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천신 세트 >
마정석 생산에 필요한 재료는 다 있었다.
빈 수정이야 창고에 있는 포대기에 쌓여 있었고, 특수한 통에 담긴 몬스터 혈액도충분했다.
남은 건 용맥이 흐르는 땅.
‘실험해보고 싶어. 까리뽕의 말이 진짜인지.’
석민이 이렇게까지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하나.
‘국내 대회야 어떻게든 될 거야. 하지만 월드 그랑프리까지 나가려면 돈이 지금보다 많이 필요해. 엄청 많이.’
석민이 즐겨보는 뉴월드에선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대전 골렘들이 소개되곤 했는데, 그 골렘들 모두 결전 병기 수준이었다.
천문학적인 장비 값만 해도 일반인은 감당하지 못할 수준.
막말로 막시무스는 미국방부에서 후원하고 있는데, 그 누가 돈지랄로 미국방부를 이기겠는가?
적어도 미국방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지원을 해줘야 악튜러스도 세계 대회에서 활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정석을 대량 생산하여 돈방석에 앉으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석민은 어려서 혼자 힘으론 게이트를 넘는 게 사실상 무리였다.
아무리 막장 군대라 하더라도 애 하나가 골렘 하나와 게이트를 넘어가는 걸 달가워하진 않을 테니까.
최소한 레이드를 뛰려는 헌터 무리에 끼어야 그나마 게이트를 넘는 데 별탈이 없을 것이다.
석민은 가장 먼저 이루리를 떠올렸다.
‘저번 일로 달가워하진 않을 거 같긴 한데... 일단 전화는 해보자.’
저번 레이드에서 까리뽕을 독식했을 때, 그녀와 김한송의 표정이 그다지 좋진 않았었다.
악튜러스가 위협하기도 했고, 그나마 좋은 사람들이라서 조용히 넘어간 것이지 아마 속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을 것이다.
몇 번의 통화음 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쁜 꼬마야.”
퉁명스런 목소리.
“안녕하세요.”
“또 무슨 일인데?”
“그때 맘 상하셨어요? 저도 악튜러스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흥, 알긴 아네.”
퉁명스런 목소리는 여기까지.
방금까지 장난이었다는 듯이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밝아졌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다른 건 아니고 예쁜 누나한테 부탁 좀 하려고요.”
“예쁜 누나? 요놈 보소. 그래, 무슨 부탁인데?”
“이번에 레이드는 안 뛰세요?”
“너 이 녀석, 이번에도 또 혼자 독식하려고 일부러 전화했구나?”
“아니요. 이번에 레이드는 안 뛰려고요. 누나도 아시잖아요? 저 예선전인 거.”
“그래? 그런데 왜 전화한 건데?”
“게이트 안쪽에서 연습할 게 있거든요.”
“연습? 무슨 연습을 하려고?”
연습이 아니라 실험을 위해 넘어가는 일.
즉, 거짓말이었다.
‘독해져야 한다.’
석민의 머릿속에는 이상하게도 악튜러스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예선전이잖아요. 이번에 악튜러스가 어스 볼이란 걸 배웠거든요. 그것 좀 연습하려고요.”
“어스 볼?”
이루리는 석민이 하는 말을 우선 의심부터 했다.
아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무언가 내키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가 무슨 이유로 게이트를 넘어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게 마정석 실험 때문이라고는 아마 짐작도 못할 것이다.
‘정말 연습하려고 그러는 건가?’
“그래서 같이 게이트 좀 넘어가 달라? 너 혼자선 힘드니까?”
“네, 제 사정에 대해선 누나가 잘 아시잖아요.”
이루리도 어른이기에 아이가 게이트를 단독으로 넘어가 무언가를 연습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어른 하나는 따라가 줘야 자기도 마음이 편할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너 혼자 보내는 건 좀 그렇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위험한 곳이라 내 마음이 편치 않거든.”
“저한텐 악튜러스가 있잖아요. 그러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래도 뭔가 안 내키거든. 안 돼. 적어도 어른이랑 같이 간다면 생각해볼게.”
석민은 짧게 고심했다.
그녀 말고 생판 모르는 레이드 팀에 끼었다가 빠지는 것도 어려웠다.
그들과 이렇다할 친분이 없는 이상 어린 아이의 부탁을 들어줄 만큼 호락호락한 어른들을 찾기도 쉽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정상적이라면 방금 이루리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어찌됐건 이루리도 석민이 걱정돼서 한 말이었으니까.
“흠 그럼 어쩔 수 없죠. 다음에 전화할게요.”
“그래, 그건 미안하다.”
전화통화를 마친 석민은 다시 고심했다.
‘아무래도 그 수밖에는 없겠다.’
생판 모르는 팀에 끼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힘들 것이다.
그들도 이루리와 같은 생각일 테니까.
하지만 다소 부도덕한 레이드 팀에게 돈까지 주면서 호의를 바라는 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석민은 게이트 출입을 돈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어차피 부도덕한 어른들이야 돈만 받으면 장땡이었으니까.
이루리의 도움을 받지 못한 석민은 그날 헌터닷컴에 올라온 여러 레이드팀에게 전화를 걸어 약간의 수고비와 게이트 출입에 대해 문의해보았다.
세 번째까지 퇴짜를 맞았고, 네 번째에서 흔쾌히 승낙하는 무리가 있었다.
대신 그들이 요구하는 수고비는 백만 원.
정부에서 허가를 받지 않은 기자의 경우 삼백만 원까지 요구한다고 하는데, 석민은 어려서 딱 백만 원만 받기로 했다.
보아하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
그들은 돈 백만 원에 아이의 안전과 양심을 팔아버린 것이다.
다음 날.
석민은 어제 연락했던 레이드 팀의 도움으로 게이트에 출입하게 됐다.
개척민 마을까지 향하는 일직선 포장도로 위.
군용 트럭 짐칸에서 악튜러스와 함께하는 석민은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던 인상 험악하게 생긴 헌터들을 쳐다보았다.
얼굴에 흉터 자국이 가득했고, 생김새는 산짐승도 뜯어먹게 생겼다.
하지만 석민이 그들에게 웃어보이자, 인상 험악하던 그들도 피식거리더니 이내 석민처럼 따라 웃어주었다.
개척민 마을에 닿기 전.
석민이 악튜러스와 함께 내리자 어느 순간부터 인상 좋아진 헌터 아저씨들이 석민에게 손까지 흔들어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야 꼬마야, 잘 가라.”
“여기 위험하니까 조심히 돌아가고.”
“네, 아저씨들도 안전 레이드하세요.”
“하하, 고놈. 귀엽네.”
“내 조카도 딱 저만해. 귀여워.”
군용 트럭이 다시 도로 위를 달리기 전, 해당 레이드 팀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석민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야 꼬마야, 여기 존나 위험한 데니까 알아서 잘 돌아가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네, 감사합니다.”
“야, 출발해!”
그렇게 석민은 악튜러스와 함께 도로 위에 덩그러니 남게 됐다.
-에탈 수도원 근처 조용한 평야입니다.
-주의! D등급 몬스터 출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초급 지역이라 그리 위험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석민은 살짝 긴장했다.
그때 악튜러스가 석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걱정마라. 그대의 안전은 내가 지킬 테니. 그것이 내 의무로다.’
악튜러스를 올려다보면 석민이 긴장감을 털어냈다.
그 누구보다 믿음직스런 어른이 옆에 있지 않던가?
석민은 악튜러스와 함께 까리뽕이 말하는 곳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푸른 초목 위.
에메랄드 빛 하늘 아래서 대전 골렘과 함께 걷는 아이가 있었다.
한참을 걷던 석민은 까리뽕이 말하는 곳에 멈춰 섰다.
“까리뽕, 여기야?”
“네, 여깁니다. 보아하니 용맥이 모이는 자리군요. 제법 명당자리입니다.”
까리뽕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
“악튜러스, 여기 땅 좀 파줘.”
석민이 부탁하기가 무섭게 악튜러스는 석민이 말한 땅을 대지의 힘으로 파주었다.
손으로 팔 것도 없이 알아서 파지는 땅.
순식간에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석민은 포켓에 넣어놨던 포대자루에 담긴 빈 수정들을 잔뜩 꺼냈다.
그리곤 악튜러스를 시켜 파놓은 땅에 심도록 시켰다.
여기다 몬스터 피까지 뿌리니 모든 작업은 완료.
까리뽕이 마지막까지 조언해주었다.
“몬스터 피를 뿌렸으니, 들짐승이나 다른 몬스터들이 그 냄새를 맡고 땅을 헤집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저 위로 흙을 더 쌓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피냄새를죽이는 방법이지요.”
악튜러스가 주변 흙을 끌어다가 아예 언덕을 만들어버렸다.
까리뽕이 만족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
“까리뽕, 우린 얼마나 기다리면 돼?”
“적어도 일주일은 기다려야 합니다.”
“일주일?”
“일반적으로 더 오래 묵혀둘수록 빈 수정에 깃드는 마나의 양이 많아지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순도가 더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밭에 뿌리는 몬스터 피의 질에서도 영향을 받습니다. 상급 몬스터의 피를 쓸수록 같은 시간 대비 마정석순도가 더 높아지지요.”
“그럼 꽤 오래 묵혀둬야 하는 거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마나 순도가 딱 일주일까지 빠르게 증가하고 그 다음부터는 서서히 줄어들어 완만하게 증가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밭을 세 개로 나눠서 경작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수확하는 밭, 한 달 만에 수확하는 밭, 그리고 일 년 만에 수확하는 밭으로 나눠서 경작했지요. 이때 개처럼 부려먹은 오크와 트롤만 해도 수십만 마리였는데...”
“그래? 그럼 난 며칠 만에 수확하는 게 좋을까?”
“딱 한 달 정도가 적당합니다. 인위적으로 만든 마정석의 경우 일반적인 마정석과 비슷한 효율을 내려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가만히 묵혀둬야 하더군요.”
“한 달?”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이란다.
적지 않은 시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석민은 다시 땅을 파서 아까 심어놨던 마정석의 상태를 살펴봤다.
다시 꺼낸 수정의 경우 마정석이라고 불리기도 애매한 상태였지만 확실히 마나가깃들어 있었다.
‘까리뽕의 말이 사실이었어.’
꺼낸 마정석을 다시 파묻은 석민이 이후 큰 그림을 그려보았다.
당장 국내 예선전에 치우쳐 돈을 쓰는 것보단, 크게 보고 투자를 하는 것이다.
‘악튜러스 장비 사려고 모아뒀던 돈은 전부 빈 수정이랑 몬스터 혈액 사는데 써야겠다. 마정석이 만들어지는 건 확실해졌으니까.’
그렇게 되면 당장 다음 주 월요일에 있을 예선전 경기에서 악튜러스가 애를 먹게 된다.
그럼에도 석민은 그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 정도 리스크야 감수해야지. 국내 대회는 포기하더라도 월드 그랑프리는 포기할 수 없으니까.’
월드 그랑프리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끽해야 몇 달.
악튜러스가 국내 대회도 잡고 세계 대회까지 나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만약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국내 대회를 포기하고 세계 대회를 노리는 것이다.
결국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겠는가?
일을 마친 석민은 게이트로 이어지는 포장 도로 위로 나와 월요일에 악튜러스가 쓸 장비를 구입하는 게 아닌, 헌터닷컴에 접속하여 빈 수정과 몬스터 혈액에 대해 알아보았다.
[대량 판매]
[빈 마력 수정(다 쓴 마정석)]
등급 : -
효율 : -
상태 : 양호
판매자 : 용산 종합 몬스터 고물상즉시구매가 : 개당 KRW 30,000-대량으로 처분합니다.
-실내 인테리어용으로 적합.
-건물 자재용으로도 적합.
[대량 판매][가장 싼 매물]
[빈 마력 수정(다 쓴 마정석)]
등급 : -
효율 : -
상태 : 양호
판매자 : 강변 종합 몬스터 부속물 판매상즉시구매가 : 개당 KRW 29,800-대량으로 처분.
-실내 인테리어용으로 적합.
-건물 자재용으로도 적합.
-100개 이상 대량 구매자에게 5% DC 빈 수정의 가격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마나가 없는 마정석이야 속 빈 강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개당 3만원 가격으로 용산이나 강변에서 대량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석민이 도로 위에서 스카우터를 통해 매물을 보고 있던 사이, 도로 위를 지나가던군용 트럭 한 대가 멈춰 섰다.
“야, 꼬마야. 여기서 뭐하니?”
차창 너머로 팔을 걸치고 운전하던 중년인이 고개를 내밀고 석민에게 말을 붙였다.
석민은 집으로 돌아갈 차를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도중에 일행을 잃어버렸거든요. 그래서 군부대까지 걸어가다가 힘들어서 쉬고 있었어요.”
“아 그래?”
석민과 악튜러스를 번갈아보던 그는 턱짓으로 짐칸을 가리켜주었다.
“그래서 언제 돌아가려고. 빨랑 타라. 이 아저씨가 군부대까지 태워다줄 테니까.”
“정말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석민은 그날 빈 수정과 몬스터 혈액 판매자에게 연락을 취해 빈 수정과 몬스터 혈액을 최대한 많이 사들였다.
그리고 다음 날.
석민은 똑같은 방식으로 게이트에 출입하여 전날과 마찬가지로 빈 수정과 몬스터혈액을 용맥이 흐르는 땅에 대량으로 파묻었다.
여기에 쓰인 돈만 7700만원.
그 7700만원에서 대략 6000만원이 빈 수정 구입에 쓰였다.
용맥에 심어진 빈 수정의 개수만 대략 2000개.
이게 한 달 뒤면 제법 그럴싸할 마정석이 된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까리뽕이 말하자 석민은 한 달 뒤 수입을 머릿속으로 대충 그려봤다.
< #18 천신 세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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