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개구리 왕 >
레드 데빌이 쓰러지자 그 위로 대검을 뽑아든 악튜러스가 인정사정없이 내리쳤다.
홍진영은 넘어짐과 동시에 거의 반사적으로 보호안을 사용하여 이를 막아냈다.
악튜러스의 검격을 보고서 보호안을 개안시킨 게 절대 아니었다.
월드 그랑프리까지 진출한 선수의 노련함을 보인 것이다.
이로써 레드 데빌이 가지고 있던 모든 마안이 사용됐다.
-마나 소모량이 급격히 증가합니다.
-주의! 최대 출력이 지속되면 하트다운의 위험성이 커집니다.
마안을 사용하게 되면 마나를 소비하게 된다.
이 마안을 다루는 걸 대개 동력(瞳力)을 사용한다고 표현하는데, 이때 생각보다 많은 마나가 소모됐다.
얼마나 큰 마나를 잡아먹느냐?
그 육중한 몸을 움직여 큰 힘을 내는 것보다, 심지어 마법을 사용하는 때보다 더 큰 마나를 소모시켰다.
이처럼 많은 마나를 잡아먹는 동력이 갖는 힘은 강력했지만, 그만큼 큰 주의를 요구하기도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동력만으로 하트다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레드 데빌은 순식간에 삼개안의 동력을 끌어냈고, 이로 인해 마나가 빠르게 동이 났다.
부족한 마나는 코어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이는 하트다운으로 귀결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홍진영은 노련한 선수였다.
우물 안 개구리 왕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우물 안에선 왕으로 군림할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보호안을 통해 악튜러스의 검격을 막아낸 홍진영은 급히 가속안과 예지안 사용을중지시켰다.
-쾌(快) 가속안, 예지안의 사용이 중지됐습니다.
-마나 소모량이 한계치에서 정상치로 돌아옵니다.
되돌아오는 정상적인 인지능력과 예측할 수 없는 미래.
그래도 보호안의 동력은 유효했다.
보호안으로 전개시킨 반구 형태의 마나 보호막이 악튜러스의 대검을 훌륭히 막아냈다.
반사적으로 전개시킨 마나 보호막이라 할지라도 그 위력은 A등급 방패에 준할 정도.
악튜러스가 등에 메고 있는 방패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따져보면 레드 데빌의 보호안이 더 좋긴 했다.
일단 무게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므로.
레드 데빌을 지키던 반구 보호막이 그 기세를 확장시키며 악튜러스를 밀어냈다.
밀려나는 악튜러스와 재기하려는 레드 데빌.
레드 데빌은 보조 무기로 가지고 있던 혼 바질리스크의 꼬리를 통해 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시에 양손에 쥐고 있던 거대 낫을 휘두르며 반격까지 했다.
레드 데빌의 반격에 악튜러스는 대응하지 않고 곧장 이면세계에 숨어들었다.
귀신처럼 사라진 악튜러스와 자리에 남은 레드 데빌.
홍진영은 아까 일로 머릿속이 뒤숭숭해졌다.
‘뭐지? 예지안으로 본 미래에선 어퍼컷까진 안 보였는데?’
예지안.
그 힘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모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예지안에도 분명한 등급과 종류가 있었고, 그 예지안이 아무리 좋다 해도 신의 계시를 받는 자가 아닌 이상 너무 먼 미래까지 내다볼 순 없었다.
끽해야 앞으로 일어날 몇 장면 정도.
그것조차 대량의 마나를 소모시켜야만 가능했다.
이게 예지안이 가진 최대의 단점이기도 했지만, 그런 단점들을 다 감안하고서라도 예지안은 대전 골렘들이 가장 선호하는 마안이기도 했다.
찰나의 순간.
예지안으로 보고 내린 정확한 판단이 모든 경기 흐름을 뒤집어놓기 때문이다.
‘설마 베타고 작품인가?’
홍진영은 짧은 시간 여러 생각을 했고, 코리아 일렉트로닉스 마크가 달린 악튜러스 장비를 보고서 베타고를 빠르게 연상시켰다.
‘그래, 베타고라면 가능하지. 슈퍼컴퓨터니까.’
홍진영은 KA 청룡 전을 대비해서 코치가 했던 말들을 기억해냈다.
“야, 베타고 AI가 아직 개발단계라고해서 얕잡아보면 절대 안 돼. 그게 진짜 무서운 거야. 어떻게 보면 예지안보다 더한다고 하더라. 여러 가능성 중, 가장 높은 가능성만 짚어낸다는데. 그게 예지안이랑 다를 게 뭐 있겠냐? 거의 예지안 수준이야.”
여기서 우스운 건 레드 데빌이 가진 예지안도 베타고의 계산 범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홍진영도 이를 어렴풋이 눈치 챘지만, 그렇다고 너무 주눅 들진 않았다.
오히려 베타고를 아주 만만하게 봤다.
‘그까짓 슈퍼컴퓨터.’
홍진영은 콧방귀를 뀌었다.
분명 베타고가 가진 연산 처리 능력은 높게 봐줄만 했다.
하지만 그것뿐.
‘그래봤자 여러 가능성 중 하나만 골라잡는 거잖아. 이쪽 예지안으로 보는 미래는진짜라고.’
예지안으로 본 미래가 바뀌는 경우는 딱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같은 예지안끼리 만났을 때.
이 경우를 제외하곤 예지안으로 본 미래는 확실했다.
다만 가까운 미래만 볼 수 있다는 게 최대 단점.
여기서 악튜러스는 예지안이 없는, 그저 슈퍼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자신감을 되찾은 홍진영이 씩 웃는다.
‘좆밥 새끼야, 기달려라. 진짜 예지안이 뭔지.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예지안을 개안합니다.
-마나 소모량이 증가합니다.
드래곤 하트에서 용솟음치는 마나는 전부 예지안의 동력으로 소모되었다.
또 다시 보이는 미래.
그 미래에서 뒤통수를 노리고 덤벼오는 악튜러스가 있었다.
‘거기냐!’
레드 데빌이 달고 있던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혼 바질리스크 붉은 꼬리.
레드 데빌이 가진 색과 잘 어울리는 붉은색 세트 아티팩트로, 그 특징이 있다면 드래곤 터틀이 가진 등껍질보다 더 단단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힘껏 휘둘렀을 때 그 위력은 미스릴로 된 장갑을 찌그러트릴 정도로 아주 강력했다.
휘두른 꼬리로 인해 레드 데빌의 심장부를 노리던 대검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악튜러스와 링크된 석민은 꼬리가 보인 힘에 놀랐다.
‘엄청 센데?’
레드 데빌은 꼬리를 휘둘러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양손에 쥐고 있던 사이드를 멋스럽게 돌림과 동시에 예지안의 동력을 끌어냈다.
홍진영은 아직도 자신감 있게 웃고 있었다.
‘보인다. 다 보인다고!’
가까운 미래에서 악튜러스가 어스 매직을 사용하여 지면을 솟구치게 했고, 그 여파로 넘어지는 레드 데빌에게 피스트 브레이커를 날리는 장면이 포착됐다.
홍진영은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절대 안 통하지.’
바로 그 순간.
예지안이 보여줬던 미래처럼 모든 상황이 그대로 재현됐다.
레드 데빌 아래 멀쩡하던 지면이 심상찮은 분위기를 자아내더니 이내 용솟음치며레드 데빌을 위로 솟구치게 했다.
동시에 이면세계를 탈출한 악튜러스가 크게 제친 피스트 브레이커를 통해 레드 데빌을 노렸다.
거친 파공음을 내며 날아오는 주먹은 레드 데빌의 가슴을 꿰뚫어버릴 기세였다.
홍진영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다 보였다고!’
-알림! 쾌(快) 가속안이 개안됩니다.
개안 된 가속안.
홍진영의 두 눈에 또다시 핏발이 섰다.
“그러엏게에는 아안되에지!”
늘어지는 말.
인지능력이 대폭 향상되고, 흐르는 모든 시간이 마치 느린 재생화면처럼 바뀌었다.
그 화면 속.
홍진영은 가슴께로 파고드는 피스트 브레이커를 보았다.
신형이 무너지던 레드 데빌이 급히 몸을 틀었다.
곡예 같은 움직임.
틀어버린 몸에 살짝 휘감긴 혼 바질리스크 꼬리.
그 꼬리가 빠르게 펴지며 악튜러스의 주먹을 쳐냈다.
홍진영이 말아 올린 입꼬리는 그대로.
‘조오았어!’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예상하지 못했던 2차 공격이 이어졌다.
사실 악튜러스가 이면세계에서 나와 내지르는 주먹은 레드 데빌을 속이기 위한 페이크였다.
악튜러스의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솟구쳤던 땅이 레드 데빌의 몸을 꽉 죄었다.
막연히 솟아올라 그 신형을 무너트리려했던 게 아니라, 마치 족쇄처럼 레드 데빌의 전신을 구속해버린 것이다.
홍진영이 예지안을 가지고도 이를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은, 홍진영이 여기까지 미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스 트랩.
흙의 지배력이 레드 데빌의 움직임을 막았다.
레드 데빌이 구속되자 악튜러스가 피스트 브레이커를 풀파워로 장전시켰다.
-마나 급속 충전 중.
-헬 피스트 준비 완료.
서로 희비가 엇갈렸다.
악을 내지르는 관중들도 악튜러스가 기회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레드 데빌을 응원하는 여성 팬들 중에선 레드 데빌이 위기에 처하자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벌어진 입을 가로막았다.
그만큼 상황이 위태로웠던 것이다.
그 순간 홍진영은 예지안으로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내다보았다.
예지안이 보여주는 미래에서 레드 데빌은 악튜러스의 주먹을 피할 수 없어 그대로 맞아주었다.
‘이이러언!’
홍진영은 개안 된 가속안과 예지안을 꺼트리며 모든 마나를 보호안에 집중시켰다.
레드 데빌 전신에 위치하던 모든 마나가 보호안에 집중됐다.
이와 맞물려 악튜러스는 헬 피스트를 장전시켰다.
그 모습에 관중들이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들에겐 다가올 악튜러스의 승리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확 젖혀진 피스트 브레이커가 이내 공기층을 무섭게 가르며 레드 데빌에게 뻗어나갔다.
헬 피스트는 완성되었고, 이제 꽂히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레드 데빌의 대응도 만만찮았다.
부랴부랴 전개시키는 마나 보호막이 헬 피스트의 진행을 가로막았다.
완성된 헬 피스트와 부랴부랴 전개되는 마나 보호막이 거칠게 충돌했다.
그 여파로 강력한 충격파가 생성되어 경기장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타격감은 시원했으나, 이를 막아선 마나 보호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홍진영과 석민의 희비가 또다시 엇갈렸다.
사실 악튜러스 헬 피스트가 부랴부랴 준비되는 마나 보호막보다 완성도가 더 높았다.
그리고 더 빨랐다.
하지만 지금 이 결과를 만든 건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바로 출력 차이.
레드 데빌이 가진 드래곤 하트가, 악튜러스가 가진 가고일 듀얼 코어보다 더 좋은것이다.
그래서였다.
악튜러스가 일찍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랴부랴 준비되는 마나 보호막에 막혔던 이유가 말이다.
‘출력 차이겠지.’
석민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링크에 집중했다.
악튜러스는 다시 이면세계로 숨어들었다.
“쥐새끼 같은 놈!”
홍진영이 크게 일갈하며 레드 데빌로 하여금 두 주먹을 맞부딪히게 했다.
쾅!
-알림! 혈계 한계가 해제 됩니다.
-최대 출력이 한계선까지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최대 출력 상승 중...
-최대 출력 상승 중...
-블러드 리미트가 해제되며 최대 출력이 기존 3220hp에서 3800hp로 상향 조정됩니다.
끓어오르는 힘.
블러드 골렘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피의 힘을 마음대로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 피가 오우거라면 오우거 같은 파괴력을 가질 것이오.
마법 계열 몬스터라면 지금 이처럼 마나를 용솟음치게 만들 것이다.
‘레드 데빌이 왜 한국 최고인 줄 알아? 귀하디귀한 키메라 매지션의 피로 만들어졌거든.’
키메라 매지션의 피로 이뤄진 레드 데빌이 미쳐 날뛰기 직전이었다.
폭주하는 출력과 끓어오르는 마나.
그 마나는 전부 레드 데빌이 익히고 있던 한 마법을 구현시키는데 집중됐다.
윈드 스파이럴.
불과 관련된 파이어 골렘이라 해서 물과 관련된 마법을 못 다루진 않았다.
해당 마법을 배웠고, 마나만 충분하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돌풍들이 하나둘씩 소환되며 레드 데빌을 옥죄고 있던 흙더미를 날려버렸다.
치솟는 흙먼지로 주변 시야는 혼탁해졌다.
홍진영은 미리 준비라도 해왔다는 듯이 계속해서 돌풍들을 소환해냈다.
‘어스 골렘이 바람에 쥐약이었지. 그래 이 속에서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고.’
홍진영은 악마처럼 웃어보였다.
‘쥐구멍에 평생 못 숨는 거 다 아니까. 빨리 나와 이 쥐새끼야!’
이면세계에 숨어든 악튜러스는 아직 소식조차 없었다.
돌풍들을 소환해놓은 레드 데빌은 계속 마나를 소모시켰지만 생각보다 여유로워보였다.
마안을 사용하는 게 더럽게 마나를 잡아먹어서 망정이었지, 이처럼 돌풍 10개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있었다.
‘리스크만 잘 관리해주면 돼.’
KA 청룡이 그랬던 것처럼, 너무 무리할 경우 하트 다운에 빠질 가능성은 레드 데빌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KA 청룡이 보였던 어리석음을 홍진영이 따라할 만큼 그는 어리숙하지도, 바보도 아니었다.
한낱 개구리 왕이라 할지라도 왕은 왕인 것이다.
‘KA 청룡이 했던 병신 짓은 절대 기대하지마라. 나는 다르니까.’
씩 웃는 홍진영의 시야엔 잘 관리되고 있는 출력 정보가 있었다.
-주의! 최대 출력이 3800hp에 근접할 경우 하트다운 가능성이 커집니다.
-실시간 출력 사용량 : 61.84% // 2350hp -예비 출력량 : 1450hp.
-상태, 매우 양호.
‘좋아. 이 정도면 훌륭하지.’
돌풍이 휘몰아치는 경기장.
잠시 후 이면세계에 숨어들었던 악튜러스가 방패를 앞세우며 현실로 빠져나왔다.
‘이면세계에 있을 수 있는 한계선이 있어. 나도 리스크를 관리할 때야.’
악튜러스가 나왔다.
레드 데빌이 소리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사이드를 겨눴다.
홍진영은 자신만만했다.
‘출력은 이쪽이 훨씬 위다. 이거 다윗과 골리앗 싸움이라고!’
더 이상 숨지 않는 악튜러스가 코리아 일렉트로닉스 마크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안티 매직 쉴드를 전면에 내세웠다.
어느샌가 두 골렘 사이에 전율이 감돌고 있었다.
< #32 개구리 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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