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파이트-109화 (109/173)

< #35 디아블로(2) >

그러나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감이 무뎠다면 기계의 오작동으로 조명만 밝혀졌다고 생각했을 터.

하지만 악튜러스의 감은 전장에 나가기 위해 잘 벼려진 칼날과도 같았다.

악튜러스는 불길한 그 느낌을 쉬이 떨쳐버리지 못했다.

‘느낌이 안 좋군.’

은신 상태의 디아블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상대 골렘이 알아차리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존 마커는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조명이 밝아졌으니 어쩔 수 없게 됐어.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그렇게 1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났다.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경기장.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악튜러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디아블로와 링크된 존 마커가 입꼬리를 조용히 끌어올렸다.

‘그래, 그래야지. 잠들어라고 아가야.’

악튜러스를 경계하며 움직임을 멈췄던 디아블로가 잠시 후 한 발자국 내딛었다.

악튜러스가 완전히 방심한 걸로 오해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 마커의 실수였다.

디아블로가 움직이면서 생겨난 진동이 경기장 바닥을 타고서 악튜러스의 발끝에 닿았다.

감았던 악튜러스의 눈은 다시 떠졌다.

‘확실히 누군가 있군.’

밝은 조명 아래 한없이 조용한 경기장.

사실 악튜러스는 주변 경계를 낮추며 눈을 감았던 게 아니라 그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눈을 감았던 것이다.

흙은 제 일부와도 같은 것.

경기장 바닥에 위치한 흙이 미세하게 떨리며 이곳에 출입한 불청객의 존재를 알려왔다.

악튜러스가 조용한 경기장 내부를 크게 훑었다.

이를 본 존 마커가 표정을 구겼다.

‘개 같군. 그런데 어떻게 안 거지? 분명 조심했는데.’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떻게 알았을까?

‘더군다나 주인도 없는데 저 반응은 또 뭐야?’

지금 악튜러스가 보인 반응은 존 마커의 상식을 철저히 깨부수는 행동이었다.

주인의 명령 없이는 멍청한 짓만 일삼는 골렘 따위가 마치 노련한 헌터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아니겠지. 아닐 거야.’

존 마커는 애써 불안한 생각을 지우고 슬슬 악튜러스를 사냥하기 위해 디아블로를 움직이기로 했다.

한 발자국 내딛고 잠시 멈춰선 디아블로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을 때,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악튜러스의 시선이 디아블로 쪽으로 정확히 향했다.

디아블로가 계속 발을 내딛자, 악튜러스는 흙의 지배력을 끌어냈다.

잠시 후 의심스러운 지역에 난데없이 흙더미가 치솟아 올랐다.

숨어 있는 쥐새끼를 가려내기 위해 악튜러스가 한 일이었다.

존 마커는 치솟는 흙더미에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당황한 존 마커.

디아블로의 움직임이 멈췄고, 치솟은 흙더미는 그 아래 숨어 있던 디아블로의 존재를 드러냈다.

밝은 조명 아래 흙을 뒤집어 쓴 투명한 골렘이 어리둥절 한다.

악튜러스가 등허리에 차고 있던 브로큰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찾았다. 거기 있었군.’

멍청한 골렘의 대처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존 마커는 급히 야오린을 불러냈다.

“신호는 전부 차단했겠지?”

“네, 전부 차단했습니다.”

“그런데 왜 골렘이 움직여?”

“골렘이... 움직입니까?”

“움직이잖아. 지금.”

알파고가 경기장에 개입할 수가 없어 멀리서 컴퓨터 화면만 보고 있던 야오린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악튜러스가 브로큰 블레이드를 디아블로에게 겨눴다.

마치 골렘 파이터가 함께하는 모습.

그 모습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지 존 마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이 꼬였군.’

평소와는 다른 진행이었다.

일반적이었다면 디아블로는 목표한 골렘의 코앞까지 무난히 다가가서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이처럼 초반부터 들킨 경우는 없었다.

있다면 이번이 처음.

‘흥. 좋은 경험이 되겠군.’

존 마커는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넘겼다.

은신 상태에 있던 디아블로가 신속기를 사용하며 악튜러스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이어 꽉 그러쥔 주먹으로 악튜러스의 턱을 노렸으나 노련한 악튜러스는 고개를 살짝 빼는 것으로 이를 흘려주었다.

그 찰나와 같은 순간.

씩 웃는 악튜러스가 디아블로의 움직임을 평가했다.

‘느려.’

디아블로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이어 악튜러스의 프론트 킥이 디아블로의 복부에 정확히 정중했다.

디아블로의 신형이 뒤로 넘어가며 디아블로 몸에 내려앉았던 흙먼지가 전부 날아갔다.

치솟는 흙먼지.

악튜러스가 안 보이는 디아블로를 상대로 손쉽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디아블로 몸에 흙먼지가 내려앉아 그 윤곽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흙먼지가 날아갔다.

디아블로가 다시 일어섰을 때 디아블로는 완벽한 은신 상태를 되찾았다.

악튜러스가 눈가를 좁힌다.

‘골치 아픈 쥐새끼로군.’

악튜러스는 경험이 많아 이런 상황에 적합한 대처법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악튜러스의 코어가 빛을 뿜어냈다.

이어 흙의 지배력을 행사하니 땅에서 세 마리의 뱀머리가 튀어나와 악튜러스 옆에 섰다.

요르문간드였다.

그때 무언가를 하려던 디아블로가 주춤하며 물러섰다.

‘뭐지? 웬 어스 매직이지?’

소환된 요르문간드는 악튜러스보다 감이 더 좋았다.

은신한 골렘 따위야 금세 알아차릴 정도로 말이다.

그럴 것이 몸을 이루고 있는 주성분이 바로 흙.

바닥이 흙으로 되어 있으니 제 몸처럼 예리하게 느끼는 것이다.

잠시 후 당황한 기색을 지워낸 디아블로가 한 발자국 내딛었을 때 소환 된 세 마리의 요르문간드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다가오고 있는 디아블로를 노려보았다.

디아블로의 움직임이 멈췄다.

존 마커의 표정은 적나라하게 일그러졌다.

‘개 같은...’

악튜러스의 시선도 요르문간드와 맞춰졌다.

상대가 아주 가소롭게 보였다.

전력을 다할 가치도 없어보였다.

‘쥐새끼처럼 숨지 말고 나와라.’

악튜러스는 전음으로 말했다.

존 마커는 들을 수 없겠지만, 상대 골렘은 그 전음을 들을 것이다.

순간이었지만 디아블로의 스트레스 게이지가 올라갔다.

디아블로가 악튜러스의 도발에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존 마커는 디아블로의 스트레스 게이지 따위야 무시했다.

애당초 뭐 때문에 스트레스 게이지가 올라가는지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설사 알았다할지라도 은신 상태를 풀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악튜러스의 전음이 다시 이어졌다.

‘한심하군.’

악튜러스가 대검에 마나를 가득 충전시켰다.

충전이 완료되자 악튜러스는 푸른 오러가 가득한 대검을 바닥에 내리찍으며 오러검기를 날려 보냈다.

땅을 가르며 날아가는 오러 검기가 은신하고 있던 디아블로에게 적중됐다.

은신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던 존 마커는 디아블로의 시야가 요동치자 욕지기를 뱉어냈다.

‘은신 상태가 보인다고? 어떻게?’

오러 검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나가 충전되는 대로 악튜러스는 계속 의심스러운 곳으로 검기를 날려 보냈다.

그 모습은 마치 전장터에 나간 장군이 홀로 검무를 추는 것과 비슷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정확도가 꽤 높다는 점이다.

결국 은신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던 디아블로가 끝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디아블로의 생각은 아니었다.

은신이 필요 없다고 판단한 존 마커의 생각이었다.

‘무슨 저런 골렘이 다 있는 거지? 주인 없이 저런 게 가능하다고?’

은신을 지워낸 디아블로는 날아오는 검기를 제 피갈귀 손으로 찢어냈다.

보통이라면 불가능한 일.

지금까지 디아블로를 얕잡아보던 악튜러스의 눈가가 좁혀진다.

‘검기를 무력화시킨다고?’

악튜러스의 관심은 디아블로의 오른 손에 집중됐다.

그곳엔 검은 빛깔을 지닌 피갈퀴손이 있었다.

보아하니 정체불명의 아티팩트로 보였다.

‘아티팩트인가? 성가신 걸 달고 있군.’

아마 석민이었다면 베타고의 도움으로 그 무기가 칠죄종 세트 중 하나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베타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악튜러스에겐 그저 요원한 일.

악튜러스가 코어 출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이에 맞서 디아블로 역시 소리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코어 출력을 높였다.

두 골렘이 내뿜는 출력은 용호상박.

악튜러스가 한국 챔피언이라고 하지만, 디아블로 역시 그런 국가 챔피언 노리는 골렘이었다.

잠시 후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두 골렘이 서로를 향해 뛰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악튜러스가 디아블로의 목을 노리고 대검을 휘둘렀다.

이에 맞서 피갈퀴손을 앞세우는 디아블로가 악튜러스의 검격을 쳐냈다.

보통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로 희비가 엇갈렸다.

악튜러스는 그 순간 미간을 좁히며 이런 생각을 했다.

‘무슨 아티팩트지?’

코어가 드래곤 하트였다.

과거에 누렸던 영광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영광과 견주어봤을 때 그렇게 많이 뒤지지도 않았다.

그런 자신이 대검에 오러를 씌워냈는데, 상대 골렘이 이를 무난하게 막아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피갈퀴손으로 말이다.

악튜러스가 연이은 검격으로 디아블로의 상체를 타격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디아블로는 피갈퀴손을 앞세우며 그 검격을 막아냈다.

실로 놀라운 무기였다.

디아블로는 악튜러스의 검격을 쳐내고 피갈퀴손을 뻗어냈다.

이때 악튜러스는 자연스레 이면세계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는 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면세계까지 따라온 피갈퀴손이 망자의 세계에 들어선 악튜러스의 몸에 갈퀴를 걸고 잡아당기자 놀랍게도 악튜러스가 이면세계에서 추방당했다.

피갈퀴손이 절대 간섭할 수 없는 이면세계까지 간섭한 것이다.

이면세계에서 본의 아니게 빠져나온 악튜러스는 곧바로 대검을 쳐올려 상대 골렘의 피갈퀴손을 막아냈으나 얼굴에 드리운 당황한 기색은 쉽게 지우지 못했다.

‘이면세계에 간섭까지 해?’

악튜러스는 디아블로의 다음 공격을 예측하며 바닥을 굴러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때 존 마커는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걸고 있었다.

‘역시 칠죄종의 힘은 다시 봐도 놀랍군. 그럼 마안의 힘도 볼까?’

외눈박이 골렘.

미간 아래에 위치한 시공안이 섬뜩한 안광을 한 차례 뿜어내자 주변 공간이 뒤틀렸다.

어긋나는 공간.

그 공간 사이 위치하고 있던 악튜러스의 팔뚝이 뒤틀린 공간에 맞춰 어긋났다.

예리한 칼에 비스듬히 썰린 것처럼, 서로 어긋난 팔뚝이 절단되자 악튜러스는 그대로 물러섰다.

시공안의 힘이었다.

순식간에 두 손을 잃게 된 악튜러스는 디아블로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반면 시공안을 앞세우는 디아블로는 기세등등했다.

존 마커의 입꼬리가 요동친다.

‘그래, 이게 바로 시공안이지.’

잘려나간 악튜러스의 두 손은 흙이 차오르며 다시 생겨났다.

뒷걸음질을 멈춘 악튜러스가 상대 골렘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동력이군.’

악튜러스 역시 마안의 힘을 끌어냈다.

주변에 위치하던 중력의 균형이 어긋나며 기류가 심상찮게 변했다.

중력이 강한 곳에 기류가 더 무섭게 내려앉으며 기류를 급격하게 변화시킨 것이다.

이 심상찮은 변화에 기세등등하던 디아블로가 멈춰 섰다.

존 마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지?’

현재 악튜러스의 정보는 비공개.

더군다나 베타고가 간섭하고 있는 경기장 내부에서 알파고의 도움 없이는 악튜러스가 무슨 마안을 사용하고 있는지 존 마커로서는 알아낼 길이 없었다.

이어 무시무시한 중력장이 기세등등하던 디아블로를 꼴사납게 짓뭉개버렸다.

거대한 중력장 아래 디아블로가 감히 일어나질 못한다.

코어 출력을 최대로 한들.

저를 짓뭉개는 중력장은 그대로.

디아블로가 힘겹게 그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 앞에서 하염없이 자기를 내려다보는 어스 골렘이 보였다.

분개하는 디아블로가 힘을 내보지만 어림도 없는 일.

존 마커는 직감했다.

‘당했군.’

보통의 방법으로는 이 중력장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판단한 존 마커가 다른 수단을 강구한다.

또 다시 개안되는 시공안.

불길한 안광을 뿜어내는 시공안이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으려했다.

< #35 디아블로(2) > 끝

ⓒ 대문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