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지역 예선 >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석민은 KRG 관계자들이 호출을 하자 경기장 바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에 맞춰 방정맞은 보라색 혓바닥이 따라붙었다.
석민은 까리뽕에게 말을 붙였다.
“까리뽕, 여행은 어땠어?”
“뭐 무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저 골렘이 얼마나 악독한 골렘인지 알게됐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니겠죠.”
“악튜러스가 악독하게 굴었어?”
“착하지는 않습니다.”
“그래? 평소엔 조용히 있어서 전혀 몰랐네.”
“근본부터가 나쁜 골렘입니다.”
그러다 무슨 할 말이 생겼는지 까리뽕이 석민의 귓가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이건 저희끼리의 비밀입니다만.”
석민은 까리뽕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말을 끝낸 까리뽕이 석민과 거리를 두었다.
“뭐 그렇습니다.”
“그래?”
까리뽕은 악튜러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고대서에 나온 그대로의 내용이었다.
지금까진 악튜러스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했던 말들을 이제와 해준 것이다.
석민이 받은 충격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무것도 모른 상태였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악튜러스가 어떤 골렘인지 대강 알게 되었으니까.
“뭐 저도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수호자가 나서서 처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왕국과 함께 멸망했지요.”
“수호자?”
“스피카라고, 고대에 존재했다는 아주 유명한 기사입니다. 제국의 수호자였지요.”
“애매하다.”
“뭐가 말입니까?”
“그런 건 표현하기 따라 다른 것 같아.”
“으음... 그런 거라면 저도 공감합니다. 저 역시 누구에겐 악랄한 리치였겠지만, 또 누군가에겐 따스한 마법사였겠지요.”
“까리뽕 네가?”
“제가 평생 악랄한 짓만 일삼았던 건 아닙니다. 저도 아주 가끔씩, 정말 드물게 착한 짓을 했었지요.”
그쯤에서 대화를 끊어낸 석민은 자신을 호출한 KRG 관계자들을 보기 위해 경기장 안쪽 건물로 들어갔다.
도착해보니 강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석민을 불렀다.
근래엔 보기 뜸해진 강준이었다.
“석민아 왔냐?”
“오셨어요?”
“그래, 소식 듣고 부랴부랴 귀국했다.”
근래에 보지 못했던 것은 강준이 여행을 갔기 때문이다.
“악튜러스랑은 어떻게 됐어?”
강준만이 아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방금 대화해봤는데 별 거 없었어요. 잘 다녀왔데요.”
지역 예선이 코앞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돌아와서 망정이었지, 만약 조금이라도 더 늦었다면 이번에 오키나와에서 열릴 지역 예선에 참가도 못할 뻔했다.
“이러다 또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강준이 걱정스레 물었다.
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그리고 악튜러스가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사라진 것도 아니에요. 계속 말했듯이 저한테 분명히 말하고 떠났어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악튜러스가 사라진 한 달 남짓한 시간은 거의 혼돈이었다.
같이 있던 한성철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자, 지난 일은 잊자고. 당장 오키나와로 가야 돼.”
올해 아시아 지역 예선은 오키나와 경기장에서 열리게 된다.
리그전 형식이며, 그 전적에 따라 동아시아 랭킹이 정해지게 된다.
“석민아.”
한성철이 부르자 석민이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번에도 자신 있지?”
“물론이죠.”
* * *
오키나와 나하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석민은 처음으로 퍼스트 클래스에 타게 됐다.
비행시간이 짧기 때문에 자지 않고 있던 한미라가 옆 좌석에 있던 석민을 불러 말을 붙였다.
“저번엔 대만에서 열린 거 알고 있니?”
“네 당연히 알고 있죠. 저 모르는 거 없어요.”
“그땐 홍진영이랑 같이 갔었는데...”
한미라는 작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홍진영과 같이 대만까지 갔었는데, 성적이 좋지 못했다.
지금 악튜러스와 달리 당시 레드 데빌의 개체 등급은 BBB 등급.
A- 등급이 안 되었기 때문에 월드 그랑프리 출전을 위해선 대만 우승이 절실하던상황이었다.
하지만 홍진영의 성적은 예상했던 대로 저조했고, 그렇게 월드 그랑프리 진출이 좌절됐다.
그게 불과 1년 전 일이다.
석민과 한 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한미라의 걱정은 올해 월드 그랑프리는 어떻게 나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서도.
“이번에는 무조건 출전하니까 마음이 놓이기는 한데...”
마음의 여유 때문이었을까?
한미라가 석민을 보며 설핏 웃었다.
‘잘하겠지 뭐. 홍진영보단 나으니까.’
그런 한미라에게 석민이 물음을 던졌다.
“아줌마, 혹시 오키나와에 가보셨어요?”
“나?”
“네.”
“아니. 나도 이번이 처음이야. 예전에 가볼까 하다가 일이 바빠서 못 갔거든.”
“저 해외로 나온 거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 그래?”
“대만은 어땠어요?”
석민은 외국에 대한 동경이 대단한 아이였다.
가본 적이 없으니 당연할 수밖에.
“대만? 대만이야 뭐... 그냥 한국이랑 비슷비슷해. 약간 이국적이긴 한데 그것 외엔 잘 모르겠다. 그땐 대회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었거든. 대회 끝나고도 기분이 좀 그래서 둘러볼 생각은 못 했어.”
그렇게 오키나와에 도착한 석민과 KRG 관계자들은 며칠 뒤에 있을 예선 경기를 준비하느라 바빠졌다.
석민은 제 숙소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 다음 이번 오키나와 예선에 출전한 선수 목록을 쭉 훑어봤다.
동아시아 모든 나라에서 각국을 대표하는 골렘들은 거의 다 출전했다.
다만 사정이 있는 선수들은 출전하지 않았는데, 북한의 리명국 선수가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이 아저씨는 또 불참하네. 저번 대만 경기도 불참하더니.’
석민은 리명국과 관련된 뉴스 기사들을 읽어 내렸다.
리명국이 이번 오키나와 예선에도 불참한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이유야 뻔했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
하지만 월드 그랑프리는 꼭 출전한단다.
그 밖에 출전하지 않는 골렘 목록들을 살펴보니 스피카도 있었다.
놀랍게도 스피카의 불참 이유는 저조한 성적 때문이었다.
자국 내에서 받은 성적들이 동아시아 예선에 나올 정도가 아니라는 것.
‘파이터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해도 경기장에 안 나가는 골렘인데 뭘.’
스피카의 성적이 안 좋다는 것은 패배한 경기들 중 태반이 기권패라는 것.
출전 자체를 안 하니 당연히 패배가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저조한 성적으로 이어졌다.
다만 스피카의 개체 등급은 이미 A- 등급을 넘겼고, 월드 그랑프리 출전 자체는 문제가 없단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골렘이야.’
석민은 스피카라는 골렘과도 만나보고 싶어 했다.
기회가 된다면 말이다.
석민은 핸드폰을 통해 기사들을 더 살펴봤다.
이번 오키나와 예선에 나오지 않는 골렘 중에는 동아시아 랭킹 1위인 동방불패도끼어있었다.
동방불패의 불참 이유.
기사엔 기술적인 문제라 적혀 있었지만 석민은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분명 월드 그랑프리 우승을 노리는 거겠지? 동방불패야 지역 예선은 같잖아 보일 테니까.’
동방불패는 이미 동아시아에서 랭킹 1위를 먹은 골렘이었다.
그러니 동아시아 순위 결정전에 굳이 나올 필요도 없었고, 컨디션 조절, 골렘 상태 등을 고려해서 나오지 않을 이유야 충분했다.
동방불패와 만나고 싶었던 석민만 아쉽게 됐다.
‘중국 1등이랑 한 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그 외에 나머지 골렘들은 전부 오키나와에 찾아왔다.
특히나 JP는 출전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자신의 홈그라운드니 출전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
석민은 겐지 선수의 인터뷰 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보았다.
환호성이 넘치는 경기장 안.
슈트 차림의 겐지 선수가 나서며 관중들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이후 사회자가 건넨 마이크를 붙잡은 겐지 선수가 제 팔뚝에 박힌 욱일승천기를 툭툭 치더니 이내 말아 쥔 주먹을 위로 뻗히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일본!”
그 외침에 경기장에서 환호하던 일본 팬들이 일제히 뒷말을 이었다.
“만세!”
석민이 알고 있는 겐지 선수는 자국 내에서도 아주 유명한 극우 단체 회원이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세계 2차 대전 당시 아주 유명한 전범이었고, 그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전부 극우 단체 회원이었다.
JP의 후원 기업조차 미쓰비시 중공업.
그야 말로 말이 필요 없는 극우 그 자체였다.
그러니 다케시마 망언 같은 것도 거리낌 없이 내뱉는 것이다.
‘이런 아저씨는 참교육을 시켜야 되는데.’
석민은 한국 사람이니 당연히 욱일승천기를 대놓고 자랑하는 겐지 선수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때마침 석민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들!”
석민이 반색하며 고개를 돌리니, 석민과 마찬가지로 바캉스 차림을 한 차태식이 서 있었다.
차태식은 월드 그랑프리가 끝날 때까지 아들 곁에 남아 있기로 했다.
정확히는 아들의 보디가드 역을 자처한 것이다.
“뭐해, 아빠랑 놀러 가야지.”
“놀러? 나 안 될 건데. 모레 경기라서 어디 나가면 안 돼.”
석민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이 아빠에겐 남의 일.
“그런 게 어딨어. 아빠랑 놀러가자. 오키나와까지 왔는데 그냥 갈 거야?”
석민의 고민은 오래지 않았다.
“아빠, 어디로 갈 거야?”
“아들은 그냥 따라오면 돼.”
“진짜?”
때마침 부하직원들과 함께 리조트 안을 거닐고 있던 한미라가 방에서 아들과 함께 나오는 차태식을 보게 됐다.
그녀는 모레 있을 예선으로 인해 아주 바쁜 상태였다.
화들짝 놀란 한미라가 차태식에게 뛰어오며 말을 붙였다.
“아버님!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저 밖에 나갑니다.”
“예?”
같이 있던 석민이 해맑게 웃었다.
“저도 아빠 따라 나갔다 올게요.”
“아니 어딜 가려고. 안 돼. 모레 경기잖아. 그러다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차태식이 나섰다.
“무슨 걱정입니까? 이렇게 S급 헌터가 옆에 붙어 있는데.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차태식은 부탁조가 아닌 통보를 했다.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려야할 KRG 대표.
그녀는 뒤에 서 있는 직원들과 멀어져가는 두 부자를 번갈아보다가 이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두 부자에게 따라붙었다.
“안 돼요. 이거 저도 따라가야 돼요. 지금 경기가 코앞인데 대체 어딜 가시겠다는거예요.”
한미라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이자 앞서가던 차태식이 우려를 표했다.
“아마 못 따라오실 텐데요?”
“그런 게 어딨어요. 제 자리 하나 있겠죠.”
말을 마치매 차태식은 리조트 앞에 주차되어 있던 바이크 앞에 섰다.
“이거 2인승이라. 세 명이 타면 위험하거든요. 아쉽게 됐습니다 대표님.”
차태식은 넋을 잃고 서 있던 대표에게 작별인사를 남기고 안전 헬멧을 쓴 아들과 함께 도로 위를 달렸다.
자리에 홀로 남게 된 한미라가 인상을 썼다.
‘아니 무슨 바이크야. 저러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차태식은 아들을 태우고 곧장 오키나와에서 가장 크다는 아쿠아리움으로 향했다.
“아들, 여기에 엄청 큰 수족관이 있대.”
“아 진짜? 그럼 그거 보러가는 거야?”
“거기서 물고기나 보자. 엄청 큰 상어 있단다.”
“진짜? 얼마나 큰데?”
“엄청 크대.”
한국 드라마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는 츄라우미 수족관에 도착한 두 부자는 좋은 시간을 보냈다.
수족관에서 나오는 길.
석민과 차태식은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긴 계단을 오르다 중턱 부분에서 취재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는 걸 보게 됐다.
차태식보다 석민이 먼저 알아보았다.
“아빠, 저기 겐지 선수다.”
“뭐? 누구?”
“겐지 선수. 일본 골렘 파이터.”
“아 그래?”
차태식이 고개를 들어 위쪽을 보자, 기자들에게 둘러 싸여 인터뷰를 하고 있던 다부진 체격의 남자 하나가 보였다.
격투기 선수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피부는 햇볕에 많이 탄 듯 새카맣게 그을렸다.
건강미 물씬 풍기는 그가 바로 JP의 파이터 겐지였다.
이때 겐지는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받고 있었다.
“이번 예선전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할 생각인지,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석민이 알고 있는 것처럼 겐지 역시 몇몇 골렘 파이터가 이번 오키나와 예선에 불참할 걸 모르지 않았다.
현재 JP의 동아시아 랭킹은 2위.
1위인 리준이 빠졌으니 우승이야 따논 당상이라고 생각한 겐지가 다소 건방진 투로 입을 열었다.
“뭐, 가볍게 일등을 해줄 생각입니다.”
“중국의 왕웨이 선수가 단단히 벼르고 있던데요?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굴 벼르고 있다고요? 새끼가 주제를 알아야지.”
겐지는 꽉 쥔 주먹을 기자들에게 내보이며 자신감을 드러내주었다.
“아 이번에 한국에서 새로운 챔피언이 나왔다는데,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이 이어지자 겐지는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겐지는 손을 내저으며 그 질문을 피했다.
“그 질문은 안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다른 질문은 없습니까?”
전부 일본말로 진행됐으나, 포켓을 가진 두 부자에겐 예외였다.
“저 새끼 존나 건방지네?”
차태식이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들이 얼마나 잘하는데. 저 새끼가 진짜 개처발릴라고.”
가만히 듣고 있던 석민도 겐지 선수의 건방짐에 목소리를 냈다.
“걱정 마 아빠. 이 아들이 며칠 뒤에 참교육 시켜줄 생각이거든.”
< #37 지역 예선 > 끝
ⓒ 대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