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천신 세트 >
“손 볼 녀석? 야, 나 그런 짓 그만 둔지 오래다. 요즘은 영업장 관리하기도 빡세.”
“에이 형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큰일은 아닙니다. 사람 하나만 손보면 됩니다.”
“아이씨... 야, 잠깐만 기다려봐. 우선 여기 일 끝내놓고 다시 전화할 테니까.”
“넵, 그럼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김두철은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던 하정우를 내려다보며 뻐근한 고개를 돌렸다.
“야, 하정우.”
“네, 형님.”
갑과 을의 관계는 항상 바뀌는 법.
과거 차태식에게 갑의 행세를 했던 하정우는 김두철에겐 철저한 을이었다.
“형돈 가지고 사채놀이 할 거면, 이자라도 꼬박꼬박 잘 가져다 바쳐야 할 거 아니야. 어?”
김두철은 하정우의 뺨을 기분 나쁘게 살짝살짝 쳤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하정우는 고개만 푹 숙였다.
“됐고, 이번 한 번만 봐줄 테니까. 아는 동생이 부탁하는 것 좀 도와줘라. 알아들었지?”
괜히 짭새와 엮여봤자 좋을 거 하나 없기에 김두철은 이동건의 부탁을 하정우를 통해 대신 처리하기로 했다.
하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두철은 곧바로 이동건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래, 여기 일 끝났다. 무슨 일인데?”
“그게 헌터협회직원입니다.”
“헌터협회? 그거 무슨 헌터 같은 건 아니지?”
“헌터는 아니고, 그냥 생일반인입니다.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근데 뭐하려고?”
김두철도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
이동건은 그가 이 일에 자세하게 얽혀봤자 자신에게 하등 도움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제 개인 문제입니다.”
김두철은 이동건의 속내가 궁금했지만, 귀찮아서 자세히 묻지는 않기로 했다.
자기 일도 바쁜데 남의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내가 사람 하나 보낼 테니까, 걔랑 잘 해결해봐라. 그리고 이거, 나랑 전혀 관계없는 거다?”
“형님,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누굴 보내는 겁니까?”
“있어. 내 영원한 시다바리.”
그 와중에도 김두철은 제 앞에 무릎 꿇고 앉은 하정우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18 천신 세트
예선 D조 네 번째 경기에서 로얄 펌프가 천하장사에게 패하면서 또 다시 탈락자 한 명이 늘어났다.
이리하여 D조에 남은 대전 골렘은 총 6기.
[예선 D조 명단]
악튜러스 // 3점
크로우 // 2점
천하장사 // 2점
안산 1호기 // 1점
범블비 // 1점
무적 돌탱이 // 1점
로얄 펌프 // 0점<탈락>
동작구 강냉이 머신 // 0점<탈락>
백두산 // 0점<탈락>
잭나이프 // 0점<탈락>
악튜러스가 3점으로 선두였고, 그 뒤를 2점인 크로우와 천하장사가 바짝 뒤쫓았다.
순번대로라면 이번엔 천하장사가 누군가를 지목할 차례.
천하장사의 골렘 파이터 강인찬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제 코치와 함께 다음 희생양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코치가 기분 좋게 말했다.
“잘했어. 이제 공동 2위다. 여기서 굳히기만 잘하면 돼.”
강인찬은 생각할 게 많았다.
“코치님, 누굴 고를까요? 전부 고만고만한 거 같은데.”
“적당히 만만한 놈으로 골라. 보니까 안산 1호기가 만만해보이던데.”
하지만 강인찬은 유독 악튜러스의 대전 영상만 찾아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흠...”
이를 본 코치는 그다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악튜러스는 단언컨대 이기기 힘든 상대였다.
“걘 안 돼. 이기기 힘들어.”
현재 D조 선두로 달리고 있는 악튜러스의 경우 이곳저곳에서 소문이 무성했다.
아빠가 S급 헌터라는 둥.
골렘 다루는 재주가 천재라는 둥.
이민호가 인정한 제자라는 둥.
그러한 소문 때문인지는 몰라도 강인찬의 코치는 악튜러스와의 싸움에선 대해선 다소 부정적인 생각이 강했다.
“걔 말고 다른 애로 골라라. 안산 1호기 고르라니까.”
“알아요. 저도 대충 아는데...”
강인찬은 탁자 위에 세워둔 슈퍼갤럭시 패드 속에서 재생되는 악튜러스 영상을 잠시 정지시켰다.
그리곤 거의 반파 된 악튜러스를 가리키며 뒷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골렘, 지원이 아예 없어요. 그냥 장갑만 씌우고 이번 예선전에 나왔다는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이야?”
“장비가 거의 반파됐는데, 고칠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마 다음 경기에 이 상태 그대로 나올 걸요?”
“기술팀도 없어? 거 들어보니까 애 아빠가 S급 헌터라는데?”
아빠가 S급 헌터라면 코리아 일렉트로닉스가 직접 후원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거야 잘 모르겠고, 제가 알아보니까 기술팀도 없고 정말 아무 것도 없어요. 가진 거라곤 무빙 아머리랑 따까리처럼 보이는 매니저 딱 한 명 밖에 없던데요?”
그것은 코치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진짜야?”
“네, 그러니까 제가 이러고 있죠. 이걸 잡아먹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놔줘야 하나. 정말 고민되거든요.”
“네 말 들어보니까 나도 고민이 좀 된다. 뒷배로 S급 헌터와 대통령을 둔 아이가 사정이 그렇게 열악할 줄은 몰랐거든.”
“그거 구라일 수도 있죠. 직접 확인해보신 건 아니잖아요?”
“뭐 그렇지. 나도 어디서 주워들은 거거든.”
“세상에 애 아빠가 S급 헌터면 막말로 예선전에 나오지도 않았어요. 장비 풀세트로 맞춰서 본선 진출권 미리 따놨겠죠.”
“그것도 그렇네. 그럼 그게 다 거짓 소문인가?”
“그러겠죠. 생각을 해보세요. 진짜 아빠가 S급 헌터겠어요?”
“흠...”
“이거 운 좋으면 우리가 잡아먹을 수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강인찬은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눈가를 좁혔다.
“아싸리 이걸로 승부수를 띄우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조 1등으로 진출 못할 거면 본선 나가도 무시만 당해요. 어차피 우승 못할 거 사람들도 다 아니까.”
“하긴, 날고 기는 골렘들이 많은 본선에서 초반부터 주목을 받으려면 네 말도 일리가 있다. 그래, 자신 있으면 해봐. 장비 상태가 계속 저 모양이면 진짜 해볼만 하니까.”
“그럼 다음 상대는 악튜러스로 갑니다?”
적을 압도하는 악튜러스의 영상.
그럼에도 결심을 굳힌 강인찬은 다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시각.
강준과 함께 무빙 아머리를 타고 집으로 가던 석민은 스카우터에 나온 내용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희 또 지목당했어요.”
“뭐? 이번엔 누군데?”
“천하장사요. 다음 주 경기에서 저흴 지목했네요. 1등자리를 탈환할 생각인가 봐요.”
“하아... 미친 거 아니야? 진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네. 쉴 틈을 안 줘요.”
“악튜러스를 상처 입은 사자로 생각하나 봐요. 아직 멀쩡한데도 말이죠.”
잭나이프와의 경기에서 악튜러스는 상체 장갑과 몇몇 장비들을 제외한 나머지 장비들이 큰 데미지를 받았다.
전체 효율이 60% 이하까지 내려간 상황.
“석민아, 악튜러스 장갑 상태는 어때? 괜찮겠어?”
“오늘 녹아버린 장갑은 이제 못 써요. 버리고 새로 사든가 아니면 악튜러스가 주워온 장갑으로 교체해야겠죠. 하지만 그것도 상태가 그다지 좋은 건 아니라서요.”
“그럼 장비 살 돈은 있어?”
“돈이야 있죠. 잠시만요.”
석민은 그와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헌터닷컴에 올려놓은 혈석 매물을 보고 연락을 취한 누군가였다.
통화를 마친 석민이 기분 좋게 목소리를 냈다.
“이제 혈석도 다 팔았네요.”
“방금 누군데?”
“방금요? 방금 상대는 서울대학교 몬스터학과 교수래요. 연구용으로 제가 올린 혈석을 사겠대요. 전부요.”
“하긴 마정석이 연구용으로 많이 쓰이긴 하지.”
“어디보자. 남은 2000만원에다가 가지고 있던 혈석들을 다 팔면 대충 7600만원이 저한테 생기겠네요.”
“와, 7600만원이라. 가끔씩 생각하는 거지만 헌터들은 진짜 돈 많이 버는 거 같아. 그럼 그걸로 새 장비를 구입하는 거냐?”
“일단 그래야겠죠?”
그때 석민의 핸드폰과 연동 된 스카우터에서 또 다시 전화가 왔다.
차태식이다.
석민은 핸드폰 대신 스카우터를 통해 전화를 받았다.
“아빠!”
석민의 목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진 차태식의 표정이 밝아졌다.
“우리 아들, 아빠 전화 기다렸어?”
“응! 아빠 지금 어디야? 아직도 천신의 장벽 안이야?”
대통령과 독대 후 다음 날 바로 레이드를 나간 차태식은 며칠 간 집에 돌아오지 않은 채 게이트 너머에 위치한 천신의 장벽에서 장시간 레이드를 뛰고 있었다.
“어, 그쯤이야. 거의 다 왔다. 저기 천신의 신전이다.”
현재 차태식과 팀을 이룬 헌터들은 국내 정상급 헌터들이었다.
팀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헌터가 AA-등급이었으니 말 다한 셈.
천신의 장벽은 B급 레이드 최상위 던전으로 A급 헌터들이 주로 팀을 이뤄 찾아가는 곳이었다.
차태식은 고개를 들어 스카우터를 통해 자기가 보고 있는 화면 그대로를 석민에게 전달해주었다.
“아들, 저게 천신의 신전이야.”
잿빛의 거대한 신전이 개벽하는 하늘 아래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석민은 비명 없이 입을 벌렸다.
천신이 살았다는 신전의 웅장함에 잠시 넋을 잃은 것이다.
잠시 후 차태식이 그 시선을 내리자 웅장한 신전 아래 광활한 공터에서 몬스터들을 대거 학살하고 있는 최상위 헌터들이 보였다.
놀랍게도 차태식은 전투 중에 아들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와, 헌터 아저씨들이다.”
아들의 기분 좋은 비명소리에 씩 웃던 차태식은 거의 반사적으로 헌팅 나이프를 휘둘러 뒤에서 저를 노리고 있던 리자드맨의 관자놀이를 꿰뚫어버렸다.
동물적인 감각을 넘어선 초인의 영역.
하지만 차태식에겐 이제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 된지 오래였다.
“아빠, 방금 리자드맨 잡은 거야?”
“어때? 아빠 굉장해 보이지?”
“아빠 짱이다. 그런데 누가 전투 중에 전화하랬어? 아빠 혼난다.”
석민이 엄한 소리를 내려하자 차태식이 피식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아무튼 모레 보자. 선물 가져갈게!”
아빠가 대뜸 전화를 끊자 석민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을 본 강준이 힐끔거리며 석민을 찾아 물었다.
“석민아 무슨 일 있어?”
“아빠가 조심성이 없어요. 나중에 혼낼 거야.”
“하하하!”
그런 석민이 귀여웠는지 강준은 그저 웃기만 했다.
석민은 인터넷을 통해 천신의 신전에 대해 검색해봤다.
천신의 신전.
B급 최상위 레이드 코스로 A급 헌터들도 애를 먹는 곳이란다.
특히 천신이 강림하는 날이면 신전 아래는 몬스터 지옥이 된다고.
“아빠가 엄청 세긴 하나 봐요. 벌써 B급 최상위 코스도 도시네요.”
“어디 계신데?”
“천신의 장벽이라고 벨리알이 지키는 층에 있는 B급 최상위 코스에요. 저흰 죽었다 깨어나도 못 가는 곳이죠.”
“천신의 장벽?”
강준이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일반인에겐 그리 친숙한 지명은 아니었다.
“난 모르겠다. 헌터가 아니라서.”
“저도 잘 몰라요. 그런데 여기가 대전 골렘과도 연관이 있긴 하네요. 신전 문을 지키는 수문장들이 대전 골렘이래요.”
“그래?”
아이 아빠가 때려 부순 골렘에게서 장비 하나만 주워 와도 어디인가?
강준은 은근히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림한 천신이 선물로 천신 세트를 주네요.”
“천신 세트? 아 그 유명한 천신 세트가 거기서 나오는 거였어?”
강준이 아는 천신 세트는 가장 비싼 골렘용 세트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미림의 재림과 거의 쌍벽을 이룰 정도.
“네, 천신 세트가 여기서 나오거든요.”
석민이 인터넷에서 찾아본 자료는 이러했다.
천신이 강림하는 날, 천신이 신전을 찾아온 이에게 아티팩트를 선물로 준단다.
그러한 아티팩트 중에서 대전 골렘용 아티팩트가 있었으니 바로 천신이란 이름을가진 아주 귀한 세트 아티팩트였다.
< #18 천신 세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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