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개미지옥 >
뭐지? 뭘까?
대체 무슨 힘일까?
적어도 그들이 모르는 새로운 능력이었다.
링화는 뻗었던 언월도를 휘저으며 귀신처럼 변한 상대를 압박했다.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이때 악튜러스는 대응하지 않고 어둠 속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야오린이 미간을 좁혔다.
‘우리가 모르는 능력이야.’
정신을 차린 스티븐도 바바리안의 시야를 통해 언월도에 공격을 당하고도 사지 멀쩡하게 이면세계로 숨어드는 악튜러스를 보았다.
소름이 끼쳤다.
“시발, 뭐야? 유령이야?”
유령이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했다.
신출귀몰한데다가 모든 공격을 무시했으니까.
분명한 것은 경험 많은 그들도 모르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능력인지 바로 파악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스티븐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마법? 아티팩트? 뭐야?”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계속 어리둥절 하는 스티븐과 다르게 야오린은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상대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B급 골렘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수준이었다.
정신이 없어 전체 장비를 살펴볼 여력은 없었지만, 대충 보니 크게 바뀐 것도 없어보였다.
‘진짜 뭐지?’
스티븐이 급히 제 골렘을 일으켜 세웠다.
꼴사납게 나동그라졌던 바바리안이 땅을 짚고 일어나려하자 유유히 나타난 악튜러스가 발길질로 바바리안의 턱을 차주며 또 다시 넘어트렸다.
스티븐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야! 뭐라도 해봐! 지금 못 일어나고 있잖아!”
야오린과 다르게 스티븐은 골렘 다루는 실력이 프로급은 아니었다.
그래서 자기보다 실력 좋은 상대에겐 한심할 정도로 추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바바리안으로 인해 링화의 움직임이 더욱 바빠졌다.
바바리안의 몫까지 링화가 대신하여 움직여야 했으니까.
순간 가속기.
신속기를 통해 빠르게 근접한 링화가 언월도를 휘두르자 바바리안에게 칼을 꽂으려는 악튜러스가 이면세계에 숨어들었다.
동시에 대검은 그대로 내리쳤는데, 놀랍게도 악튜러스의 대검은 상대방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야오린은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뭔지 알겠어.’
악튜러스는 다시 이면세계에 숨어들어 완벽히 자취를 감추었다.
상대하는 입장에선 공포가 따로 없었다.
링화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라진 악튜러스를 찾았다.
동시에 야오린은 미간을 좁혔다.
‘이유가 있었어. 괜히 우릴 불러냈던 게 아니야.’
야오린은 그 꼬마가 왜 자기 골렘을 고물상으로 불러들였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찾아오는 전문 도둑들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바바리안이 가까스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야오린이 급히 소리쳤다.
“뒤를 봐!”
급히 고개를 돌린 바바리안.
하지만 악튜러스의 대검이 더 빨랐다.
섬광처럼 꽂히는 검격.
바바리안의 한쪽 팔이 순식간에 썰려나갔다.
“젠장! 퍽퍽퍽!”
스티븐이 욕지기를 내뱉으며 꽉 쥔 주먹으로 제 앞의 운전대를 내리쳤다.
야오린은 그런 스티븐 따위야 신경 쓰지 않고 링크에 집중했다.
상대는 귀신처럼 몸을 숨기며 공격과 방어를 꽤나 자유롭게 하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되지는 않았다.
야오린이 분석하듯 입을 열었다.
“내가 보니까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되진 않아. 이쪽에서 막무가내로 공격하면 상대도 숨기에만 급급할 거야. 공세를 계속 취해. 아직 우리가 유리하다고.”
야오린의 판단은 정확했으나 스티븐이 문제였다.
“그거 확실해?”
오히려 반문할 정도.
“확실해.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집중하라고.”
“아니 무슨 귀신처럼 숨어대는데 공세를 계속 취하래. 저거 못 잡아. 이거 졌다고.”
스티븐은 협공해서 잡을 생각보다 이미 졌다는 생각부터 했다.
마치 귀신처럼 변한 상대를 어떻게 잡겠는가?
“이길 수 있다니까! 공격과 방어가 한꺼번에 안 된다고!”
그래도 야오린이 다그치자 최소한의 성의는 보였다.
바바리안이 팔 하나 잃은 상태에서 어둑한 주변을 훑었다.
그때 귀신처럼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온다.’
바바리안이 제 앞에서 덮쳐오는 정체불명의 실루엣을 향해 한손 도끼를 강하게 내리쳤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짓.
악튜러스는 마치 농락하듯 유유히 바바리안을 지나쳐 완전한 이면세계로 숨어들었다.
욕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스티븐은 역시나였다.
“시발! 이거 못 이긴다니까? 우리가 졌어.”
이쯤에서 스티븐은 포기를 했다.
뭘 해도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상대를 잘못 봤어. 어쩐지 대놓고 움직이더라.”
이미 졌다고 생각한 스티븐은 상대 골렘이 언제부터 저런 능력을 얻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지는 건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모든 시도에서 성공만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실패할 경우도 분명 있었고, 그 경우 투입된 골렘을 잃는 일이야 이따금씩 있었다.
그래서 스티븐은 당장 전투에 집중해도 모자를 판국에 다른 생각을 했다.
이번 일을 실패했을 때 보스의 반응 같은 것을 생각한 것이다.
스티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스티븐의 태도에 야오린은 화부터 났다.
상황이 절대 불리한 게 아닌데 이 바보는 벌써부터 포기해버렸으니까.
“야!”
야오린이 소리쳤을 때 스티븐은 딴 생각을 하다가 바바리안의 머리를 날려먹었다.
링화의 추격으로부터 사라진 악튜러스가 상대적으로 공세가 취약한 바바리안부터 노린 것이다.
이로써 바바리안은 팔과 머리가 잘려나가며 잠시간 전투 불능상태가 됐다.
스티븐은 시야가 새카맣게 변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카우터를 벗어냈다.
그리곤 당당하게 말했다.
“곧 경찰 뜰 거야.”
“그래서?”
“뜨자고.”
“그게 할 소리야? 이렇게 포기하자고?”
“이기든 지든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거 5분 안에 절대 작업 못 쳐. 애당초 우리가 진 게임이라고.”
스티븐의 말도 틀린 게 없었다.
그들이 목표했던 바는 빠르게 악튜러스를 제압하고 난 뒤 장비를 터는 것이었지. 여기서 악튜러스란 골렘과 씨름해서 이기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런 건 경기장에서 해야 할 일.
그들은 선수가 아니라 도둑이었다.
“난 아직이야.”
하지만 야오린은 승부욕이 발동했는지 쉽사리 악튜러스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런 야오린을 무시하는 스티븐이 무빙 아머리의 시동을 걸었다.
그러면서 씩 웃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작업에 쓰는 골렘들은 최소 장비만 맞추는 거지. 실패할 경우도 생각해야 하니까.’
물론 그 장비들이 엄청 싸진 않았으나 적어도 스티븐에겐 싼 편이었다.
그들은 스케일부터가 달랐으니까.
무빙 아머리가 움직이자 석민이 그 소리를 들었다.
어차피 이면세계에 있다면 악튜러스는 안전했으므로 석민은 잠시 링크를 끊고 그아래를 내려다봤다.
‘도둑 아저씨들, 그렇게 도망치시면 안 되죠.’
그들이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는 몰랐으나 미리 대비는 해놨었다.
석민이 다시 스카우터를 썼을 때 주변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었다.
석민은 다시 악튜러스와 링크했고,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무빙 아머리에 시동을 걸고 도망치려던 스티븐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젠장!’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은 스티븐이 급히 옆쪽을 쳐다봤다.
그곳엔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던 야오린이 있었다.
스티븐은 신경질 적으로 그녀의 스카우터를 벗겨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지금 경찰 떴어. 빨리 내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고 야오린은 아직도 악튜러스에 대한 미련을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스티븐은 그런 야오린을 다시 한 번 강하게 윽박질렀다.
“빨리 움직이라고! 여기서 잡힐 생각이야? 이번엔 증거가 있어서 잡히면 안 돼.”
말을 마치매 스티븐은 무빙 아머리에서 뛰어내렸다.
야오린은 스카우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가 마지못해 무빙 아머리에서 내렸다.
여기서 잡힌다면 곤란해질 것이다.
둘이 무빙 아머리에서 내림과 동시에 기다리고 있던 이루리가 둘을 마주보았다.
그녀가 능력자라는 것은 스티븐은 잘 알고 있었다.
아이에게 고용된 C급 헌터였으니까.
스티븐은 곧바로 총을 꺼내 겨눴다.
이루리가 당황했다.
한국에서 총이라니.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잠시.
이루리가 몸을 움직였다.
빠른 움직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이루리에게 스티븐이 방아쇠를 당기며 반격했으나 애당초 일반인이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능력자를 이길 순 없었다.
마나보호막이란 것도 있었고, 그 움직임이 너무 빨라 아무리 총을 가졌어도 능력자를 맞추는 건 거의 요원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스티븐이 이루리에게 제압당하는 사이, 같이 있던 야오린이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스티븐과 다르게 야오린은 헌터 능력자였고, 그 능력은 도망치는데 나름 빛을 발했으니까.
사이렌 소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이루리에게 제압당한 스티븐은 계속 욕만 내뱉었다.
* * *
“안쪽 일은 어떻게 됐어요?”
석민은 경찰서에서 나오던 강준에게 물었다.
이때 강준은 자꾸만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아까 전 도망치던 야오린을 막아서다 몇 대 얻어맞았는데 그게 아직도 아픈 것이다.
“쉽게 인정을 안 하네. 혐의를 계속 부인하면서 미국대사관만 찾더라. 하지만 증거가 있으니까 아마 빼도 박도 못할 거야.”
“그래요? 그보다 그 도둑 누나는 아직도 못 잡았대요?”
석민은 도망친 야오린에 대해 물었다.
“놓쳤다고 하나봐. 아직도 못 잡았대.”
이루리가 있긴 했지만 총을 가진 스티븐을 제압하다가 야오린은 놓치고 말았다.
결국 놓쳤다는 말에 석민은 불만이 일었다.
“그 누나도 잡았어야 하는데... 좀 아쉽네요.”
“아 그 애... 무슨 주먹이 쇳덩이야. 나도 얻어맞고 깜짝 놀랐다.”
“저도 그 누나가 능력자인줄은 몰랐어요. 그보다 대표 아저씨는 어때요?”
“형? 아직도 안에서 죽는 소리하더라. 나보다 두 대 더 맞았거든.”
한성철 역시 강준과 마찬가지로 도망치는 소녀를 우습게보다가 된통 당했다.
중학생 정도 되는 소녀한테 얻어맞고 지금 병원을 갈까 말까 하는 상황.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네요. 저도 그 누나가 능력자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알았다면 아저씨들한테 그런 부탁은 안 했을 텐데.”
“그나마 D급이라서 천만다행이었어.”
“D급이요?”
“내가 이루리 씨한테 물어보니까 D급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하더라.”
“C급은 아니래요?”
“C급이었으면 우리가 치명상을 입었을 거래. 그래서 C급은 아니라고 하나봐.”
“그나마 다행이네요.”
“생각해보면 C급 정도 되는 능력자가 골렘 장비나 털진 않겠지. 그냥 레이드만 뛰어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에 석민은 공감하지 못했다.
도둑도 도둑 나름.
국내에서만 활동하는 전문 도둑이라면 모르겠지만 세계적인 수준이라면 일반적인 C급 헌터보다 벌이가 수백 배는 더 좋을 것이다.
“아쉽다. 그나저나 도망친 그 도둑 누나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요?”
“글쎄다. 뭐하고 있을지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야오린은 은신처로 숨어들어가 보스와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뭐? 스티븐이 붙잡혔다고?”
“응. 나도 가까스로 도망쳤고.”
“한심한 놈들. 실패한 것도 모자라 잡히기까지 하다니. 그보다 작업은 왜 실패한 거지?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는 있나?”
야오린은 가지고 나온 스카우터에 저장되어 있던 영상 자료를 그에게 넘겼다.
“보고 나서 판단해.”
둘 사이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영상 자료를 훑어보던 존 마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기하군. 이게 무슨 능력이지?”
“나도 모르는 거야. 이런 건 나도 처음 봤어.”
존 마커는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새 새로운 장비라도 얻었나? 자료 넘겨봐. 내가 직접 확인해보지.”
야오린은 자료를 넘기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컴퓨터를 통해 스카우터 자료들을 분석해봤다.
그러자 이전에 놓쳤던 부분들이 새롭게 발견됐다.
“장화가 바뀌었군. 고작 이것도 몰라 봤나?”
존 마커가 지적하자 야오린은 할 말이 없었다.
“미안. 아깐 몰라봤어.”
“한심하군. 그런데 빛깔을 보니... 설마 그건 아니겠지?”
“...아다만틴?”
야오린이 보고 있는 화면에선 미국 제리코 본사에 위치한 알파고가 분석한 내용이 있었는데, 알파고는 악튜러스가 신고 있는 장화의 재질을 아주 높은 확률로 아다만틴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덤으로 칠죄종 세트의 가능성까지.
존 마커 역시 야오린과 보는 화면이 동일했다.
그의 입꼬리가 조심스레 올라갔다.
“조만간 한국에서 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