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JP >
환호하는 한국팬들과 침묵하는 대만팬들.
그 아래 사회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사회자가 큰 목소리로 승자를 호명해주었다.
“승자, 악튜러스!”
대다수는 일본팬들이었기에 전체적인 반응은 약간 뜨뜻미지근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충격은 사회자 못지않으리라.
석민이 선수 대기실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강준과 한성철이 반겼다.
“잘했다. 아주 잘했어!”
“대만쯤이야 가볍게 이겨줘야지. 진짜 잘했다.”
두 어른은 싱글벙글이다.
석민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쯤에서 찾아와야할 아줌마가 보이질 않았다.
‘아줌마가 안 오네?’
딱히 찾는 건 아니었지만, 찾아오리라 예상되던 그녀가 오질 않으니 약간 이상했다.
그러다 대기실 입구서 자기 아빠를 붙잡고 하하호호 하고 있던 그녀가 보이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런 석민을 멀리서 아니꼽게 보는 자가 있었으니.
개인 대기실에서 나와 악튜러스 경기를 지켜보던 일본의 대표 파이터, 나카무라 겐지였다.
나카무라 겐지는 이전에 홍진영이 보여줬던 모습 그대로를 재현시키며, 화기애애해진 한국 스텝들을 훔쳐보다가 조용히 사라져주었다.
겐지가 개인 대기실로 돌아오자 겐지 소속사 대표가 찾아와 말을 붙였다.
“어딜 갔다 온 거야? 좀 있으면 경기 시작하는데.”
“한국 꼬마 좀 보고 왔습니다.”
겐지는 상대가 제 소속사 대표이건 말건 건방진 투로 답했다.
원래 그런 성격이었기에 소속사 대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물었다.
“한국 꼬마? 아, 그 고물상 골렘?”
고물상 골렘은 여기서도 유명했다.
겐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신경 좀 써야겠어요. 대만 골렘을 생각보다 쉽게 잡아버리네요.”
겐지가 걱정하는 모습을 본 대표가 씩 웃는다.
“무슨 걱정이야. JP도 그 정도는 하잖아.”
만약 JP가 타이페이 골렘과 맞붙었다면 악튜러스와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경기를보였을 것이다.
JP는 일본 기술력의 최정점이자 일본 최고의 골렘이었으니까.
특히나 미쓰비시 재벌을 포함한 일본 사회 각계에서 전심전력으로 밀어주고 있는골렘이었다.
그런 골렘이 본선 무대도 아닌 예선 무대에서 패배한다는 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안 되는 일.
겐지는 굳은 표정을 살짝 풀어내며 웃는다.
“물론 저도 그 정도는 하죠. 그런데 많이 거슬리네요. 짜증나게.”
대표가 겐지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다독여주었다.
“그딴 깡통 골렘 신경 쓰지 마. 여기가 경기장이라 네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죠.”
둘의 대화가 한창일 때 겐지의 코치가 다짜고짜 들이닥쳤다.
“야, 경기 봤어?”
코치 얼굴이 제법 심각하다.
대표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대체 무슨 일인데?”
“아니 대표님, 앞에 경기 안 보셨어요? 한국 골렘이요. 대만 골렘을 그냥 찢어버렸잖아요.”
“그랬어?”
대표의 표정이 잠시 굳는다.
사실 그는 악튜러스 경기를 보지 못했다.
아마 봤다면 겐지의 태도를 처음부터 이해했을 지도 모를 일.
“한국 골렘이 대만 골렘을 찢었다고?”
“네, 정말 안 보셨어요?”
“안 봤지. 그걸 왜 봐? 한국 골렘인데. 안 그래?”
대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고개를 내저은 코치가 그 뒤에 있던 겐지를 찾는다.
“야, 넌 봤지?”
“예 봤죠. 좀 거슬리더라고요.”
“두 공간이 어긋나는 거 봤어? 그거 동력이다.”
대표란 작자는 사실 골렘 파이트에 있어서 전문가가 아닌 비지니스 맨에 가까웠다.
대표는 둘의 대화에 끼지 않고 귀만 열어두었다.
일단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봐야만 했으니까.
그런 대표를 병풍으로 하여 겐지와 코치가 서로 마주봤다.
코치가 가장 먼저 걱정을 내비쳤다.
“JP가 그 동력에 버틸지 모르겠다. 일단 타이페이 골렘은 못 버텼어.”
한 나라에서 챔피언을 먹던 골렘이 동력 하나에 무너져 내렸다.
이는 절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검지로 제 입술을 긁던 겐지가 무서운 얼굴로 그 입을 열었다.
“JP라면 아마 버틸 겁니다. 예전에 프랑스 골렘이 그런 능력을 쓴 걸 봤어요.”
“내가 확인해보니까 타이페이 골렘이 오리하르콘으로 된 장갑을 쓰고 있던데. 그게 찢겼어.”
“오리하르콘이요?”
겐지가 대회에 참가한 모든 골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코치의 말을 듣자 겐지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그게 오리하르콘인데 찢겼다고요?”
“그래, 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 아니냐? 지금 보면 JP도 위험해. 드래곤 스킨이 못 버틸 수 있어.”
“설마요. JP의 드래곤 스킨이 특별한 건 코치님도 잘 아시잖아요. 버틸 겁니다. 오리하르콘이랑 달라요.”
코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와 생각이 상반된 것이다.
“아 좀 그런데. 야, 이번에 구한 아다만틴 장갑으로 전부 교체할까?”
아다만틴으로 주조된 장갑은 아주 특별했다.
절대 변형 불가능한 금속.
“아다만틴 장갑이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JP의 가장 큰 장점은 저중량 장갑에 의한 고기동성이다.
겐지는 그 즉시 부정의 뜻을 내비쳤다.
“그 마안 때문에 JP의 강점을 버릴 순 없습니다. 그냥 놔두세요.”
아다만틴으로 주조된 장갑이라면 공간 절단에 충분히 버티겠지만 문제는 그 무게였다.
가장 높은 방어력을 가진 만큼 그 무게 역시 살인적이라 고기동성을 추구하는 JP와는 전혀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겐지가 부정의 뜻을 내비친 것이다.
“그러다 대만 골렘 꼴 나면?”
코치의 걱정에 겐지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들먹였다.
자국 기술력은 세계 최고.
그리고 그 중심엔 JP가 있다고 확신하는 모습이다.
“출력은 저희가 더 위고, 상대가 동력을 사용하면 오러 형태의 보호막을 전신에 씌우면 됩니다. 마나 보호막이요. 아니면 어긋나는 공간에 다중 쉴드를 세우던가. 그러면 다중 쉴드가 버틸 겁니다.”
“그냥 아다만틴 장갑으로 전부 교체하는 건 어때? 나는 그게 제일 낫다고 보는데.”
“그렇게 하면 저랑 스타일이 안 맞아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 세계 최고라는 일본 자존심이 짓밟힌다고요. 드래곤 스킨 형태의 장갑은 제가 지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고수할 겁니다.”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아다만틴 장갑으로 바꾸지 그래?”
“고집 아닙니다. 일본 기술력은 세계 최고입니다. 드래곤 스킨을 믿으세요 코치님.”
JP는 일본 대표 골렘답게 지원이 빵빵해서 사실 미국의 막시무스처럼 전신 장갑을 아다만틴으로 바꾸는 게 전혀 불가능하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드래곤 스킨 형태의 장갑을 고수하는 건 겐지의 고집 때문이다.
코치는 겐지의 고집이 그다지 내키진 않았지만, 겐지 발언이 셌기 때문에 제 입장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저대로 나가면 그냥 찢길 거 같은데. 새끼가 고집은 있어가지고.’
“그래, 드래곤 스킨을 고수한다치자. 그건 그렇고 한국 골렘이 A급 세트 아티팩트를 거의 다 모았다는데 이건 어떻게 할 거야?”
악튜러스의 동력도 문제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악튜러스의 다른 아티팩트도 충분히 문제였다.
고심하던 겐지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제리코 쪽에 루슬렉 쌍대검 있죠? 그거 빌려오는 거 될까요?”
“루슬렉 쌍대검?”
“그거 잠깐 못 빌릴까요? 한국 골렘하고 붙을 때만 잠깐 쓰면 되는데.”
A급 세트 아티팩트에 대항할 수 있는 건 같은 세트 아티팩트 뿐이다.
나름 괜찮은 발상이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코치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긴 한데, 거기서 빌려주려고 할까?”
루슬렉 쌍대검.
칠죄종과 같은 A급 세트 아티팩트로 총 두 자루의 대검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이 두 자루의 세트 아티팩트가 한 명의 소유자 밑에 있는 게 아니라, 두 소유주 밑에 있다는 점이다.
겐지의 소속사인 미쓰비시 매니지먼트와 제리코 코퍼레이션.
이 두 곳에서 각각 루슬렉 쌍대검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차피 서로 안 팔 거 뻔히 아는데, 필요할 때 빌리는 게 낫죠. 안 그래요?”
“네 생각이야 나야 충분히 공감가지. 그런데 문제는 제리코에서 루슬렉 쌍대검을빌려주느냐 마느냐겠지. 내 생각인데 안 빌려줄 거 같은데?”
이때 조용하던 대표가 나섰다.
“그거야 말을 꺼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지.”
대표가 알고 있기엔 루슬렉 쌍대검은 아다만틴이라는 금속으로 주조 되어 변형 자체가 불가능했다.
즉, 파손 우려가 없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가 없다면 잠깐 빌려오는 거야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대신 그쪽이 필요할 때 우리도 빌려주면 되고. 이런 거야 우리가 감안해야하는 거니까.”
“그런데 진짜 빌려줄까요?”
코치는 계속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대표도 사실 긴가민가했지만, 지금 사정을 보니 루슬렉 쌍대검이 꼭 필요해보였다.
“그거 꼭 필요한 거야?”
만약 아무것도 아닌 상대였다면 겐지가 상대 선수를 염탐하기 위해 공용 선수 대기실까지 찾아가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네, 필요할 거 같아요. 무조건 빌려오세요.”
“그래 알았다. 그럼 내가 한 번 말해볼게.”
대표가 떠나가자 겐지는 아니꼬운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아 기분 잡치네. 좆도 아닌 골렘 하나 잡으려고 이 난리를 치나.”
그러면서 스파링 때 자신을 농락했던 독일 여아가 생각났다.
꼴에 귀족이랍시고 시건방지게 까불던 여자아이.
겐지의 표정이 좋질 않았다.
‘하여간 애새끼들이 문제라니까. 대체 애새끼들이 왜 깝치고 다니는 거야.’
그날 모든 경기가 끝나자 겐지는 또 다시 기자들 앞에 섰다.
“겐지 선수, 오늘 경기에서 중국의 리챠오 선수를 잡게 되셨는데. 그 소감 부탁드립니다.”
자국 기자들을 포함한 각 나라 외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겐지는 그 밑도 끝도 없는자신감을 내비쳐주었다.
“뭐 너무 뻔했던 경기라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런 겐지에게 누군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한국 골렘이 갑자기 치고 나오던데,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네 맞습니다. 악튜러스에 대한 겐지 선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아 그 고물상 골렘이요? 꼬맹이랑 같이하는.”
겐지는 그저 비웃기만 했다.
기자들은 겐지의 다음 말만 기달렸으나, 겐지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그 질문은 그냥 넘기겠습니다. 같잖아서요.”
그런 태도에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렇게 대놓고 무시할 정도는 아닌데.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그 반응은 악튜러스를 위협적인 상대로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오늘 대만 골렘이 허무하게 패했습니다.”
“그 경기는 저도 봤습니다.”
“그런데도 악튜러스를 JP의 상대로 보지 않는 겁니까?”
“JP도 그 정도는 합니다. 설마 한국 골렘이 하는 걸 JP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일본 골렘은 세계 최고입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겐지가 떠나가자 기자들이 우르르 겐지 뒤로 따라붙었다.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강준이 투덜거렸다.
강준에겐 어느샌가 포켓이 함께 하고 있었다.
“쟨 또 무슨 자신감이야? 대만처럼 콱 찢겨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마찬가지로 까리뽕과 함께하던 석민이 멀리서 인터뷰하던 겐지를 보며 묘한 미소를 띠웠다.
석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 웃고 있었다.
< #38 JP > 끝
ⓒ 대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