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개구리 왕 >
주춤하는 레드 데빌.
그 앞에 나타난 거대한 뱀이 입을 쩍 벌렸다.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마법이었다.
홍진영의 표정은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별 희한할 걸 다 불렀네.’
어스 골렘이 대지 관련 마법에 특화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어스 골렘에게도 한계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저 골렘은 그런 한계도 없어보였다.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게이트 너머엔 진실 된 마법사들이 존재한다.
헌터들이 말하길, 그들은 매우 뛰어나고 위협적인 존재라 했다.
헌터도 아닌 홍진영이 마법사를 떠올릴 만큼, 악튜러스가 불러낸 요르문간드는 그만큼 정교하고 대단해보였다.
홍진영은 비웃음을 지었다.
‘그래, 저번엔 드래곤 같은 걸 소환했었지.’
홍진영은 악튜러스의 지난 경기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주춤하던 레드 데빌이 다시 한발자국 내딛었다.
그래도 한국 챔피언.
홍진영은 상대가 누구든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이 우물 안에선 내가 왕이다.
‘가소롭긴. 출력은 이쪽이 더 위다.’
레드 데빌의 코어가 푸른빛을 뿜어냈다.
치솟는 출력.
덩달아 세 개의 마안이 번뜩이더니 이내 착용 중인 세트 아티팩트 효과가 발동되었다.
-육(肉) 군주 세트 효과가 발동됩니다.
-벌크화 진행 중.
벌크화.
몸집이 커지는 효과다.
육 군주의 능력 중 하나.
블러드 골렘이 저를 집어삼키려는 뱀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 그 몸집을 거대하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개구리가 제 몸을 부풀려 상대를 위협하는 것처럼, 레드 데빌 역시 육 군주 세트로 그 몸집을 불렸다.
서로 맞물려 있던 장갑들이 벌어지고, 확장된 전신은 곧이어 저를 내려다보던 뱀과 그 눈높이를 맞췄다.
벌크화를 마친 레드 데빌이 전보다 더 높아진 시야로 악튜러스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자기가 어른이라면, 악튜러스는 마치 뱀머리에 올라간 애처럼 보였다.
‘절대 안 진다. 이 자리는, 영원히 내 자리니까.’
그 순간 홍진영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아무 것도 없던 인생.
그 인생에서 골렘 파이트를 만나 인생을 역전시켰고, 한국 챔피언이 됐다.
한국 챔피언으로서 누렸던 삶은 그야말로 황홀 그 자체.
만약 그 자리를 한 번 차지해봤던 사람이라면, 지금의 홍진영과 같은 생각일 것이다.
‘내 자리라고!’
격분한 레드 데빌이 소리 없는 괴성을 내지르더니 이내 제 앞을 가로막고 있던 요르문간드에게 덤벼들었다.
거대한 골리앗이 종말의 뱀에게 맞서는 장면은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환호성을나오게 했다.
함성 가득한 경기장 아래.
레드 데빌이 두 주먹을 앞세웠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레드 데빌이 요르문간드의 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요르문간드가 맥없이 쓰러졌다.
발 디딜 곳을 잃은 악튜러스가 그전에 뛰어 올라 대검을 내리그었다.
레드 데빌은 보호안을 개안시켜 악튜러스의 검격을 무력화시켰다.
보호안에 밀린 악튜러스가 땅에 발을 딛고, 다시 자세를 잡기도 전에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레드 데빌이 몸통박치기로 악튜러스를 노렸다.
악튜러스는 급히 이면세계로 숨어들며 이를 피했다.
목표를 잃은 레드 데빌이 꼴사납게 나동그라지고 다시금 소리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이어 예지안이 개안된다.
‘어디냐! 어디냐고!’
핏대가 선 눈으로 가까운 미래를 보는 홍진영이 이어지는 악튜러스 공격을 알아차렸다.
‘거기냐!’
악튜러스는 레드 데빌 뒤통수를 노리고 나타났다.
레드 데빌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악튜러스의 검격을 혼 바질리스크 손갈퀴로 쳐냈다.
쳐내는 힘이 얼마나 좋던지 악튜러스가 휘청거렸다.
출력 차이는 극복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 장면을 보고 레드 데빌 팬들이 열광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들뜬 경기장.
그 아래 레드 데빌이 다시 악튜러스를 노렸다.
악튜러스가 이번엔 방패를 앞세웠다.
레드 데빌은 꽉 말아 쥔 주먹으로 악튜러스의 방패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꽤나 육중한 타격감이 전신을 타고 레드 데빌에게 전해졌다.
쾌감은 짜릿했다.
홍진영도 느낄 정도.
방패를 앞세운 악튜러스는 가까스로 버티긴 했지만 반격할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다.
홍진영이 이를 으득 갈았다.
‘꺼져! 이 자리는 내꺼라고!’
지금까지 누려왔던 그 호화스런 삶을 놔주기엔 홍진영은 욕심이 너무 많았다.
제 분에 넘치는 욕심이 말이다.
레드 데빌의 거센 반격에 악튜러스가 또 처참하게 밀렸다.
홍진영이 격분하자, 그와 링크되어 있던 레드 데빌도 영향을 받았는지 정말 거칠게 악튜러스를 밀어붙였다.
그 모습은 마치 다 큰 어른이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소년을 못살게 구는 장면과 똑같았다.
‘이 자리는 영원히 내꺼...’
격분하여 움직이던 레드 데빌이 갑작스레 멈췄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는 시야.
무언가에 잡힌 듯 레드 데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레드 데빌이 시선을 내리자, 그곳엔 레드 데빌의 허리를 물고 있는 요르문간드가 있었다.
“이런!”
레드 데빌이 제 허리를 물고 늘어지는 요르문간드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성난 골렘이 내리치는 주먹질은 상당했으나, 상대는 살점으로 이뤄진 소환물이 아니라 흙으로 된 소환물이었다.
흙을 내리친들 무엇하리.
무너져 내린 흙은 마법적인 힘으로 다시 제 자리를 찾았고 그 형태를 온전히 유지시켰다.
그래도 레드 데빌이 광적으로 저항하자 요르문간드의 형태가 빠르게 망가지긴 했다.
문제는 마주보고 있던 악튜러스였다.
악튜러스는 요르문간드가 레드 데빌을 구속함과 동시에 레드 데빌의 안면부를 향해 주먹을 냅다 꽂았다.
피로 이뤄진 안면부가 처참히 일그러지며 사방팔방으로 핏물이 튀었다.
홍진영의 시야가 요동치더니 이내 흙먼지 자욱한 하늘로 바뀌었다.
레드 데빌이 넘어간 것이다.
이어지는 함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붉은 악마들이 내지른 함성은 절대 아니었다.
그 동안 숨죽여 지켜보던 악튜러스 팬들이 내지른 환호성이었다.
아나운서들도 그 입이 거칠어진다.
한국 챔피언을 가리는 마지막 자리.
그들도 상당히 감정적으로 변했다.
“악튜러스! 지금 레드 데빌의 안면부를 거칠게 강타했습니다!”
“레드 데빌이 넘어갑니다!”
“과연 저 싸움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지!”
뒤로 나자빠지는 레드 데빌의 시야를 홍진영이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보이는 건 푸른 하늘이 아니었다.
날아오른 흙먼지로 뿌옇게 변한 하늘이었다.
레드 데빌이 바닥에 나자빠지고, 덩달아 몸을 띄워낸 악튜러스가 깍지 낀 손으로 레드 데빌의 머리를 노렸다.
이때 홍진영은 반사적으로 쾌 가속안을 사용했다.
연이은 공세를 피하기 위해 가속안을 사용하는 건 홍진영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가속안으로 느려진 세상.
홍진영은 깍지 낀 두 손을 확 젖힌 채로 날아오는 악튜러스를 보았다.
레드 데빌은 급히 옆쪽으로 몸을 굴렀다.
그 바람에 악튜러스는 애꿎은 땅만 내리찍고 말았다.
-육 군주 세트 효과가 종료됩니다.
-벌크화 종료.
육군주 세트의 효과가 종료됐다.
원상태로 돌아오는 크기.
네 발로 기는 레드 데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그 몸을 바닥 쪽으로 확 잡아당기는 존재가 있었다.
레드 데빌이 일그러진 시선을 내리자, 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요르문간드가 보였다.
홍진영의 얼굴을 아주 적나라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격분한 레드 데빌이 주먹으로 제 허리를 물고 있던 요르문간드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것도 잠시.
악튜러스가 그런 레드 데빌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두 골렘이 서로 뒤엉켜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레드 데빌이 다시 일어나 반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거머리처럼 붙은 요르문간드는 아직이었고, 그런 레드 데빌만큼이나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악튜러스가 다시 몸을 날려 왔다.
악튜러스가 가까스로 파운딩 자세를 잡고 코어가 아닌 레드 데빌의 마안만 집중적으로 노렸다.
이것은 석민이 원하던 바였다.
‘보호안만이라도!’
연타되는 주먹들이 레드 데빌의 시야 위로 떨어진다.
요동치는 시야 속.
홍진영이 이를 악 물었다.
‘개 같은 놈이 마안을 노리고 있어!’
일순간 출력을 최대로 높이는 레드 데빌이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악튜러스를 밀쳐냈다.
레드 데빌의 대응은 빨랐으나, 악튜러스의 집요함은 이미 마안 하나를 가져간 상태였다.
‘됐어!’
석민은 방금 전 파운딩으로 레드 데빌이 가지고 있던 세 마안 중 가장 골치던 보호안을 끝장냈다.
마안 하나를 잃고서 격분한 레드 데빌이 이번엔 반대로 파운딩 자세를 잡았다.
위를 잡고 앉은 레드 데빌이 악튜러스의 상체 장갑을 타격했다.
꿈쩍도 안 하는 장갑은 놀라우리만치 견고했다.
홍진영은 급히 머리를 노렸다.
힘에서 밀리는 악튜러스는 파운딩 자세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보였다.
악튜러스가 시야를 잃자 석민이 보는 시야도 어두워졌으나 그건 잠시였다.
베타고가 그 즉시 가상시야로 대체해줬다.
나름 위기였지만 석민은 슬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싸움을 끝낼 그림을 말이다.
‘악튜러스 스트레스 게이지가 올라가고 있어. 조금만 더.’
악튜러스는 맞아야 스트레스 게이지가 올라간다.
악튜러스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석민은 지금 이기기 위해선 악튜러스의 고유 기술인 레이지 오버하트가 꼭 필요했다.
‘조금만 더.’
레드 데빌이 신나게 악튜러스 머리를 두 주먹으로 분쇄시키자 홍진영이 씩 웃었다.
‘그래, 이거지.’
그 순간 악튜러스가 이면세계로 자취를 감추었다.
목표하던 스트레스 게이지가 가득 찼고, 악튜러스가 소위 빡친 것이다.
악튜러스를 깔고 앉은 레드 데빌이 저 혼자 바닥을 마주보게 됐다.
홍진영이 표정을 와락 구겼다.
‘또 어디로 튄 거야!’
그 순간 레드 데빌의 뒤통수를 무지막지하게 후려치는 악튜러스가 있었다.
이면세계에서 나온 악튜러스였다.
레드 데빌이 나자빠지고 악튜러스가 그 위를 다시 잡았다.
-스트레스 게이지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현재 수치 61/100-현재 스트레스 게이지가 60에 도달했음으로 폭주경보가 ‘경계’ 단계로 격상됩니다.
-주의! 현재 코어 출력이 한계치를 넘었습니다.
-알림! 오버하트 발생!
-알림! 코어 출력이 151%를 넘어섰습니다.
어느샌가 파운딩 자세를 잡은 악튜러스가 오른손을 뻗어 레드 데빌의 턱을 밀었다.
그 바람에 레드 데빌은 시야가 위쪽으로 밀려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됐다.
보이는 건 피 묻은 바닥과 아까 몸싸움에서 떨어져 나간 금속 장갑들 뿐.
홍진영은 가소로운지 씩 웃었다.
‘어차피 출력은 이쪽이 더 좋다고!’
그래도 출력 좋은 레드 데빌이 반격하려 애썼지만, 이미 한쪽 손은 요르문간드가 물고 늘어진 상태.
나머지 손으로 저항해봤지만, 이상하게도 악튜러스의 힘이 더 좋았다.
영문 모를 상황.
‘뭐야? 왜 밀려? 출력은 분명 이쪽이 더 좋을 텐데?’
당황한 홍진영이 급히 예지안을 발동시켰다.
핏대가 선 홍진영의 눈에 새까매진 미래가 보였다.
‘뭐야? 왜 아무것도 안 보...’
보이지 않는 미래.
그것은 끝을 의미했다.
레드 데빌이 미처 보지 못하는 곳에서 악튜러스는 피스트 브레이커에 마나를 가득 채웠다.
-드래곤 피스트 장전 완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된 마법의 주먹.
전보다 더 붉게 빛나는 악튜러스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먹을 냅다 꽂았다.
초근접전에서 내리꽂히는 피스트 브레이커의 위력은.
그것도 드래곤 피스트를 겸한 그 파괴력은 상상불허.
레드 데빌의 코어가 뚫렸다!
< #32 개구리 왕 > 끝
ⓒ 대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