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악한 일을 하려고 서둘러 달려가는 두 발 >
* * *
그림자 도시.
듀란의 성에서 3일이면 닿을 수 있는 곳.
까리뽕이 안내한 곳이며, 칠죄종 세트 중 하나인 ‘악한 일을 하려고 서둘러 달려가는 두 발’의 제작 도안이 잠들어 있는 도시다.
늪지대로 둘러싸인 도시 주변은 음습했으며 폐허가 된 도시 안은 눅눅하면서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아 마치 버려진 도시 같았다.
“여기에 제작 도안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이곳의 주인인 그림자 왕이 가지고 있지요.”
“여긴 아무도 없나봐.”
“아마 그림자 망령 외엔 아무도 안 살 겁니다. 보니까 아주 오래 전에 버려진 것 같군요.”
석민은 이번에도 골드 군단과 듀란을 포함한 몇몇 대장급 몬스터들을 데려왔다.
나머지는 전부 아다만틴 채굴장에서 일하는 상황.
채굴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완전 채굴까지 2주도 안 걸리게 생겼다.
“막 귀신이 나올 것 같아. 그런 분위기야.”
으스스한 도시 풍경에 석민이 말했다.
“까리뽕, 여긴 뭐하던 곳이었어?”
“이곳은 과거 크로벤 공국이 자리하던 곳입니다. 아마도 라시타 제국에 패해 멸망한 것으로 보이는 군요.”
“라시타 제국? 게이트 안에 있는 나라야?”
“그렇습니다. 보티스 층에 황국을 두고 탑 곳곳에 세력을 뻗히던 대제국이었지요.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있었을 당시에는 가장 큰 나라였습니다.”
“게이트 안에도 나라가 있다는 건 홍담비 선생님한테 들어봤어.”
“제가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서 탑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하다못해 이곳의 지적 생명체와 대화라도 나눴다면 모르겠지만.”
“듀란이 있잖아. 듀란은 아예 모르는 거야?”
석민은 같이 데려온 언데드 왕에게 물어보았다.
듀란은 고개를 저었다.
까리뽕이 혀를 찼다.
“쯧쯧, 변방의 떨거지 영주 따위가 뭘 알겠습니까? 몬스터가 된 마당에 지 성에 처박혀 세월아 네월아 살았겠지요.”
아그니가 끼고 있는 반지의 힘에 종속당한 듀란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악튜러스도 왔으면 재밌었을 텐데. 아쉽다 그치?”
“뭐 굳이 안 따라와도 저희가 있는데 뭘 걱정하십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악튜러스는 데려오지 못했다.
전날 악튜러스를 살펴보던 외부인 때문에 신림 지하 벙커에 두고 온 상황.
게이트 탐사를 위해 악튜러스를 고물상까지 데려오기엔 너무 위험했다.
조심해야 했다.
‘솔직히 지하 벙커까지 데려가는 것도 쫄렸어.’
강준과 한성철이 말하기론 사진 속 여자애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철저하게 외부인이란 소리다.
석민이 떠올리는 건 딱 하나 밖에 없었다.
어느새 냄새를 맡고 찾아온 전문 도둑들이다.
‘아무래도 개체 측정할 때 정보가 셌나봐. 그 담당 직원도 행방불명 됐다고 했으니까.’
대신 석민에겐 아그니가 있었다.
성질 더러운 파이어 골렘.
성깔은 있었지만 악튜러스 다음으로 석민이 마음에 들어 하는 골렘이었다.
아그니가 제 몸에서 나는 불로 주변을 밝혔다.
어둠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눈동자가 사린다.
아그니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무언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석민과 함께하던 까리뽕이 입을 열었다.
“이곳 왕에게 효교단에서 칠죄종 세트 중 하나를 만들 수 있는 도안을 건넸지요.”
“왜?”
“각 세트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 다 다릅니다. 황금의 효교단에선 장화에 깃들 힘으로 그림자왕이 가진 힘을 원했지요. 그래서 이곳 왕에게 도안을 건넨 겁니다. 그리고 훗날 자격이 되는 자가 찾아온다면 그 도안을 넘겨달라고 부탁했지요. 시련은 그 그림자 왕이 줄 겁니다.”
“그럼 저번처럼 악튜러스가 필요한 거 아냐?”
“아그니가 있잖습니까? 이 골렘이든 저 골렘이든 시련만 통과한다면 도안은 넘겨줄 겁니다.”
도안을 얻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런다고 악튜러스를 위험에 노출시킬 순 없었다.
까리뽕이 다른 말을 꺼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저는 그 골렘을 별로 믿지 않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야.”
“아, 아닙니다. 제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뭐야, 제대로 말해줘.”
괜한 소리를 했다간 나중에 그 손아귀에 잡혀 교육받을 것이다.
“그냥 해본 헛소리였습니다. 잊어주시죠.”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음... 그럼 듣고 잊으시죠. 예전에 일레븐 스타라는 게 있었습니다. 라시타 제국을 세운 킬제덴 대제가 경계하던 11대의 고대 골렘들을 말하는 겁니다. 이 고대 골렘들은 라시타 제국을 건국할 당시 적으로 있었죠. 그래서 제가 그런 헛소리를 했던겁니다.”
“일레븐 스타?”
석민은 스카우터를 통해 일레븐 스타에 대해 검색해봤다.
나오는 정보가 아무 것도 없었다.
‘없네. 까리뽕만 아는 이야긴가 봐.’
“더 자세히는 모르는 거야?”
“저도 거기까지 밖에 모릅니다. 노망이 들어서 쓸데없는 헛소리만 했군요.”
그들은 도시 안쪽에 위치하던 고성에 출입했다.
고성도 폐허가 된 도시와 그 분위기가 비슷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비워진 왕좌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까리뽕, 여기 아무 것도 없는데?”
콜록콜록!
그때 기침 소리를 내는 누군가가 있었다.
“누구냐?”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 그것은 왕좌에 앉아 그들을 초라하게 맞이했다.
까리뽕이 나섰다.
“그대가 칠죄종 세트의 도안을 가지고 있겠지? 우린 그 도안을 넘겨받으러 왔다.”
그림자왕은 고개를 들어 말하는 혓바닥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파이어 골렘도.
내키진 않지만 상대가 조건을 갖췄으니 언약에 따라 시련을 내줘야할 의무가 생겼다.
그 의무를 이행하기 전에 그림자 왕은 불만을 표했다.
“귀찮게 하는 군. 하여간 그놈의 마법사들이 문제야. 그딴 걸 왜 맡겨가지고.”
“어서 내주시지요. 피차 피곤할 테니 빨리 끝냅시다.”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시련은 줘야겠지. 에고 허리야.”
왕좌에서 일어선 그림자 왕이 축 늘어진 눈을 부릅떴다.
일순간 바뀌는 풍경.
왕의 알현장이 순식간에 그림자 폭풍이 몰아치는 다른 공간으로 바뀌었다.
석민이 놀랐다.
“까리뽕, 이게 뭐야?”
“이면세계입니다. 죽은 자가 보는 세상이라면 이해가 편할 겁니다.”
“죽은 자의 세상?”
“여기 그림자 왕이 제법 하는 군요. 역시 누구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법입니다. 슬슬 아그니를 준비시키십시오. 시련은 곧 시작될 겁니다.”
이전엔 악튜러스에게 모든 걸 맡겼지만 이번엔 달랐다.
석민은 아그니와 링크했다.
그리곤 소용돌이가 치는 가장자리를 떠나 중앙에 위치하며 섰다.
그림자 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대, 시련을 받으러 온 자여. 이면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림자 왕의 목소리는 계속 됐다.
“이 시련을 극복한다면 그대는 이면세계의 힘을 허락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그니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분 나쁜 곳이었다.
주변에 이는 소용돌이는 거칠었고, 그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분명 같이 온 골렘들도 있었는데, 시련의 장소에선 아그니 혼자였다.
석민은 링크한 상태로 주변에 불꽃을 일게 했다.
화르륵! 이는 불꽃이 주변을 밝혔다.
“그럼 시작해보도록 하지. 어디 한 번 이 시련을 극복해보아라 도전자여.”
바짝 긴장한 석민은 사방을 경계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러다 앞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분명 그 모습은 옥좌에 힘없이 앉아 있던 그림자 왕과 똑같았다.
다른 점은 그 크기.
옥좌에 힘없이 앉아 있던 그림자 왕이 성인 남자의 크기였다면 지금 등장한 그림자 왕은 거신 정도의 크기였다.
대전 골렘과 비슷한 크기란 소리다.
그리고 한 손엔 날이 휘어진 거대한 사이드가 들려 있었다.
그림자 왕을 본 아그니가 손을 크게 휘저으며 불길을 내뿜었다.
내뿜은 불길은 앞에서 덮쳐오던 그림자 왕에게 적중했다.
꽤 강한 불길이었지만 그림자 왕은 그 불길을 유유히 지나친 뒤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마치 귀신처럼.
“뭐야?”
석민은 당황했다.
분명 그림자 왕이 불길에 적중했는데 그림자 왕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버렸으니까.
그때 까리뽕이 조언해주었다.
“아까 건 그림자 왕이 이면세계로 숨어든 겁니다. 그런 능력입니다.”
‘이면세계에 숨었다고?’
아그니는 사라진 그림자 왕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림자 왕이 이번엔 위에서 덮쳐왔다.
크게 휘둘러지는 사이드.
아그니는 몸을 날리며 거의 반사적으로 불길을 뿜어냈다.
내리치는 사이드보다 불길이 더 빨랐다.
그림자 왕은 사이드를 내리치다말고 다시 이면세계에 숨어들었다.
이면세계에서 휘둘러지는 공격은 현실세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말 그대로 현실과 다른 세상에서 이뤄지는 공격인 것이다.
이면세계에 숨어든 그림자왕은 크게 웃었다.
“흐하하하하!”
그림자 왕이 또 다시 사라졌다.
아그니와 링크 된 석민은 생각하듯 눈썹을 모았다.
‘어떤 식인지 대강 알겠어.’
사방을 경계하던 아그니는 뒤에서 사이드가 휘둘러지자 앞구르기를 통해 재빠르게 피했다.
또 다시 이면세계에 숨어드는 그림자왕이 칭찬하듯 말을 흘렸다.
“꽤 하는 구나. 하지만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 시련을 통과하지 못했으니까.”
그림자 왕의 날카로운 공격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 동안 아그니는 거의 곡예와 같은 움직임으로 그 공격들을 모조리 피했다.
그림자 왕이 당황했다.
지금까지 도전자 중에서 이렇게까지 기민한 움직임을 보인 상대가 있었던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저를 공격할 타이밍을 알고 있었다.
석민은 사라졌던 그림자 왕이 나타나서 사이드를 휘두를 때가 유일한 공격 타이밍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 점까지 간파되자 그림자 왕은 씩 웃었다.
이면세계와 현실세계를 오가던 그림자왕은 몇 번 아그니와 씨름하다가 이내 왕좌로 돌아와 앉았다.
주변에 몰아치던 그림자 폭풍이 걷히며 그림자 왕은 예전의 크기로 돌아와 있었다.
링크를 끝낸 석민이 자리에 나서며 왕좌에 앉아 있던 그림자 왕을 찾았다.
“벌써 끝내신 건가요?”
“귀찮았거든. 그래서 대충 했어. 시련은 무슨. 허리 아파죽겠는데.”
그림자 왕은 석민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시련은 끝났다. 그만 가봐. 간만에 움직였더니 너무 힘들어. 이제 좀 쉬어야겠어.”
말을 마친 그림자 왕은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이면세계에 숨어버렸다.
그러자 노발대발하는 까리뽕이 사라진 그림자 왕을 향해 소리쳤다.
“야 이놈아! 도안은 주고 가야지!”
그림자 왕은 이면세계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 직전, 두루마리 하나를 던져주었다.
던져진 두루마리를 석민 앞에 떨어졌고, 석민은 그 두루마리를 들어 펼쳤다.
무언가가 잔뜩 적혔으나 석민은 해석할 수 없었다.
“이게 그 도안이야?”
“도안이군요. 이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다만틴 채굴량도 나쁘지 않으니이제 남은 건 제가 데스 블랙스미스와 함께 마나 용광로를 준비시키는 일이겠군요.”
“거기서 내가 도와줄 건 없는 거야?”
“없습니다. 나머진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당분간 듀란의 성에 머물러 있을 테니, 제가 없다고 외로워하진 마십시오.”
“걱정 마. 별로 외롭진 않을 거 같아.”
“이럴 땐 빈말이라도 외로울 것 같다고 해주는 겁니다.”
이렇게 칠죄종 세트 중 하나를 만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 장화가 제작되면 석민이 가지고 있는 칠죄종 세트는 총 두 개가 된다.
그런데 석민이 가진 칠죄종 세트 중 하나를 노리는 녀석들이 있었다.
먼 미국 땅에서 한국까지 찾아온 스티븐과 야오린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혀? 그거 확실해.”
“말까지 하는 걸 보니 확실해. 말하는 포켓, 고서에 나온 그 거짓말을 하는 혀야.”
서울 한강 벤치에 앉아 있던 스티븐은 그 즉시 미국에 위치한 존 마커에게 전화를걸었다.
“보스, 확인했어. 운철 맞아. 그리고 놀라지 마. 거짓말 하는 혀를 찾았어. 그 얘가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래? 확실한가?”
“확실해. 고서에 나온 그대로야. 말도 하고.”
칠죄종 세트는 그들의 보스가 모으고 있는 A급 세트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그 시각 어둠 속에 존재하던 존 마커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늘이 날 돕는 것 같군. 거만한 눈을 미끼로 무고한 피를 흘리는 손을 작업친 게 바로 엊그제였는데.”
골렘 닷컴에 올라온 거만한 눈은 존 마커가 존 스미스란 가명을 써서 미끼 형태로올려놓은 매물이었다.
보통 칠죄종 세트에 관심을 갖는 구매자들이 하나 이상의 칠죄종 세트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를 이용하여 사냥감을 물색하고 다녔던 것.
덕분에 칠죄종 세트 중 하나인 ‘무고한 피를 흘리는 손’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됐고,전날 작업을 통해 이를 얻게 됐다.
“보스가 가진 게 몇 개지? 이제 두 갠가?”
“나한테 눈과 손이 있다. 그 아이한테서 포켓까지 얻으면 이제 세 개가 되겠군.”
“이건 포켓이니까 야오린이 직접 작업칠 거야. 원래 남자가 미인계에 약하잖아.”
“어리석군. 상대는 어린 아이다.”
“그래도 고추는 달렸겠지.”
“신경 쓰지 않겠다. 실수 없도록.”
“그리고 이제 작업하려고. 나와 야오린 골렘, 오늘 한국으로 보내.”
< #22 악한 일을 하려고 서둘러 달려가는 두 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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