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비공개 스파링
-현재 시야를 잃은 상태입니다.
-파손 된 머리 수복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 00:08이민호가 말릴 틈도 없이 스턴건과 링크 된 석민은 시야도 없이 그 즉시 바닥을 냅다 굴렀다.
그 바람에 스턴건의 코어를 노리던 헐버드의 날이 애꿎은 땅을 찍고 말았다.
이를 본 페트리샤가 미간을 찌푸렸다.
‘곱게 끝내주려고 했는데 이 아저씨 안 되겠네.’
시야를 잃은 상태에서 스턴건은 계속 바닥을 굴렀다.
“야 뭐하는 거야 애새끼가 스턴건이랑 링크했잖아!”
“빨리 뺏어!”
석민은 주변에서 소리치는 어른들을 무시하며 스턴건과의 링크에 집중했다.
‘코어 출력을 더 높이면 사라진 머리는 금세 복구 될 거야.’
생각과 동시에 스턴건의 코어에서 푸른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출력이 향상됩니다.
-머리 수복의 시간이 단축됩니다. 앞으로 00:02벌레처럼 구르는 스턴건.
페트리샤는 베가로 하여금 구르는 스턴건을 계속 쫓아가게 했다.
‘밟은 벌레가 꿈틀거리네. 그래, 저렇게라도 꿈틀거려야 재미있지.’
-머리가 수복됩니다.
-시야가 복구됩니다.
락 골렘인 스턴건은 안면 보호구 없이 돌덩이가 차올라 머리가 생성됐다.
동시에 시야를 되찾은 스턴건은 자기 머리를 노리던 할버드의 도끼날을 이제 의미 없어진 오른팔로 막아낼 수 있었다.
출력이 부족한 베가는 스턴건의 오른팔을 그대로 두 동강내지 못했다.
또한 스턴건의 오른팔 장갑이 유독 두꺼운 것도 베가가 일격에 베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스턴건의 오른팔은 거의 반파된 상태로 제 구실을 못하는 상태였지만 할버드의 무시무시한 도끼날을 막기엔 그만한 방패도 없는 상태.
‘출력은 스턴건이 더 위야.’
바닥에 주저앉은 스턴건은 오른팔로 베가의 도끼날을 밀어내며 힘으로 일어섰다.
페트리샤가 씩 웃었다.
‘이거 발악하네?’
힘으로 일어선 스턴건이 오른팔로 할버드를 쥔 베가를 밀쳐냈다.
출력에서 밀리는 베가는 뒤로 주춤하더니 다시 자세를 잡았다.
상대 파이터가 바뀐 줄 모르는 페트리샤는 앞뒤 보지 않고 덤벼들었다.
‘그래봤자 이미 끝났잖아.’
휘둘러지는 할버드의 도끼날이 스턴건에게 꽂히려는 그 순간.
스턴건은 아주 놀라운 움직임으로 할버드의 도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더니 카운터로 백스핀 엘보우를 베가의 안면부에 적중시켰다.
쾅!
스턴건의 첫 유효타가 터지자 석민을 말리려던 이민호 사람들이 멍해졌다.
“야, 터졌다. 한방 먹였어.”
“어어, 봤어.”
“이 꼬마 꽤 하는데?”
이쯤 되자 넋을 놓았던 이민호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스턴건이 답도 없는 상대에게 유효타를 먹이자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반격이 가능하다고?’
이민호가 고개를 돌려 스턴건과 링크한 석민을 쳐다봤다.
자신의 골렘과 링크한 것도 웃겼지만 그것보다도 베가를 상대로 꽤 선전하는 모습이 더 신기했다.
카운터로 백스핀 엘보우를 맞은 베가의 전신이 흔들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두개골이 강해 시야를 잃진 않았지만 페트리샤는 다짜고짜 미간부터 찡그렸다.
아무 것도 아닌 상대에게 한 대라도 맞았다는 게 정말 분했다.
아니 쪽팔렸다.
‘이씨 짜증나게!’
뒤로 주춤하던 베가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때 몸을 추스른 스턴건도 반파 된 오른팔을 올리면 파이팅 자세를 잡았다.
무언가 분위기가 변했다.
‘무슨 파이터가 바뀐 것도 아닌데.’
어쩌다 재수 없게 맞았다고 생각한 페트리샤가 이번에도 재차 상대를 얕보고 할버드를 크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까 했던 공격의 변형이다.
페트리샤는 이번 공격도 상대가 막을 수 없다고 봤다.
예측하기 힘들 테니까.
‘또 온다.’
석민이 바짝 긴장했다.
이민호를 넋 놓게 하였던 그 공격이 또 오려한다.
스턴건의 가드가 견고하게 올라갔다.
가드의 핵심은 반파 된 오른팔.
그 순간 할버드를 거칠 게 돌리던 베가가 이를 날렸다.
아까와 다르게 공격한 것이다.
날아오는 할버드는 가속과 맞물려 파괴력이 배가 됐다.
예측하지 못한 공격.
하지만 가드가 견고했다.
거북이처럼 몸을 꽉 웅크린 스턴건은 할버드에게 직격 당한 직후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해 다소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으나, 오히려 버티는 것보단 나았다.
이런 식으로 힘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소리는 굉장했지만 땅을 구르는 스턴건은 별다른 타격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신 할버드에 직격당한 오른팔은 더 망가져버렸다.
바닥에 내던져진 할버드를 다시 쥔 베가가 스턴건을 향해 걸어왔다.
석민은 생각했다.
‘이대론 힘들어.’
스턴건의 핵심은 오른팔이었다.
그런데 그 오른팔을 공격을 당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태.
‘판금과 미스릴 2중 장갑이 이렇게까지 타격받은 거 보면 상대 무기가 꽤 좋다는 거겠지. 최소 도끼날이 아다만틴은 될 거야.’
판단은 빠르게.
‘우선 기동성부터 살리고, 베가가 저 할버드를 못 다루게 해야 돼.’
스턴건은 석민의 판단대로 오른팔 장갑을 통째로 버렸다.
육중한 무게의 오른팔 장갑을 벗겨내자 이를 본 베가가 움직임을 멈췄다.
‘뭐하는 거야?’
스턴건이 스스로 제 무기를 버렸다.
딱 봐도 오른팔이 무기 같은데, 그 오른팔 장갑을 다 벗겨냈으니까.
‘무게를 줄여 기동성을 살리려는 건가. 하지만 그 실력으로 살려봤자 뭐하겠다고.’
스턴건이 제 장비 중 가장 무거운 부분을 버리자 전보다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
다르게 말하면 기동성이 더 올라간 것이다.
할버드를 쥔 베가는 자세를 잡더니 스턴건을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스턴건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베가를 향해 뛰어나갔다.
두 골렘이 격돌했다.
베가가 할버드를 휘둘렀으나 이를 곡예처럼 피한 스턴건을 맞추진 못했다.
마치 베가가 보였던 그 움직임.
스턴건도 똑같이 흉내 냈다.
지켜보는 모두의 희비가 교차하고, 할버드를 피한 스턴건은 빠른 기동성을 살려 아직 유효한 왼팔을 스트레이트로 뻗어 베가의 안면부를 재차 타격했다.
이어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그 바람에 베가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고, 이를 놔주지 않겠다는 듯 스턴건은 이민호처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먹들은 아까와 다르게 전부 적중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얕본 나머지 또 다시 유효타를 내주게 된 페트리샤는 머릿속이 무척 혼란스러워졌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이미 스턴건에 대한 분석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흐름은 읽어냈고, 상대가 공격을 변형시켜도 자신의 예측 범주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할버드를 피한 곡예 같은 움직임.
그리고 집요하게 파고들며 베가에게 유효타를 꽂는 모습 등.
자기가 분석했던 상대 파이터와 완전 달랐다.
‘이건 파이터가 바뀌었어!’
그 생각과 동시에 페트리샤가 상대 진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턴건이 집요하게 때리든 말든 관심 밖.
‘쟨 누구야?’
이민호는 어디가고 웬 꼬마 아이가 어른들에게 둘러 싸여 스턴건을 조종하고 있었다.
‘썅, 이럴 줄 알았어. 파이터가 바뀌었잖아!’
다시 싸움에 집중하는 페트리샤가 자기에게 한방 먹이려는 스턴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베가가 에퀴테스라 해서 인파이터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파이터의 역량만 된다면 인파이터든지 소드 임펄스라든지 아니면 웨펀 마스터라든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페트리샤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저딴 녀석한테!’
초근접전에선 기동성을 살린 스턴건을 상대로 할버드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도끼창을 다루는 동작 자체가 커서 주먹으로 연타 맞기 딱 좋았으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자존심이 상한 페트리샤는 자기 역시 주먹싸움으로 상대를 이기려고 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으니까.
곧 경기장 한복판에서 두 골렘이 격렬하게 치고 박았다.
단순 권투를 넘어선 골렘의 한계를 넘어선 격돌.
이민호 진영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베가가 보이는 곡예 같은 움직임을 스턴건도 똑같이 따라했다.
오히려 스턴건이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민호가 가진 파이터 자질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왜 이민호는 저렇게 못 싸우는 걸까?
같은 스턴건을 가지고 말이다.
그 질문에 대해선 석민이 대답할 수 있었다.
애당초 오른팔 장갑이 무거운 스턴건은 출력이 더 올라가지 않는 이상 흉내 낼 수 없는 움직임이라고.
그러니 이민호를 탓할 건 아니었다.
‘짜증나 짜증나. 짜증난다고!’
페트리샤는 표정을 왈칵 구기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재수 없는 녀석이 자기와 맞먹고 있었으니까.
그때 석민은 스턴건으로 하여금 큰 거 한방을 준비시켰다.
-마나를 집중합니다.
-드래곤 피스트 시전 중.
우웅!
코어에서 뿜어지는 고출력의 푸른 빛무리.
이어 지반이 원형으로 꺼지며 스턴건의 오른팔에 마법의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이자 베가가 주춤하더니 두 주먹을 세차게 부딪치며 제 앞으로 마나의 벽을 세웠다.
트리플 쉴드.
3중으로 된 마나 막이 방어막을 형성했다.
피스트 마법 중 최상위라는 드래곤 피스트와.
물리 방어 마법 중 나름 상위권에 속하는 트리플 쉴드.
지켜보는 모두의 이목이 경기장에 집중되고, 그 순간 스턴건이 모으던 마나가 폭발하여 베가가 세운 트리플 쉴드를 향해 주먹을 냅다 꽂았다.
지반이 뒤흔들리고 지켜보던 모두의 머리칼이 날렸다.
주먹과 방패의 대결은 무승부였다.
‘진짜 짜증나!’
만약 스턴건의 오른팔이 정상이었다면 방금 전 그 격돌로 3중 쉴드가 부서지며 경기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제대로 타격 받은 베가는 빠른 회복이 불가능한 데미지를 받았을 테니까.
갑작스레 경기 중단을 선언한 페트리샤는 테이블 위에 기술팀이 먹다 놔둔 생수병이 보이자 이를 들고선 반대편 진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곤 도착한 곳에서 이민호 스텝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석민을 향해 소리쳤다.
“야!”
모두의 시선이 아이에게 쏠렸을 때, 페트리샤는 쥐고 있던 생수병을 석민에게 던지며 고함을 내질렀다.
“너 반칙이야! 세상에 경기 도중에 파이터가 바뀌는 경우가 어딨어! 이 경기는 완전 무효야 무효!”
그렇게 비공개 스파링이 끝나고 말았다.
여기서 이민호는 졌지만, 스턴건은 지지 않고 스파링을 끝마칠 수 있었다.
이민호 스텝들은 경기 도중 있었던 그 황당한 일에 대해선 그냥 해프닝으로 넘겨주었다.
슈나이더 측도 좋은 스파링이었다고 말만 해줄 뿐, 그 외 다른 말들은 없었다.
경기 후.
이민호는 심란한 상태로 앉아 있다가 스텝들에게 칭찬을 받는 어린 꼬마를 가만히 지켜봤다.
‘꼬마가 꽤 하네. 나보다 낫겠다.’
이민호는 석민을 보며 자존심이 상하진 않았다.
이미 어느 공주님에게 상할 대로 상한 자존심이었으니까.
“야 꼬마야.”
이민호가 부르자 석민이 그에게 다가갔다.
“아까 보니까 꽤 잘 싸우더라? 네가 예전에 골렘을 만들었다고 했었지?”
“네.”
“그럼 골렘 파이터가 될 생각이냐?”
“네,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
이민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은 이미 한물이 간 퇴물.
그래도 애한테는 아직 영웅이었다.
“나도 많이 죽었다. 예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들어보니까 베가가 스턴건보다 개체 등급이 한 단계 낮았다더라. 나는 유리한 경기도 못 이겼어.”
“스턴건 출력이 더 좋긴 했어요.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요.”
“걔들이 거짓말 할 이유는 없겠지. 저쪽은 주장비도 아니었고, 싸움이 더 격렬해지기 전에 저쪽 공주님께서 아주 난리를 쳤으니까.”
이민호는 적발 여아가 석민에게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나무라는 장면이 아직도 생생했다.
주변에 잡히는 건 죄다 내던지며 이건 반칙이라는 둥.
나중에 다시 붙어야한다는 둥.
그러다 뒤따라온 아이 엄마가 말려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눈에서 쏘아내는 레이저로 석민을 태워 죽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는 오늘부로 그만 둬야 할 거 같다.”
이제까지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젠 인정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자신이 세계 대회에 못 나가는 이유.
아까 붙은 공주님이 전부 설명해줬으니까.
석민이 이민호를 만류했다.
“네? 왜 그만 둬요. 안 돼요.”
“이제 세계무대도 못 밟는 2류 파이터인데, 이 바닥에 남아서 뭐하겠냐? 더 망가지기 전에 은퇴해야지. 원래 박수 칠 때 떠났어야 했는데, 그때 떠나질 못 했어. 세계 대회에 대한 미련이 너무 심하게 남았었거든.”
“그래도요.”
무언가를 결심한 이민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떠나기 전에 이 아저씨가 선물 하나 주고 갈께.”
“선물이요?”
“너라면 아마 세계 대회에서 활약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본다.”
“제가요?”
“그래. 그래서 말인데 좋은 선물 하나 주려고.”
“그게 뭔데요.”
“스턴건 주먹을 주마.”
이민호는 우연찮게 알게 된 한 아이에게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래서 자신의 못 다한 꿈을 우연히 만난 아이가 대신 이뤄주길 소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