에서 가장 관심을 갖는 상대는 석민 외엔 아무도 없었다.

‘쟤만 잡으면 돼. 나머진 필요 없어.’

그 모습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상어가 그 주변을 맴도는 모습과 판박이다.

상어는 사냥하기 전에 사냥감을 툭툭 건드리는 습성이 있었다.

지금 페트리샤처럼 말이다.

“야, 뭐하는데 그리 바빠.”

톡 쏘는 말투.

석민이 뒤돌아서자 자기처럼 슈트 차림의 혼혈아가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석민은 페트리샤를 마주하며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알 거 없어.”

“무슨 일 있어 보이는데?”

“아무 일 없는데.”

“정말?”

석민은 그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건방지게 누구 앞에서 까부는지.

“여긴 왜 왔어?”

“왜 오긴. 염탐하러 왔지.”

솔직도 하셔라.

“너무 솔직한 거 아냐?”

“솔직한 게 미덕이거든.”

페트리샤가 석민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악튜러스 관계자들 훑어보았다.

무언가 일이 있는 모양.

아무래도 그거 같다.

페트리샤는 석민과 마주보며 입가에 긴 호선을 그렸다.

“아까 코어 때문에 난리 났던데.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석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그런 거 아냐. 다른 일이야.”

“솔직하게 말해봐. 솔직하게 말하면 악튜러스랑 같은 상태로 맞춰줄 테니까.”

사실 32강전 상대가 페트리샤가 된다면 악튜러스 관계자들이 굳이 발 아프게 돌아다닐 필요가 없긴 했다.

승부욕이 강한 그녀는 무조건 악튜러스와 베가가 같은 상태가 되는 걸 원할 테니까.

“야, 나는 누가 조금이라도 유리한 거 절대 용납 못 해. 그건 승부가 아니니까.”

“그 말은 서로 정정당당하게 붙자는 거야?”

“맞아. 그러니까 똑바로 말해. 너 코어에 문제 있지? 그렇지?”

석민은 페트리샤의 그런 점을 절대 모르지 않았다.

스턴건 때도 그러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장비도 골렘 파이트의 일부라는 거 몰라? 그런 것도 실력이야.”

“알아. 하지만 그렇게는 안 할 거야. 그래선 무참하게 짓밟힌 내 자존심이 복구가안 되거든.”

석민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나랑 같은 조건으로 붙으면 절대 못 이길 텐데?”

“누구 맘대로?”

“자신 있어?”

“당연히 자신 있지. 넌 내가 밟을 거야. 두고 봐.”

“그래 좋아.”

석민은 자신이 쓰는 테블릿 PC를 가져왔다.

그리곤 악튜러스의 장비 정보가 담긴 화면을 페트리샤에게 그대로 넘겨주었다.

이를 넘겨받은 페트리샤가 내용을 살펴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렸다.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똑같이 맞춰줄게. 두고 봐. 내가 널 어떻게 짓밟는지.”

으름장을 내놓던 페트리샤가 떠나갔다.

아무래도 보여준 장비 수준대로 베가를 맞출 가능성이 커보였다.

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천재라더니 완전 바보였다.

‘바보 같아.’

석민은 영악하게도 방금 전 장비 수준에 악튜러스를 맞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32강은 편히 가야겠다.’

그런 석민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석민을 알게 모르게 가르쳐왔던 악튜러스였다.

‘나와 있던 사이 많이 성장했군.’

석민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악튜러스가 석민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봤어?”

석민이 묻자 악튜러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저만의 격언 같은 걸 전해주었다.

‘그대. 아직 어리지만, 차츰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군. 그래, 독해져라. 절대 약해지지 마라. 나약하고 어리석은 자의 말로는 항상 같다.’

“음... 사실 쟤한테 미안한 감정 같은 게 조금 있긴 해. 거짓말 한 거니까.”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서로 남남이지 않은가?’

“그래도 남을 속인 건 나쁜 짓이잖아?”

악튜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아직 무르다. 물러도 많이 무르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악튜러스는 다시 침묵했다.

석민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주변 환경이 변했다.

선수 대기실이 접히며 살벌한 전장이 펼쳐졌다.

흘러내린 피는 땅을 적시고, 저항 의지를 잃은 수많은 병사들이 바닥에 깔렸다.

저기 먼 곳에 진을 치고 있는 제국군은 아직 진격도 하지 않았는데, 제국군이 풀어낸 몬스터 대군이 어느 별동대를 덮쳤다.

그 별동대를 이끌던 한 사내가 팔이 잘려나간 오크 멱살을 잡았다.

자세히 보니 인간일 때의 악튜러스였다.

악튜러스는 저처럼 피를 흘리며 사투를 벌이고 있던 한 남자를 불러 세웠다.

“지원군은!”

악튜러스가 불러낸 부하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뒤를 힐끔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안 보입니다.”

“반드시 올 거야. 그때까지 버텨! 무조건 버티라고!”

잡았던 오크 멱살을 거칠 게 내던지는 악튜러스가 대검을 어깨 위로 젖히더니 이내 몬스터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숲속을 향해 내달렸다.

“전부 숲으로 이동해!”

악튜러스가 빠르게 숲으로 이동하는 사이.

석민에겐 악튜러스의 과거 이야기가 펼쳐졌다.

악튜러스는 마법사인 아버지를 따라 에아로 넘어갔고, 그 에아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별동대장이 되었다.

악튜러스가 이끄는 별동대는 크게 보면 에아에 소속된 성기사단의 일부였다.

악튜러스와 그 별동대는 날이면 날마다 교단에게 승전보를 안겨다주었다.

그런 악튜러스와 별동대의 명성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교단에선 악튜러스에게 이곳 루안다군 전진기지를 맡겼었다.

그리고 제국군이 들이닥쳤다.

악튜러스는 제국군이 보낸 몬스터 대군에 맞서 싸우며 에아에서 찾아올 지원군을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지원군은 끝끝내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부하들과 함께 숲속으로 내달린 악튜러스는 그곳에서 지루한 전투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렇게 몇 달.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이 다 죽고 악튜러스 혼자 살아남았다.

모두는 악튜러스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숲은 이미 몬스터 천국이 되어 있었고, 악튜러스가 지키던 루안다 전진기지는 이미 라시타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악튜러스는 기어코 살아났고, 그 거머리 같은 생명력으로 숲을 빠져나가 제국기가 휘날리고 있던 루안다 전진기지에 몰래 숨어들어 그 수장을 만났다.

목에 칼이 겨눠진 제국군 수장.

악튜러스는 여기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날... 버렸다고?”

“그렇다. 그댄 이미 교단에서 버린 장기말에 불과하다.”

“어떻게... 내가 그 동안 해준 게 얼만데!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악튜러스가 교단에 대한 적의로 불타오르고 있을 때.

루안다 전진기지를 접수한 하몬드 총독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미안하지만, 밖은 내가 불러낸 부하들로 가득하다. 아마 네놈은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무슨 소리야!”

악튜러스가 칼을 더 깊숙이 들이밀자 그들이 있던 방을 세차게 두들기는 자들이 있었다.

방문으로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악튜러스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빼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젠장!”

살기 위해 발악하는 악튜러스를 두고서 하몬드 총독은 느긋함과 비웃음을 함께 머금었다.

“이 자리서 무릎을 꿇어라. 그럼 최대한 자비롭게 죽여주지.”

악튜러스는 도망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서자, 그 즉시 하몬드 총독을 죽였다.

모가지가 잘린 하몬드 총독의 수급은 그의 책상 위에 올려 지게 되었고, 그 목을 자른 악튜러스는 모든 걸 자포자기한 채로 그의 의자에 앉았다.

곧이어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하몬드 총독의 목이 잘려져 있었고, 그 수급이 올려진 책상 뒤엔 거지 몰골의 암살자가 버젓이 앉아 있었으니까.

< #42 일레븐 스타, 베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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