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개미지옥 >
* * *
“뭐라고? 다시 말해봐.”
“무빙 아머리가 이동 중이야.”
“오늘 경기 없잖아? 안 그래?”
“없지.”
스티븐은 야오린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군부대에 처박혀 있던 목표물이 난데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단다.
‘왜 움직이는 거지? 더 좋은 곳에 숨기려는 건가?’
“알았어. 일단 계속 보고 있어. 만약 어딘가에 도착하면 바로 알리고.”
“알았어.”
통화를 마친 스티븐은 한동안 그 이유에 대해 추측해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움직이는 걸까?
그 의문은 몇 십분 뒤에 이어지는 통화로 더욱 증폭됐다.
“고물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뭐? 다시 말해봐.”
“고물상이라고.”
“거길 왜 가?”
“모르지.”
스티븐은 곧장 석민고물상 앞쪽 건물 위 옥상으로 찾아갔다.
그리곤 쌍안경으로 그 아래를 내려다봤다.
흙벽으로 둘러싸여 마치 요새 같았던 고물상은 더 이상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왜냐면 그게 사라져 있었으니까.
‘뭐야?’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한평생 숨어 있을 줄로만 알았던 목표물이 난데없이 쥐구멍에서 기어나왔으니까.
스티븐의 고민은 오래지 않았다.
스티븐은 곧장 국외로 전화를 걸었다.
“헤이 보스.”
“스티븐, 무슨 일이지?”
스티븐은 석민고물상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목표물이 군부대에서 나왔어.”
“나왔다고? 어디로 나왔다는 말이지?”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어.”
보스도 예기치 못한 소식에 놀란 모양.
“이유가 뭔지 알고 있나?”
“모르겠어. 군부대에 있다가 갑자기 고물상으로 돌아왔어. 어떻게 할까? 지금이라면 바로 칠 수 있는데.”
외국에서 공수해온 그들의 골렘은 현재 무빙 아머리에 실려 대기 중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고물상을 치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생각보다 치안이 잘 되어 있는 나라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마.”
“그건 알지. 하지만 야밤에 노린다면 생각보다 빠르게 털 수 있어.”
골렘을 이용한 전문 털이는 일단 소란스러운 게 문제.
그래서 그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수법은 일단 급습한 뒤, 급습에 사용 된 골렘 본체만 버리고 장비만 따로 챙겨 탈출하는 방식을 주로 이용했다.
여기서 턴 장비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포켓이란 획기적인 아이템이 있었으니까.
“일단 지켜봐. 잠시 들렸을 수도 있으니까.”
“다시 연락할게.”
그렇게 하루가 지났는데도 악튜러스란 골렘은 고물상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스티븐이 다시 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악튜러스를 감시한지 하루만이었다.
“목표가 안 움직여. 아예 옮겼나봐.”
“왜 옮긴 거지?”
여기에 대해선 스티븐도 알지 못했다.
“정확한 건 모르겠어. 아무튼 골렘은 군부대에서 빠졌어.”
“단순히 국내 도둑들만 경계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저번 사건에서 저쪽 골렘이 이겼지. 그래서 자신감을 얻은 게 아닐까?”
“어리석군. 전문 도둑들을 전부 같은 수준으로 보다니.”
“애잖아. 애아빠는 아직 돌아올 생각도 없어 보이고.”
“만약 오늘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밤에 움직여도 좋다. 포켓은 꼭 챙겨 와라. 운철로 된 장갑도 중요하지만 포켓 역시 중요하다. 만약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포켓만 가져와도 된다.”
씩 웃는 스티븐은 통화를 마쳤다.
그리곤 야오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오늘?”
“그래, 보스가 오늘 털래. 질질 끌어봤자 좋을 거 없잖아. 어차피 목표하던 게 밖으로 기어 나왔으니까.”
야오린은 아직까지도 꼬마에게 뒤통수 맞은 일을 잊지 못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자신을 꾀어내던 꼬마였다.
그런 꼬마가 또 머리를 쓰지 않았을까?
“함정이 아닐까? 난 이해가 안 돼. 함정 같기도 하고.”
“무슨 함정이야. 이런 곳에 군병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상대는 고작 B급 골렘이다. A급 골렘이 아니라고.”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동안 야오린은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왜 꼬마가 자기 골렘을 위험한 곳에 노출시켰는지를 말이다.
“난 계속 이해가 안 돼. 그 꼬마, 절대 바보짓을 할 아이가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내가 그 꼬마 때문에 경찰서 간 거.”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상대는 꼬마고 골렘도 B급 수준이다. 우리 골렘도 B급 수준이지만 우린 둘이야. 2대1이라고. 2대1도 못 이길 거 같아?”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경찰들은?”
“저번처럼 골렘 본체는 버리고 갈 거다. 버리고 갈 코어가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골렘들이 시간을 벌 동안 우리가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으니 그 정도 투자는 해야겠지.”
골렘이 제대로 난동을 피우려면 코어는 핵심이었다.
야오린은 그 코어가 아까워 한 마디 했다.
“그거 듀얼 코어도 가능한데 굳이 버려야겠어?”
“어차피 A등급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이 나라, 생각보다 치안이 좋아. 브라질 같은 데가 아니야. 다른 건 다 챙겨도 코어는 여차하면 버리고 갈 거다.”
듀얼 코어의 가치는 보통 싱글 코어보다 좋았다.
두 개를 엮어 쓰면 고출력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듀얼 코어조차 두 블랙맘바 멤버에겐 그저 그런 코어 중 하나였다.
스티븐 말처럼 A등급이 아니면 가치가 별로 없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 저녁이다. 그렇게 알고 있어.”
찝찝했지만 야오린은 일단 알겠다고 했다.
어둑한 방안.
컴퓨터 모니터에서 나오는 불빛이 야오린을 비춘다.
야오린은 여러 상념에 잠겼다.
‘아직도 모르겠어. 그 꼬마, 무슨 생각이지?’
그들이 석민의 생각을 눈치 챌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악튜러스에게 새 장비가 생겼다는 걸 절대 알 수 없었으니까.
이때 석민은 조용한 고물상 안에서 자기 핸드폰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핸드폰엔 놀랍게도 고물상 옆 건물 위를 비추는 몰래 카메라 화면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 화면엔 쌍안경을 들고 있는 스티븐이 있었다.
‘이 아저씨는 하루도 안 거르고 감시하고 있네. 진짜 열성적이다. 악튜러스 장비가 그렇게 탐나나봐.’
그런 스티븐을 보니 석민은 자연스레 이동건이 생각났다.
지금쯤 쇠고랑을 차고 있을 이동건도 딱 화면 속 금발벽안의 청년처럼 행동했었다.
그리고 그 말로도 아마 같을 것이라 석민은 생각했다.
‘아저씨도 얼른 골렘을 데리고 오셔야죠. 제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자신만만하고 미소 가득한 스티븐의 표정을 보니 석민도 자연스레 입꼬리가 휘어졌다.
그 표정만 보면 당장이라도 쳐들어와 거사를 치를 것만 같았다.
‘표정만 보면 오늘밤 산타 할아버지처럼 찾아오실 것 같네요.’
이동건이 왜 범행을 계획하게 됐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으로 서울 대로변에서 그 지랄을 했는지 석민은 모르지 않았다.
정보가 외국으로 샜고, 이로 인해 일을 조급하게 서두르다가 결국 그 사달을 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은 다른 도둑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빨리 오세요. 남한테 선수 뺏기기 싫잖아요.’
그렇게 날이 저물었다.
날이 저물고 야심한 밤이 되자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스티븐이 무빙 아머리를 몰아석민고물상 앞에 세웠다.
그 소리는 요란했으나 가게 안은 조용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가게 안이 텅텅 비었다는 점이다.
스티븐은 스카우터를 쓴 채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야오린에게 말했다.
“준비됐지?”
야오린은 스티븐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말없이 자기 골렘과 링크를 시도했다.
-Link Start.
-Link Complete.
-System Check...
-System All Green.
-Stand by.
야오린의 시야가 거치대에 서 있던 골렘의 시야로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골렘과 링크를 하는 스티븐이 입을 열었다.
“알지? 이 나라에선 길어야 5분에서 10분 사이로 작업해야 돼. 길어지면 골치라고.”
야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충분해.”
그렇게 두 골렘이 무빙 아머리에서 내렸다.
이 모든 걸 위에서 내려다보는 한 꼬마가 있었다.
스카우터를 쓴 석민이었다.
석민은 스티븐이 자주 올라가 있던 옥상 위에서 그들을 소리 없이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 오셨네요.’
이어 링크 시도.
석민도 보는 시야가 바뀌었다.
악튜러스는 고물상 뒤편 널찍한 쓰레기 공터에 가만히 서 있었다.
석민이 굳이 나서는 이유는 악튜러스에게 맡겼다간 다 때려 부수기 때문이다.
저번에 헬하운드가 급습했을 때 악튜러스는 자신을 덮쳐온 헬하운드를 무자비하게 때려 부쉈다.
건진 건 달랑 코어 하나.
나머지는 거의 반파되어 용광로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였다.
석민이 악튜러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나서는 이유가 말이다.
‘장비 좀 건져볼까?’
육중한 몸을 움직여 고물상 뒷마당까지 걸어온 두 골렘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악튜러스와 마주하게 됐다.
스티븐이 곧장 표정을 구겼다.
단순 느낌이지만 저 골렘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으니까.
“주제에 깝치네.”
무빙 아머리에 타고 있던 스티븐의 입꼬리가 묘하게 휘었다.
상대 골렘이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웃음이 새어나왔다.
가소롭다고 할까?
꼴에?
“그리고 보니 챙이 배신했다고 하던데... 우리 정보까지 팔아넘긴 건가? 하여간 중국 새끼들은 믿을만한 족속들이 못 된다니까.”
“시끄러워. 집중해.”
“어차피 2대1인데 상관없겠지. 빨리 끝내자고.”
그렇게 두 골렘이 석민이 파놓은 개미지옥에 찾아왔다.
스티븐의 골렘은 바바리안이라 불리는 에퀴테스 타입의 마블 골렘이었다.
양손엔 티타늄 합금으로 주조 된 도끼와 메이스를 들고 있었고, 코어는 BB-등급의 쌍둥이 가고일 심장.
배운 마법은 없었으며, 대신 락 골렘과 같이 대리석으로 된 단단한 몸체를 가지고있었다.
마법을 배우지 않은 이유는 여차하면 버리고 갈 골렘이라 그러했다.
야오린의 골렘은 링화라 불렸으며, 티타늄 합금으로 주조된 언월도를 장비한 크리스탈 골렘이었다.
코어는 마찬가지로 BB-등급의 쌍둥이 가고일 심장.
대신 마법은 배웠는데 이는 스티븐과 다르게 골렘에 대한 애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여차하면 골렘을 버렸지만 야오린은 자기 골렘에 깃든 영혼은 꼭 챙겨갔다.
스티븐과 다르게 자기 골렘에 대한 애착은 있었기 때문.
사실 두 골렘의 장비 수준만 보면 악튜러스보다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위협적인 이유는 수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은 석민도 잘 알고 있었다.
‘2대 1은 처음인데... 괜찮아.’
어느샌가 다가온 두 골렘이 악튜러스를 양쪽에서 압박했다.
악튜러스는 양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긴장감마저 감도는 그때.
스티븐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두 골렘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어 사라지는 악튜러스.
귀신처럼 사라지는 악튜러스에 스티븐이 크게 당황했다.
“뭐야? 어디 갔어?”
예상치도 못한 전개에 당황한 바바리안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당황하는 스티븐과 다르게 야오린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 순간 귀신처럼 나타난 악튜러스가 깍지 낀 손으로 바바리안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 바람에 바바리안이 나동그라지며 꼴사납게 나자빠졌다.
그때 악튜러스를 노리고 날아오는 창끝이 있었다.
언월도를 뻗어내는 링화였다.
하지만 그 공격은 악튜러스를 꿰뚫지 못했다.
악튜러스가 막을 것도 없이 이면세계에 숨어들어 이를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
링화의 언월도는 마치 귀신을 찌르듯 허공을 가로질렀다.
놀란 야오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럴 수가.
< #27 개미지옥 > 끝
ⓒ 대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