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철의 장막 >
그로부터 며칠 뒤.
CF 광고 촬영으로 바쁜 석민이 집에 돌아와 안에 있던 차태식을 불렀다.
“아빠, 근처 건물 사는 건 어떻게 됐어?”
그 말을 듣자 티비를 보고 있던 차태식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아이고 말도 마라. 사람들이 돈에 눈이 뒤집혀가지고... 세상에 무슨 재개발이 된다고. 하이고.”
“아빠 무슨 일 있었어?”
차태식이 그간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줬다.
“아 그래?”
어른들 이야기였지만 석민도 별다른 뾰족한 수가 안 보였다.
들어보니 있지도 않은 재개발을 들먹이면서 주변 건물주들이 건물들을 죄다 안 팔고 있단다.
심지어 건물 시세보다 5억이나 더 높게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럼 이 근처에 집 못 짓는 거야?”
“일단 놔두자. 어차피 재개발도 없으니까 그 바람 좀 꺼지면 아빠가 다시 말해보려고.”
돈은 있었지만 차태식은 그렇게 무리해가면서까지 집을 올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건 호구나 하는 짓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차태식의 핸드폰이 울렸다.
감미로운 발라드 송.
그가 핸드폰에 뜬 이름을 보고 살짝 눈가를 좁혔다.
그러다 전화를 받았다.
“어 정민 씨. 무슨 일이야?”
전화를 건 김정민은 다짜고짜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저기 무슨 전화 안 왔어요?”
“전화? 무슨 전화?”
“아, 아직 안 왔구나. 곧 헌터부에서 전화 올 거예요.”
“대체 무슨 전환데요?”
“그게... 아무래도 게이트에 일이 생긴 거 같아요. 지금 헌터부에서 일류 헌터들 전부 소집하고 난리가 났어요.”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그런데 들어보니까 게이트 안쪽 사람들 아시죠? 라시타 제국이라고 그쪽 사람들 말이에요.”
“대충 알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왜요? 쳐들어오기라도 했대요?”
“그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나 봐요. 아무튼 자세한 건 저보다 헌터부 관계자에게 듣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차태식은 감을 잡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목소리를 들어보니 작은 일은 분명 아니었다.
“일단 저도 좀 알아볼게요. 알았어요. 좀 있다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네, 그러세요.”
통화가 끝나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석민이 걱정스레 목소리를 냈다.
“아빠, 무슨 일이야? 게이트는 왜?”
차태식은 대답 없이 급히 티비 리모컨부터 찾았다.
티비를 켜고 채널을 돌린다.
뉴스 채널.
하지만 잠잠하다. 속보도, 특보도 없었고. 그저 조용하기만 한 뉴스 채널.
때마침 헌터부에서 전화가 왔다.
저장된 번호를 보니 헌터부 차관보의 전화였다.
“네 무슨 일이시죠?”
석민은 가만히 귀만 열어두었다.
일단 무슨 일인지 아는 게 중요했으니까.
“안녕하세요 태식 씨. 부득이하게 알려드릴 게 있어서요.”
“무슨 일인데요?”
“시간이 되시면 헌터부에 좀 와주셨으면 합니다. 전화로 얘기하기는 좀 그렇고. 저희가 직접 설명을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직접 보여드릴 것도 있고요. 지금 일류 헌터들은 죄다 소집하는 중이니까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차태식이 생각하듯 미간을 좁혔다.
“일단 알겠습니다. 가서 뵙죠.”
통화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석민이 목소리를 냈다.
“아빠 진짜 무슨 일 있어?”
“글쎄다. 아들, 아빠 잠깐 나갔다 올게.”
차태식은 급히 외출 준비를 했다.
그가 집을 나서자 석민은 걱정됐다.
아빠가 대체 무슨 일로 나서는 걸까?
집에 홀로 남은 석민은 급히 스카우터를 찾아 썼다.
그리곤 베타고를 불렀다.
“베타고.”
베타고 AI가 대답하자 석민은 아까 일과 관련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러자 베타고가 석민에게 준비된 영상들을 보여주었다.
그 영상들은 게이트 안에서 스카우터를 쓰고 있던 헌터들이 우연히 촬영한 것으로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베타고에 의해 수집된 기록이었다.
석민이 그 영상들을 살펴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평소처럼 몬스터 레이드를 끝내고 쉬고 있던 헌터 무리를 갑작스럽게 습격하는 이들이 있었다.
게이트 안에서 별의별 일이 다 있다지만 몬스터가 아닌 사람 무리에게 습격당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같은 헌터가 아니야. 이계인이네.’
그들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무리였다.
베타고는 부연 설명으로 저 무리가 라시타 제국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라시타 제국이라면 악튜러스랑 관련 있을 텐데.’
악튜러스의 회상과 석민이 알고 있던 지식에서.
라시타 제국의 초대 황제가 바로 과거 악튜러스 회상에서 나왔던 붉은 머리칼의 청년이었다.
‘그럼 저 사람들이 라시타 제국의 마법사들이라고?’
영상에 나온 헌터들이 습격한 마법사 무리에게 반격을 하려고 했을 때, 그들에게 드리워지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황금빛 거신.
바로 골렘이었다.
석민이 알고 있는 대전 골렘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골렘이 저항하려는 헌터들을 마안으로 훑어 내렸다.
동력이 가해지자 포위된 헌터들이 전의를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전 골렘과 함께하는 마법사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헌터들을 제압했고, 구속시켰다.
그리고 그 영상의 마지막에선 유난히 체구가 작아 보이는 한 마법사가 속박된 헌터들에게 다가오면서 그 후드를 벗어 내리는 장면이 있었다.
석민 또래의 어린 소녀였다.
그 소녀는 적발, 적안이었으며, 좌안(左眼)을 가로 지르는 신비로운 문양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꽤 무거웠다.
“베타고, 쟨 누구야?”
석민이 질문을 던져봤으나 베타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는 하나.
일급 기밀이기 때문이다.
베타고가 하지 못하는 그 대답은 헌터부 고위 공직자가 대신 해주고 있었다.
장관 주최로 열린 간부급 회의.
오늘 이 회의에 초대된 대한민국 상위 1% 헌터들을 상대로 차관보가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영상에 나온 쪼그만 소녀가 라시타 제국의 황족입니다. 좌안을 가로지르는 저 문양을 보시죠.”
그가 확대시킨 화면엔 소녀의 좌안을 가로지르는 다소 신비로운 문양이 잡혔다.
차관보가 레이저포인터 소녀의 좌안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불사의 각인이라고 하는데, 대대로 라시타 제국의 황족만이 새길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문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걸 새기면 불사의 가호를 받아 죽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리고 저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 이 역시 라시타 황족만이 가지는 특징입니다.”
차관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김정민 헌터가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차관보가 그를 쳐다보자 김정민이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아니 황족이고 나발이고 저 꼬마가 왜 헌터들을 인질로 잡았다는 겁니까?”
“그들은 저희에게 요구만 했지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희가 추측하기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다.
그날 석민은 이른 저녁 시간에 전화를 받게 됐다.
아빠 전화였다.
“아빠, 무슨 일이야? 언제 와?”
“아빠 일 생겨서 지금 게이트 안쪽으로 가야 하거든? 그래서 오늘 못 들어가겠다. 밥은 루리 누나한테 말해서 챙겨 먹어.”
“왜? 무슨 일인데?”
석민이 걱정스레 묻자 차태식은 두루뭉술하게 설명해줬다.
“그게 말이야. 게이트 안쪽에서 누가 쳐들어오고 있거든. 이걸 아빠가 가서 막아야 돼.”
“아빠가 왜?”
“아빠가 제일 강하니까 가서 막는 거야. 그리고 아빠 혼자 막는 게 아니라 김정민아저씨 알지? 그 아저씨랑 그때 봤던 헌터 아저씨들하고 다 같이 막는 거니까 아들은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그러다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야? 안 돼.”
석민이 단호하게 목소리를 냈으나 차태식은 막무가내였다.
“아무튼 아빠 며칠 간 못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어.”
통화가 끝났다.
석민은 불만과 걱정이 동시에 일었다.
석민이 아빠한테 다시 전화하기도 전에 통화음이 울렸다.
핸드폰을 보니 강준이었다.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
헌터부에서 대한민국 상위 헌터들을 불러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최상위 골렘 파이터에게도 도움을 청해왔다.
“어 석민아. 지금 헌터부에서 전화가 왔는데 우리보고 좀 도와달라고 하네. 이거 어떻게 할까? 좀 중요한 일인가 봐.”
여기에 대한 석민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거 무조건 한다고 하세요.”
물론 이 일은 차태식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차태식은 김정민 헌터와 함께 게이트 안쪽 동부관문에 가 있었다.
이계 마법사들이 한국에 넘어오려면 이 동부관문 게이트를 통과해야만 했고, 이를 막기 위해서 일류 헌터들이 모인 것이다.
물론 그들만 찾아오지 않았다.
신림에 주둔해 있던 군부대가 전부 움직여 동부관문 근처에 진을 쳤다.
동부관문까지는 포장도로가 나 있었기 때문에 신림 군부대에서 출발한 군병력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실 동부관문까지 이어진 포장도로는 이런 일을 대비하기 위함이 컸다.
속속히 들어오는 군부대 차량들을 뒤로 하고 김정민 헌터가 입을 열었다.
“아니 이계마법사들이 온다는데, 이거 우리끼리 막을 수 있나?”
“정민 씨, 우리가 못 막으면 대체 누가 막아요. 우리가 무조건 막아야지. 여기 뚫리면 서울까지 직행인데.”
“아까 영상 보니까 골렘도 있던데. 골렘은 좀...”
김정민이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전 골렘의 평가는 상대적으로 헌터들보다 위였다.
A급 대전 골렘이면 S급 헌터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게 헌터들이 가진 상식.
현재 찾아오고 있는 대전 골렘의 등급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거 일이 커서 대전 골렘도 불렀을 텐데. 우리나라에서 부를 대전 골렘이라고 해봤자...”
KA 청룡이야 국방부 소속이니 미리 와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어떤 전력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 또는 헌터부에서 취해야할 행동은 뻔했다.
“태식 씨, 혹시 석민이 안 와요?”
“무슨. 제 아들이 여길 왜 와요? 절대 안 오죠.”
그는 우스갯소리로 넘기려 했으나 뭔가 이상하게 불안했다.
김정민은 거의 확신하는 투로 말꼬리를 흐렸다.
“분명 헌터부에서 연락을 했을 텐데...”
“에이 무슨. 아니에요. 그리고 대전 골렘이면 저기 KA 청룡이 있잖아요.”
아까 상황 브리핑 때 헌터부 관계자들은 KA 청룡만 언급했었지 악튜러스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었다.
그래서 차태식은 이번 작전 때 제 아들 골렘이 쓰일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아니 절대 안 와요. 그리고 저한테 말도 안 했는데 뭘.”
“그런 건 태식 씨가 아니라 소속사한테 말했겠죠. KA 청룡이야 국가 소유고, 악튜러스야 소속사가 관리하잖아요.”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순간 걱정이 든 차태식이 급히 핸드폰을 꺼내려는 찰나.
저 멀리 눈에 익은 무빙아머리가 보였다.
“저기 아들 오네.”
김정민이 웃었다.
반면 차태식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아빠!”
무빙아머리에서 뛰어내린 제 아들이 달려와 안긴 것이다.
“아들, 여기 왜 왔어?”
“왜 왔긴. 나라에서 불러서 왔지.”
뒤따라오던 강준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국방부 관계자들에게 가로막혔다.
그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차태식이 아들에게 말을 붙였다.
“아들 여기 위험한데.”
“걱정 마. 내가 아빠 지키러 왔어.”
그 시각.
동부관문 게이트가 한눈에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그 모습을드러냈다.
은신 마법을 지우고 나타난 검은 로브의 마법사들.
그 수는 대략 스무 명.
그 뒤로는 황금빛 골렘이 보였다.
< #39 철의 장막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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