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네거티브 >
일을 쉰지 한 달이 넘었으니 슬슬 몸이 근질근질한 팀원들이 모일 때가 됐다.
그가 생각 좀 하더니 이내 긍정의 목소리를 냈다.
“제가 팀원들한테 연락해볼게요. 아마 특별한 일 없으면 다들 따라나설 겁니다.”
“그럼 부탁 좀 할게. 여길 꼭 가야하거든.”
“그런데 갑자기 황금 산맥은 왜요? 여기 뭐가 있는 거예요?”
“거기 에이션트 웜을 사냥해야 하거든. 그 심장이 필요해.”
“에이션트 웜이요?”
황금산맥에 대해선 어렴풋이 들어봤다.
황금으로 덮여진 산맥.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고대 웜도 유명했다.
“음... 그럼 나머지 몫은 포기하시는 거죠? 태식 씨도 아시잖아요. 요즘 심장 비싼 거.”
코어로 쓰이는 심장의 가치가 고공행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문 헌터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몫은 포기할 거냐고 묻는 것이다.
차태식은 군말 없이 승낙해주었다.
“다른 건 안 건드릴 테니까 내 몫으로 그 심장만 챙겨줘. 그게 있어야 우승을 할 수 있다고 하나봐.”
“좋은 코어도 많을 텐데 굳이 에이션트 웜 심장을...”
“후원하는 곳에서 그걸 추천하던데? 좋은 심장인가 보지.”
“그래요? 아무튼 일단 말은 해볼게요. 얼마 안 걸릴 테니까 좀만 기다리세요.”
“알았어.”
통화를 마친 김정민은 평소 알고 지내던 팀원들에게 전부 전화를 돌렸다.
전부 오케이.
김정민이 다시 차태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부 따라가겠대요. 그런데 황금 산맥을 가는 건 좋은데, 여길 들어가는 방법이 극히 제한적이라고 하거든요. 운이 따라줘야 한데요.”
“운?”
차태식은 김정민으로부터 황금 산맥에 대한 걸 듣게 됐다.
“헌터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서 환상 고블린을 찾아야 하거든요. 요 녀석을 찾아야만 황금 산맥에 닿을 수 있어요. 들어보니까 한수 씨가 환상 고블린을 자주 봤다는 필드가 있나봐요. 거기서부터 시작할 생각이에요.”
“언제 출발할 생각인데?”
“출발이야 너무 늦지 않게. 전부 준비를 해야 하니까 어디 보자... 모레 아침 9시 신림 게이트에서 모이는 걸로 하죠.”
그렇게 레이드 시간이 잡혔다.
석민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있다가 집에 찾아온 회장 비서로 인해 그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렇게 말하셨다고요?”
“왜? 괜히 한 말이니?”
“그렇게 말하시면 아빠가 황금 산맥에 찾아가시잖아요. 거기 위험한데.”
석민이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쏘아보는 눈빛이 귀엽다.
회장 비서는 쓰고 있던 안경을 쓱 올리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석민을 내려다보았다.
“미안. 하지만 네 아빠도 알 건 아셔야지.”
“혹시 일부러 말하셨나요?”
“그렇게 보이니?”
“네, 그렇게 보여요.”
“사실 의도한 바가 있긴 해. 네 아빠는 한국에서 얼마 없는 S급 헌터잖니?”
“아빠가 강하긴 해도 저 때문에 위험한 일에 보낼 순 없어요.”
석민은 대화를 중도에 끝내고 차태식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 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아들.”
“아빠, 황금 산맥 가려고?”
“그걸 어떻게 알았어?”
“회장하고 붙어 다니는 아줌마가 말해줬어. 아빠, 그런데 가면 안 돼. 위험해.”
석민은 그 누구보다도 황금 산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칠죄종 마지막 세트 아티팩트가 그곳에 있는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오슬로라 불리는 에이션트 웜은 알려진 것보다 더 위험한 몬스터였다.
괜히 황금 산맥이 지금까지 멀쩡한 게 아니란 소리다.
“아빠, 지금부터 아들이 하는 말 잘 들어. 아빠는 황금 산맥으로 향하는 길만 아들한테 알려줘. 그럼 악튜러스가 오슬로를 잡을 거야.”
“왜? 아빠가 할 수 있어.”
“아니야. 그건 악튜러스가 잡는 게 좋아. 악튜러스는 준비가 됐거든.”
“하지만 악튜러스가 아빠를 따라가면 세계 대회는 못 나가잖아?”
“아빠 그건 걱정 마. 이미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까리뽕이 알려준 이동 마법진은 아직 그에게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차태식 반응이 저러한 것이다.
“아무튼 그 일은 악튜러스에게 맡겨. 자세한 건 집에 오면 아들이 다 설명해줄 테니까.”
아들놈이 다 알아서 하겠단다.
아들 생각에 굳은 결심을 했던 차태식은 뭔가 허전해졌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보단 악튜러스가 더 세니까. 그런데 무슨 수로 에이션트 웜도 잡고 세계 대회도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거지?’
그 의문은 집에 와서야 풀리게 됐다.
석민은 그에게 이동 마법진에 대해 알려주었고, 차태식은 아들이 그려준 마법진을 유심히 살펴봤다.
“이게 가능해?”
“가능하지. 그럼 아들이 거짓말을 할까?”
차태식은 뒷마당에 나가 석민이 미리 만들어놓았던 이동 마법진으로 시험해봤다.
정말이었다.
두 부자는 어느 샌가 게이트 안쪽으로 이동해있었다.
“아들. 이런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여태까지 안 가르쳐준 거야?”
“이게 비밀이라서 그런 거야. 남들한테 알려주기 싫었거든.”
아들 생각이 좋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마냥 틀린 것도 아니었다.
“거참 신기하네. 그런데 아들 이거면 게이트도 아빠 몰래 들락거렸던 거 아냐?”
차태식이 날카롭게 파고들자 석민이 당황했다.
하지만 이동 마법진에 대해 말하는 순간 게이트 출입에 관한 비밀을 들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당연히 시험해봤지. 왜냐면 그게 작동하려면 용맥이 흐르는 땅이 필요하거든.”
차태식이 아들을 무섭게 내려다봤다.
“누가 위험하게 게이트에 들어가라고 했어? 그보다 어떻게 게이트 안쪽까지 간 거야?”
“아들한테 악튜러스가 있잖아. 악튜러스랑 함께 레이드 나간 적이 있거든.”
“뭐? 레이드를 나가?”
그날 석민은 밤늦게까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아빠 몰래 게이트에 출입한 벌을 선 것이다.
방구석에 앉아 손을 들고 있는 아들에게 차태식이 엄한 목소리를 냈다.
“두 번 다시 게이트에 들어가면 안 된다?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아빠 잘못했어. 두 번 다시 게이트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을게.”
아들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차태식이 손을 내리라고 했다.
“손 내려. 아들, 그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땐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아무튼 이제부터라도 게이트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마. 이거 어기면 그땐 진짜로 혼난다?”
“응, 알았어...”
그렇게 날이 저물고 다시 아침해가 떴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일어난 석민은 TV를 켜고 앉아 아침 뉴스를 지켜봤다.
그러다 아주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됐다.
“현재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있는 라시타 제국의 황녀, 므라두앙느 데 라시타가 월드 그랑프리 출전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몇 주 전, 천문학적인 자산을 만든 그녀가 이번엔 어떤 행보를 보일 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파리 공항입니다.”
라시타 제국의 황녀.
아무 연고도 없이 찾아온 미지의 땅.
이곳에서도 제국 황족이 가진 재력은 막대한 힘을 발휘했다.
제국 황녀는 제국에서 공수된 여러 재화와 값비싼 보물들을 팔아치워 미국 로스차일드 가를 연상케하는 거대한 자산을 단숨에 만들어냈다.
1경원.
그 자산을 만들어낸 지가 불과 몇 주 전의 일이다.
그 황녀가 이번엔 골렘 파이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단다.
TV 속 화면이 바뀌며 파리에 위치한 샤를드골 국제공항에 모습을 드러내는 황녀와 그 수행원들이 보였다.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속.
소녀는 무수히 많은 카메라 앞에 섰고,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프랑스 대통령이 직접 찾아와 예우를 해주었다.
뉴스에서 전하길.
소녀가 프랑스를 찾아온 것도 올해 월드 그랑프리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기 때문이란다.
이를 본 석민이 미간을 좁혔다.
‘쟤는 여기저기 바쁘게도 움직인다.’
몇 주 전만 해도 먼 이계의 나라에서 찾아온 소녀가 이렇게나 빠르게 이곳 세상에적응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건 석민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이곳 생활이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그건 활짝 웃고 있는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다시 한국 아나운서들의 말이 이어졌다.
“골렘 파이트는 라시타 제국에서도 흥행하고 있는 재밌는 볼거리라고 전해지는데요. 제국측 관계자가 말하길 므라두앙느 황녀가 올해 출전 의지를 보였다고 합니다.”
“제국에서 찾아온 청동 골렘, 탈로스가 개체 등급 판정을 위해 이미 에인츠로 향했다고 합니다. 결과에 대해선 비밀이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A- 등급 이상은 무난히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개체 등급에 대해선 소문만 무성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라시타 황녀에 관한 뉴스가 끝나자 석민이 미간을 좁혔다.
새로운 적의 등장.
‘쟤도 월드 그랑프리에 나온다고?’
왜 출전하는지는 불명이었으나 석민은 왠지 모르게 악튜러스가 관계되어 있을 거란 느낌을 쉽사리 지우지 못했다.
불과 2주 전.
생판 모르는 누군가가 석민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석민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악튜러스를 넘기라고 말했었다.
대신 돈으로 1000조를 주겠다고 했다.
1000조다.
빌게이츠도 못 가진 돈을 주겠다고 했으나 석민은 한사코 거절했다.
“친구는 파는 게 아니에요.”
석민은 문득 그때 일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1000조란 돈을 주면서까지 악튜러스를 가지려 하는 자가 있다면 딱 한사람 밖에 없었다.
악튜러스에게 대단한 악의를 가진 소녀.
순식간에 1경원에 달하는 자산을 만들어낸 그 소녀가 배후일 거라 석민은 확신했다.
‘그 애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골렘을 사면서 1000조를 지불할 사람이 없어.’
빌게이츠도 그건 못했다.
오직 1경원 자산을 가진 소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석민이 다른 뉴스를 시청하고 있을 때 잠에서 깬 차태식이 옅은 신음소리를 냈다.
“으으... 아들, 또 아침부터 뉴스야?”
석민은 잠에서 깨어난 차태식을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아빠, 그때 봤던 황족 알지? 그 여자애 있잖아. 라시타 제국에서 왔다던.”
“아 걔? 걔는 왜.”
“그 애가 이번 월드 그랑프리에도 나온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공주님이 그런데 왜 나와.”
“아들도 잘 몰라. 그런데 이번에 나온데.”
“허허... 진짜야?”
“진짜지.”
그렇게 아침이 시작됐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그러나 그 평화로운 아침은 갑작스레 찾아온 검은 정장의 어른들로 인해 깨지고 말았다.
석민고물상 앞으로 길게 늘어진 외제차 행렬.
그 외제차들은 한 소녀를 호위하는 경호원들이 타고 온 것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한 소녀를 호위하며 길을 터주었다.
라시타 제국의 황녀 므라두앙느 데 라시타.
그녀는 1경원의 자산가이자 그 어떤 법도 그녀를 옭아맬 수 없는 치외법권이 되어 석민을 찾아왔다.
석민은 아침 뉴스에 봤던 소녀가 한국에 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반면 소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석민과 마주보며 섰다.
소녀는 생각지도 못한 낡은 가게 안에서 소년을 보았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또 보게 되는구나. 이번이 두 번째인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선 불명.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니 석민은 소녀가 왜 찾아왔는지 알게 됐다.
“1000조로도 부족하다면 2000조까지 내줄 의향은 있다.”
돈이 더 이상 돈처럼 느껴지지 않는 액수 앞에서 석민은 눈빛을 달리했다.
소년은 소녀를 보는 눈빛을 무겁게 깔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친구는 파는 게 아니야.”
그 말에 피식 웃는 소녀가 거대한 보석 박힌 지팡이를 땅에 찍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너희 야만인들은 돈이면 뭐든 된다고 하던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어.”
“그래?”
소년의 태도를 보아하니 돈이 중요한 게 아닌 듯싶었다.
소녀는 무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건 고상하지도 않고 꼴사나웠으니까.
대신 소녀는 이곳 방식대로 저를 욕보였던 골렘을 벌하고자 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여기 식대로 보답해주지.”
혼자 고상한 척은 다 떠는 소녀가 가지고 왔던 지팡이를 옆구리에 끼며 뒷모습을 보였다.
할 말이 끝났으니 떠나는 것이다.
소녀는 그렇게 떠나갔고 소년은 말없이 지켜봤다.
그러다 소녀가 멈춰서더니 뒤에 있던 소년을 향해 말을 흘렸다.
“그대, 마법은 사용하지 말도록. 그건 예의에 어긋나니까.”
석민은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마법을 써. 나 마법 몰라.”
소녀는 빙긋 미소를 흘렸다.
“그댄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구나.”
아리송한 말만 남기는 소녀가 떠나갔다.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40 네거티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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