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파이트-102화 (102/173)

< #33 재계약 >

*  * *

석민고물상에 위치한 뒷마당은 어수선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술팀과 골렘 거치대에 걸린 악튜러스가 보인다.

과거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고철더미는 대부분 석민의 비밀 아지트인 듀란의 성으로 옮겨졌고, 그나마 남아 있던 고물들은 다른 고물상에 넘겨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악튜러스와 기술팀이 가져온 대형 장비들이 차지했다.

정비 받고 있는 악튜러스를 배경으로 기술팀의 이명준 팀장이 회사에서 찾아온 사람들과 만나 석민과 마주한 자리에서 재계약에 대해 언급해주었다.

“지난 경기 결과에 대해선 저희 회장님께서 아주 흡족해하셨습니다. 이대로 재계약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석민 혼자 이 자리에 참석한 게 아니었다.

예전부터 석민을 도와주던 강준과 한성철도 이 자리에 있었고, 한미라도 재계약 자리에 나와 있었다.

계약서를 가장 먼저 떠들어보던 한미라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보통이라면 회사와 회사 간의 계약일 텐데, 지금 이 계약서는 개인과 회사의 계약이었다.

“저희 이름이 빠진 것 같네요? 저흴 기만하시는 것도 아니고 이 계약서는 뭔가요?”

“아 그게...”

후원 업체가 선수가 속한 매니지먼트와 계약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회장의 고집이 이런 일을 만들어냈다.

“저희 회장님께 선수 개인과 체결하라고 하셔서요.”

“그럼 저희는 뭔가요? 선수 매니지먼트가 왜 있는 건데요?”

“이게 저희들 요구사항입니다.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이 그래요. 하하. 장난하시는 것도 아니고.”

석민과 함께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불만을 드러냈다.

“세상에 선수 개인과 하는 데가 어딨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선수 혼자 그런 귀찮은 일까지 다 할 거면 매니지먼트가 있을 필요가 없잖아.”

여기저기서 불만들이 쏟아지자 회사 관계자들도 그들 입장을 확실히 밝혔다.

“저희 입장은 확고합니다. 선수 개인과 계약하지 못한다면 저희는 재계약이 불가합니다.”

관계자와 마주보고 있던 한미라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무슨 이런 곳이 다 있는지.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등쳐먹으려는 건가. 아직 애니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으나 꺼내 말하진 않았다.

설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관계자 말엔 그 생각이 보다 확실해졌다.

“아, 그리고 이 계약은 선수 개인과 하는 것이고, 계약서에 비밀유지에 대한 조항이 있기 때문에 다른 분께선 잠시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이 제시한 계약서의 두께만 해도 상당했다.

아까 한미라가 살펴봤던 것은 극히 일부분.

그것도 자기 회사 이름이 없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저 무식한 계약서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는 한미라도 예측하지 못했다.

“설마 등쳐먹으려고? 당신들 그 생각이지.”

회사 관계자들은 아니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무슨 저희가 동네 양아치 기업도 아니고.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석민이 이쯤에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있잖아요. 무언가 대단히 오해하신 거 같은데요.”

석민이 말을 꺼내자 모두의 시선이 아이에게 집중되었다.

석민은 건조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저희 재계약 안 할 건데요?”

“네?”

회사 관계자들이 당황했고, 석민을 도와주려 이 자리에 찾아온 세 어른은 순간 당황했다가 이내 통쾌함을 느꼈다.

그래 이거지.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희랑 안 하시겠다니요.”

“악튜러스가 왜 그쪽 후원만 받아야한다고 생각하세요?”

“그야...”

왜 받아야 하냐고?

이 대한민국에서 월드 그랑프리 수준으로 후원해줄 곳은 코리아 일렉트로닉스가 유일했고, 또한 최고였으니까.

그 말을 삼키는 회사 관계자들이 난색을 표했다.

“안 하시겠다고요? 지금 농담하시는 건 아니죠?”

“저희 계약 한달짜리였잖아요. 그럼 그 한 달이 끝났으니까 저희가 다른 곳이랑 하면 되잖아요. 왜 굳이 그쪽이랑 계약을 연장할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아니 그게...”

이쯤에서 비웃음을 머금은 한미라가 그들이 내밀었던 뭉텅이 같던 계약서를 다시돌려주었다.

“그렇다네요. 댁들 우두머리한테 잘 좀 전해주세요. 이쪽은 재계약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회사 관계자들이 물러난 자리.

강준이 석민을 찾았다.

“석민아, 진짜 안 할 생각은 아니지?”

“계약은 해야죠. 하지만 태도가 불량하니까 버릇부터 고쳐주는 거예요.”

한미라도 한 마디 해주었다.

“쟤들 우리 포기 못해. 내가 개인적으로 알아보니까 저쪽도 발등에 불 떨어졌거든. 아마 다시 연락 올 거야. 기다려봐.”

일이 이렇게 되니 회사 관계자들도 난처하게 됐다.

재계약을 안 하게 될 줄은 아예 예상도 못했던 것.

해당 사안은 곧바로 회장에게 보고되었다.

집무실에 있던 회장은 찾아온 전속비서의 보고 사항을 듣고선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 지금 뭐라고 했어.”

“그쪽에서 재계약을 안 하겠다고 합니다.”

“지들이 뭔데 우리 제안을 거절해?”

“배경에 대해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거절 의사를 확실히 밝혔습니다.”

“우리 말고 누가 접촉했나?”

“그럴 리가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뭔데?”

“말 그대로 안 하겠다는 거겠죠.”

회장은 생각하듯 눈가를 좁혔다.

전속비서가 재차 물어보았다.

“회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소롭군. 꼴에 주제를 알아야지.”

본래 그 성격 같았으면 후원도 안 해줬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도 놓치기엔 아까웠다.

누구 덕에 국내 우승까지 했는데.

“진짜 안 할 생각인지 어디 한 번 지켜보자고. 내가 장담하는데, 녀석들은 절대 우릴 못 버려.”

전속비서는 그의 생각이 못마땅한지 이쯤에서 끼어들었다.

“회장님. 저희가 느긋하게 기다릴 정도로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월드 그랑프리를 위해 준비할 게 상당히 많거든요. 할 일도 많은데 재계약 문제로 썩힐 시간이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 그건 몰랐군.”

“들어가는 돈만큼이나 공들여야할 시간도 만만찮습니다. 악튜러스 전용 장비를 개발하는데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시간도 생각하셔야죠. 그러니 이쯤에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자사 이익을 위해 회장 편을 들어주지 않는 건 전속비서의 오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회장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여자를 제 비서로 두고 있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휘둘려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것을 전속비서가 제대로 잡아주었으니까.

회장이 무서운 얼굴로 탁자 위를 탁탁 내리쳤다.

“그럼 우리가 그쪽에 맞춰줘야 한다는 말인가?”

“후원하실 생각이라면 그게 맞다고 봅니다.”

“우리가 왜? 우리 장비 없으면 걔들도 우승하기 힘들어. 비굴하게 꿇어야 하는 건 그들이라고.”

“그건 그들이 우승을 바랄 때의 일이겠죠. 추가적으로 그 꼬마가 이런 말도 했답니다.”

“무슨 말?”

“저흰 우승할 생각이 없는데요. 이렇게요.”

“진짜로 그랬어?”

“네.”

“그걸 믿나?”

“회장님. 상대는 어린 아이입니다. 저희가 예측하기 힘든 부분이 은근히 많습니다.”

어른이 그런 말을 했다면 꼴에 머리를 굴렸다고 우습게 봤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라서 그들도 예측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말 그대로 예측 불가능한 아이의 생각이었으니까.

“골치 아프군. 왜 하필이면 애새끼랑 엮인 거지?”

“굳이 후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제품을 다른 식으로 홍보할 수단을 찾아보면 되니까요.”

“하지만 골렘 파이트보다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 없잖아?”

“그건 맞습니다. 지금으로선 골렘 파이트가 가장 효과적인 홍보 수단입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그가 전속비서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제 생각이요?”

“그래. 내가 시건방진 자네를 옆에 두고 있는 건 이럴 때 조언을 듣기 위함이잖아.”

“제 생각은 이겁니다. 회장님께서 너무 나가셨어요. 후원한다고 해서 저희가 갑이 되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골렘 파이트에서는 선수와 골렘이 갑입니다. 그들이 모든 걸 일궈내니까요. 저흰 그들에게 맞춰줘야 하는 입장입니다. 이건 저희를 포함한 모든 회사가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해봐.”

“지금 저희에겐 악튜러스 외엔 후원할 골렘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악튜러스는 국내 우승을 했기 때문에 소속사 KRG의 역량이라면 다른 곳과 재계약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굳이 저희에게 목매달 필요가 없는 거죠. 우승할 생각이 없다면요.”

말 그대로 우승할 생각이 없다면 굳이 코리아 일렉트로닉스라는 대기업 후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네 말은 우리가 을이다?”

“저희 사정도 만만찮으니 을이 맞습니다.”

“잠깐. 굳이 국내 말고 해외 골렘도 많이 있잖아. 찾다보면 후원할 골렘이 어딘가에 있겠지.”

전속비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베타고가 고대 골렘에 대한 평가를 높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개된 고대 골렘이라고 해봤자 악튜러스를 포함한 셋이 전부죠. 그런 고대 골렘을 이대로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악튜러스에게 목매다는 이유.

다른 걸 다 제치고서라도 고대 골렘이라는 것이 가장 컸다.

“고대 골렘이라... 고대 골렘이 그리 대단한가?”

“저도 고대 골렘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릅니다. 다만 그 성적들은 대단하죠. 악튜러스만 봐도 기적에 가까운 성적을 내지 않았습니까? 지금 베가나 스피카 모두 성적이 좋습니다.”

“성적이 좋다라...”

“사실 성적이 전부죠. 만약 막시무스를 꺾을 가능성이 높은 골렘을 저보고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대 골렘을 택할 겁니다. 그만큼 고대 골렘이 가진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회장님.”

회장은 생각을 위해 잠시간 침묵했다.

입을 닫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으나 반박거리를 찾지 못했다.

반박거리가 없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납득해야한다는 소리였다.

“내가 원하던 건 이게 아닌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택권이 없잖아. 그럼 맞춰줘야지.”

“회장님. 이번 일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악튜러스 성적입니다. 사실 성적이 전부죠.”

“그래 맞아. 성적이 전부지. 성적이 좋으면 모든 게 용서가 돼. 그래 알았어. 그 일은 그렇게 처리해.”

“네,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해당 사항은 곧바로 석민고물상까지 파견되어 있던 회사 관계자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KRG 관계자들을 찾아갔다.

석민과 다시 만난 그들은 표정 자체가 달라졌다.

어깨와 눈에 들어가 있던 힘도 없어졌다.

철저하게 낮은 위치를 고수한 것이다.

한미라가 운을 뗐다.

“그새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까랑 표정이 다르시네.”

“아니요. 아닙니다. 저희 내부 회의 결과 최대한 맞춰주는 쪽으로 결정이 났습니다. 요구하시는 모든 조건을 들어드리겠습니다.”

한미라는 그들이 내민 계약서 따윈 거들떠도 안 봤다.

어차피 양이 많아서 이 자리에서 검토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건 저희가 좀 살펴볼게요. 모레 다시 찾아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모레가 되자 그들이 다시 찾아왔다.

“이게 저희 쪽이 제시하는 수정안이에요. 검토하시고 다시 연락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석민은 끼어들지 않고 회사 관계자끼리 만나서 계약서를 주고받는 장면을 조용히지켜봤다.

자기가 다 하기에는 버거운 일.

확실히 회사를 끼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그렇게 6개월 연장의 재계약이 끝났다.

앞으로 6개월 간 코리아 일렉트로닉스는 악튜러스의 우승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해줬다.

그리고 회사 관계자들이 석민을 찾아와 신형 무기 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가 내부적으로 검토한 결과, 우승을 위해선 신형 무기 개발이 꼭 필요하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하지만 저희 회사 사정과 자금, 인력 문제 등으로 악튜러스 전체 장비를 전부 개발할 순 없는 상태고. 대신 두 개 장비 정도는 AA+등급 이상으로 맞춰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나머지 장비들은요?”

“나머지 장비들도 최대한 맞춰드리려고 합니다만 기술 개발은 힘들 것 같습니다.아시는지 모르겠지만 AA- 등급 이상 장비 개발만 해도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 점은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33 재계약 > 끝

ⓒ 대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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