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파이트-131화 (131/173)

< #39 철의 장막 >

일렬로 서 있던 마법사들 중 두어 명이 비켜서자 그 사이로 작은 체구의 마법사가걸어 나왔다.

“여기가 바로 변방 중에 변방이로다.”

제 주위로 눈알 형태의 보주가 떠다니는 소녀는 쓰고 있던 로브 후드를 벗어 내리며 붉은 곱슬머리를 보였다.

좌안을 가로지르는 신비로운 문양.

고양이 눈매라 선한 인상보다는 센 인상을 남기는 소녀가 제 발치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한눈에 담았다.

저기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게이트가 보인다.

저곳을 넘어가면 미리 정찰 보냈던 마법사의 말대로 야만인들이 진을 치고 있단다.

“변방에 기생하는 야만족이라.”

소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소녀 근처에 있던 마법사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연다.

“전하.”

소녀는 저 아래로 둔 시선은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사로잡은 야만인 중 하나를 풀어 주거라. 짐이 그들의 대답을 여기서 들어보겠노라.”

말을 마치매 명을 하달 받은 마법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뒤집힌 손바닥을 올렸다.

윗사람에게 보이는 그들만의 예법이자 명을 받은 신하의 참된 모습이었다.

몇 십분 뒤.

아공간에 붙잡혀 있던 헌터 하나가 풀려나 게이트 쪽으로 쫓겨났다.

무언가에 쫓기듯 도망기는 그가 게이트를 넘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게이트 반대편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군인들이 일제히 총부리를 겨누었다.

놀란 그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지휘관이 급히 소리쳐 군인들의 발포를 막았다.

“사격 중지!”

그렇게 살아 돌아온 헌터는 의무병과 만난 뒤 곧장 상황실로 불려갔다.

상황실에서는 군 관계자와 헌터부 고위 공무원들, 그리고 일류 헌터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 중이었는데, 풀려난 헌터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를 바로 호출시켰다.

파란 담요를 덤은 헌터가 초췌해진 몰골로 입을 열었다.

그는 이계 마법사와 만나게 된 과정, 그리고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이계 마법사들이 자신을 풀어준 이유까지도 알려주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듣기론. 제국에 볼모로 잡힐 노예 10만 명을 요구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노예라뇨.”

상황실은 난데없는 노예 이야기로 소란스러워졌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노예야.”

“그걸 어떻게 수용해? 절대 수용 못해.”

헌터부 장관도 나섰다.

“이걸 물으나 마나 대통령께서도 분명 거절할 겁니다.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초췌한 몰골의 헌터가 우려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그는 들었던 그대로 전할 뿐이다.

“그럼 무력을 보이겠답니다. 절 협박하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뭐 무력?”

몇몇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김정민이 나섰다.

“잠깐만요.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까?”

“네.”

김정민이 제 뺨을 긁적였다.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계 마법사들과 접촉한 경험이 있었던 김정민은 그들의 무력 행사를 모르지 않았다.

“이거 우습게 볼 일이 아닙니다. 그쪽 마법사들은 저희 헌터들과 수준이 달라요. 저나 상위 헌터들도 게이트 안쪽이면 기피하는 지역인데 그 사람들은 그곳에 나라를 세우고 지난 수천 년 간 살아온 자들입니다. 괴물이에요.”

김정민이 그들을 괴물이라 칭할 정도로 높게 평가했다.

만만치 않다는 소리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헌터부 고위 관계자들도 어렵게 말을 꺼냈다.

“맞습니다. 이거 그냥 가볍게 듣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냥 들으면 개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개소리가 아니에요.”

별 네 개 박힌 국방색 모자를 쓰고 있던 사령관이 나섰다.

“아니 말을 그렇게 하시면 저희보고 뭘 어쩌란 겁니까? 싸우란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그 물음에 있어서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김정민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상위 헌터라도 저쪽에선 같잖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일례로 예전에 이계 마법사들하고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제 무력 수준을 보고선 대놓고 비웃더라고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희보고 야만인이랍니다.”

불과 몇 년 전 그가 동료들과 함께 던전 탐사를 하던 도중 이계인 무리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김정민과 그 무리를 보고서 야만인이라 칭하며 무시했었다.

어떤 헌터가 발끈해서 덤벼들었지만 꼴사납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 헌터가 A급 헌터였다.

“그때 일 이후로 저흰 이계 마법사들을 더 조심하게 됐죠. 정확히는 피해 다녔어요. 저희랑 무력 수준이 다르니까.”

김정민의 말을 듣고서 어른들이 조용해졌다.

석민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자기가 낄 자리가 아니기도 했지만, 딱히 할 말도 없기 때문이다.

대책 회의란 게 성과 없이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노예 10만명을 내줄 수도 없는 상황.

일단 상황실에선 이계마법사들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게이트 바로 앞에다 철의장막을 치기로 했다.

철벽을 세워 이계마법사들의 출입을 물리적으로 차단시키려고 한 것이다.

누구는 마법사를 상대로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지만, 대다수는 상부 지시라면서 묵묵히 철의 장막을 세웠다.

공사엔 골렘들이 동원됐다.

그렇게 날이 어두워졌다.

날이 어두워지자 차태식은 아들과 함께 천막 하나를 얻어 자리하게 됐다.

물론 그 천막엔 두 부자 외에 최상위 헌터들도 모여 있었는데, 김정민도 그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석민이 근처 탁자에 앉아 있던 김정민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김정민이 석민을 쳐다보자 석민이 했던 말을 이어나갔다.

“왜 갑자기 조용히 있던 이계 사람들이 찾아와서 저희보고 노예를 내놓으라고 하는 걸까요?”

“그야...”

김정민은 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었지만 선뜻 대답하기가 좀 그랬다.

왜냐?

원인 제공은 자기를 포함한 전 세계 헌터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가 거슬렸나 보지.”

“거슬려요? 왜요?”

김정민은 사실 그대로 답해주었다.

“사실 아저씨 같은 헌터들이 저쪽 이계인 입장에선 침입자 같은 거거든. 허락도 없이 남의 땅에 찾아가서 몬스터를 잡고 아티팩트도 몰래 훔쳐오고 하니까 말이야.”

헌터들이 들쑤시고 다니는 게이트 안쪽 지역은 전부 주인 없는 땅이 아니었다.

제국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고, 몬스터 중에서도 영향력이 제법 큰 보스 몬스터의 경우 지역 관리자의 형태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런 곳에 허락 없이 출입하는 헌터들.

그들에겐 반가울 리 없는 것이다.

“뭐 그런 거지.”

석민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만약 아저씨 말대로라면 저희가 잘못한 게 맞는 거 같은데, 왜 이전까지 말이 없다가 이제 와서 난리를 치는 걸까요?”

게이트를 들쑤시고 다니는 헌터들.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계 마법사들이 찾아와 노예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일까?

“그야 모르지.”

그러자 근처에 있던 어느 여자 헌터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론 제국 사정이 좀 복잡하다고 들었어.”

그녀는 타국 헌터들과 팀을 이뤄 제국 영토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던 헌터였다.

그녀는 제국에 대해서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봤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말이다.

“어쩌면 공로를 세우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닐까?”

“공로요?”

헌터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석민이 나서서 질문을 던져보았다.

“무슨 공로요?”

졸지에 시선을 받게 된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차기 황제를 뽑는다고 들었거든. 그 황제가 되기 위해서 공로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지.”

그 말에 주변 헌터들은 맹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사실 모든 헌터가 그녀만큼 제국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걸 아무도 몰라요?”

오히려 그녀가 주변 헌터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되물었다.

“이 사람들 대체 어쩌려고 그래. 상위 랭커면 이 정도는 기본 상식 아니에요?”

그녀의 핀잔에 다른 헌터들이 볼멘소리를 냈다.

“게이트가 무슨 다 제국 땅인 줄 아시나. 다른 나라도 있고, 몬스터 관리자들이 지배하는 곳도 있는데. 굳이 그쪽 사정 몰라도 레이드 뛰는 데는 전혀 지장 없습니다.”

그녀의 핀잔에 반박하며 낸다는 소리가 제국 사정을 몰라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국에서 무슨 사정이 있든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어차피 남의 집, 남의 나라 이야기인데.

그것도 다른 세상에 있는.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말을 꺼낸 여자 헌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침묵했다.

밤이 깊어지자 천막 안에 위치하던 헌터들은 전부 잠자리에 들었다.

석민도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2시쯤 깨어났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깨게 되었는데, 근처에 자고 있는 아빠를 보니 혼자 화장실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막의 문을 젖히고 나와 보니 눈부신 조명등 아래 훈련된 군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바쁘네. 헌터들이 가장 편한 거 같아.’

화장실을 찾지 못한 석민이 근처 어두운 곳에서 대충 일을 보고 다시 천막 안으로향했다.

그러다 저를 막아서는 정체불명의 소녀와 마주치게 됐다.

놀란 석민의 눈과 입이 크게 떠졌다.

소녀는 무서운 표정으로 입술 위에 검지를 세웠다.

마치 소리를 지르면 죽이겠다는 무언의 협박 같았다.

석민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근처에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 군인들은 전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마법에 당한 것이다.

“왜 멀쩡한 거지?”

소녀가 석민에게 다가온 것은 당연히 의식을 잃어야할 상대가 멀쩡히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군. 고작 야만족주제에.”

소녀는 알 수 없는 언어를 구사하며 좌안의 동력을 끌어냈다.

그리곤 석민을 품평하듯 살펴보았다.

소녀가 놀랐다.

‘네거티브?’

석민 같은 체질은 극히 드물었다.

그 놀라움이 말로 표현되기도 전에 석민 뒤에 있던 공간이 일그러졌다.

악튜러스가 시공안을 개안했다.

이어 공간과 공간이 이어지자 악튜러스가 튀어나와 그 주먹으로 소녀를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

동시에 여기저기서 큰 소란이 일었다.

이제야 소리 없이 찾아온 이계 마법사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다.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렸다.

헌터들이 자고 있던 천막에서도 크게 소란이 일었다.

이때 석민은 악튜러스 주먹에 찌그러진 소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름 비위가 강하다고 자부했지만, 악튜러스 주먹에 맥없이 찌그러진 소녀를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소녀의 형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렸다.

악튜러스가 손으로 입을 막고 있던 석민에게 전음을 날리기도 전에, 그 앞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곧이어 황금빛 골렘이 튀어나오고 악튜러스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이를 가뿐히 피해주는 악튜러스가 뒤로 구른다.

황금빛 골렘은 두 팔에서 칼을 튀어나오게 했다.

곧 두 골렘이 거칠게 격돌하며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그 싸움에서 자유로운 석민은 말없이 죽은 소녀를 내려다봤다.

움푹 파인 바닥에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는 소녀를 말이다.

‘죽, 죽었어...’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녀가.

불사의 힘으로 되살아난다.

짓이겨진 살점이 다시 붙고 흘러내렸던 피가 그 살점 안으로 스며들어 흐르기 시작한다.

소녀는 금세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대신 바닥에 주저앉은 꼴사나운 모습이 되었다.

골렘 주먹에 맞아 정신이 어질어질한지 소녀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 자기를 내려다보던 소년을 보았다.

소녀는 표정을 구겼다.

< #39 철의 장막 > 끝

ⓒ 대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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