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KA 청룡 >
악튜러스는 기다리며 먼저 나서지 않았다.
먼저 나섰다가 상대에게 틈을 보인다면 상대는 그 틈을 파고들어 잃어버린 두 마안을 바로 찾을 것이다.
석민은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여기서 박대한 대위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생각 있는 쪽은 오히려 코리아 일렉트로닉스 본사였다.
“보니까 간을 보고 있군.”
회장이 운을 뗐음에도 모두는 조용했다.
회장 외에는 경기 자체를 볼 줄 모르는 것이다.
“먼저 움직인 놈이 불리한 상황이다. 베타고에게 따로 지시해.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고.”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비서가 노트북 키보드를 빠르게 두들겼다.
베타고에게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이다.
회장의 말대로 베타고는 잠시 후 움직임을 보이려다가 본사에서 말리자 그 판단을 뒤로 물렸다.
조용한 대치 상황이 계속 됐다.
석민은 아직도 조용한 KA 청룡을 보고선 입술을 매만졌다.
‘왜 아직도 안 움직이는 거지? 내가 노리는 걸 알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먼저 수를 보이는 쪽이 불리한 건 사실이다.
상대편에서 이를 보고 바로 대응을 할 테니까.
‘우선권이 나한테 있기는 한데.’
석민은 숨어 있는 악튜러스가 조금 더 유리하단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서진 않기로 했다.
그 대치 상황이 지속되자 젊은 회장이 피식 웃었다.
“버러지 같은 애새끼가 머리를 쓰는군. 좋아, 계속 대기해. 보니까 상대도 이면세계란 곳에 오래 못 있는 모양이니까.”
긴 줄다리기 끝.
악튜러스는 더 이상 이면세계에 있지 못하고 빠져나왔다.
이면세계는 곧 죽은 자의 세상.
현실과는 엄연히 다른 곳으로 그런 곳에 계속 머물렀다간 영혼이 그쪽 세계에 귀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오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나오진 않았다.
악튜러스는 모습을 드러낸 직후 준비된 대검을 내리쳐 제 발치에 있던 KA 청룡의두개골을 박살냈다.
본래 미끼로 놔둔 것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더 이상 미끼로 쓸 수 없어 그냥 부숴버린 것이다.
지켜보던 회장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개 같은 놈이군. 이쪽에 내줄 바엔 그냥 부숴버리겠다는 건가?”
KA 청룡과 잃어버린 머리 사이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기에 악튜러스가 그 머리를 노렸음에도 KA 청룡은 그저 넋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악튜러스는 심하게 짓이겨진 두개골에서 튀어나온 눈깔 하나를 스스로에게 이식시켰다.
모두가 놀랐으나 경기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은 아니었다.
물론 실소유는 KA 청룡이었지만 경기장 내에서 상대 장비를 역이용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방법.
싸움을 하다보면 상대가 놓친 무기를 주워 싸우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골렘 파이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켜보던 회장이 뒷목을 잡았다.
“뭐야? 저게 돼?”
회장이 가진 골렘 파이트에 대한 지식은 너무 깊지 않았다.
골렘 파이트야 야구나 축구처럼 단순히 스포츠에 불과했으니까.
회장의 시선이 전속비서에게 향하자 전속비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가능합니다 회장님. 룰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회장은 욕지기가 나오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다른 지시를 내렸다.
“지금 저 눈깔부터 뽑아내. 당장!”
이기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생각보다 회장이란 사람은 감정에 많이 휘둘리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그런 면모가 베타고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베타고는 제 판단을 거스르고 최우선적으로 본사 명령을 이행하기로 했다.
박대한 대위에게 새로운 명령이 하달됐다.
-추천 명령 : 적이 가져간 마안 회수.
-최우선 과제입니다. 상대가 탈취해간 마안을 회수하십시오.
어디 그것뿐이랴?
성난 회장은 이쯤에서 끝장 보기를 원했다.
“파이어 번도 쓰란 말이야. 언제까지 휘둘리기만 할 거야! 이쯤에서 기도 콱 죽여놔야지!”
회장의 일갈에도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는 그의 전속비서는 명령 그대로 베타고에게 하달했다.
-추천 명령 : 파이어 번을 사용하십시오.
여기서 박대한 대위는 누가 명령하는지조차 모른 채 그대로 이행하기 바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베타고의 충실한 꼭두각시였으므로.
-파이어 번을 시전합니다.
-코어 출력이 빠르게 상승합니다.
-알림! 파이어 번 시전 뒤 한계치까지 적을 몰아붙입니다.
-주의! 파이어 번은 하트다운의 위험성을 증가시킵니다.
-경고! 하트다운 상태에서는 빠른 대처가 불가능합니다.
-파이어 번은 적절치 못한 사용입니다.
갑자기 횡설수설하는 베타고의 말에 박대한 대위는 어리둥절했다.
난데없이 파이어 번을 사용하라는 것도 이상했는데, 마지막 글귀엔 적절치 못한 사용이라고 나왔으니까.
‘뭐야? 에러인가?’
그런다고 어쩌겠는가?
불꽃은 이미 심장에 점화됐는데.
-파이어 번 시전까지 앞으로 0:03.
-파이어 번 시전까지 앞으로 0:02.
-파이어 번 시전까지 앞으로 0:01.
-Fire Burn!
-하트다운까지 앞으로 20초.
20초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 KA 청룡이 마안을 이식한 악튜러스를 향해 덤벼들었다.
이때 악튜러스는 마안의 동력을 사용했고, 이어지는 푸른 빛줄기가 KA 청룡에게 쏘아졌다.
매직 미사일.
아주 위력적인 마안이었다.
직격당한다면 현재 KA 청룡이 가진 장갑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매직 미사일은 현재 코어를 노리고 있었고, KA 청룡의 입장에선 이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베타고는 박대한의 시야상에 매직 미사일을 피할 수 있는 회피 동작 등을 미리 투영시켰다.
푸른 실루엣으로 된 KA 청룡이 날아오는 매직 미사일을 곡예처럼 피하고, 이를 본 박대한 대위는 그대로 따라했다.
KA 청룡은 베타고가 지시한대로 매직 미사일을 훌륭하게 피해냈다.
만약 파이어 번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회피 자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파이어 번을 사용한 뒤 그 움직임이 비약적으로 빨라졌기 때문에 회피까지 가능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빠르기.
매직 미사일을 피한 KA 청룡은 악튜러스를 노리며 그의 발치까지 무섭게 파고들었다.
석민이 놀랐다.
‘빨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KA 청룡은 악튜러스가 2차 매직 미사일을 쏘기 직전 악튜러스의 면상을 노리고 주먹을 날렸다.
피스트 마법이 어느새 장전되고 날아가는 주먹에 실렸다.
이때 악튜러스의 한쪽 눈에선 매직 미사일이 쏘아지고 있었고, 그 방향엔 날아오는 주먹이 있었다.
공중에서 매직 미사일과 주먹이 부딪혔다.
주먹을 꿰뚫는 매직 미사일.
그 위력은 강력했으나 주먹 자체는 막지 못했다.
매직 미사일조차 무시해버린 주먹이 악튜러스의 코앞까지 날아왔다.
코앞까지 날아온 주먹을 피하기 위해 악튜러스는 급히 이면세계로 숨어들었고, 그대로 악튜러스를 지나치는 KA 청룡이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아직도 파이어 번은 유효.
악튜러스도 이면세계에 너무 오래 있어 다시 현실로 나오는 시간이 짧아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KA 청룡이 다시 나타나는 악튜러스를 찾아냈다.
-추천 명령 : 지속적인 압박.
-적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베타고는 악튜러스를 놓치지 말 것을 박대한 대위에게 계속 주문했다.
그리고 그 명령 뒤에는 코리아 일렉트로닉스 본사가 있었다.
“계속 몰아붙여. 이면세계에서 튀어나오는 시간이 계속 짧아지고 있어. 이건 상대도 더 이상 이면세계에 숨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회장은 팔짱까지 끼면서 상황을 진두지휘했다.
물론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의 전속비서가 말렸다.
“회장님, 너무 무리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적당히 치고 빠지셔야 돼요.”
하지만 회장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회장에겐 저 고물상에서 조립됐다는 골렘이 때려 부수고 싶은 일념뿐이었으니까.
“닥치고 내가 밀어붙이라면 밀어붙여. 무슨 말이 많아.”
“그럼 지시하신대로 계속 몰아붙이겠습니다.”
이때 회장은 무언가 아쉽다는 느낌을 쉽사리 지우지 못했다.
‘내가 직접 했으면 금방 끝났을 거 같은데.’
회장은 자기가 직접 조종했다면 이번 경기는 쉽게 가져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자신 있었으니까.
“좋아. 그렇게 계속 몰아붙여. 아주 박살내버리라고.”
회장이 보고 있는 스크린 속에서 KA 청룡은 악튜러스를 향해 두 주먹을 난타하며무섭게 몰아붙였다.
날아드는 원투 펀치에 악튜러스의 상체 장갑이 타격당하고 뒤로 밀렸다.
버티려 안간힘 쓰는 악튜러스를 향해 또 다시 거리를 좁힌 KA 청룡이 이번엔 복부를 노린다.
복부에 꽂히는 주먹.
그 공격에 악튜러스 전신이 들썩이며 그 육중한 몸이 공중으로 살짝 떠올랐다.
그럼에도 KA 청룡은 아직이었다.
계속 몰아붙이는 KA 청룡은 어퍼컷을 적중시켰고, 이어 백스핀 블로를 성공시키며 악튜러스의 턱을 가격시켰다.
그 바람에 석민의 시야는 요동치며 적색으로 물들여졌다.
‘이면세계에 너무 오래 있었어.’
석민은 아까 전부터 악튜러스에게 이면세계에 숨어들 것을 주문했으나, 악튜러스는 그 명령을 불이행했다.
악튜러스도 한 번 언급했던 것처럼 어느샌가 그 한계점에 들어선 것이다.
더 이상 이면세계에 숨는 건 불가능했다.
‘아까 그 대치상황에서 너무 오래있었던 거야. 그게 독이 됐구나.’
악튜러스는 파이어 번을 사용하고 거칠게 몰아붙이는 KA 청룡에게 무자비로 얻어맞았다.
석민은 일단 버티기로 했다.
‘풀하트 상태라면 저 상태가 오래가진 않을 거야.’
그러면서 이런 의문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기회를 잡았다지만 KA 청룡이 이성을 잃은 듯 막 몰아붙였으니까.
‘그런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이상해. 베타고가 감정에 휘둘려 이렇게 막 나올 리가 없을 텐데.’
지켜보는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환호했고, 몇몇은 KA 청룡을 응원하는 국방색 깃발을 휘날리며 크게 소리까지 질러댔다.
이를 생중계하는 아나운서들도 그 입이 바빠진다.
“악튜러스, 계속 흔들리고 있습니다!”
“파이어 번을 사용한 KA 청룡이 불타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는 군요. 파이어 번을 사용한 KA 청룡, 지금까지 불리하던 상황을 전부 뒤집고 있습니다.”
“악튜러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이 순간 KA 청룡의 어퍼컷이 또 다시 적중합니다.”
“저기 마안이 튀어나오는 군요!”
“악튜러스! 지금 마안까지 잃었습니다.”
두 번째 이어지는 어퍼컷에 악튜러스는 아까 전 얻었던 마안을 도로 내놓고 말았다.
꼴사납게 나동그라지는 악튜러스와 튀어나온 마안이 바닥을 구른다.
악튜러스를 지키는 티타늄 외골격은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상황이 180도로 바뀌었다.
이를 지켜보던 회장이 기분 좋게 소리를 내질렀다.
“좋았어! 바로 그거지.”
흥분한 회장과 마찬가지로 덩달아 기분이 좋던 임원들이 박수갈채를 날리며 분위기를 띄웠다.
“회장님,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회장님, 이참에 골렘 하나 장만하셔서 월드 그랑프리에 나가시죠. 저희가 전폭적으로 밀어드리겠습니다.”
“최고십니다!”
그러나 그들 중 딱 한 명.
베타고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고 있던 전속비서만은 표정이 좋질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보여주는 폭풍 같은 몰아침 뒤에 찾아올 무시무시한 후폭풍을 말이다.
잠시 후 회장이 보는 시야가 적색으로 물들여졌다.
당황한 회장이 고개를 휙 돌려 자신의 전속비서를 찾았다.
“뭐야, 저거 왜 저래?”
전속비서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회장님, 하트다운입니다.”
“뭐? 하트다운? 그게 뭔데?”
회장이 가진 얕은 지식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전속비서가 입 거친 회장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렇게나 말렸는데.
무식한 남자.
“회장님, 하트다운도 모르세요?”
“그게 뭐냐고?”
“숨고르기입니다. 회장님께서 너무 무리하게 끼어드셨어요. 그냥 베타고에게 맡기셨다면 저런 불상사는 아마 없었을 겁니다.”
“뭐?”
회장의 시선이 다시 스크린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악튜러스를 찌그러트리려 했던 KA 청룡이 미동조차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저거 아예 못 움직이는 거야?”
“회장님, 옆에 나와 있는 시간을 보세요.”
전속비서가 가리키는 곳엔 하트다운이 풀려나는 시간이 카운트되고 있었다.
13초.
생각보다 길었다.
“단축 좀 시켜봐.”
“이미 한 상태입니다.”
“이미 했다고?”
“네.”
회장의 낯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시발. 좆됐군.’
< #28 KA 청룡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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