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어스 매직 >
요동치는 시야.
강철중은 정신없는 시야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런!’
데미지를 입는 건 자기가 아니라 골렘.
한시라도 빨리 정신 차려야 했다.
‘정신 차려! 공격받은 건 내가 아니잖아.’
악튜러스는 무방비에 놓인 적을 베기 위해 브로큰 블레이드를 뽑아 마나를 가득 채웠다.
마나로 이뤄진 검날이 보다 선명해지고, 노리고 있는 상대가 아직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때.
악튜러스는 잭나이프의 코어를 노리며 마나의 대검을 무섭게 내리쳤다.
깔끔하게 적중.
하지만 그 공격은 유효타가 되지 못했다.
‘군다의 가호.’
군다의 가호로 되살아나는 잭나이프와, 그 가호에 의해 밀리는 악튜러스.
반투명한 구체 보호막이 악튜러스를 밀어내면서 동시에 잭나이프를 구해냈다.
잭나이프는 다시 기회를 얻었고, 강철중은 안도함과 동시에 아쉬워했다.
‘큭, 벌써 군다의 가호가 빠졌어.’
게임으로 치자면 벌써 라이프 하나를 잃은 셈.
남은 라이프는 없다.
벼랑 끝에 내몰린 강철중이 투지를 불태웠다.
그의 눈빛이 변하며 흙벽에 가로막혀 있던 쓰로잉 나이프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잭나이프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
치솟는 마나.
이에 반응하는 쓰로잉 나이프가 탄력을 받아 흙벽을 뚫어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상대 골렘이 코어에서 마나를 미친 듯이 뿜어내자 악튜러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쓰로잉 나이프가 박혀 있던 흙벽이 아주 위태로워 보였다.
석민이 미간을 좁혔다.
‘던진 나이프를 다시 불러들이고 있어.’
투척용 나이프가 상대 골렘에게 돌아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공격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악튜러스는 그 전에 다시 한 번 공세를 취하기 위해 자세를 수그렸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주의! 브로큰 블레이드의 유지 시간이 7초 남았습니다.
브로큰 블레이드의 유효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악튜러스는 브로큰 블레이드에 흘려보내던 마나 공급을 중단시키며 코어에서 생산되는 마나를 보존했다.
‘마나를 아껴야 돼. 하트 다운이 될 순 없어.’
이후 스프린터처럼 몸을 웅크린 악튜러스는 아무런 신호도 없이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아무리 녹슬었다지만 육중한 장갑을 뒤집어 쓴 대전 골렘이 전력을 다해 뛰어오는 모습은 한 마디로 소름.
그러나 기죽지 않는 강철중이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건방진 게!’
적이 기세를 잡았다고는 하나, 애당초 장비 상태는 자기 골렘이 더 좋았다.
괜히 기세에 주눅 들어 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장비는 이쪽이 더 좋다고!’
강철중이 뒤늦게 반응하며 잭나이프로 하여금 도망치는 게 아닌, 정면에서 맞부딪히게 했다.
화르륵! 이는 불꽃이 잭나이프를 휘감았다.
파이어 골렘.
원소 계열 골렘 중에선 가장 위력적이고 힘이 좋다고 소문난 골렘이다.
그 파이어 골렘이 주변을 불태우며 어스 골렘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성난 고릴라처럼 맞붙은 둘은 서로를 향해 난타전을 시작했다.
사정없이 내지르는 주먹.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만드는 그 장면에 지켜보던 관중들이 자리에서까지 일어나 크게 환호했다.
그 우레와 같은 환호성 아래.
악튜러스와 링크 된 석민의 시야가 갑작스레 적색으로 변했다.
-주의! 몇몇 장비의 내열성이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장비 효율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악튜러스의 스트레스 게이지가 상승합니다.
파이어 골렘이 뿜어내는 강한 열기에 이기지 못한 몇몇 장비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효율이 낮아지며 급격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워터 골렘이 아닌 이상 자체 냉각도 어려운 상황.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석민은 장비를 급하게 냉각시킬 방법을 찾아봤다.
‘그래, 그게 있었지.’
석민은 악튜러스로 하여금 땅 깊은 곳에서 흙을 솟구치게 했다.
파이어 골렘이 내뱉는 열기에 직접적으로 노출 된 땅 표면의 온도는 높았으나, 더깊숙한 곳의 온도는 제법 낮았다.
그런 흙으로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장비를 전부 식히긴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할 터.
악튜러스가 방금 막 땅에서 뽑아낸 차가운 흙먼지를 제 몸에 끼얹었다.
이로 인해 몇몇 장비의 온도가 살짝 내려가긴 했지만, 그게 전부.
아직 주변은 용암 대지처럼 뜨거웠다.
그 순간.
강철중이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큰 거 한방을 준비했다.
헬 피스트.
‘내열성이 부족한 골렘에겐 이게 쥐약이지. 이글거리는 주먹으로 다 뚫어주마.’
주변의 뜨거운 열기가 잭나이프의 오른 주먹에 무서운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초고온으로 가열 된 주먹.
이글이글 타오르는 주먹은 마치 용광로에서 막 나온 금속 덩어리를 보는 듯했다.
상대 골렘이 헬 피스트를 준비하자 석민이 눈썹을 모았다.
‘헬 피스트네.’
강철중은 상대 장비들이 죄다 미등록에다가 내열에 취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드래곤 터틀의 등껍질을 가져와 막는다고 해도 헬 피스트까지 막지는 못할 터.
‘이건 하느님이 와도 못 막는다!’
기세를 잡고 무섭게 파고는 잭나이프가 시뻘겋게 달궈진 오른 주먹을 그대로 뻗어냈다.
-헬 피스트를 시전합니다.
석민은 고심하다 악튜러스의 오른 손을 뻗어냈다.
이를 본 강철중은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그 무엇으로 막든.
헬 피스트를 막을 순 없을 테니까.
그러나.
‘헬 피스트를 막았다고? 무슨...’
악튜러스가 펼쳐낸 손바닥이 헬 피스트의 진행을 막아버렸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
강철중을 포함한 대다수의 관중들이 경악했다.
용암처럼 뜨거운 헬 피스트를 막아낼 줄이야.
흔들리는 잭나이프의 시선은 어느덧 시뻘건 주먹을 아무렇지 않게 쥐고 있는 악튜러스의 오른팔에 가 있었다.
-미등록된 장비입니다.
-사용자 요구로 해당 장비를 정밀 검색 중...
-대한헌터협회에서 해당 장비에 대한 정밀 검색을 불허했습니다.
-정밀 스캔이 불가합니다.
‘뭐야, 보통 장비가 아닌데?’
그저 철이 산화되어 붉은 줄로만 알았던 고철 장갑.
그런데 단순히 녹슨 장갑이 아니었다.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주먹을 버텨낼 정도로 아주 우수한 내열성을 가진 정체불명의 장갑이었다.
여기서 신기한 점은 다른 미등록 장비들은 내열성이 없어 녹아내리고 있는데, 유독 상체 장갑과 오른팔 장갑만이 이를 이겨내고 있다는 점이다.
헬 피스트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악튜러스 전신으로 뻗어나갔다.
몇몇 장비들은 표면이 녹아내리기도 했다.
석민은 이 상태가 매우 위험하단 걸 알았다.
‘빨리 끝내자. 장비 상태가 안 좋아.’
석민은 승부를 짓기 위해 출력을 전보다 더 높였다.
시뻘건 열기 속에서 코어의 출력은 더없이 높아지고, 악튜러스는 순간 높아진 출력으로 잭나이프를 강하게 밀쳐냈다.
그 바람에 바닥에 나동그라진 잭나이프.
그 위로 선 악튜러스가 다시 한 번 브로큰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마나의 검날이 생성되고, 목표는 잭나이프의 코어.
잭나이프와 링크 된 강철중도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옳거니. 이거 기회다.’
강철중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나름 노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곧 온다.’
아까 흙벽에 가로막혀 있던 쓰로잉 나이프가 거의 빠져나오기 직전이었다.
흙벽은 제 구실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거의 다 빠져 나온 쓰로잉 나이프가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강철중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돌아오는 쓰로잉 나이프가 악튜러스의 등허리에 꽂히는 장면을 말이다.
만약 여기서 악튜러스가 움직인다면 돌아오는 쓰로잉 나이프는 허공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최대한 버티다가 마지막에 구르는 거야.’
그 생각을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그 생각은 읽힌 상태.
오히려 석민이 의도한 바가 되었다.
강철중이 되돌아오는 쓰로잉 나이프만 찾고 있을 때, 바닥에 나동그라진 잭나이프의 몸을 뱀처럼 휘감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엇인고 하니 바로 흙.
꼼짝달싹도 못하게 된 강철중이 순간 당황하며 잭나이프의 몸을 움직여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어 내리치는 악튜러스의 대검이 잭나이프의 코어 캡슐에 그대로 적중했다.
그와 동시에 악튜러스의 등 뒤로 또 다시 흙벽이 치솟아 올랐다.
이로 인해 강철중이 의도했던 바는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승자, 악튜러스!”
홍길동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경기장에서 강철중은 스카우터를 벗고 고개를 떨궜다.
경기 전부터 불안했던 마음이 현실로 찾아온 것이다.
“하... 시발.”
어지간해선 욕을 잘 쓰지 않는 그도 이번만큼은 욕을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작년엔 본선까지 나갔건만.
올해는 본선도 못 나가고 예선전 첫 경기에서 나가떨어졌으니까.
의욕을 상실한 강철중과 그런 강철중의 경기를 끝까지 지켜보던 그의 코치도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하... 져버렸네. 뭔가 아쉽다.”
코치도 강철중이 그렸던 마지막 승부수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만약 잭나이프 코어를 노리는 악튜러스 등허리에 쓰로잉 나이프가 제대로 꽂혔다면 경기 양상은 다르게 됐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악튜러스가 잭나이프를 잡자마자 예선 D조 명단이 그 즉시 업데이트됐다.
[예선 D조 명단]
악튜러스 // 3점
크로우 // 2점
로얄 펌프 // 1점
천하장사 // 1점
안산 1호기 // 1점
범블비 // 1점
무적 돌탱이 // 1점
동작구 강냉이 머신 // 0점<탈락>
백두산 // 0점<탈락>
잭나이프 // 0점<탈락>
이렇게 악튜러스가 3점으로 D조 선두 자리를 굳히게 됐다.
그런 악튜러스 경기를 티비 속 화면으로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이동건이 아닌 이동건의 부탁을 받고 악튜러스에게 DD+등급을 줬다 지방으로 좌천까지 당한 우리의 조상민이다.
‘어쭈, 이겼네?’
근신 명령까지 받은 조상민은 제 원룸에서 오징어 다리를 뜯으며 캔 맥주를 목구멍에 털어넣었다.
‘당연히 이기겠지. 장비가 더 좋은데.’
그때, 조상민의 핸드폰이 크게 진동했다.
이동건이다.
조상민과 마찬가지로 악튜러스의 경기를 지켜보던 이동건이 무언가 낌새를 눈치 채고 마지막으로 확인 차 조상민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조상민은 받지 않으려다가 이대로 놔두면 계속 전화가 올 것 같아 받기로 했다.
“아니, 왜 자꾸 전화하시는 거예요. 안 그래도 그쪽 때문에 짜증나 죽겠는데.”
“조상민 팀장님, 그때 일은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지금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 시발... 됐고, 앞으로 전화하지 마세요. 지금 그쪽 때문에 시골로 쫓겨났으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이동건은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에게서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진 빌 생각.
조상민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이동건은 자기가 원하던 걸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그런데 팀장님, 저번에 제가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습니까?”
조상민이 씩 웃었다.
‘그래, 니 새끼가 생각하는 게 뻔하지.’
“아, 그 상체 장갑이요?”
“네, 맞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죠?”
“동건 씨가 특별히 부탁해서 제가 좀 자세히 알아보긴 했습니다.”
“결과는요?”
지금 조상민 손에는 악튜러스 상체 장갑에 대한 분석 자료가 들려 있었다.
-금속 빛깔, 표면 조직 상태로 추정 가능한 금속은 오스뮴, 니켈, 코발트 등이며,주요 성분은 현 장비로 판별이 불가능합니다.
조상민이 씩 웃었다.
별빛금속일 확률이 99.9%.
아까 경기를 보니, 고온에서 버텨내는 성질도 아주 우수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
“별 거 없던데요. 그냥 내열성 좋은 철입니다.”
하지만 대답은 다르게 했다.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
“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성분 함유를 보니까 그냥 철이네요. 그런데 원소 내열성이 아주 좋더라고요.게이트 너머에서 채굴 된 철광석으로 만든 장갑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왜 자꾸 물으세요?”
“아닙니다.”
아쉬움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동건이 전화를 끊었다.
조상민은 씩 웃는 표정으로 이동건을 욕했다.
‘야이 새끼야. 니 때문에 내가 좆 됐는데 내가 미쳤다고 이 정보를 너한테 곧이곧대로 알려주겠냐?’
좋은 정보는 때론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다.
조상민은 이동건과 통화를 마친 뒤 곧바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싱가포르까지 이어졌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 조상민은 다소 어리숙한 영어로 첫 마디를 열었다.
“Hunter Chang?”
조상민과 통화를 마친 이동건은 찝찝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 새끼,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겠지? 아니야 이 새끼, 분명 뭔가 있어.’
이동건은 평소 알고 지내던 건달 두목에게 전화를 걸었다.
용인 벙커의 대빵.
김두철이다.
“형님, 안녕하세요. 접니다 이동건.”
“니가 나한테 무슨 일이냐? 왜, 한미라 그년이 뭐라도 시켰냐?”
“아니요, 그런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전화했어? 형 바쁜데.”
“형님 도움이 좀 필요해서요. 손 볼 녀석이 하나 생겼거든요.”
< #17 어스 매직 > 끝
ⓒ 대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