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개구리 왕 >
코어가 뚫린 레드 데빌은 그 즉시 저항을 멈췄다.
남은 두 마안에서 생기가 가신다.
레드 데빌이 패했다.
놀라 벌어진 아나운서의 입.
목소리가 안 나온다.
“어, 악튜러스가.”
중도에 끊어진 말.
잠시 숨을 고르고 눈을 껌뻑이다가 이내 악을 내질렀다.
“레드 데빌을 꺾었습니다! 악튜러스 우승입니다!”
“오늘 한국 챔피언이 바뀌었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악튜러스 우승입니다! 고물상 골렘이 대한민국 최강을 꺾었습니다!”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과 맞물려 아나운서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반면 레드 데빌이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관중들은 새로운 챔피언 등장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올해도 레드 데빌이 이기리라 예상했건만.
그 기대는 어느 고물상 골렘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끄아! 크핫하!”
승자가 호명됨과 동시에 지켜보던 강준이 희열에 찬 악을 내질렀다.
강준은 냅다 달려 스카우터를 벗어 내리던 석민을 번쩍 들어올렸다.
“석민아! 우승이야 우승! 네가 이제부터 한국 챔피언이라고!”
뒤따라온 한성철도 난리였다.
“세상에 이겼어! 한국 챔피언이라고!”
두 어른이 석민을 들어 올리고 던지고 받으면서 난리를 쳤다.
멀리서 지켜보던 한미라도 입가에 조그마한 미소를 드리웠다.
그녀도 내심 레드 데빌보단 악튜러스가 이기길 바랐다.
레드 데빌이 이겨봤자 좋아라 할 사람은 홍진영 뿐이었고, 그런 홍진영과 트러블이 있던 한미라의 입장에선 차라리 악튜러스가 이기는 게 나았으니까.
곧이어 경기장 전역으로 함성이 끓어올랐다.
새 챔피언이 탄생한 것에 대한 관중들의 환호였다.
악튜러스! 악튜러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레드 데빌을 부르짖던 경기장엔 이제 새로운 챔피언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가득 차올랐다.
두 어른에게 헹가레를 받던 석민이 악튜러스의 이름이 가득한 경기장 아래서 기분 좋게 웃어보였다.
‘이겼어!’
석민과 링크가 끊어진 악튜러스는 고개를 들어 제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상대 골렘을 응원하던 관중들이 어느샌가 제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악튜러스는 무덤덤하게 반응했고, 건조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내린 시선에는 간헐적으로 움직임을 보이는 블러드 골렘이 있었다.
악튜러스는 이게 전쟁이 아닌 한낱 경기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튜러스는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아다만틴 장화발로 레드 데빌의 머리통을 짓밟았다.
그 바람에 머리가 찌그러지며 두 마안이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바닥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악튜러스는 레드 데빌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춘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더 이상 레드 데빌을 괴롭히지 않았다.
악튜러스는 이 싸움의 승자가 된 거에 대해선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에 의미를 두었다.
‘계속 강해지고 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악튜러스는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만 더.’
레드 데빌이 패하자 링크가 끊어진 홍진영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스카우터를 벗어 내렸다.
경기장은 악튜러스를 부르짖는 관중들의 함성으로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워졌지만 홍진영 귀에는 아무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패배.
쓰라린 패배감이 엄습했다.
‘졌다고?’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마치 꿈인 듯싶었다.
홍진영이 미친 사람처럼 설핏 웃었다.
‘아니야. 내가 질 리가...’
그때.
울먹이며 달려온 홍수아가 홍진영을 탓했다.
“오빠. 지면 어떡해. 절대 안 진다고 했잖아!”
애가 떼쓰듯, 홍수아는 제 기분만 우선시했다.
“졌잖아. 이제 나 어떡해.”
평소라면 윽박질렀을 홍진영은 대답도 없이 그 시선을 내렸다.
자기가 졌다고 생각 안 했었는데, 철부지 동생으로 인해 그제야 실감하게 된 것이다.
‘내가 졌다고?’
홍진영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심각해졌다.
그런 홍진영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스텝들이 있었다.
그들 중 홍진영 코치로 있던 한 사내가 홍진영의 축 처진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질 수도 있지. 진영아, 다음엔 잘하자.”
위로는 거기서 끝났다.
그도 홍진영이 질 거란 생각은 못했다.
악튜러스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긴 했지만 그래도 홍진영이 이기리라고 생각했었다.
홍진영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파이터였으니까.
그런데 국내 본선도 처음인 새파란 신인에게 질 줄이야.
생각할수록 긴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홍진영 앞에서 한숨을 짓진 않았다.
위로는 못해줄 망정 한숨이라니.
그건 대단한 실례였다.
어깨를 다독이던 코치는 조용히 물러났다.
홍진영은 아직도 시끄러운 동생을 옆에 두고서 그 동안 말없이 경계했었던 상대 선수를 쳐다봤다.
저기 멀리서 자기들끼리 껴안고 난리치는 두 어른과 한 아이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홍진영은 자기도 모르게 예전 생각이 났다.
‘그래. 나도 한때는 저랬었지.’
저기 웃고 있는 석민처럼 홍진영도 과거엔 도전자 신분이었다.
그 당시 홍진영이 노리던 상대는 이민호와 스턴건이었다.
대한민국 최고라 불리던 스턴건을 꺾었을 때의 그 쾌감.
홍진영은 그때의 그 짜릿한 쾌감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일궈냈던 몇 안 되는 기적 중 하나였으니까.
‘그때... 기분 째졌었는데. 하, 이젠 내가 그 이민호가 됐네.’
씁쓸해졌다.
그러다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이랄까?
그 동안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
홍진영은 고개를 젖히며 그것을 마지못해 인정해주었다.
‘퇴물. 그래 시발. 나도 이제 퇴물 다 됐네. 저딴 애한테 지고. 아주 지랄 났어.’
그런데도 홍진영은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그를 짓눌러왔던 부담감이 전부 사라지면서 오히려 홀가분해진 것이다.
한국 챔피언으로서 가져야할 부담감.
그 부담감 때문에 사실 홍진영은 잠도 제대로 못자는 날이 많았었다.
전보다 못한 성적을 지적받을 때면 숨이 막힐 정도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한때 자신을 챔피언, 혹은 영웅이라 부르던 매스컴도 성적이 지지부진해지자 금세 태도를 바꾸어 퇴물, 겁쟁이 등으로 욕보였다.
그러면서 월드 그랑프리는 대체 언제 진출할거냐며 매일 같이 쪼아댔다.
지옥 같은 나날들.
전부 자신이 한국 챔피언이었기에 생긴 일이었다.
월드 그랑프리는 한국 챔피언만 출전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자리를 다른 선수에게 넘겨버리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시발 이번에도 못 나갈 것 같아서 똥줄 타고 있었는데 오히려 잘 됐네.’
“잘 됐네.”
홍진영이 웃는다.
그런 홍진영을 두고서 울상 짓던 홍수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오빠가 지금 미친 건가?
“오빠. 미쳤어?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픽 웃는 홍진영이 어느샌가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시끄러 이년아. 내가 졌지, 니년이 졌냐? 왜 옆에서 질질 짜고 지랄이야. 안 그래도 짜증나죽겠는데.”
“오빠.”
홍진영은 흘리듯 말을 뱉어냈다.
“쟤 잘하더라.”
“뭐? 무슨 소리야?”
“저 꼬마 은근히 잘하더라고. 예지안도 없었는데 그 정도면 나보다 잘하는 거지. 안 그러냐?”
“오빠. 그게 할 말이야?”
홍진영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솔직한 심정이 됐다.
‘애가 어른보다 잘한다던데 진짠가 봐. 이민호도 독일 꼬마한테 개발렸다는데.’
홍진영은 오히려 석민을 응원해주었다.
‘저 실력이면 나중에 JP도 잡을 수 있으려나.’
홍진영에게 JP는 트라우마 혹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내심 누군가가 제 대신 JP를 때려잡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홍진영의 시선은 저 멀리서 기자들에게 둘려 싸여 있던 석민에게 고정되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그 쪽바리 새끼만 잡아줘라. 제발.’
잠시 후 홍진영은 패자답게 초췌한 모습으로 퇴장했다.
기자 한둘이 따라붙긴 했지만, 손사래를 치며 물렸다.
반면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블루 진영에서는 석민이 애를 먹고 있었다.
“차석민 선수, 우승한 소감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이제 한국 챔피언인데, 월드 그랑프리 진출 계획은 있겠죠? 아니면 아직 생각 중이십니까?”
기자들이 봇물 터지듯 몰려들자 강준과 한성철이 나서서 그들을 막는 인간방파제가 됐다.
뒤에서 지켜보던 한미라와 KRG 소속사 사람들까지 나서서 몰려드는 기자들을 막았다.
이때 석민은 나비넥타이를 메고 찾아온 사회자 홍길동과 마주보았다.
홍길동은 잠시 마이크를 꺼두고 석민에게 미소로 운을 뗐다.
“야, 경기 잘 봤다. 꽤 하던데? 너 이제 한국 챔피언이야.”
“홍길동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래, 이 아저씨 기억나지? 용인 벙커에서 진행 맡았었잖아.”
“당연히 알죠. 악튜러스에게 깡통이란 별명도 붙여주셨잖아요. 그 별명 사라질 기미가 안 보이네요.”
은근히 가시 돋힌 말.
홍길동은 웃어 넘겼다.
“하하, 그거 미안. 내가 우승할 줄 알았으면 그런 별명 안 붙여줬을 텐데. 그보다 아저씨랑 인터뷰나 하자. 저기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우승 소감은 말해줘야지.”
“네.”
홍길동이 다시 마이크를 켰다.
동시에 석민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우리 차석민 선수, 드디어 우승했네요? 우선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모두에게 소감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사실 생각해둔 게 없어서요.”
“하하, 아무거나 말해보세요.”
짧게 고민하던 석민이 누군가를 입에 담았다.
“아빠, 나 우승했어. 빨리 돌아와.”
그 목소리는 게이트 안쪽까지 전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태식은 아들의 경기를 끝까지 지켜보다가 마지막 말을 듣고선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아들, 기다려. 아빠 곧 가니까.’
그 옆에서 차태식이 보는 화면을 같이 흘겨보던 김정민 헌터가 입을 열었다.
“태식 씨, 아들 잘 두셨네요.”
“예? 아, 네.”
“태식 씨 아들 보니까... 결혼 생각이 조금은 드네요.”
김정민이 우스갯소리로 말하자 주변에서 쉬고 있던 팀원들이 일제히 손사래를 쳤다.
“미쳤어? 결혼은 미친 짓이야. 정민 씨, 절대 결혼하지 마.”
“그냥 혼자 사는 게 편하지. 물론 애가 있으면 저런 일도 있겠지만.”
김정민도 볼멘소리를 냈다.
“아 그냥 해본 소리에요. 누가 결혼한데요?”
이때 결혼 유경험자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결혼은 말이야. 해보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그러다가 또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도 괜찮은 거야. 계속 생각만 해. 절대 하진 말고.”
그 말을 듣고서 차태식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한손으로 포켓을 만지작거렸다.
그 포켓 안에는 아들에게 줄 귀한 선물 하나가 조용히 뛰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 아빠가 비싼 선물 들고 가는 중이니까.’
차태식과 마찬가지로 석민의 인터뷰 영상을 지켜보던 코리아 일렉트로닉스 회장도 씩 웃어보였다.
여간해선 웃지 않는 그였다.
그만큼 만족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훌륭해. 아주 잘했어. 어린 꼬마놈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회장의 웃는 표정을 본 회의실 임원들은 크게 안도했다.
불같은 성격이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당장은 기분이 좋아보였으니까.
회장이 다음 말을 이었다.
“재계약 진행해. 이제 진짜 무대로 옮겨보자고.”
< #32 개구리 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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