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형제들 사이에 싸움을 일으키는 자 >
그 당시 까리뽕은 그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해 생긴 것 그대로 개돼지라 불렀었다.
그리고 개돼지라 불린 왕고블린, ‘불스아이’는 항상 까르니아와 마주칠 때면 머릿속에 점 하나가 생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무슨 점이냐면, 평상시엔 아무렇지도 않다가 까르니아만 보면 온 신경이 집중되는 점이라고 할까?
진짜 화가 나고 진짜 미치도록 답답한데, 그런 감정을 풀어낼 수 없을 때 생기는 점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만큼 숱한 갈굼을 당했다는 소리다.
아무튼 까르니아로부터 해방을 갈망하던 불스아이는 까르니아 실종 이후 광명을 찾게 됐다.
그날 창가에 스미는 햇빛이 왜 그리도 따스하던지.
그의 부하들이 말하길, 까르니아가 사라진 뒤 그의 표정은 한없이 밝아졌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갈굼은 대물림된다고. 불스아이는 제가 당했던 그 모든 것들을 제 부하들에게 풀어내며 그 악명을 높여갔다.
과거 까리뽕의 전성기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가 이뤄낸 악명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 까르니아가 다시 돌아왔다.
주인을 잃고 해방감을 만끽하던 개돼지에게 말이다.
“그 개돼지가 아닌가? 짜식, 그새 몰라보게 더 뚱뚱해졌구나.”
까리뽕이 아는 채를 했음에도 관심을 끈 악튜러스는 주변에서 다가오는 무리들을경계했다.
전부 불스아이의 유흥을 위해 대기 중이던 검투사 노예들이었다.
악튜러스가 다가오는 무리에게 힘을 보이기 전.
까리뽕이 불스아이를 찾아가며 상황을 반전시켰다.
“네 이놈! 네 주인이 납셨는데, 거기서 뭐하니?”
소름 돋는 그놈 목소리.
악튜러스를 짓뭉갤 생각에 알게 모르게 웃고 있던 불스아이는 거의 본능처럼 몸을 떨었다.
불스아이의 시선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그는 곧 허공에 떠서 저를 향해 말을 걸어오던 보라색 혓바닥을 보았다.
저절로 침이 넘어간다.
“그새 날 잊은 건 아니겠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
불스아이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뒷다리 고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날 조짐이 보였다.
불스아이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표정이 굳고 오물거리던 턱도 멈췄다.
설마....
설마 그는 아니겠지?
하지만 그놈 목소리는 가차 없이 그 기대를 짓밟아버렸다.
“니놈 주인이 왔다.”
“뉘, 뉘신지?”
“날 모르겠니?”
“뉘신지 물었습니다만...”
“자동.”
불스아이는 자동이란 말에 숨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 말을 또 듣게 될 줄이야.
남이 들었을 땐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한때 개돼지라 불리며 학대를 받았던 불스아이에겐 제법 의미 있는 단어였다.
까리뽕은 다른 말없이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해주었다.
“자동.”
어쩔 줄 몰라 하는 불스아이.
그러나 까리뽕은 적당히란 게 없었다.
“자동!”
이제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입술을 덜덜 떠는 불스아이는 제 의자에서 벗어나 우당탕탕 넘어지더니 꼴사납게뒷걸음질을 쳤다.
“어, 어떻게! 분명 죽었을 텐데!”
“야이놈아! 이 몸은 불사신이다. 절대 안 죽지. 특히나 너 같은 개돼지를 놔두고 먼저 가면 쓰냐?”
“당신은 죽, 죽었어!”
“자동!”
시장의 꼴사나운 모습에 부하들이 잔뜩 당황했다.
저 악마가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줄이야.
잠시 후 불스아이는 본능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에 머리를 박고 뒷짐을 지었다.
그런 불스아이를 두고 까리뽕이 목소리를 냈다.
“내가 없는 사이 아주 살판이 났구나. 그래, 내가 없을 때가 좋았지?”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주인님이 없는 걸 반겼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던데? 아까 나보고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어렸을 적 형이나 부모에게 학대를 받았던 아이들은, 그 학대 정도가 크면 클수록나중에 컸을 때도 쉽게 저항하지 못하는 법이다.
불스아이는 딱 그런 경우였다.
까리봉의 전성기 시절.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심하게 괴롭혔기에 불스아이는 몇 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까르니아가 기억하는 그저 무식한 개돼지로만 남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까리뽕의 그림자조차 못 밟는 것이다.
열중쉬어 자세로 머리를 박고 있는 불스아이에게 다가온 악튜러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악튜러스는 그에게 사금 자루를 던져주었다.
불스아이의 시선이 돌아가자 악튜러스는 그에게 묻고 싶은 걸 물었다.
‘카사블랑카로 향하는 길을 알려준다면 이 자루는 그대에게 주겠다.’
어차피 사금이야 원한다면 마음껏 만들 수 있었다.
보통이라면 입을 안 열겠지만, 찾아온 옛 주인을 쫓아 보내기 위해 불스아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카사블랑카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 악튜러스는 까리뽕과 함께 다시 길을 나섰다.
배웅까지 해주는 시장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기던 악튜러스가 같이하던 까리뽕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발이 넓군.’
“이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닙죠. 과거엔 저런 부하쯤이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많이 부리고 다녔습니다.”
그 정도 선에서 대화를 끊어낸 악튜러스는 시장이 내준 정보를 토대로 결절이란 공간 안에 위치해 있는 고대 도시를 찾아 나서게 됐다.
팡치앙 중립시를 벗어나 결절까지 찾아가는데만 5일.
그 5일이 지나서야 악튜러스는 공간 균열로 치부되는 결절에 닿게 됐다.
찾아간 결절은 초목이 우거진 숲의 끝에 위치해 있었다.
‘아소스가 남긴 도흔이로군.’
탑처럼 생긴 이 세상은 제로스라 불리며, 이 제로스엔 신이라 불리는 대장장이가 한 명 존재했다.
그 대장장이는 오직 신만이 다룰 수 있는 재료로 여러 검자루 만들어냈는데, 그 중 하나가 공간을 베는 검, 아소스였다.
아소스는 신이 다루는 검으로, 이를 만들어낸 대장장이조차 다루는 게 불가능했는데, 대장장이가 그 검을 만들고 손에서 놓았을 때 제 스스로 공간을 베고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그 뒤 주인을 잃고 공간을 표류하게 된 아소스는 이곳저곳에 공간과 공간을 잇는 결절이라는 것을 만들게 됐다.
지금 악튜러스가 찾아간 결절도 아소스가 세상을 베며 남긴 여러 상처들 중 하나였다.
‘시공안의 도움을 받는다면 아소스를 찾아 나설 수 있겠지만, 지금 할 일은 아니지.’
찾아간 결절에 들어서기 전, 악튜러스는 까리뽕을 불러냈다.
‘어리석은 리치여. 결절 안에서 헤매기 싫다면 나와 붙어 있는 게 좋을 것이다.’
전혀 다른 두 공간이 이어지는 곳은 생각보다 위험했다.
틈새만 넘어가면 곧바로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고, 경우에 따라선 동시간대에 들어선 이와 전혀 다른 세계에 놓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염려한 악튜러스가 말을 꺼내자 까리뽕은 그 불편한 속내를 숨기며 악튜러스에게 바짝 붙었다.
‘아니 내가 애새끼도 아니고 그걸 모를까? 멸망을 부르는 왕이라지만 나를 너무 무시하는군.’
둘이 결절을 넘어서자 주변 환경이 바로 바뀌었다.
강렬한 햇빛 아래 넓게 펼쳐진 사막.
끝없는 모래사막이 펼쳐지는 곳에 악튜러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제로스 안 어딘가겠지.’
사실 결절이란 것은 다르게 보면 게이트와 같았다.
여기서 결절과 게이트의 차이점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느냐 안 알려졌느냐 정도의 차이였다.
주변 지형을 둘러보던 악튜러스는 저기 높게 치솟은 피라미드 하나를 발견하게 됐다.
그리고 그 아래 펼쳐진 도시 또한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 카사블랑카인가?’
마찬가지로 거대 피라미드를 알아본 까리뽕이 목소리를 냈다.
“고대서에 나온 카사블랑카 그 자체로군요. 저런 구조물은 제로스에서도 정말로 보기 드뭅니다. 만약 별 일이 없었다면 저 안에 황금의 효교단이 맡겨놓은 칠죄종 아티팩트가 있을 겁니다.”
‘칠죄악을 다 모으게 되면 전설에 나온 용왕의 힘을 얻게 되겠군. 천신에 비견될 힘이로다.’
아직 세트 아티팩트를 다 모은 건 아니었지만 악튜러스는 그 시점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나섰으니 세트 아티팩트를 모으는 거야 시간문제.
이쯤 되자 까리뽕도 슬슬 운을 뗐다.
“계속 감추시는 것 같은데, 용왕의 힘을 가지게 되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왕의 계보를 잇는 자가 누구의 명령을 받을 순 없을 터.”
‘아이와 나는 친구다. 우린 그 누구에게도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당신의 주인이지요. 당신이 골렘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 알고 있군.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그 무엇도 없다.’
“그럼 아이는 어쩌시려고?”
‘내 길은.’
악튜러스는 결연에 찬 눈빛을 지어보였다.
‘이미 정해져 있다.’
악튜러스는 까리뽕과 함께 카사블랑카로 향했다.
그로부터 10일 뒤.
악튜러스는 칠죄종 세트 중 가장 핵심이라 불리는 ‘간악한 계획을 꾸미는 마음’을제외한 모든 세트 아티팩트를 모았다.
고물상에서 하염없이 악튜러스만 기다리던 석민은 고물상 뒷마당에서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자 허겁지겁 뒷마당으로 향했다.
이어 열리는 포탈.
그 포탈을 열고 악튜러스가 돌아왔다.
“악튜러스!”
놀란 석민이 악튜러스를 부르자 포탈을 열고 나온 악튜러스가 아이를 내려다보며입을 열었다.
‘약속보다 일찍 돌아온 것 같군. 생각보다 수월한 여정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없었던 것 같군.’
석민은 악튜러스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은 빛깔의 검과 머리 근처에서 떠다니고 있는 검은 보라색 눈깔을 보게 됐다.
‘형제들 사이에 싸움을 일으키는 자’라 불리는 아다만틴 롱소드와 ‘거짓말을 퍼뜨리는 거짓 증인’이라 불리는 마나 증폭 마력원이었다.
“설마 칠죄종 세트를 전부 모아온 거야?”
석민이 기대에 차 물었지만 악튜러스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세트 아티팩트는 악튜러스도 구할 길이 없었다.
그건 오직 운이 따라줘야만 구할 수 있었으니까.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구해왔다.’
“하나? 나머지 하나는 뭔데?”
‘간악한 마음이다. 그 아티팩트는 아쉽게도 황금 산맥에 있다고 하더군. 환상 고블린을 만나지 않는 이상,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다.’
누구에겐 한 달에 한 번.
또 어떤 누구에겐 일평생 한 번 볼까말까 한다는 환상 고블린.
그 환상 고블린이 여는 포탈을 타야만 칠죄종 세트 중 마지막 세트 아티팩트가 있다는 황금 산맥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세트 아티팩트는 황금 산맥을 지키는 에이션트 웜, 오슬로의심장이다. 알아보니 먼 옛날 아크메이지들이 그 심장을 에이션트급 드래곤 하트로 바꿔놓았다고 하더군.’
사실 악튜러스가 여기까지 알아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만약 석민이 고물상에서 헌터들이 물어오는 정보만으로 칠죄종 세트를 모으려 했다면 아마 한평생 남은 세트 아티팩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진짜 최고다. 잘했어 악튜러스.”
‘나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돌아온 악튜러스.
그리고 추가 된 두 개의 칠죄종 세트.
그 소식은 악튜러스의 귀환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모두에게 알려졌다.
그중 가장 기뻐했던 건 사라진 악튜러스를 두고 노발대발했던 코리아 일렉트로닉스 회장이었다.
“뭐? 돌아와?”
“네, 돌아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저도 소식을 듣고 바로 알려드리는 거라서요.”
회장은 크게 안도했다.
하마터면 전부 말아먹을 뻔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군.”
“그리고 반가운 소식입니다.”
“반가운 소식? 뭔데?”
“A급 세트 아티팩트를 거의 다 모았다고 하네요.”
“칠죄종 세트를?”
“네, 회장님.”
회장은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 말은 골렘 혼자서 세트 아티팩트를 구해왔다는 소린가?”
“네, 회장님.”
“무슨 골렘이 그래? 우리가 아는 골렘이 아닌데?”
“아무래도 자아를 가진 것 같습니다.”
“영혼이 있다는 건 나도 들었어. 하지만 자아까지...”
“베가도 그렇고 스피카도 지금 말이 많습니다. 저희가 생각하는 골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차피 게이트 관련해서는 미스테리한 게 너무나도 많았다.
회장은 복잡한 일은 생각하기 싫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하나.
악튜러스의 우승뿐.
“뭐 놈이 자아를 가졌든 세트를 모았든 하나도 관심 없으니까. 무조건 우승만 시켜. 알아들었나?”
< #36 형제들 사이에 싸움을 일으키는 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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