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질럿! >
무려 3천억의 투자비를 받은 KA 청룡.
아나운서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큰 액수였다.
“세상에 3천억이라... 정말 엄청나네요. 레드 데빌에 투자 된 돈도 그 정도까지는아닐 텐데요.”
“KA 청룡의 경우 현재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코어만 해도 200억이 넘어가는데다최대 출력은 2300마력에 달합니다. 악튜러스가 쓰고 있는 코어의 거의 두 배죠.”
출력 차이는 거의 두 배.
“외람된 말씀이지만 3천억 투자 받은 골렘치곤 코어가 많이 부실한데요?”
“이유가 없진 않습니다. 좋은 코어는 매물 찾기가 힘들거든요. 돈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소리죠.”
이건 국방부가 듣기 좋은 말.
3천억이나 투자 받고서 코어가 그게 뭐냐고 빈정대는 사람들을 잠재울 때 쓰기 좋은 변명거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요즘 코어 가격이 마정석 충전붐 때문에 천정부지로 솟고 있어서 아마 당분간 코어가 교체가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역시 국방부가 환영할 만한 일.
“아 그래서 홍진영 선수가 그렇게까지 자신감을 보인 건가요?”
이용호 캐스터의 물음에 김요한 해설위원이 답했다.
“네, 투자된 돈과 다르게 골렘 스펙은 현재까지 레드 데빌이 더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몰라도 올해는 레드 데빌이 더 우세인 거죠.”
예선전 초반.
홍진영은 KA 청룡을 경계했었다.
하지만 그 경계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그러들었는데 그 이유는 KA 청룡의 경우공개 된 장비가 레드 데빌보다 한 단계씩 낮았기 때문이다.
“아마 홍진영 선수가 보인 자신감은 거기서 나왔을 거라 짐작됩니다.”
이야기는 악튜러스에서 시작하여 자연스레 KA 청룡으로 넘어가게 됐다.
“KA 청룡이 악튜러스를 무난하게 잡고 올라간다면 4강전에서는 김철민 선수와 붙게 되겠네요?”
“그렇죠. 어떻게 보면 4강전부터가 진짜 시작이죠. 4강전부터 내로라하는 우승 후보들이 전부 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올해 우승자 중에서 월드 그랑프리 진출자가 나올까요? 작년엔 진출도 못했지 않습니까?”
“홍진영 선수가 조금 부진하긴 한데 잘 극복할 수 있으리라 보구요. 김철민 선수도 불철주야 노력 중이고, 이번에 나온 KA 청룡의 경우도 국방부에서 잘만 밀어준다면 올해 월드 그랑프리 진출. 더 이상 꿈은 아닐 것 같습니다.”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다음 경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아나운서들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을 때 시청하던 TV를 꺼버리는 독일 꼬마가 있었다.
나머지 경기들은 꼬마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꽤 하네. 재밌겠어.’
페트리샤는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대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난다면 이민호처럼 발라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랑 다를 거야. 절대 안 져.’
그런 페트리샤와 마찬가지로 개인 선수 대기실에서 악튜러스 경기를 지켜보던 홍진영이 있었다.
표정이 제법 심각했다.
‘저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나도 처음 보는데.’
악튜러스가 보여준 어스 드래곤.
그렇게나 높은 수준의 마법은 홍진영도 이번에 처음 보았다.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월드 그랑프리에서나 볼법한 상급 마법이었다.
표정은 계속 어두웠다.
밝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나보다 더 잘하는 거 같은데?’
파이터 실력만 본다면 자기 따윈 가볍게 압살하고도 남을 정도.
그러니 자연스레 똥줄이 탔다.
‘이거 대표년이 배 갈아탈 생각을 할 법도 한데? 내년엔 저 꼬마한테 들러붙는 건 아니겠지?’
홍진영은 그 누구보다도 매니지먼트 사정에 밝은 자였다.
한 매니지먼트에서 주력적으로 밀어줄 수 있는 선수라 해봐야 딱 한 명.
단순히 국내 본선만 본다면 KRG의 경우 선수 셋까지 밀어줄 수 있겠으나, 월드 그랑프리를 목표로 둔다면 그 잘난 KRG에서도 딱 한 명의 선수 밖에 지원할 여력이안 됐다.
그리고 그 자리는 지금까지 홍진영이 확고부동하게 맡아왔었는데, 만약 저 꼬마가 KRG에 영입되어 대표가 키울 생각을 한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맡아왔었던 그 자리가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개 같네. 올해 진출도 힘들 것 같아서 개망나니처럼 놀고 있었는데 무슨 한국 땅에서 저딴 게 나와. 짜증나게.’
홍진영.
대한민국 넘버원 파이터.
그는 월드 그랑프리 2회 진출의 영광까지 안고 있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넘버원파이터였지만, 한국민 모두가 우러러보는 그의 이면에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월드 그랑프리는 지금까지 딱 두 번 진출해봤는데, 우승이란 벽은 너무나도 높아보였다.
죽어라 기를 써도 우승은커녕 진출조차 힘겨웠으니까.
이후 홍진영은 월드 그랑프리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데, 그게 어떤 식으로 바뀌었냐면 우승은 뒷전으로 두고 진출 자체만 목표로 삼은 것이다.
어차피 백날 발악해봐야 우승은 힘들었고, 여기에 따른 마음고생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으니 일찌감치 포기해버리고 목표치를 낮춰 진출하는 것으로 목표로 바꾼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만 해도 한국 땅에선 왕으로 지낼 수 있었다.
우물 밖으로 못 나가는 개구리라 할지라도 우물 안에선 왕처럼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위협할 경쟁자라고 해봤자 휠체어 탄 개구리 하나와 자기처럼 우물 밖으로 나가려고 발악하다가 최근에 은퇴를 선언한 개구리 뿐.
홍진영은 그렇게 한국이란 좁디좁은 우물에서 세계 대회 우승이란 꿈을 저버리고그저 왕노릇만 몇 년째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길 몇 년.
배때기가 부른 왕이 우연히 우물 안을 살펴보다가 자기보다 될성부른 작은 개구리가 크고 있는 걸 보게 됐다.
놀란 왕의 눈은 크게 떠졌다.
‘대표년이 저 꼬마한테 붙어서 키우면 나 완전 나가리되는 거 아냐?’
개구리 왕은 불현듯 자기 자리를 그 작은 개구리에게 뺏길까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홍진영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야, 저 꼬마에 대한 거 다 가져와봐. 한 번 살펴보게.”
본능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홍진영이 홍수아에게 악튜러스에 대한 자료를 요구했다.
“오빠가 무슨 일이래? 새파란 애송이한테 관심을 갖고.”
“야이, 오빠가 시키는 거 있으면 말대꾸나 처하지 말고 빨리 가져와봐. 지금 장난아니니까.”
홍진영이 말은 아니꼽게 했지만 그래도 그의 매니저이자 친동생이었다.
홍수아는 미리 준비해놨던 악튜러스 관련 자료를 꺼내 홍진영이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턱! 하니 올려놓았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놨지. 오빠가 안 시켰어도 내가 오빠한테 보여주려고 했거든? 잘 정리해놨으니까 한 번 봐봐.”
“잘했어. 니가 드디어 밥값을 하는구나.”
“뭐래.”
홍진영은 급히 그 자료들을 거들떠봤다.
그러다 손을 내저었다.
“야, 짜증난다. 스카우터 줘봐. 종이로는 이제 못 보겠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알았어 기다려봐.”
홍진영은 스카우터를 건네받았고, 홍수아가 말한 파일에 접근하여 이를 살펴봤다.
자료를 살피던 홍진영이 입을 열었다.
“이거 완전 새내기였네? 올해 처음 나타났다고?”
“응. 신인이야. 완전 신인.”
“아이 시발...”
“왜 그래?”
“아니야.”
중고 신인도 아닌 완전한 신인.
데리고 있는 골렘도 몇 달 전 처음으로 등록했고, 경기 영상도 그 뒤로밖에는 없었다.
악튜러스의 지난 경기들을 지켜보던 홍진영의 표정이 제법 심각해졌다.
‘이건...’
천재잖아.
홍진영은 아이가 천재인 걸 바로 알아보았다.
‘좆됐네. 이 녀석 존나 크겠는데?’
홍진영은 이런저런 자료들을 훑어보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차지해왔던 이 왕의 자리를 갑툭튀한 어느 새파란 개구리한테 뺏기게 생겼으니까.
홍진영의 표정이 굳어있자 홍수아가 비아냥거렸다.
“어때, 이제 좀 똥줄이 타시나?”
“닥쳐 이년아.”
“오빠, 오빠가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오빠만 끝나는 게 아니야.”
홍수아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에 있었다.
“오빠 덕에 호가호위하던 나도 끝나. 그러니까 정신 좀 바짝 차리고 해. 오빠가 대한민국 일등을 몇 년 더 해먹어야 나도 이 생활 더 지속할 거 아냐? 그 사이 시집도 가야하고.”
“아이 진짜. 개 같은 게 기어 올라오고 있었네. 이거 내년에 대표년이 붙으면 나 완전 나가리되는 거 아냐?”
“그거야 당연한 거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이 꼬마가 오빠보다 나은 거 알고 있는데, 그 여우같은 대표년이 그런 생각 한 번 안 해봤을까? 대표가 배 갈아타면 오빠 끝인 거 알지? 오빠 이제 퇴물이잖아.”
“야이씨... 야, 됐고. 가서 대표나 데려와. 이거 확실히 못 박아둬야겠다.”
“뭐하려고?”
“애 영입 못하게 막아야지. 야, KRG도 월드 그랑프리는 한 선수밖에 못 밀어. 애랑 나랑 같이 있으면 하나는 무조건 나가리되는 거야. 이걸 몰라서 물어?”
“그거야 잘 알고 있지.”
“그러니까 당장 대표 불러와. 빨리.”
월드 그랑프리 우승을 포기한 홍진영의 경우 보기보단 제 분수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를 잘 알고 있었고, 자기가 꼬마보다 못하다는 걸 절대 모르지 않았다.
당장이야 골렘 성능 차이가 있어 우위를 점하고 있다지만 그 차이가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왕의 자리는 갈수록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런데 오빠.”
“뭐?”
“그런다고 영입을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선수 영입은 매니지먼트 의무야. 오빠가 그런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못 막으면 어쩔 건데? 내가 나가버린다고 협박하면 대표년이 뭐 별 수 있나?”
“그렇긴 하지. 오빠가 아직은 왕이니까. 알았어. 금방 데려올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홍수아가 선수 대기실을 나가 대표 한미라를 데려왔다.
“그럼 둘이서 이야기하세요.”
한미라가 대뜸 쏘아보았다.
“그래서 할 얘기가 뭔데? 무슨 얘긴데?”
“아 대표님, 제가 보니까 이 애 있잖습니까?”
홍진영은 테이블 위에 있던 자료 중에 차석민 얼굴이 나와 있는 페이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서 뭐?”
“이 애, 영입하면 안 됩니다.”
“뭐? 또 그 소리야?”
“지금 확실히 못 박아두는데. 이 애 영입하면 저 KRG 나갑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애 영입하는 거랑 너랑 나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대표님,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십니까? 애랑 저랑 같이 있으면 한 놈은 무조건 죽어요. 그건 아시죠?”
“뭘 죽어. 같이 키우면 되지.”
한미라가 능청을 떨어봤으나 홍진영에겐 얄짤 없었다.
“제가 그 누구보다도 매니지먼트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 거짓말은 하지 마시죠. 피차 알 거 다 아는 사람끼리 이러시면 안 됩니다.”
“더 투자 받으면 될 거 아냐? 안 그래?”
“아니 됐고요. 그딴 거 신경 안 쓰니까 아무튼 이 애 영입하는 순간 제가 나가는 걸로 아십쇼.”
“야, 너 자꾸 이럴래? 너 이러는 거 월권이야. 내가 누굴 영입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제 지원이 위태로워지니까 저도 제 밥그릇 챙기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아세요.”
홍진영은 한미라를 상대로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했던 말 그대로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개구리 왕의 발악이었다.
< #26 질럿!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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