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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파이트-101화 (101/173)

< #33 재계약 >

#33 재계약

영등포에 위치한 석민고물상.

석민은 이른 아침부터 신음소리를 냈다.

석민은 지금 악몽을 꾸고 있었다.

귓전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비명소리.

그 소리에 놀란 어린 소년이 잠에서 깼다.

석민은 아니었다.

석민과 비슷한 또래의 다른 소년이었다.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뒤졌어? 저쪽은?”

“전부 뒤졌습니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말라는 전하의 명이시다. 샅샅이 뒤져라!”

“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방금 막 깨어난 어린 소년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소란스런 창밖을 보았다.

그곳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병사들이 요란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소년은 급히 침대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 순간 병사 둘이 소년이 살던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조차 쉬지 않았다.

집안으로 들이닥친 병사들은 횃불을 든 채 입을 열었다.

“여긴 비었어. 넌 저쪽 방으로 가봐.”

“잘 살펴봐. 혹시 모르잖아.”

“어차피 불태울 건데 무슨 상관이야. 기어 나오면 그때 죽이면 되지.”

소년은 울상이 됐다.

불태운다고?

두 병사는 대충 훑어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횃불 하나를 내던졌다.

그리곤 집안을 벗어나려다 칼을 들고 나온 어느 여인과 마주치게 됐다.

잠시 후 소년은 낯익은 비명소리에 눈시울을 붉혔다.

‘엄마.’

칼든 여자를 손쉽게 처리한 병사들은 집 밖으로 나오다 그들의 상관과 마주치게 됐다.

집이 작았기에 그들의 대화소리는 소년의 귀까지 들려왔다.

“다 뒤졌나?”

“네, 전부 뒤졌습니다.”

“여긴 아무도 없었나?”

“하나 있었는데, 저희가 죽였습니다.”

“잘했어. 빨리 저쪽으로 가봐.”

“네.”

대화를 엿듣고 있던 소년은 오열도 하지 못한 채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렸다.

말로만 듣던 라시타 연합군의 정복 전쟁.

선봉 토벌대가 근처까지 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마을을 습격할 줄이야.

소년의 꽉 쥔 주먹은 분노로 인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절대 용서 못해.’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해맑기만 하던 소년의 눈동자는 어느새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있었다.

소년은 불타는 집안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연기가 차오르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갈 생각을 못했다.

밖으로 나갔다간 눈에 불을 켜고 생존자를 찾는 병사들에게 개죽음을 당할 테니까.

그때, 연기 가득한 방안으로 허름한 로브를 입은 장년인이 들어왔다.

그는 떡갈나무로 만든 나무 지팡이를 앞세워 집안을 스캔하더니, 이내 생명 반응을 확인하고선 침대 아래를 살펴보기 위해 몸을 숙였다.

마도사는 침대 아래서 떨고 있던 소년을 찾아냈다.

푸른 눈동자와 금발의 머리칼.

자기가 찾던 아이가 맞았다.

“어서 나오거라. 거기서 뭐하는 게냐.”

눈시울이 붉은 소년은 그를 말없이 응시했다.

마도사는 손짓으로 어서 나오라고 했다.

“그러다 타죽겠다. 빨리 나오래도.”

소년은 그를 의심하여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도사는 소년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정체부터 밝혔다.

“걱정 말거라. 나는 제국군이 아니니. 어서 나와라. 빨리!”

타죽기는 싫었는지 소년이 마지못해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때마침 천장을 떠받히던 나무 대들보 하나가 불에 타 떨어져 내렸다.

마도사는 지팡이를 앞세워 마나 쉴드를 펼쳤고, 이를 막아냈다.

마도사는 소년을 불타는 집밖으로 간신히 빼냈다.

“다행이야. 정말 큰일 날 뻔 했어.”

울먹이던 소년은 불타고 있는 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부 리시타 연합군의 소행이었다.

이를 악문 소년에게 마도사가 슬픈 어조로 운을 뗐다.

“악튜러스, 드디어 만났구나.”

“저를... 아세요?”

난생 처음 만난 마도사가 제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악튜러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푸른 눈동자에 금발.

마도사가 충격적인 사실을 고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네 아버지다.”

“그럴 리가요. 제 아버지께선... 이미 오래전에 마물 습격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요.”

“네 어미가 그리 말하더냐? 하긴 그리 말할 만도 하겠구나. 다 이해한다. 나는 아비 될 자격이 없던 자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다. 나와 함께 가자 악튜러스. 이제부턴 내가 널 키우마.”

악튜러스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는 자신을 살려준 마도사였다.

아버지라는 사실은 믿기가 힘들었지만, 우선 그를 따라나섰다.

마도사를 뒤따르는 악튜러스는 계속 눈물지었다.

그런 악튜러스를 흘겨보며 마도사가 말을 흘렸다.

“울지 말거라. 운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흐흑.”

마을을 벗어난 둘은 계속 걸었다.

앞서가던 마도사에게 악튜러스가 무언가를 물어봤다.

“저거 리시타 연합군 맞죠? 그렇죠?”

앞장서 걷던 마도사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악튜러스를 돌아보았다.

“네 말이 맞다. 그들은 리시타 연합군이다.”

“복수할 거야. 다 복수할 거야.”

분노로 일그러진 소년을 두고서 마도사는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들은 탑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다. 그리고 그들의 수장인 킬제덴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야.”

“킬제덴이요? 그가 리시타 연합군에 있었나요?”

“모르고 있었느냐?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로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영웅이잖아요?”

“영웅이지. 그리고 머잖아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될 것이다.”

“복수할 거야.”

성인 어른의 반토막도 안 되는 어린 소년이 복수를 생각하자 마도사는 다시 한 번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일러도 너무 이르다. 단순히 증오만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게야.”

“그럼 어떻게 해요? 그냥 놔둬요?”

“우선은 때를 기다려야지.”

둘은 또 다시 걸었다.

끝나지 않는 걸음.

걸음에 지친 소년이 앞서가던 마도사를 다시 불렀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갈 데는 있는 거예요?”

“에아로 가자꾸나. 베리드 층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니까.”

“에아라면 교단이 지배하는 곳이잖아요. 저는 그쪽 신자가 아니에요.”

“킬제덴과는 사이가 안 좋은 곳이다. 당장은 그곳만큼 안전한 데가 없을 게다. 그리고 그쪽에 이 아비가 사놓은 집이 있다. 당분간은 거기서 지내자꾸나.”

꿈이었을까?

아니면 악튜러스가 가끔씩 보여주는 과거 회상이었을까?

석민은 이른 아침에 신음과 함께 잠에서 깼다.

“흐응...”

잠자리가 안 좋았던 모양인지 석민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악몽 싫어.’

석민은 부스스한 몰골로 자기 옆에서 자고 있던 이루리를 보았다.

편한 차림으로 자고 있던 이루리는 제 턱을 긁적이며 입을 쩝쩝 다셨다.

석민도 입을 쩝쩝 다셨다.

개인 경호원이 된 뒤부터 이루리는 석민과 거의 살다시피 했다.

지금은 반 식모가 된 상황.

근래에 석민의 밥을 챙겨주는 건 이루리였다.

석민은 방밖으로 나왔다.

삼선 슬피러를 신고 뒷마당으로 향하자 가게 안 이곳저곳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작업복의 어른들이 보였다.

전부 코리아 일렉트로닉스에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전부 야근하셨나보네. 집에 가서 주무시지.’

예전 같았으면 군부대에 있을 악튜러스는 어느샌가 석민고물상에 되돌아와 제 집처럼 지내고 있었다.

회사나 매니지먼트에선 보안 문제로 악튜러스의 거처를 옮길 것을 여러 번 제안했었지만, 석민은 한사코 거절했다.

‘악튜러스가 싫어하니까.’

석민이 찾아오자 가부좌 자세로 명상을 하고 있던 악튜러스가 조용히 실눈을 떴다.

그리곤 다시 눈을 감았다.

석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악튜러스, 예전에 사람이었어?”

‘내 과거를 보았나?’

악튜러스도 석민이 무엇을 보았는지 대강 아는 모양이었다.

“응. 원해서 본 건 아니고. 어쩌다 보게 됐어.”

‘기억하기 싫은 과거 중 하나다. 보여주기 싫었는데 갈수록 영혼의 결속 고리가 짙어지는 걸 보니, 나중에 가면 내 모든 비밀에 대해 알게 되겠군.’

석민은 조심스레 물었다.

“복수는 아직도 못한 거야?”

‘그 복수를 이뤘다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진 않겠지.’

악튜러스는 석민이 더 물어보기 전에 이쯤에서 대화를 끊었다.

‘언젠간 내가 가진 비밀도 전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들을 마주했을 때 그대가 너무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왜냐면...’

석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악튜러스는 적절한 말을 고르다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대와 나는, 친구니까.’

“친구?”

‘그래, 그대와 나는 친구다. 싫어도 뗄 수 없는 관계지.’

이후 대화가 귀찮았는지 악튜러스가 침묵했다.

명상하는 악튜러스를 두고서 석민은 방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보니 아침 6시 반.

‘너무 일찍 일어났어. 조금만 더 잘래.’

석민은 이루리 옆자리로 가서 다시 이부자리에 눕고 눈을 감았다.

석민이 돌아오자 실눈을 뜨고 이를 확인한 이루리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 시각 인천국제공항.

개인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온 자가 있었다.

존 마커.

블랙 맘바의 우두머리이자 월드 그랑프리 출전 경험까지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는 혼자서 한국에 찾아오지 않았다.

대형 로펌의 변호인단과 함께 한국을 찾아왔다.

그를 따라온 변호인단의 목적은 단 하나.

현재 구치소에 수감 중인 스티븐 스미스를 빼내기 위해서다.

스티븐이 저번 일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존 마커 입장에선 스티븐은 유능한 부하였다.

사실 변호인단만 보내면 될 것을 존 마커가 직접 찾아온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부하가 아닌 자신이 직접 일을 처리하길 원해서다.

존 마커는 말끔한 정장차림이었지만 190가 넘는 거구의 사내였다.

다부진 체격에 기골은 장대.

그가 주변을 훑자 입국장에서 야오린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둘은 곧바로 공항 앞 리무진에 탑승했다.

서울에 위치한 호텔로 향하는 차안에서 존 마커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실망스럽군. 일을 꼭 그따위로 해야 했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새 한국 챔피언이 됐더군.”

존 마커는 미묘하게 표정을 구겼다.

목표하던 골렘이 자꾸만 강해지고 있었다.

“예, 새로운 챔피언입니다.”

“그때 너희들끼리 처리했어야 했어. 이제 조금만 지나면 우리 손을 떠나게 돼.”

세계적인 전문 도둑들도 월드 그랑프리를 제집처럼 출전하는 골렘을 상대로 작업을 칠 순 없었다.

지금 악튜러스는 그들이 우려하는 최고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고대 골렘이라... 이것도 나름 골치 아프군.”

아마 평소의 존 마커였다면 한국에 찾아오지도 않고서 이번 일을 물렸을 것이다.

그만큼 리스크가 커졌으니까.

“조금만 어긋나면 오히려 내 장비가 위험해.”

존 마커 입장에선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칠죄종 세트를 향한 그의 욕심은 절대 작지 않았다.

“내가 이딴 나라까지 온 마당에 물릴 순 없겠지.”

존 마커는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대로 진행한다. 대신 너무 질질 끌진 않겠어. 며칠 안으로 끝내자고.”

“이 이상 시간을 내줬다간 후원으로 인해 보스 골렘과도 장비 차이가 거의 안 날 겁니다. 그때가면 도박이겠죠.”

“후원업체가 코리아 일렉트로닉스라고 했나?”

존 마커는 다시 표정을 구겼다.

“성가신 데랑 만났군. 하필이면 네임드 방산업체야.”

“그만큼 시간이 없습니다.”

야오린은 시간이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존 마커 역시 통감하는 바였다.

< #33 재계약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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