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파이트-94화 (94/173)

< #32 개구리 왕 >

의미 없는 대화가 지속됐다.

하지만 코어를 주겠다는 약속은 끝내 받아내지 못했다.

회사 관계자들이 떠나가고 자리에 남은 강준이 표정을 구겼다.

“나는 저 사람들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강준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한성철도 말을 붙였다.

“저거 다 개소리야. 저런 대기업에서 A 등급 코어 하나 못 밀어준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라고.”

“아니 형. 그럼 왜 말을 안 했어. 나만 입 아프게 떠들어댔잖아.”

“지들이 안 된다는 내가 뭘 어쩌겠냐? 회사 사정 때문에 안 된다는데.”

“진짜 저것들 무슨 생각이지? 이러다 악튜러스가 우승도 못하면 지들 손해 아냐?”

듣고만 있던 석민도 이쯤에서 목소리를 냈다.

“당연히 손해죠. 저기 회사 사람들도 악튜러스가 우승하길 바랄 걸요?”

“그런데 왜 저 지랄이래. 난 이해가 안 된다. 쟤들 바보인가? 한 번 져줘야 정신 차리나?”

석민은 어렴풋이 감이라도 잡고 있었다.

“만약 일부로 안 내주는 거면 저와 악튜러스를 시험해보길 원하는 거겠죠.”

“시험을 해본다고? 아니 다 검증 끝나고 후원해주는 거 아니었어?”

“그건 아니죠. 저흰 새파란 신인이잖아요. 코리아 일렉트로닉스도 긴가민가한 거겠죠. 이대로 계속 밀어줘야하는지,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철수해야하는지. 저들도잘 몰라요. 그래서 악튜러스를 시험해보는 거라면 대충 이야기가 맞아요.”

“아니 지금까지 그렇게 기적적으로 이겨왔는데 무슨 시험이 필요해?”

“그만큼 월드 그랑프리가 만만하지 않다는 거겠죠. 당장 국내 대회만 본다면 아저씨 말대로 코어 하나만 밀어주면 돼요. 하지만 검증도 안 된 선수를 세계 대회까지 밀어붙이는 건 회사 입장에서도 리스크가 엄청 큰 거겠죠. 그래서 계속 재는 거예요.”

한성철이 말을 붙였다.

“애 말이 맞아. 국내 대회에서 감당할 리스크랑 완전히 다른 거겠지. 확실히 세계로 나가게 되면 천문학적인 돈이 투자되니까. 그 돈을 생각해보면 저쪽에서도 아마 확실한 걸 원할 거야.”

“아니 그렇게 잴 거면 애당초 후원을 해주지 말던가. 안 그래?”

셋은 조용해졌다.

회사의 의도를 대충 파악했으니 여기에 대해 좀 더 생각한 것이다.

강준은 그래도 감정적이었다.

“기분 나쁘네. 아무리 대기업이라지만 너무 한 거 아냐?”

그에 반해 한성철은 현실적으로 나섰다.

“그래도 어쩌겠냐? 대기업 후원 없이는 월드 그랑프리 문턱도 못 밟는 현실인데.막말로 지금 악튜러스에게 지원 안 해줬어봐. 준결승전도 힘들었고, 결승전에서 악튜러스가 유리하단 말도 못 들었을 걸? 하는 짓은 꼴배기 싫어도 그 정도는 우리가 감내해야지. 어찌됐거나 쟤들도 우리 우승을 바라고 있잖아.”

“아니 내가 답답한 건 국내 우승이 코앞인데 이걸 안 밀어주는 거야. 진짜 조금만밀어주면 되는데. 이러다 지면? 지면 재들 손해야. 최소한 국내 우승이라도 확실히 챙겨줘야지.”

“그러게. 국내에서 나가리 되면 쟤들도 손해일 텐데. 지금 악튜러스한테 밀어준 돈만 해도 수백억 아닌가? 못해도 오백억이 넘어갈 텐데.”

석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정도 리스크는 감안하겠다는 거죠.”

“수백억인데?”

강준은 어이가 없었다.

석민은 차분한 어조를 이어갔다.

“저희와 보는 시각이 다른가 봐요. 저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 백 만원에 벌벌 떨던 아이였는데, 어느 순간 큰돈을 만지다보니 십억이란 돈 앞에서도 무덤덤해졌어요. 아마 그런 거겠죠.”

“아니 그래도... 아이씨.”

“그래 맞네. 쟤들 입장에서는 지금 악튜러스에게 투자된 수백억 정도는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 거네. 나중에 가면 지금보다 스케일이 더 커질 텐데, 거기서 입을 손해에 비하면 이건 새 발의 피니까.”

세 남자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 침묵을 깨트린 건 석민이었다.

“제가 보니까 저쪽은 목적이 확실한 거 같아요. 작은 이익보다 큰 이익에 집중하고 있어요.”

“여기서 우승만 해도 광고 수입이 얼만데... 아오 저것들.”

“아저씨, 코리아 일렉트로닉스는 국내 광고에 목매달지 않아요. 세계를 상대로 장사하는 글로벌 대기업이잖아요.”

한성철도 말을 덧붙였다.

“하긴 거기 방산업체잖아. 무기 팔아먹는 데니까 한국 같은 작은 시장에 연연하진 않겠지.”

강준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럼 어떻게 해? 말 들어보니까 코어는 안 내주겠네.”

석민은 코어에 대한 아쉬움이 강준보다 덜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받은 지원만 해도 과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긴 해요. 검증도 안 된 신인에게 이 정도까지 투자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쪽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석민은 선을 그었다.

“애당초 그쪽에선 저흴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들 이익을 위해 투자한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 너무 섭섭할 필요도 없고, 저희도 저희 이익만 챙기면돼요.”

정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바로 태도의 문제.

그들의 태도가 불량스럽다고 수백억대의 지원을 마다하겠는가?

나중에 가면 수천억대로 불어날 지원을 말이다.

아니었다.

한성철도 한 마디 했다.

“그래 맞아. 저쪽 태도에 뭐 신경 쓸 거 있어? 우리야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고 아니다 싶으면 냅다 버리면 되는 거지. 후원할 데가 저기 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국내우승만 해도 밀어주겠다고 줄서는 기업들이 어디 한둘이겠냐고?”

서글프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요즘 시대에 의리가 어딨어? 없어. 그냥 서로 안 맞으면 바로 갈라서는 거야. 그러니까 계약을 똑바로 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한 달짜리 계약은 진짜 신의 한수였다.”

한 달짜리 계약.

애당초 회사가 슈퍼갑인 입장이었기에 가능한 거였지, 만약 상황이 달랐다면 계약 기간이 달랐을 것이다.

“그건 저희가 계약을 잘한 게 아니라 애당초 회사가 유리한 입장이니까 계약이 그렇게 된 거죠. 저쪽에선 저희가 슈퍼을이니까요.”

“그렇긴 하지.”

석민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제가 보니까 이번 대회를 이겨도 회사 쪽 간섭은 계속 될 거 같아요. 막말로 저와 악튜러스가 검증 안 된 신인이잖아요?”

“아니 그래도 석민아. 그쯤 가면 검증은 됐겠지.”

“아니요. 악튜러스가 막시무스도 아니고, 월드 그랑프리 첫 출전인데 검증은 절대 안 돼요. 그쪽에선 저희가 우승할 그릇인지 계속 의심할 거예요. 끝까지요. 그리고 제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따로 있어요.”

“그게 뭔데?”

“간섭이 심해지다 보면 경기 자체도 끼어들려고 할 거예요. 서로 우승을 원하는 건 맞지만, 방식이 다른 거죠. 저야 저와 악튜러스가 힘을 합쳐 우승하길 원하지만, 회사 쪽에선 무조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고 하니까요. 그래서 베타고 간섭이 더 심해질 거예요.”

석민은 다가올 미래를 어느 정도 내다보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회사에선 악튜러스에게 지원한 장비를 빌미로 베타고에게 모든 명령권을 넘기라고 요구할 수도 있어요. 어차피 저기서 지원한 장비는 저희께 아니니까. 빌린 거잖아요.”

강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 설마. 그럴 거면 굳이 우리랑 계약할 이유가 있겠어? 선수 없이 슈퍼컴퓨터에게 다 맡길 거면 그냥 자기들끼리 골렘 하나 만들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겠지.”

“그게 KA 청룡이었잖아요. KA 청룡은 이미 끝났어요.”

“아... 그렇네.”

“KA 청룡에게 했던 걸 저희한테 똑같이 요구할 거예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이요. 그래서 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그건 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해요. 한 마디로정도를 넘어선 간섭인 거죠.”

한성철이 석민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니?”

“어떻게 하긴요. 그렇다고 해서 그쪽 지원을 버릴 수도 없어요. 현실적으로 대기업 후원은 꼭 필요하니까.”

그들은 석민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S급 헌터가 엄청 대단하긴 했어도, 오랫동안 헌터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골렘 장비를 전문적으로 생산해내는 대기업보다 지원이 월등하다고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헌터인 제 아빠가 엄청 대단하긴 해요. 세상에 몇 없는 S급 헌터시잖아요. 하지만 아빠가 벌어온 걸로는 힘들어요. 그리고 아빠한테 그런 부담을 주기도 싫고요. 차라리 기분 더럽더라도 아빠 돈보단 회사 쪽 꽁돈을 활용하는 게 더 낫죠. 그게 맞아요.”

“그럼 간섭은?”

“그러니까 선을 정해놔야죠. 다음 계약 때 확실히 못 박아둘 거예요. 선을 넘지 말라고 으름장을 내놓는 거죠.”

“거기 대기업인데 우리 쪽 으름장을 듣기나 할까?”

“콧방귀나 안 뀌면 다행인데.”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제가 선을 정해놨다는 거예요.”

이런 아이 또 없습니다.

확고부동한 석민의 태도에 두 어른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두 어른이 서로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나야 뭐 석민이만 믿고 가는 거니까. 형은?”

“내가 무슨 낯짝으로 간섭을 하냐. 난 아무 생각도 없다. 묻지 마라.”

강준과 한성철은 아이의 뜻에 크게 간섭할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이야 국내 우승만으로도 감지덕지했으니까.

이야기는 끝났으나 우려의 목소리가 잠식된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고분고분하게 나올까?”

“절대 아닐 걸요. 지금 계약도 한 달짜리인 게 저쪽이 슈퍼갑이라서 그래요. 저흰절대 어떤 식으로든 저쪽 입장에 토를 달 수 없어요. 저쪽에서 지원해주는 돈만 해도 얼만데.”

그게 현실이었지만, 아이는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

두 어른이 보기엔 너무나 험난해보였다.

“그래서 하는 소리야. 석민아, 뭘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계약 하는 상대가 어른도 아니고 애잖아요.”

석민은 살며시 웃었지만, 두 어른이 보기엔 어린 악마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애처럼 땡깡 부리면 저쪽에서도 별 수 없어요. 어쩌겠어요? 상대는 애인데. 답 없어요.”

“그렇긴 하네.”

“이상하게... 말이 될 것 같기도 하네?”

계약하는 상대가 다 큰 어른이었다면 좆까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라면 대기업 입장에서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

“중요한 건 아저씨들의 태도에요. 아저씨들이 잘해주셔야 저쪽에서도 빠르게 포기할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제 고집이 황소고집이라고 하는 거죠. 절대 그 고집 못 꺾는다고요. 아빠야 제 편이니까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황소고집 하니 석민은 저한테 땡깡 부리던 독일 여아가 떠올랐다.

“우리야 뭐 그렇게 할게.”

“다음 계약 때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하네.”

“그런데 그렇게 땡깡 써도 안 된다고 하면?”

석민은 씩 웃었다.

“아니요. 꼭 그렇게 되진 않아요. 그쪽에서도 발등에 불 떨어졌거든요. 인터넷 기사 못 보셨어요?

“무슨 기사?”

“코리아 일렉트로닉스가 방위산업체잖아요. 그런데 방위산업체가 요즘 골렘 파이트와 연관성이 엄청 높아졌어요. 제리코 아시죠?”

“제리코?”

세계 1위 방산업체라 할지라도 일반인에겐 생소할 수 있었다.

그나마 강준과 한성철이 제리코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는 막시무스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막시무스 후원하는데 아냐?”

“그 제리코가 막시무스를 후원하면서 기업 총 매출이 몇 년 사이 크게 올랐거든요. 골렘 파이트가 저희 같은 일반인들에겐 단순히 볼거리지만 기업 입장에선 공개 무기 시험장이거든요. 후원하는 대전 골렘의 성적이 좋으면 좋을수록 그게 매출 증대효과로 바뀌는 거죠.”

“그거야 우리도 알고 있지.”

“나도 들어는 봤어. 골렘 파이트가 방산업체에겐 무기 시험장이라고.”

“다른 방산업체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코리아 일렉트로닉스만 매출이 그대로에요. 작년엔 오히려 줄어들었어요. 이게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거죠. 지금 그쪽에서도 후원할 골렘을 찾고 있어요. 물론 그게 악튜러스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골렘들이 대부분 특정 기업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는 이상, 코리아 일렉트로닉스에게 주어진 카드는 별로 없어요.”

한성철과 강준은 넋 나간 표정으로 석민만 쳐다봤다.

자기들이 어른인데 어째 애보다 더 모르고 있었다.

“악튜러스를 밀어주던가 아니면 검증 된 다른 골렘과 전속 계약을 맺던가. 둘 중 하나인데 제가 볼 땐 계속 밀어줄 것 같아요. 지금 악튜러스 말고 딱히 후원할 골렘이 제가 알기론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코리아 일렉트로닉스가 겉으론 슈퍼갑처럼 보여도, 사실상 슈퍼갑이 아닌 슈퍼을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굳이 비굴하게 빌빌 거릴 필요도 없어요. 저희가 세게 나가면 아쉬운 건 그쪽일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