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철의 장막 >
“야만인 주제에... 감히 그런 눈으로 짐을 내려다보다니.”
아쉽게도 석민은 소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살아났어...”
대신 죽다 살아난 소녀가 신기할 따름이다.
석민은 제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잠에서 덜 깬 건 아닌 모양.
소녀는 판타지에서 나오는 불사신, 뭐 그런 거 같았다.
소녀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섰다.
그리곤 변방의 소년이 자기를 내려다보는 게 불만인지 그 몸을 높게 띄웠다.
이제 소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게 됐다.
소녀는 적당한 높이까지 날아올라 소년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소녀의 입엔 어느샌가 만족감이 걸려 있었다.
소녀가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황금빛 골렘이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을 무섭게 굴렀다.
이어 시공안을 개안한 악튜러스가 갑자기 튀어나와 또 다시 소녀의 미간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 순간 소녀가 개안한 또 다른 마안이 악튜러스의 주먹을 막는 놀라움을 선보였다.
소녀의 미간 위에 그려진 제 3의 눈동자.
라시타 황가의 보물이자, 절대전능의 마안.
전능안이다.
악튜러스는 소녀 앞을 가로막는 3중 보호막을 제 주먹으로 짓누르면서 잊힌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킬제덴!’
석민이 보는 시야가 변했다.
회상이다.
빛무리가 크게 번쩍이더니 이내 비추는 곳은 피로 얼룩진 전장.
그 전장에서 인간 악튜러스는 어느새 성년이 되어 있었고, 대검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피로 얼룩진 만신창이.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 위에 선 악튜러스는 제 앞으로 다가온 붉은 머리칼의 사내를 보았다.
‘드디어 만났구나. 마을의 원수!’
이 날을 위해 악튜러스는 에아에 위치한 성기사단 훈련소에서 지옥 같은 훈련을 버티며 대검을 다루는 병사가 됐다.
그 실력은 성기사가 되고도 남았지만, 신앙심이 깊지 않아 성기사가 아닌 그들을 도와 성전에 나가는 병사가 됐다.
다 죽고 저 혼자만 남은 전장.
악튜러스는 적의 수장을 앞에 두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반면 적의 수장은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는 육중한 갑옷에, 최고급 피혁으로 만든 망토를 걸치고 사뭇 여유로운 표정을 입가에 담고 있었다.
킬제덴은 거센 기합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악튜러스를 시야에 담았다.
그의 표정은 정말 여유로웠다.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
진정한 강자의 여유였다.
그는 크게 움직이지 않고 검신을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악튜러스의 대검을 가볍게 쳐냈다.
이미 체력이 고갈되어 있던 악튜러스는 크게 저항하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으며, 그 목은 어느샌가 다가온 대검에 의해 겨눠지고 있었다.
킬제덴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악튜러스에겐 그 미소가 조롱처럼 보였다.
“그게 네가 가진 전부더냐?”
킬제덴이 물었다.
반박하지 못한 채 이만 으득 가는 악튜러스가 분한 마음에 피가 섞인 흙을 한 움큼 쥐었다.
“전장은 본디 자비가 없는 곳이다.”
킬제덴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때 악튜러스가 손에 쥐었던 흙을 킬제덴에게 던졌다.
킬제덴이 반사적으로 왼손을 들어 올려 제 눈앞을 가렸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자, 악튜러스가 상대 목을 노리며 대검을 휘둘렀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하지만 킬제덴은 지금껏 보인 적 없는 새로운 마안을 개안시키며 악튜러스가 보인 회심의 일격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제 앞에서 펼쳐지는 3중 보호막 앞에서 악튜러스는 전의를 잃었다.
이내 뒷걸음질 치는 악튜러스는 뒤도 안 돌아보며 도망쳤다.
왼손가락 사이로 도망친 악튜러스를 노려보는 킬제덴이 제 옆으로 다가와 활시위를 당기는 궁사를 보았다.
킬제덴은 망설이지 않았다.
“쏘거라.”
숙련된 궁사는 화살을 쏴 도망치는 악튜러스의 등허리를 맞췄다.
그럼에도 악튜러스는 계속해서 도망쳤고, 절대 멈추지 않았다.
회상이 끝났다.
악튜러스는 전능안을 가진 소녀를 찍어 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주먹만으론 무리.
악튜러스가 칠죄종 피갈귀 손으로 보호막을 찢어냈다.
그러자 전능안에 보호되던 소녀가 무방비 상태가 됐다.
놀란 소녀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악튜러스.
악튜러스는 또 다시 사정없이 주먹을 내리쳐 소녀를 바닥에 처박히게 했다.
악튜러스는 화가 가시지 않은지 성난 주먹으로 바닥에 깔린 소녀를 두어 번 더 때렸다.
석민이 악튜러스를 말렸다.
“그만해. 어차피 안 죽어.”
석민의 말은 사실이었다.
악튜러스가 주먹으로 짓뭉갠 소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졌지만 이내 곧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갔다.
불사의 힘 앞에선 악튜러스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악튜러스가 미간을 좁혔다.
‘불사로군.’
불사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힘.
저 힘을 가졌다면 필시...
악튜러스의 악의가 느껴지자 석민은 다시 한 번 악튜러스를 말렸다.
“어차피 저 아이는 네가 찾는 그 사람이 아니잖아. 넌 엉뚱한 사람한테 화풀이를 하고 있어.”
악튜러스는 멍하니 있다가 옆에서 저를 노리던 황금빛 골렘의 턱주가리를 쳐주었다.
황금빛 골렘이 나자빠지고, 악튜러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악튜러스는 소년과 그 옆에 죽어 있던 소녀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전음을 날려주었다.
‘그 아이는 라시타 제국의 황녀다. 불사의 힘을 가진 걸 보니 현 황제가 가장 아끼는 딸인가 보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악튜러스는 소녀를 손으로 붙잡았다.
그냥 놔둘 수가 없었던 모양.
석민은 소란이 일던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란은 아직이다.
헌터들이 모인 천막도 아수라장이 됐다.
석민 앞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붙잡힌 황녀.
그 황녀로 인해 섣부르게 나서지 못하는 마법사들이 이내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고 무언가를 보이려하자 악튜러스가 으름장을 내놓았다.
‘꿇어라.’
악튜러스 손아귀엔 황녀가 붙잡혀 있었다.
조그마한 악력이면 소녀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마법사들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일제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법사들이 떠난 자리.
석민은 안도했다.
‘다행이다.’
석민은 악튜러스와 함께 아빠가 있던 천막으로 향했다.
무너진 천막 위로는 적을 잃고 방황하는 차태식이 있었다.
“아빠!”
차태식은 정신없이 싸우다 뒤늦게 제 아들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당황하던 찰나였다.
“아들!”
아들을 안아 올린 차태식이 뒤따라오는 악튜러스와 그 손아귀에 잡힌 소녀를 보게 됐다.
차태식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야? 설마 그 황족이야?”
석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주었다.
“응! 악튜러스가 붙잡았어.”
붙잡힌 황녀.
상황이 종료되고, 황녀는 포박됐다.
포박에 순순히 응하는 황녀는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온몸이 결박되고 눈가리개까지 한 황녀 근처엔 악튜러스가 같이 있었다.
악튜러스는 붙잡은 황녀 곁을 떠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몇 십분 뒤 석민은 아빠와 함께 어수선한 상황실에 찾아갔다.
“다들 무사하시군요.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도중에 황녀를 사로잡아서 망정이지.”
다들 말이 많았다.
대부분은 아까 있었던 소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 이제 사람들은 추후 일을 논하기 시작했다.
“이제 저 여자아이를 어떻게 할까요? 말을 들어보니까 제국의 황녀라고 하는데...”
이계 마법사들이 헤집어놓은 일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했다.
철의 장막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마법사들이 원래 그런 존재인 것이다.
최상위 헌터들도 그들과 다시 붙으면 곤란하다고 했다.
이때 아들과 대화를 주고받던 차태식이 나섰다.
“저기 제 아들이 할 말이 있다고 하네요.”
석민이 어른들 앞에 서서 목소리를 냈다.
“제가 보니까 악튜러스가 붙잡은 그 여자애 있잖아요? 그 여자애는 해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돌려보낼 수도 없을 거 같아요.”
만약 위해를 가한다면 황제가 아끼는 딸이니 제국과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반대로 그냥 풀어준다면 소녀는 전과 마찬가지로 10만명의 노예를 요구할 것이다.
“그래서 풀어줄 수도 없어요.”
상황실에 있던 어른들이 우왕좌왕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냥 막연히 붙잡아둘까요? 그러다 또 쳐들어오면 어떡해?”
헌터들도 목소리를 냈다.
“일단 그 아이는 무조건 붙잡고 계셔야 합니다. 다시 놔줬다가 마법사들이 다시 찾아오면 저희도 답이 없어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는 안 싸웁니다. 그땐 빠질 거예요.”
헌터들도 지레 겁을 먹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마법사의 힘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헌터들이 저 지랄이니 군관계자들도 발만 동동 굴렀다.
“아니 헌터들이 내빼면 우린 뭐 낙동강 오리알이라도 되란 말입니까? 여기가 뚫리면 서울까지 직행이라고요. 이 사람들이 진짜.”
헌터들은 손사래를 쳤다.
“글쎄 우린 잘 모르겠고. 아무튼 두 번 다시 이계 마법사들하고 싸울 생각 없으니까 저 꼬마 말대로 그 황녀인지 황족인지 뭔지나 잘 간수하십쇼.”
혼란스러운 상황.
보다 못한 헌터부 장관이 나섰다.
“그만! 이건 대통령님께 직접 보고 드리겠습니다. 모든 건 대통령께서 판단하실 거니까 그렇게 싸울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청와대에 전달됐다.
얼마 후 상황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헌터부 장관이 그 전화를 받고서 무언가를 전해 듣기 시작했다.
잠시 후 헌터부 장관이 모든 상황을 종결시켰다.
“대통령께서 말하시길. 우선 그 여자아이를 붙잡고 협상에 써먹자고 하셨습니다.우선 우리가 황녀를 안전하게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저기 마법사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누구 자원하실 분 안 계십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헌터들이 일제히 시선을 피했다.
나름 이 나라에서 상위권에 속한다는 헌터들의 뜨거운 애국심이었다.
보다 못한 석민이 겁쟁이 어른들에게 한 마디 해주었다.
“아무도 안 나서면 아까 그 마법사들이 다시 쳐들어올 거예요. 그땐 아까보다 더 격렬하게 싸울지도 몰라요. 그걸 원하시는 거예요?”
군관계자. 헌터부 고위 공무원들.
헌터들까지 모두.
아직 초등학교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애보다 못했다.
제 목숨 지키기가 급급한 것이다.
한숨을 쉰 차태식이 자원했다.
“제가... 나서죠. 여기서 헌터 등급은 제가 젤 좋으니까.”
그러자 석민이 놀랐다.
“아빠가 왜?”
차태식은 아무 말 없이 아들 볼을 꼬집었다.
“그럼 제가 나서는 걸로 합니다?”
모두는 말없이 수긍해주었다.
그래도 염치는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악튜러스와 차태식이 함께 마법사들을 찾아가게 됐다.
여기서 석민은 따라가지 않았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제 몸을 지킬 수 없는 석민은 짐이 되기 때문이다.
차태식이 동부관문 게이트를 넘어 황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마법사들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차태식을 보고서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이내 시공을 찢고 나타난 골렘을 보고선 방금 전 생각을 물리게 됐다.
차태식이 나섰다.
“거기 대빵이 누굽니까? 저랑 얘기 좀 합시다.”
그러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하나가 로브 후드를 벗으며 나섰다.
그 얼굴엔 형광색 문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황녀는 저희가 인질로 붙잡고 있습니다. 물론 안전하게, 그리고 극진이 모실 예정입니다. 하지만 아무 보험도 없이 풀어드릴 순 없는 상태입니다. 그냥 풀어줬다간 10만 노예 같은 개소리나 하실 테니까.”
그들은 쓰는 언어가 달랐지만 포켓으로 인해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늙은 마법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하의 옥체에 조그마한 변고라도 생긴다면. 위대하신 라께선 전쟁을 불사하실 것이다. 그게 싫다면 전하를 순순히 내놓는 게 그대들에게 좋을 것이다.”
“그럼 저희가 곱게 풀어주면 10만 노예는 없던 게 되는 겁니까?”
그 말에 노인이 즉답을 피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하지. 믿어라. 우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악튜러스가 주먹으로 땅을 세차게 내리찍었다.
‘너희들은 새빨간 거짓말쟁이다. 제국이 언제부터 약속을 지켰었지?’
이계 마법사의 시선이 일제히 악튜러스에게 향했다.
늙은 마법사의 표정엔 경악이 차올랐다.
“너, 너는...”
< #39 철의 장막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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