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불법 경기장
영등포에 위치한 어느 8차선 도로 위.
개조된 대형 트레일러를 갓길에 세워둔 남자는 밖으로 나와 연신 담배를 입에 물며 혹시나 찾아올 골렘과 골렘 파이터를 기다렸다.
그가 할 일은 서울 외곽에서 열리는 불법 경기장에 참가자격을 갖춘 골렘과 골렘 파이터를 남모르게 수송하는 일이다.
잠시 후, 어린 아이와 그 아이를 따르는 거대한 고철 골렘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아이 혼자 찾아왔을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골렘 파이터의 연령이 낮아지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듣기론 어릴수록 골렘을 잘 조종한단다.
하지만 그런 아이라 할지라도 골렘을 정비하는 기술자나 어른 매니저, 또는 어른 코치가 다 따라붙었다.
그런데 아이 혼자라니!
그것도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저학년 남학생이었다.
“설마, 너 혼자 왔니?”
“아니요. 조금 있다 한 분 오실 거예요.”
“알았다. 그럼 안에서 기다려라. 조금 있다가 출발할 테니까.”
“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골렘을 살펴 본 운전기사는 크게 의문을 두지 않았다.
‘어른 하나 오겠지. 설마 아이 혼자 가겠어?’
석민와 악튜러스는 가장 먼저 대형 트레일러 안쪽에 앉아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석민과 비슷한 이유로 골렘을 끌고 온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
젊은 청년들은 자기들끼리 떠들어대며 먼저 온 석민과 악튜러스를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딱히 다가가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보호자가 어디 있겠지.’
잠시 후 한 팀이 더 찾아왔다.
이번엔 나이 좀 있어 보이는 어른 무리였다.
“아따 송 씨, 이번엔 확실하겠지?”
“나랑 우리 적토마만 믿으랑께.”
“나는 송 씨만 믿어. 이번엔 꼭 우승할 거여.”
그렇게 어른들과 청년들이 뒤엉키니 운전기사는 그중에 아이 보호자가 있을 것이라 넘겨짚고 말았다.
이것은 운전기사뿐만 아니라 뒤이어 온 청년들과 아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아이 혼자 왔겠어?
전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의 일은 관심을 꺼두었다.
그렇게 세 팀을 실은 대형 트레일러는 영등포를 벗어나 서울 외곽도로로 나갔다.
불법 경기장은 서울 외곽에 위치한 지하 벙커에서 매주 토요일 밤 열리고 있었다.
한국군이 버린 대형 벙커를 개조하여 불법 경기장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도착한 벙커 앞은 대형 트레일러가 한 대도 아닌 여덟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개조 된 대형 트레일러 안에 골렘 셋 정도 들어가니 최대 24개의 대전 골렘이 출전하여 우승을 노릴 것으로 보였다.
트레일러에서 내린 석민은 대형 트레일러와 수십 대의 봉고차를 보았다.
봉고차에선 어른들이 잔뜩 내리며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그들은 미리 공표 된 대진표를 보며 우승할 골렘을 점치느라 조용할 틈이 없었다.
‘여기구나.’
불법 경기가 열리는 곳은 버려진 군시설로 보이는 벙커였다.
주변엔 철조망이 있었고, 관리가 안 된 풀밭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석민처럼 우승을 노리고 찾아온 골렘 파이터들이 팀을 이뤄 골렘과 함께 벙커 안으로 들어갔다.
악튜러스와 함께하던 석민도 잠시 후 벙커 안으로 들어섰다.
골렘 파이트 불법 경기장.
정식 경기가 아니다보니 주인장 마음대로 정하는 주먹구구식 룰로 운영되는데다가 경기의 주된 목적은 불법 경기를 통한 도박꾼들의 투기 유도였다.
석민이 찾아간 벙커 안은 크게 한탕을 노리는 어른들로 제법 시끄러웠다.
“자, 오셨습니까! 저 홍길동, 오늘도 골렘 파이트의 사회를 맡게 됐습니다. 불타는 토요일 밤, 저와 함께 달려보시겠습니까!”
와아아아!
능숙한 사회자의 진행에 맞춰 모여든 어른들은 벌써부터 자기가 응원하는 골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성화였다.
불법 경기장 내부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과거 탱크가 지나다니던 입구는 불법 경기장의 입구가 되어 있었고, 탱크들이 주차되던 널찍한 공간은 두 골렘의 파이트 장소로 탈바꿈했다.
원형으로 된 경기장은 거대한 철조망으로 둘러 싸여 있었으며 그 밖으론 질서를 유지하는 조직 폭력배와 투기꾼들이 뒤엉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곧 불타는 토요일 밤 첫 경기가 시작됩니다. 모두들 준비는 되셨습니까!”
불법 경기를 주최한 당사자이자 경기장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조직 폭력배들의 우두머리인 김두철은 뜻밖의 일을 보고 받게 됐다.
“뭐, 다시 말해봐. 지금 어린애 혼자 찾아왔다고?”
“네, 형님. 완전 애새끼인데 초등학생이랍니다.”
대형방탄유리 너머로 불법 경기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귀빈실.
그곳에서 경기를 총괄하던 김두철은 뜻밖의 보고에 어이를 상실했다.
“미친 거 아냐? 애새끼가 여길 왜와?”
“그게... 돈 때문에 왔답니다. 상금 천만 원이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미쳤나. 그 돈은 가져다 뭐에 쓰려고.”
“애아빠가 사채 빚이 있답니다.”
“하, 시발. 내가 살다보니 아빠 사채 빚 갚으려고 노름판 찾아오는 애새끼 이야기를 듣네. 야, 초등학생이라고?”
“네, 형님. 어떻게 할까요? 그냥 쫓아 보낼까요?”
“야이 시발놈아! 여기가 무슨 애새끼 놀이터인 줄 알아? 당장 쫓아 보내!”
경기 규칙 중 참가자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는 건, 참가자의 나이가 어리더라도 보통 팀 단위로 움직이기에 어른이 한둘 정도는 무조건 따라붙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른도 없이 아이 혼자서 경기에 참가했다?
그것도 초등학생이?
전대미문의 사건에다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두철이 소리치기가 무섭게 90도로 폴도 인사를 마친 부하가 귀빈실을 막 벗어나려고 했을 쯤, 황급히 뛰어온 다른 부하가 어떤 소식을 알려왔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김성필 이 자식, 오늘 펑크 냈답니다.”
“뭐? 왜 시발. 갑자기 왜 펑크내는데.”
“다음 달 한국 예선이잖습니까? 거기 나가겠다고 펑크내겠답니다.”
“그 시발놈이!”
“이거 어떻게 합니까 형님? 대진표를 수정할까요?”
“개시발! 이 미친 새끼가 첫 경기부터 빵구 내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갑작스런 보고에 화가 난 김두철이 자기 앞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예정된 첫 경기를 펑크 내면 경기장에 참가한 투기꾼들의 반발이 엄청 심할 것이다.
김두철은 급히 머리를 짜냈다.
“야야, 잠깐 해수야. 아까 그 애새끼, 골렘은 있어?”
김두철이 앞서 보고한 부하에게 물었다.
“네, 제가 봤는데 완전 깡통 골렘입니다. 그래도 구색은 다 갖췄습니다. 누가 봐도 대전 골렘처럼 보이긴 합니다 형님.”
김두철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시발,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그 애새끼한테 대신 출전하라고 해.”
“형님, 애새끼 혼자 왔습니다. 그걸 내보내시게요?”
김두철이 사악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우리랑 뭔 상관인데? 경기에 나갈 골렘만 있으면 됐지.”
“뭐, 그렇긴 하죠. 저희가 무슨 정식 경기도 아니고.”
“어차피 애새끼가 데려온 골렘이면 첫 경기부터 나가떨어질 테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 안 그러냐?”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 보는 길동이한테는 잘 말해두고.”
“아무렴요.”
그는 김두철의 명령을 받고선 곧장 골렘 파이터들이 모여 있던 선수 대기실로 뛰어갔다.
그리곤 급히 석민을 찾았다.
석민은 나무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험악한 인상과 다르게 환한 얼굴로 좋은 소식을 전해왔다.
“꼬마야. 운도 좋다? 형님께서 너 나가도 된단다. 대신 첫 경기야. 바로 준비해라.”
출전을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크게 걱정하고 있던 석민의 표정은 한껏 밝아졌다.
“정말요?”
“대신 잘해야 된다. 네가 데려온 골렘이 경기장에서 부서질 수도 있으니까 그건 각오하고.”
“그런 건 알고 있어요. 잘할게요.”
“좋아, 그럼 바로 가자.”
스카우터를 쓰고 있던 석민은 첫 경기에 출전하기에 앞서 자기 옆에 서 있던 악튜러스에게 말을 건넸다.
“악튜러스, 잘 할 수 있지?”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아도, 아이의 감정과 머릿속 생각들이 스카우터에 내장된 티아라를 통해 악튜러스에게 전달되었다.
악튜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의사를 보내왔다.
석민은 시끄러운 어른들을 해치며 철조망이 쳐진 경기장 쪽으로 나갔다.
첫 경기에 임할 두 골렘 파이터가 골렘을 데리고 철조망 안쪽으로 입장하자 사회자 홍길동이 크게 목소리를 냈다.
“우선 첫 경기에 앞서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매치에 나오기로 했던 김성필 선수가 불참하게 됐습니다. 그런 이유로 김성필을 대신할 새로운 선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어른들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기대하던 김성필은 어디로 가고 기대도 안 하던 녹슨 골렘 하나와 어린 아이가 대신 출전했다.
“저희 용인 경기장의 최연소 골렘 파이터이자, 백혈병에 걸린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참가하게 된 효자! 골렘 깡통의 주인! 어린 차석민 선수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홍길동이 소개한 문구는 즉석에서 대충 만들어낸 것.
사실이야 어찌됐건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김성필을 대신할 선수를 제법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게 그의 일이었으니까.
“시발, 여기가 무슨 애들 놀이터야?”
“그래도 골렘은 있네요.”
“풉, 이름 들었어? 세상에 깡통이래, 하하하!”
여기저기서 야유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악튜러스가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잠시 후 상대 골렘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자 그럼 우리 꼬마 효자를 막을 선수를 소개해볼까요? 김성필의 라이벌! 추성운 선수가 데리고 다니는 인파이터 계열의 무지막지한 골렘! 나는 무조건 한 놈만 팬다! 헤라클래스!”
소개가 끝남과 동시에 악튜러스를 노려보고 달려오는 거대한 락 골렘이 있었다.
흡사 중장비를 씌워놓은 듯한 외양.
노란 장갑이 참으로 인상적인 락 골렘이 두 주먹을 쾅쾅 부딪혀대며 악튜러스와 마주보고 섰다.
석민은 악튜러스로부터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전의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악튜러스, 너도 싸우고 싶구나.’
두 골렘이 중앙에서 대치되자 석민은 상대 골렘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스카우터를 작동시켰다.
곧이어 석민의 시야 상으로 상대 골렘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해당 물체를 스캔하는 중입니다.
-스카우터가 최신 버전입니다. 스캔 능력이 향상됩니다.
[락 골렘]
개체명칭 : 헤라클래스(Herakles)
등록번호 : KR-1632344
개체등급 : DD-(대한헌터협회 May 15th, 2027)개체타입 : 인파이터(Infighter)
최대출력 : 240hp
보유용도 : 대전 골렘용.
-인터넷에 접속하여 골렘의 세부 정보를 갱신합니다.
[장갑 목록]
코어 : [C] 코도 비스트 심장
코어 캡슐 : [C-] 코리아 일렉트로닉스, 코어 캡슐 KR-1A 머리 가리개 : [D] 강철 해드
어깨 가리개 : [DD] 강철 덧대
몸통 가리개 : [D+] 강철 가슴받이 손목 가리개 : [DD] 강철 암가드다리 가리개 : [D-] 강철 각반
손 보호구 : [C-] 강철 장갑
발 보호구 : [D] 강철 장화
장갑 종합효율 : 93%
장갑 종합판정 : DD-
‘역시 락 골렘이었어.’
스캐너로 스캔했을 때와 다른 점은 정보 갱신이 빠르고 추가된 사항도 있다는 점이다.
‘개체 등급이 DD-야. 악튜러스보다 개체등급이 8단계나 높구나. 하지만 악튜러스 정보는 아직 정확한 게 아니니까.’
일단 개체등급만 봐서는 악튜러스는 헤라클래스에게 이길 수 없었다.
둘의 개체등급이 정확하다는 조건 하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둘 다 전문기업으로부터 개체등급을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여기선 단순히 개체등급만으로 승자를 점칠 순 없었다.
‘하지만 장비가 더 좋긴 하네.’
헤라클래스는 조잡한 장비를 착용한 악튜러스와 다르게 어디선가 인증을 받은 장비를 쓰고 있었다.
회사 제품이 아닌데도 착용한 장비들이 전부 스캔된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인증을 받았다는 말이니까.
일반적으로 골렘 장비를 인증할 때 많이 찾아가는 곳이 대한헌터협회였다.
검사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고, 또한 검사비가 무진장 쌌으니까.
‘회사 제품이 아닌 걸 보면 나처럼 직접 만든 건가? 하긴 골렘 장비가 비싸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세부정보에서 석민이 관심 갖는 부분은 더 자세하게 추가됐는데, 각 장비의 최신 업데이트 날짜가 최근 한 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게 많았다.
아마도 곧 있을 국내 예선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장비 정보를 최신으로 업데이트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저 아저씨도 이번 예선전에 나가고 싶나봐. 장비 목록을 전부 최신으로 업데이트 해놨네.’
어디 그뿐이랴.
석민의 시야 상엔 헤라클래스와 연관된 인터넷 동영상만 수백 개가 넘게 검색되고 있었다.
헤라클래스는 아직 정식으로 대뷔하지 않았을 뿐이지, 당장 국내 예선전에 출전해도 손색없는 대전 골렘이었다.
‘상대는 준프로야.’
그에 반해 석민은 악튜러스와 링크되어 싸워본 적도 없는 완전 초짜였다.
데리고 나온 골렘도 좋다고 할 수 없었고, 그 골렘이 착용한 장비마저 녹슨 고철을 용접시켜 만든 게 전부.
막말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쟁터에 나온 견습 기사, 아니 그 후보생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을 다잡는다.
석민에겐 꼭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길 수 있어. 난 악튜러스를 믿으니까.’
석민이 전의를 불태우자 악튜러스가 반응했다.
악튜러스는 아이의 전의를 그대로 느꼈다.
코어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헤라클래스의 코어도 가동되었다.
악튜러스와 마찬가지로 싱글 코어.
하지만 코어는 악튜러스보다 더 좋은 걸 쓰고 있었다.
코도 비스트 심장.
오크들이 전장에서 타고 다니는 코뿔소 같은 몬스터였다.
당연 오크보다 몸집이 훨씬 컸으며 힘도 좋았다.
경기 시작 전이라 상대 골렘을 터치할 수 없는 헤라클래스는 화를 곱씹으며 이를 갈았다.
락 골렘이 이를 갈자 그의 입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악튜러스를 노려보는 헤라클래스의 두 눈은 마치 시뻘건 용암처럼 이글거렸다.
‘곧 부숴주마.’
골렘끼리 가능한 정신감응으로 헤라클래스가 으름장을 내놓자, 악튜러스는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헤라클래스는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감히?
‘가장 먼저 그 오만방자한 입부터 부숴주마.’
헤라클래스의 도발에도 악튜러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적을 살피는 두 눈은 맹수처럼 날카로웠다.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골렘 파이터 박상훈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김성필 말고 다른 녀석이 나왔다기에 조금 긴장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
딱 봐도 고철을 씌운 조잡한 골렘.
막말로 고물상에 굴러다니는 녹슨 강철들을 용접하여 씌우면 딱 저런 모양이 나올 것 같았다.
더군다나 그 흔하다던 어스 골렘이 아닌가?
희귀 원소 골렘이었다면 살짝 긴장도 했겠지만, 그 흔한 어스 골렘이니 엄청 만만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스카우터에 나온 정보도 아주 형편없었다.
저런 걸 대전 골렘이라고 끌고 나온 아이가 기특할 정도다.
‘저건 뭐 완전히 쓰레기 골렘이군. E+? 등급도 존나 웃기네. 아니 뭘 어떻게 하면 E+가 나오지? 팔다리 하나 없이 검사라도 받았나?’
박상훈이 알고 있기론 사지 멀쩡한 골렘 중 E 등급은 극히 드물었다.
이런 말을 하면 실례겠지만, 사람으로 치면 장애 등급이었다.
골렘의 팔 하나가 없다든가 아니면 다리 하나가 없어야만 E 등급이 나온다고 알고 있었다.
진짜 쓰레기 같은 골렘도 하다못해 EE+, EEE 정도는 받았다.
진짜 최하 등급.
그런데 이름이 깡통인 줄 알았던 악튜러스는 E+였다.
‘대한헌터협회에서 측정한 거니 약간의 착오가 있겠지만 그래봤자 큰 차이는 없어. 걔들도 적당히는 하니까. 아무튼 등급은 E+에 장비도 쓰레기. 볼 것도 없겠구만.’
혹시나 해서 스카우터를 통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해당 골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이 말은 철저히 정보를 숨겼던가 아니면 완전 신출이란 소리다.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도 없는 것 같고, 그럼 초짜인가?’
스카우터를 착용한 박상훈의 시야엔 악튜러스와 관련된 정보가 0건 검색되었다.
박상훈은 의심 없이 확신을 굳혔다.
‘신출 맞네. 그럼 개같이 밟아줘야지!’
박상훈은 어린 골렘 파이터의 꿈을 짓밟는 아주 못된 생각을 했다.
두 번 다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골렘 파이트 같은 어른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도록 트라우마라도 심어주고 싶었다.
그는 심보가 아주 못 된 어른이었으니까.
지켜보는 관중들도 저마다 스카우터를 착용하고 악튜러스와 헤라클래스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너무 뻔한 거 아냐? 등급 차이가 말이 안 되잖아? E+과 DD-면 무려 8단계 차이라고. 애랑 어른이 싸움하는 거랑 똑같다니까?”
“아무리 정식 경기가 아니라지만 대전 골렘이면 무조건 D 등급 이상인데. 살다 보니 여기서 E 등급 대전 골렘도 다 보네.”
골렘 등급에서 E 등급 골렘은 찾기가 어려웠다.
전부 폐기처분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경기장에 출전하는 골렘의 최하 등급이 D- 등급이었으니 관중들의 웅성거림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E+ 등급치곤 제법 멀쩡해 보이는데? 보통 팔다리 하나 없어야 하는 거 아냐?”
“팔다리가 붙어있으면 다른 하자라도 있겠지. 그거 아니면 E+ 등급이 안 나와요.”
“그렇긴 한데...”
“보니까 여기 주인이 빵구낸 김성필 대타로 애를 내보낸 모양이네. 골렘 파이터도 완전 애새끼야.”
소란이 일자 경기 사회를 맡은 홍길동이 크게 목소리를 냈다.
“자 여러분! 배팅은 전부 끝났습니까? 그럼 경기를 곧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탕을 노리고 온 투기꾼들은 전부 의기투합하듯 헤라클래스에게 올인 했다.
전광판에 나온 배팅 비율은 96대 4로 헤라클래스가 압도적.
“두 선수 모두 준비 됐습니까!”
배팅을 끝낸 어른들이 철조망 너머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 기세는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는 두 골렘에 못지않았다.
“그럼 깡통과 헤라클래스의 경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준비 됐습니까!”
“예!”
“그럼 달려 봅시다! Ready, Fight!”
사회자 길동의 부르짖음과 동시에 악튜러스를 잔뜩 벼르고 있던 헤라클래스가 무시무시한 돌주먹을 뻗었다.
골렘과 링크 된 석민은 이를 보고 곧장 왼쪽으로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석민과 완벽하게 링크되지 않은 악튜러스는 오른쪽으로 피하려고 했다.
몸은 하나고, 명령은 두 개니 혼선이 빚어졌다.
결국 악튜러스는 잔뜩 벼르고 있던 헤라클래스에게 면상을 얻어맞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육중한 골렘이 쓰러지며 굉음을 내자 성난 관중들은 더욱 크게 소리쳤다.
“죽여 버려!”
“대가리를 박살내라고! 아주 찍어버려!”
나동그라진 악튜러스 위로 거대한 락 골렘이 날아와 깍지 낀 손으로 그 면상을 다시 한 번 찌그러트렸다.
만약 인간의 경기였다면 그 즉시 심판이 나서서 이를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골렘들의 경기였다.
심판 따윈 없었고, 제한 사항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다 때려 부수면 됐다.
“다 부숴버려 헤라클래스!”
헤라클래스가 파운딩 자세를 잡고 정말 무지막지하게 악튜러스의 면상을 내리찍었다.
용접된 강철 해드는 몰아치는 주먹질에 순식간에 찌그러지며 그 형태를 잃었다.
이 순간 석민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스카우터를 통해 골렘과 링크된 상태라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은 멀리서 얻어맞고 있는 악튜러스가 아니라, 파운딩 자세에서 얼굴을 맞고 있는 악튜러스, 그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 이건 내가 하던 대전배틀게임이 아니야.’
초짜라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었다.
골렘과 링크 된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실전으로 싸우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계속 간다면 곤란했다.
석민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곤 혼선을 빚어내고 있는 악튜러스를 불렀다.
‘악튜러스, 그만하고 나한테 맡겨.’
아이의 목소리는 제법 강단이 있었고, 결연했다.
악튜러스는 절대 남에게 의지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의 목소리엔 묘한 힘이 있어서, 웬만해선 제 뜻을 굽히지 않던 악튜러스는 아이의 판단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악튜러스의 지배권이 완전히 넘어오게 되자 석민은 그제야 제 뜻대로 골렘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이제 시작이야.’
헤라클래스는 때려눕힌 악튜러스를 놔두고선 관중들을 향해 만세 하듯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제 승리를 자축하는 것이다.
악튜러스는 몸을 웅크려 반동으로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걸 모르는 박상훈은 광대라도 된 마냥 헤라클래스를 경기장에서 춤추게 했다.
그가 만들어낸 승리의 세레모니였다.
박상훈은 항상 경기에서 이기면 그 춤을 골렘에게 추게 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춤추는 골렘은 관중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해줬다.
그 순간.
반동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 악튜러스가 주제도 모른 채 승리를 자축하고 있던 헤라클래스의 뒤통수를 목표로 잡았다.
말아 쥔 주먹.
강철로 된 주먹은 헤라클래스의 뒤통수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헤라클래스는 그대로 머리를 바닥에 쳐박히고 말았다.
당황한 박상훈은 생각지도 못한 진행에 어리둥절했다.
관중들을 향해 춤추고 있다가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그 머리가 바닥에 박혔으니 당연했다.
‘뭐지? 뭐야?’
통각이라도 느꼈다면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것을 바로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통각이 없으니 그저 상황 판단만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맞혀야 했다.
‘뭐지? 대체 뭐냐고!’
다르게 보면 박상훈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볼 수 있었다.
굳이 통각을 느끼지 않더라도 실력이 좋았다면 무슨 상황인지 바로 맞췄을 테니까.
다급히 링크를 끝낸 박상훈이 본래 시야에서 경기장에 위치한 헤라클래스의 상태를 보게 됐다.
깡통 골렘에게 한 대 맞고 고꾸라진 헤라클래스가 보였다.
“이런 시발!”
박상훈이 다시 링크하기 전.
박상훈은 헤라클래스의 뒤를 잡고 있던 악튜러스가 헤라클래스의 엉덩이를 아주 찰지게 차주는 것을 보게 됐다.
‘시발놈이 가만히 쳐맞다가 왜!’
다시 링크 시작.
박상훈은 엉덩이를 차이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헤라클래스와 다시 링크됐다.
다 구르고 나자 벙커의 시멘트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면상에 직격하려는 어느 골렘의 발도.
도무지 피할 재간이 없었다.
박상훈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그것은 다르게 보면 비명과도 같았다.
악튜러스의 발이 헤라클래스 면상에 직격했다.
사람이 저리 밟혔다면 머리통이 찌그러지고 뇌수가 사방팔방으로 튀었을 것이다.
하지만 골렘이었다.
강철판에 짓눌린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며 들끓던 관중들을 잠시 진정시켰다.
관중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 깡통이 헤라클래스 머리를 날린 것 같은데.”
“저게 말이 돼?”
관중들 중 태반이 놀랐다.
기대도 안 하던 깡통 골렘이 나름 우승 후보로 점쳐지던 헤라클래스의 머리를 부숴버렸으니까.
“개 같은!”
화가 난 박상훈은 계속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골렘의 머리가 박살 나 일시적으로 시야를 잃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기 수복이 되는 골렘의 특성상 잃은 시야는 곧 찾게 되겠지만, 그때까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박상훈은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시야 속에서 지금 상황에 대한 이유를 찾고 있었다.
‘대체 뭐냐고! 출력이라 해봤자 30마력이었잖아? 30마력짜리가 어떻게!’
박상훈은 똑똑히 기억했다.
경기에 앞서 스카우터로 깡통 골렘을 스캔했을 때 최대출력이 고작 30hp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에 반해 헤라클래스의 출력은 240hp.
무려 8배 차이였다.
등급도 8배 차이였고.
진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고!’
이를 악 물었다.
미간의 골이 깊어진다.
‘저 위력이면 고작 30마력을 내는 골렘일 리 없잖아!’
방심이 화근을 불러왔다.
거기서 승리의 세레모니를 왜 췄을까?
누군가는 그랬다.
모든 일이 끝나기 전 축배를 일찍 터트리면 하늘이 노한다고.
그러니 항상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헌터협회에서 측정했다고 해도 어느 정도 맞을 텐데. 저건 아예 안 맞잖아!’
석민이 골렘 개체 측정을 할 때 대충 했던 게 호재가 됐다.
적어도 헤라클래스는 충분히 방심했고, 악튜러스는 그 틈을 서슬 퍼런 칼날처럼 파고들었으니까.
‘악튜러스!’
-골렘과 싱크로율 92.4%
-평균 골렘 파이터의 싱크로율이 70% 근처인 것을 감안할 때 아주 놀라운 수치입니다.
어느새 악튜러스와 한 몸이 된 석민은 마치 자기가 악튜러스가 된 것처럼 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던 헤라클래스에게 덤벼들었다.
헤라클래스는 머리 장갑이 찌그러진 뒤, 빠르게 머리를 수복시키려 했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이길 수 있어! 여기서 끝내는 거야!’
반면 기회를 잡은 악튜러스는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몰아붙였다.
땅을 짚고 일어나려던 헤라클래스를 발길질로 걷어차고, 급히 등에 메고 있던 대검부터 뽑아들었다.
이어 대검을 휘둘러 정신없던 헤라클래스의 복부 장갑을 타격했다.
그 바람에 헤라클래스는 또 다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반격을 하지 못하는 헤라클래스와, 속수무책으로 상황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박상훈.
박상훈이 무언가를 하려 해도 실력 없는 허접한 골렘 파이터라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 바쁠 뿐이다.
‘링크가 된다 할지라도 시야가 없어. 빨리 머리가...’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거칠 게 몰아붙이는 악튜러스는 묵직한 대검을 배트 휘두르듯 가까스로 수복되려던 헤라클래스의 머리를 재차 날려버렸다.
‘시야를 주면 안 돼. 여기서 끝내야 돼!’
헤라클래스의 강철 해드가 완파됐다.
특수 금속도 아닌 가장 흔한 강철로 주조됐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더 이상 제 구실하지 못한 강철 해드가 날아 경기장 외곽에 세워져 있던 강철 철조망과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까만 시야를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박상훈이 말꼬리를 흐렸다.
“시발...”
박상훈은 전의를 상실했다.
‘이래가지곤 아무 것도 못 해. 뭐가 보여야 뭐라도 해보지!’
아무래도 악튜러스가 승기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제 주제도 모르고 관중들 앞에서 춤을 췄던 골렘과, 어설픈 실력으로 어린 아이의 꿈을 짓밟으려 했던 못된 어른의 최후라 할까?
‘이건... 끝났다.’
박상훈이 스카우터를 힘겹게 벗어냈다.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간접적인 신호였다.
박상훈이 경기장 안쪽을 보자 헤라클래스가 거대한 강철 대검을 휘두르는 악튜러스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다.
“개 같네. 아무것도 뭣해보고 질 줄은...”
경기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자 관중들은 말이 없어졌다.
그들도 할 말이 없진 않았다.
나름 이 바닥에서 오랜 시간을 누벼왔었다.
두 골렘의 스펙만 비교해 봐도 누가 이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름 전문가라 자부하던 그들마저도 이번 경기는 의외였다.
‘저건... 말이 안 돼. 저 깡통 출력이 말이 안 된다고. 저게 진짜 30마력짜리 위력이야? 내가 볼 땐 훨씬 더 높은 거 같은데.’
‘왜 출력을 거짓으로 올려놨을까... 역시 헌터협회 건 믿으면 안 돼.’
‘시발... 내 돈.’
혹시 몰라 악튜러스에게 배팅한 정말 극소수의 어른들만 환희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도 이런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남들이 헤라클래스에게 올인 하니까, 그 분위기에 편승하려다 혹시? 라는 생각으로 악튜러스에게 배팅했던 것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으니까.
‘오, 하느님 부처님!’
‘오늘 제대로 찍신 한 번 강림하셨는데? 느낌 좋아. 다음 경기도 이렇게 가보자.’
경기장 저편, 귀빈실에 앉아 뜻밖의 결과를 맞이한 김두철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헤라클래스가 이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지금 분위기 상으론 깡통 골렘이 이길 것 같았다.
“뭐야, 저게 이기네? 허허...”
김두철은 곧장 근처에 있던 여인을 불러냈다.
“자기야, 저걸 어쩌나? 저 깡통이 지금 이기는데?”
김두철이 바라보는 곳엔 다소 깊게 파인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하나 있었다.
짙은 화장.
붉은 색 드레스에다가 머리칼도 정성스럽게 가꾼 태가 났다.
육감적인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내던 그녀는 스카우터를 쓰고 있다가 표정을 구겼다.
“그러네. 완전 예상 밖이야.”
“우리 자기, 저기서 돈 좀 잃겠는데?”
김두철이 비아냥거리며 그녀의 허벅지 위에 은근슬쩍 손을 가져다 놓자 한미라가 그의 손을 딱 내리치며 으르렁거렸다.
“이러지 말자. 서로 살가운 사이도 아닌데.”
“자기야, 섭섭하게 왜이래? 우리가 그런 사이였어?”
“지랄은. 그보다 저 골렘 정보가 잘못 된 것 같은데?”
“잘못 돼? 뭐가?”
김두철은 스카우터가 없는 상황인지라 한미라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몰랐다.
그를 위해 한미라가 짧게 설명해줬다.
“스펙을 장난쳐놨어. 출력이 등록된 것과는 달라. 몇 배는 더 센 거 같은데.”
“출력? 골렘 출력이야 뻔하지. 그래도 저 정도면 백은 나오지 않나?”
“등록 된 정보에선 백도 안 나와.”
“뭐? 백도 안 나와? 그럼 몇인데?”
“삼십. 말도 안 되게 삼십을 등록해놨네.”
김두철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전 골렘치곤 출력이 백보다 낮은 골렘은 보지도 못 했으니까.
“뭐? 삼십? 설마, 그거 헌터협회에서 측정한 거야?”
“응, 그것도 며칠 전에 검사 받은 거야.”
“하, 그 새끼들. 그 새끼들 완전 가라야. 개체 측정 완전 가라로 한다니까.”
결국 얻어맞는 헤라클래스를 보다 못한 박상훈이 경기 포기를 선언했다.
헤라클래스가 더 부서지기 전에 수렁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이로써 첫 경기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악튜러스가 가져가게 됐다.
“세상에! 깡통이 헤라클래스를 이겼습니다! 그 누가 이런 기적을 예상 했을까요? 깡통, 헤라클래스를 꺾고 8강전에 진출합니다!”
경기의 진행을 맡은 홍길동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프로답게 능숙하게 다음 진행을 이끌어냈다.
“자 그럼, 경기장이 준비되는 대로 다음 경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두 선수, 모두 퇴장해주세요.”
악튜러스가 거의 일방적으로 때려 부순 헤라클래스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망가져버렸다.
헤라클래스는 경기가 끝난 뒤에야 잃은 머리를 수복했지만, 그래봤자 이미 경기에선 진 뒤였다.
분이 가시지 않는 박상훈은 스카우터를 꽉 쥐었다.
나름 마음속으론 다음 달 예선까지 준비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예기치 못한 패배를 당하자 정신적인 데미지가 엄청났다.
아무래도 예선전 출전은 포기해야할 것 같았다.
‘내가 저딴 애새끼한테 지다니.’
경기 시작 전.
어떤 아이의 꿈을 잔인하게 짓밟으려던 그가 오히려 자기 꿈을 짓밟히고 말았다.
심보가 못된 사람다운 최후였다.
‘저딴 애새끼한테도 졌으면 이번 예선전 나가도 별 거 없겠다. 접자 접어 시발. 가서 아버지한테 가업이나 물려받아야지.’
그는 이 자리서 골렘 파이터를 은퇴할 생각을 했다.
헤라클래스야 팔아버리면 그만.
박상훈의 어깨가 축 늘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석민은 악튜러스를 보고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잘 했어 악튜러스.”
악튜러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제 몸에 묻어 있던 헤라클래스의 돌가루를 털어냈다.
석민은 이번 경기로 큰 자신감을 얻게 됐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것이지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면 자신감을 얻기 마련이었으니까.
‘다음 경기는 방금처럼 요행은 없을 거야. 하지만 이길 수 있어.’
그렇게 여러 경기가 지나고, 8강전이 시작됐다.
한두 경기가 지나고, 악튜러스 차례가 왔다.
석민은 거대한 철조망 너머로 나아가는 악튜러스를 보며 상대편 골렘을 스카우터로 살펴봤다.
‘저 아인 헤라클래스보다 스펙이 낮네?’
헤라클래스는 이번 불법 경기에서 나름 우승 후보로 점쳐지던 대전 골렘이었다.
그러니 출전한 다른 골렘들이 헤라클래스보다 스펙이 낮은 건 당연지사.
개체명칭, 릴리로 되어 있는 분홍빛 골렘은 출력 190hp에 개체등급이 D인 대전 골렘이었다.
원소 속성은 물.
워터 골렘이었다.
석민은 이번 경기도 자신이 있었다.
‘전 경기처럼 이길 수 있어. 잘 부탁한다 악튜러스.’
전 경기로 인해 머리에 쓴 강철 해드가 반파 된 악튜러스가 경기장에 섰다.
첫 경기에서 돈을 딴 몇몇 관중들이 크게 환호했지만, 아직 그 인기가 상대편 골렘보다 많지는 않았다.
릴리라 불리는 분홍빛 대전 골렘의 주인은 담배 피는 여자였다.
티셔츠에 청바지. 캡 모자를 쓰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김현지는 자기상대로 스카우터를 착용한 남자아이를 보자 낯부터 찡그렸다.
‘지금 나보고 조카뻘 되는 애랑 싸우라는 건가? 그나저나 헤라클래스는 어떻게 이긴 거래?’
불법 경기장이다 보니 못된 어른들이 많았다.
‘짜증나네. 일단 보이는 스펙은 거짓일 테고, 출력은 대충 어느 정도일까?’
그 순간.
사회자 홍길동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자, 자, 자! 나왔습니다! 오늘 경기에 참가한 여러 파이터 중 유일한 홍일점! 김현지 선수와 그녀의 골렘! 릴리를 소개합니다!”
김현지는 담배를 입에 물고 손을 들어 올리며 관중들의 환호에 화답해주었다.
뒤이어 석민과 악튜러스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그리고 헤라클래스를 꺾고 올라온 깡통과 그의 주인, 차석민 선수를 소개하겠습니다!”
나름 불법 투기장이다 보니, 이길 골렘을 점치려는 어른들의 신경전으로 경기장 주변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잠시 후 관중들의 배팅 결과가 전광판에 올라왔다.
이를 본 홍길동이 크게 목소리를 냈다.
“놀랍군요! 우리 당돌한 꼬마 선수와 그의 골렘, 깡통에 대한 배팅률이 엄청 올라갔는데요? 무려 67대 33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첫 경기에서 96대 4란 배팅률을 받았던 석민은 다음 8강전에서 33까지 그 배팅률이 올라갔다.
골렘 스펙이 정확하지 않았고, 나름 우승후보로 점쳐지던 헤라클래스를 격파한 공로였다.
“우리말 속담에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하죠! 그럼 우리 석민 선수의 고추는 얼마나 매울까요?”
홍길동의 거침없는 입담에 긴장감이 팽배하던 경기장 분위기는 한층 밝아지게 됐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그럼 이번 경기도 작은 고추가 매운 지 한 번 보겠습니다. 두 선수 준비 되셨습니까!”
이어지는 관중들의 함성.
그들은 자기가 배팅한 골렘의 승리를 향해 악을 내질렀다.
“부숴버려!”
“박살내버리라고! 가라 릴리!”
홍길동이 8강전 세 번째 경기 시작을 알렸다.
“Ready, Fight!”
시작과 동시에 악튜러스가 릴리를 향해 치고나갔다.
릴리 역시 물러서지 않고 악튜러스를 향해 달려 나갔고, 둘은 중앙에서 두 팔을 마주잡고 힘겨루기에 들어섰다.
두 골렘이 힘겨루기에 들어가자 관중들은 철조망까지 흔들어대며 괴성을 내질렀다.
“이겨!”
“힘으로 눌러버리라고!”
김현지는 씩 웃었다.
그녀는 나름 베테랑이었다.
‘우선 깡통의 출력부터 재보자고.’
워터 골렘에 분홍빛 강철 장갑을 씌운 릴리가 최대출력을 냈다.
최대출력 190마력.
워터 골렘이 힘을 보이자 악튜러스도 지지 않고 맞섰다.
석민도 김현지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맞선다면 악튜러스가 가진 최대출력을 가늠할 수 있을 거야.’
석민의 눈은 전에 없이 불타고 있었다.
두 골렘이 힘으로 격돌했다.
스카우터에 표시 된 두 골렘의 출력은 각각 30hp와 190hp.
보통의 경우라면 30hp의 출력을 가진 악튜러스가 릴리에게 밀려야만 했다.
출력 차이가 무려 6배 이상 났으니까.
하지만 악튜러스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릴리와 대치하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30hp가 190hp에게 맞선 것이다.
오히려 압도하려는 모습까지 보이자 김현지를 포함한 대다수 관중들은 악튜러스의 출력을 의심했다.
썩 내키지 않은 상황에 김현지가 미간을 구겼다.
‘출력이 우리 릴리보다 위네?’
김현지는 착용한 스카우터로 악튜러스의 코어를 살펴봤다.
‘블랙핸드 오크 부족장 심장이라...’
해당 정보는 그녀의 시야 상에 빠르게 업로드 됐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해당 물체를 스캔하는 중입니다.
[블랙핸드 오크 부족장 심장]
등급 : DDD
효율 : 93%
상태 : 양호합니다.
‘아니 이거 말고. 블랙핸드에 대한 거.’
그녀의 생각대로 정보를 출력해내는 스카우터는 그 즉시 인터넷에 접속하여 오크 부족장, 블랙핸드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수집하기 시작했다.
수집된 정보는 채 1초가 지나기도 전에 출력됐다.
-해당 정보는 대한헌터협회의 오픈 정보, 강남헌터카페에서 수집한 자료입니다.
[오크 부족장 블랙핸드]
위험등급 : DDD
특이사항 : 하센 부족의 그락카르 후계자.
-네임드 오크 부족장입니다.
-하센 지역에선 악명 높기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13일 전 헌터 이진아를 필두로 하는 한국 레이드 팀, ‘유니콘’이 사냥했습니다.
이것 외에도 수집 된 여러 정보가 있었지만, 그녀가 관심을 가졌던 정보는 딱 하나였다.
‘네임드 오크였네. 그럼 일반적인 오크 심장보다 좋다는 건데... 그래서 DDD등급이구나.’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현재 릴리의 코어는 오크 부족장보다 더 좋은 코도 비스트 심장을 쓰고 있었다.
물론 앞서 헤라클래스가 쓰던 코어보다는 질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오크 심장에 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신기하네. 코도 비스트 심장을 쓰는 코어가 오크 심장을 쓰는 코어보다 출력이 낮을 수 있나?’
코어로 쓰이는 몬스터 심장 중 오크 심장은 대체적으로 D등급, 코도 비스트 심장은 C등급이었다.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했다.
일반적인 상식에선 한참 벗어나는 일이었으니까.
‘설마 골렘 차이인가?’
골렘의 출력을 결정하는 건 코어가 가장 컸다.
하지만 코어가 골렘 출력을 100% 결정하는 건 아니었다.
코어를 심지 않은 골렘 자체도 마나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부분도 어느 정도 고려해야 했다.
‘기분 나쁘네. 우리 릴리가 저 깡통보다 안 좋다는 거야?’
그녀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됐어. 그래봤자 저 정도면 별 차이 안 나니까.’
출력의 차이는 분명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출력 차이야 약간 밀리는 정도.
그 정도야 다른 것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깡통 출력은 대충 200hp에서 210hp정도?’
그 생각은 석민과 비슷했다.
생각을 마친 김현지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스카우터를 통해 건너편에 있던 석민에게 통신을 보냈다.
“야 꼬마야.”
석민은 난데없이 걸려온 통신에 당황했다.
보통 이런 경우 항복 선언을 하기 위해 통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 골렘이 더 망가지기 전에 상대 파이터를 말리는 것이다.
그럼 좀 더 멀쩡한 상태로 자기 골렘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릴리 상황이 경기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석민은 경기 경험이 별로 없어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네?”
“이제부터 누나가 재밌게 놀아줄게. 지고 나서 애처럼 질질 짜진 마라.”
뭐하러 통신을 하나했더니 도발이었다.
석민은 그녀의 도발에,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곧장 응수했다.
음기응변은 석민이 잘하는 것 중 하나였으니까.
“아줌마도요.”
“뭐 아줌마?”
나이 서른도 안 된 처자에게 아줌마란 호칭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썅! 너 뒈졌어.”
안 그래도 서른에 근접한 나이라 최근부터 나이에 관해선 엄청 예민한 상태였다.
출력 싸움에서 재미를 보지 못하자 그녀는 진행을 바꿨다.
‘꼬맹아, 물지옥이 뭔지 보여줄게.’
그녀는 릴리가 등에 매달고 있던 물탱크 두 개의 수문을 열었다.
물탱크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은 바닥으로 수직 낙하했고, 그 물로 인해 경기장 바닥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됐다.
악튜러스는 힘겨루기 도중 시선을 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는 물을 보았다.
석민이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무슨 물이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석민은 재빨리 스카우터를 통해 상대 골렘의 대전 영상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뭘까? 당하기 전에 빨리 찾아야 돼.’
석민의 정보분석력은 범인 수준이 아니었다.
대전 골렘 릴리와 연관된 동영상만 수백 개.
석민은 빠른 눈으로 한 순간 여러 동영상들을 훑으며 자신이 원하는 영상을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그녀가 자주 쓰는 수법인지 관련된 동영상이 여러 개 있었다.
동영상을 살펴보니 탱크에서 쏟아낸 물로 적 골렘을 옭아맸다.
물의 지배력을 행사한 것이다.
‘워터 골렘의 이점을 이용한 건가?’
보통 원소 골렘들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원소에 대해 아주 놀라운 친화력과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
파이어 골렘이라면 불을 능숙히 다뤄 굳이 불계열의 마법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파이어 샷, 파이어 웨이브 등과 같은 불과 관련된 마법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구사했다.
워터 골렘도 마찬가지.
워터 골렘이면 물과 관련되어 있었고, 물을 다루는데 아주 능숙했다.
‘그런데 악튜러스가 지 속성이라 수 속성 골렘에게 불리한 점은 없는데.’
골렘 대전에서 속성의 상관관계는 꽤 중요했다.
가장 흔한 원소 골렘들은 지풍화수생암광(地風火水生暗光)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수(水) 속성은 화(火) 속성에 강하고 생명과 관련된 생(生) 속성보단 약했다.
즉, 워터 골렘이 파이어 골렘보다 강하고, 나무로 된 트리 골렘보다 약한 것이다.
이게 바로 속성의 이점.
악튜러스는 지 속성이라 수 속성과는 이러타할 상관관계 없었다.
‘하지만 바닥에 고인 물이 악튜러스에게 스며들 거야. 악튜러스는 바위가 아니라 흙이니까.’
같은 지 속성인 헤라클래스였다면 릴리의 수법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헤라클래스는 돌 골렘이라 물이 스며들 수 없는 구조니까.
하지만 악튜러스는 구성 원소가 흙이었다.
흙은 물을 머금을 수 있었다.
역시나.
석민이 예상했던 대로 바닥에 고여 있던 물은 악튜러스 몸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워터 골렘인 릴리가 물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해 어스 골렘인 악튜러스를 물에 젖게 만든 것이다.
원하던 상황이 나오자 김현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릴리! 가서 저 깡통을 부숴버려!”
김현지의 취향에 맞게 전신 장갑이 분홍빛으로 칠해진 릴리는 예쁘장한 외양과 다르게 괴성을 내지르며 최대출력을 냈다.
반면 물에 젖은 악튜러스는 최대출력을 낼 수 없었다.
흙에 스며든 물이 억제력을 행사해 움직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물에 젖은 악튜러스가 빠르게 밀리기 시작했다.
물 때문에 출력이 크게 저하된 것이다.
‘저 상태론 출력을 제대로 낼 수 없어.’
물에 젖은 악튜러스는 출력이 반토막 났다.
앞서 가늠했던 악튜러스 최대출력은 200~210hp정도.
거기서 반토막이 났으니 현재 출력은 100~105hp가 됐을 것이다.
힘에서 밀린 악튜러스의 상체가 꺾였다.
출력이 두 배 차이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모두의 희비가 교차하고 릴리에게 무자비하게 밀리는 악튜러스가 결국 버티질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어 성난 고릴라로 돌변한 릴리가 주먹 쥔 손으로 악튜러스의 강철 해드를 수차례 내리찍었다.
석민의 시야가 요동쳤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관중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성난 관중들.
그들은 악튜러스가 성난 릴리에게 맞는 걸 보고선 짜릿한 쾌감을 만끽했다.
동시에 울려 퍼지는 홍길동의 목소리.
“오! 드디어 나왔습니다! 릴리가 자주 쓰는 물지옥! 과연 깡통은 저 물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관중들이 환호성이 뒤따랐다.
악튜러스는 어느새 쇠창살까지 밀려 릴리의 주먹을 가드 올린 손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악튜러스는 정말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가드를 올린 왼쪽 팔 강철 장갑이 서서히 찌그러지고 있었으니까.
단,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체 장갑과 오른 팔 장갑은 아직도 멀쩡했다.
릴리가 아무리 쳐도 찌그러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다.
석민은 미간을 모았다.
답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가드를 올린 상태가 큰 데미지는 없는 상태.
오히려 상대 골렘이 때리다 지칠 것이다.
녹슨 강철로 만든 장갑은 생각보다 견고했으니까.
상대도 때리다 지칠 것이고, 기다리다보면 틈이 보일 것이다.
‘수세에 몰렸을 땐 방어하는 쪽이 훨씬 유리해. 공격자는 에너지 소비가 크니까. 조금 있으면 상대 골렘도 때리다 지칠 거야. 그렇게 되면 틈이 생기겠지. 그 틈을 파고들면 돼.’
그것과는 별개로 석민에겐 다른 걱정거리가 있었다.
바로 악튜러스가 가진 스트레스 게이지였다.
현재 스카우터에 표시 된 악튜러스의 스트레스 게이지는 정말 무섭게 올라가고 있었다.
-스트레스 게이지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현재 수치 39/100-현재 스트레스 게이지가 40에 도달했음으로 폭주경보가 ‘관심’ 단계로 격상됩니다.
-주의! 스트레스 게이지가 너무 높으면 골렘이 자제력을 잃고 폭주할 수 있습니다.
-경고! 폭주한 골렘은 링크 된 골렘 파이터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스트레스 게이지가 계속 상승 중입니다.
경기를 뛰는 골렘도 하나의 인격체와 같아서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으면 사람처럼 ‘스트레스’라는 걸 받았다.
골렘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였다.
링크 된 파이터가 형편없이 싸울 때와 샌드백처럼 무작정 맞을 때.
다만 샌드백처럼 맞을 때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는데, 첫 번째 만만한 상대에게 맞을 때와 두 번째 만만하지 않은 상대에게 어쩔 수 없이 맞을 때가 있었다.
위의 두 가지 중 첫 번째에 해당됐을 때 골렘이 받는 스트레스가 가장 컸다.
그리고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악튜러스는 버티는 게 기분 나쁜가봐.’
-스트레스 게이지가 60에 도달했습니다. 폭주경보가 ‘관심’ 단계에서 ‘경계’ 단계로 격상됩니다.
이 상황에서 정말 놀라운 것은 악튜러스가 짓는 표정이었다.
수세에 몰린 악튜러스의 낯은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게 아니라 분노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자신의 파이터가 아닌 자신을 일방적으로 때리고 있는 상대 골렘에 대한 분노였다.
그 순간, 석민의 눈에 보이는 풍경이 갑작스레 변했다.
‘뭐지?’
생전 처음 보는 곳이다.
함성이 메아리치던 경기장이 아닌, 적막한 어느 방 안이었다.
바깥 하늘은 날이 저물어 가는 지 은은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평화로운 안에선 낯이 익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예전에 악튜러스의 기억에서 보았던 늙은 마도사였다.
“사랑하는 내 아들 악튜러스.”
창가 앞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은 석민이 서 있던 곳으로 말을 던졌다.
석민은 이 상황을 빠르게 인지했다.
‘저번처럼 악튜러스가 가진 기억이구나. 저 할아버지 또 본다.’
석민의 생각대로 이곳은 악튜러스가 가진 기억 중 일부였다.
노인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운을 뗐다.
“기억나니? 너는 어렸을 때 동네 어귀에서 아이들에게 정말 많이 맞았었지.”
악튜러스가 아이들에게 맞았다고?
석민은 노인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악튜러스는 골렘일 텐데?
“그러다 한 번 화가 나기 시작하면 너는 정말 물불 가리지 않고 다 때려 부쉈지. 그때 내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준 깽값만 생각하면...”
말을 하면서도 노인은 은연 중 웃고 있었다.
전부 다 좋은 추억이었다.
“그런 점은 지금도 똑같구나 악튜러스. 항상 화를 다스리거라. 화는 네 힘의 근원이지만, 한편으론 네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단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다시 경기장이다.
-알림! 골렘의 고유 능력을 발견했습니다.
-가(假)폭주 상태로 돌입합니다.
악튜러스가 입고 있던 상체 장갑의 색이 변했다.
짙은 붉은 색으로.
석민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악튜러스와 링크된 석민은 그 누구보다도 악튜러스의 감정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악튜러스가 화났어.’
악튜러스의 상태가 변하자 석민의 시야에 떠오르는 글귀도 많아졌다.
-현 시간부로 새로 발견 된 골렘의 고유 능력을 밝혀내기 위해 정보를 수집합니다.
-알림! 수집된 정보는 코리아 일렉트로닉스 본사에 위치한 베타고에 의해 분석됩니다. 분석이 완료 될 경우 국내 헌터법에 의거 대한헌터협회와 해당 정보를 공유하게 됩니다.
-분석된 정보는 정부의 허가 없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습니다.
‘정말 고유 능력이야?’
석민이 착용한 스카우터의 성능은 나쁘지 않았다.
인터넷 신호도 양호한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정보가 스카우터와 정보를 교류하는 슈퍼컴퓨터인 베타고에 전혀 없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골렘 스킬이 아니라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악튜러스만의 고유 능력일 수도 있다는 걸 방증했다.
그리고 이렇게 고유 능력을 갖는 골렘은 극히 드물었다.
-분석이 완료된 기술은 골렘이 가진 고유 능력으로 치부되어 기술창에 신규 스킬로 등록됩니다.
-코어 가동률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코어 가동률 110%
-코어 가동률 123%
-코어 가동률 141%
-현재 악튜러스의 코어는 141%까지 오버하트(Over Heart)된 상태입니다.
악튜러스가 스트레스를 받고, 그 수치가 60을 넘어가자 가장 먼저 코어 가동률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최대 100%인데, 오버하트로 인해 41%나 증가한 141%를 기록한 것이다.
석민은 크게 놀랐다.
‘오버하트가 가능하다고?’
오버하트가 가능한 골렘은 정말 드물었다.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 골렘들은 세계 대회에서나 볼 수 있었다.
‘악튜러스. 넌 정말 특별하구나.’
지금에서야 석민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악튜러스가 정말 특별한 골렘인 것을 알게 됐다.
이전까지는 악튜러스가 특별한 골렘일지도 모른다고 넘겨짚었지만, 오버하트까지 가능해지자 반신반의하던 마음이 이젠 확신으로 바뀐 것이다.
-오버하트의 영향으로 출력이 상승합니다.
-주의! 높은 출력은 코어에 상당한 무리를 줍니다.
-주의! 오버하트 상태가 장시간 지속될 경우 코어에 쓰인 몬스터 심장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하트다운의 위험성도 커집니다.
코어 가동률이 곧 출력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효율 문제도 고려해야 했으니까.
만약 전체 효율이 100%였다면 출력도 41%정도 올라갔을 테지만, 지금 악튜러스의 장비 상태론 출력이 25~30% 사이로 올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좋아. 출력이 더 올라갔어.’
화가 난 악튜러스의 출력이 다소 오르긴 했어도, 결국 출력 차이는 크게 좁혀지지 않았다.
물을 머금고 반토막이 난 출력에 30%정도가 올랐어도 130hp 근처.
이걸론 최대 190hp의 출력을 내는 릴리에게 맞서기엔 무리였다.
결국 모든 건 파이터인 석민에게 달린 것이다.
석민은 이 순간 악튜러스에게 두 가지를 주문했다.
첫째, 가드를 더 올릴 것.
둘째, 전신에 머금고 있는 물을 짜낼 것.
‘머금은 물은 흙의 지배력으로 짜낼 수 있어. 몸을 압축시켜 악튜러스.’
악튜러스는 석민의 말대로 흙으로 된 전신을 꽉 조이며 내부에 머금고 있던 물을 어느 정도 짜냈다.
그렇다고 해서 흙에 있던 모든 물기를 제거하진 못했지만, 물의 지배력이 전보다 크게 줄어들어 움직임이 전보다 더 수월해졌다.
-출력이 상승합니다.
물을 제거하자마자 덩달아 오르는 출력.
잃었던 출력을 되찾았으나 이미 릴리에게 기세를 뺏긴 터라 곧바로 반격하진 못했다.
석민은 이 상태에서 크게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아까의 생각은 계속 유효했으니까.
‘지금 상황에선 공격하는 상대가 훨씬 불리해. 이쪽은 가드가 견고하니까. 버티기만 하면 우리가 이길 거야.’
악튜러스는 석민의 말을 따라 일단 버텼다.
본래 성격 같았으면 당장 치고 나가서 상대 머리부터 찌그러트렸을 테지만, 주인의 말을 무시할 만큼 이성을 잃진 않았으니까.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놀라운 것은 63에서 멈춘 악튜러스의 스트레스 게이지였다.
악튜러스는 화를 잘 냈지만, 그 화를 어느 정도 다스릴 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파죽지세로 올라가는 스트레스 게이지가 금세 80을 넘어 100까지 도달했을 테니까.
이때 릴리는 부서지지 않는 악튜러스의 상체 장갑만 집요하게 쳐대고 있었다.
하지만 치는 대로 찌그러지는 왼팔 장갑과 다르게 상체 장갑과 오른팔 장갑은 흠집 하나 나지 않았고 있었다.
치는 입장에선 돌아버릴 지경.
‘뭐야? 왜 아직도 멀쩡한 거야? 설마 고철이 아닌 건가?’
김현지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어 물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나오는 세 살 버릇이었다.
‘짜증나네. 고철로 만든 조잡한 장갑 따위가 아직도 멀쩡할 리 없잖아. 우리 릴리 주먹이 그렇게 약한 것도 아니고.’
그녀는 보기보단 집요한 성격이었다.
안 되는 걸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라, 어린애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멍청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두들겨서 찌그러지거나 박살나지 않았다면 강철 말고 다른 금속도 의심할 법도 한데, 그녀는 보이는 그대로를 믿고 있었으니까.
‘녹슨 강철이잖아. 다른 장갑보다 훨씬 두껍나보지. 분명 치다보면 언젠간 찌그러질 거야.’
이로 인해 짜증이 쌓이자, 그녀가 조종하는 릴리 역시 스트레스 게이지가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릴리의 스트레스가 올라가는 건 주인과 같은 이유.
다만 악튜러스와 다른 점은 아무런 이점도 없이 스트레스 게이지만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수치가 60이 넘어가자, 김현지는 릴리에 대한 통제권을 서서히 잃어가기 시작했다.
웃기게도 그녀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찌그러지지 않는 악튜러스의 상체 장갑과 오른팔 장갑에만 가 있었으니까.
‘이거 진짜 안 부서지는데? 차라리 다른 곳을 쳐볼까?’
그녀가 마지못해 그런 생각을 했을 때도 화가 난 릴리는 부서지지도 않는 악튜러스의 상체 장갑만 정말 무리하게 치고 있었다.
코어가 한계 상태에 직면했다는 걸 알았다면 김현지가 릴리를 말리며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트다운만은 꼭 피해야했기 때문이다.
하트다운(Heart Down).
보통 골렘이 코어 가동률을 100%까지 끌어올리고 상당한 무리를 했을 경우, 코어가 골렘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동률을 급격히 낮추며 소위 숨고르기에 들어가는데, 이때의 코어 상태를 하트다운이라고 표현했다.
‘이러다가 하트다운 되겠어. 이제 됐어, 멈춰 릴리!’
놀란 김현지가 릴리를 말렸으나, 릴리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릴리가 가진 스트레스 게이지가 80을 넘어가자 통제권을 잃은 것이다.
골렘의 스트레스 게이지에 따라 통제권을 잃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골렘과 파이터간의 유대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경우에 따라선 골렘이 가진 스트레스 게이지가 100을 넘어도 통제권을 가질 수 있는 파이터가 있다고 전해진다.
극히 드물겠지만.
이성을 잃고 폭주하게 된 릴리는 제가 가진 코어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전보다 더 무리하게 악튜러스를 쳐댔다.
그 결과.
김현지가 보는 시야가 적색으로 물들여졌다.
우려하던 하트다운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경고! 코어에 무리가 갔습니다.
-경고! 출력이 급감합니다.
-무리한 코어가 회복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코어 재가동까지 대기 시간을 산출합니다.
-코어 재가동까지 남은 시간 0:23안절부절 못하는 김현지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아... 망했다.’
코어 재가동까지 앞으로 23초.
이럴 경우 코어에 옹골리언트의 맹독으로 제조 된 특수한 약물을 투입하면 재가동까지 걸리는 시간이 크게 단축되지만, 그런 장비는 현재 릴리에게 없었다.
릴리가 축 늘어지자 김현지가 울상을 지었다.
‘이제 어떡해. 완전 망했어.’
역시나 석민이 예상했던 대로 릴리는 높은 출력을 이어 가다 제 풀에 지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이제 턴이 넘어갔다.
끝까지 가드를 선택했던 석민은 지금 이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야 악튜러스!’
잔뜩 벼르고 있던 악튜러스가 드디어 가드를 풀어냈다.
수세에 몰려 가드만 올리고 있던 악튜러스가 갑자기 치고 나오자 당황한 김현지가 급히 릴리를 불렀지만 제 풀에 지친 릴리는 씩씩거리고만 있을 뿐, 이러타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악튜러스는 릴리의 아래턱을 향해 주먹을 올려쳤다.
어퍼컷이 작렬하자 릴리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릴리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름과 동시에 릴리에게 배팅한 투기꾼들의 환상 역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 돈이여.
릴리를 응원하는 관중들은 수세에 몰린 악튜러스가 그대로 끝날 줄 알았다.
그렇게 맞고도 전혀 반격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악튜러스는 끝까지 가드를 올리며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그 한방을 위해!
얻어맞고 있던 악튜러스에게 잔뜩 불만을 품고 있던 관중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오 이런! 깡통이 드디어 한방 먹였군요!”
홍길동의 목소리도 요란해졌다.
그는 싸우는 두 골렘 중 누구 편도 아니었으니 제 멋대로 릴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골렘 대전을 중계해왔던 그에겐 보였던 것이다.
미련했던 김현지의 집요함이.
“우리 김현지 선수, 그렇게 무리하게 공격하더니 결국 이런 사달을 만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장비가 안 좋으면 적당히 치고 빠지면서 상대를 간볼 줄도 알아야죠. 오 깡통! 이제 반격을 시작합니다!”
악튜러스가 기세를 잡자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김두철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자기, 또 못 맞췄네?”
그의 비아냥거림은 근처에 있던 한미라에게 향했다.
“시끄러워. 안 그래도 짜증나니까.”
“그 잘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우리 자기도 그런 건가봐.”
“자꾸 그럴래?”
한미라는 평소와 다르게 낯빛을 일그러트렸다.
악튜러스가 참가한 경기만 두 번 연속 승자를 맞추지 못했다.
그녀의 본 직업은 좋은 골렘을 발굴해내어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매니지먼트사의 대표였다.
매니지먼트의 대표인만큼 일반인들보다 골렘을 보는 눈이 좋긴 했다.
하지만 악튜러스와 관련해선 두 번이나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내가 뭘 잘못 본 거지? 그냥 고철 아니었나?’
그러다 찌그러지지 않는 골렘 장갑이 유난히 붉은 빛을 띠는 것을 알게 됐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한미라는 그 즉시 운을 뗐다.
“야, 저 깡통 있잖아. 아까보다 붉어진 것 같지 않아?”
“뭐 붉어져? 무슨 소리야. 어디가 붉어졌다는 건데.”
“상체 장갑.”
김두철은 양주를 몇 잔 걸친 상태라 눈이 침침했다.
눈을 가늘 게 뜨고 반격에 나서는 악튜러스를 살펴봤다.
그녀 말대로 상체 장갑이 약간 붉어졌다는 느낌을 받긴 했으나, 녹슨 고철로도 보이긴 했다.
“그냥 녹슨 거 아냐?”
한심한 소리에 한미라는 고개부터 저었다.
“넌 안 되겠다. 눈이 삐꾸라 평생 여기서 썩을 운명이다. 넌 니 주제에 맞게 계속 푼돈이나 만져라. 누나처럼 큰돈은 만지지 말고.”
아까의 앙갚음.
김두철이 발끈했다.
“뭐 시발? 지금 말 다 했냐?”
“응. 다 했는데?”
“이 썅년이...”
“입조심해. 그러다 다치니까.”
“아오 시발.”
김두철이 옷만 야하게 입은 한미라를 어쩌지 못하는 것은 그녀 역시 골렘 파이터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호신용으로 데려온 대전 골렘만으로도 이곳 전체를 박살내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성깔 더러운 김두철이 분을 삭이는 것이다.
‘개 같은 년이 골렘 하나 믿고 존나 깝치네. 진짜 데려온 골렘만 없었어도.’
다시 경기장.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악튜러스의 공세는 정말 대단했다.
악튜러스는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덤벼들었다.
그에 반해 릴리는 하트다운으로 거의 무방비상태였다.
마나를 생산해내는 코어도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상태.
악튜러스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악튜러스는 아까 당했던 그대로를 갚아줬다.
우선 주먹 쥔 손으로 릴리의 강철 해드부터 잔혹하게 내리쳤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무방비로 있던 릴리가 바닥에 대(大)자로 널브러졌다.
이어 몸을 크게 띄워낸 악튜러스가 깍지를 낀 손으로 릴리의 머리를 재차 찍어버렸다.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
릴리의 머리는 시멘트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머리를 보호하던 장갑판이 잔인하게 찌그러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안에서 머리를 이루고 있던 물이 사방팔방으로 튄 것은 덤이다.
그럼에도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악튜러스는 꽉 그러쥔 두 주먹으로 릴리의 코어만 집중적으로 때려댔다.
이대로 코어를 부숴버릴 생각.
상황이 이러니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김현지의 속만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상대가 꼬마라 자존심이 상해 쉽사리 항복도 못 했다.
덕분에 그녀의 골렘은 코어를 잃기 직전이었다.
‘확실히 끝내야 돼. 반격할 여지를 주면 안 되니까.’
석민은 대충 할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코어를 박살내고 승기를 굳히려 했다.
그 순간 상대 파이터로부터 통신이 왔다.
좋지 못한 표정의 김현지였다.
“그만. 내가 졌어.”
코어까지 망가지기 직전.
김현지가 굴욕적인 항복 선언을 했다.
도저히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코어라도 건지기 위해 항복한 것이다.
다만 운이 없었는지 간발의 차이로 코어를 건지지 못했다.
졌다는 소리를 단 1-2초만 빠르게 말했어도 코어를 건졌을 텐데, 그 몇 초 차이로 성난 악튜러스가 릴리의 코어까지 꽉 그러쥔 강철 주먹으로 잔인하게 찍어버린 것이다.
김현지는 그 알량한 자존심을 챙기려다 코어까지 놓쳐버렸다.
석민은 간발의 차로 코어를 부순 게 미안했는지 그 감정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죄송해요. 너무 늦게 말하셔서...”
“아...”
김현지도 알고 있었다.
좀 더 빨리 말했더라면 코어라도 건졌을 텐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와 누굴 탓하겠는가?
골렘 대전에서 골렘의 장비가 망가지는 일이야 아주 흔한 일이었다.
악튜러스가 릴리의 코어를 부수고 일어서자 몇몇 관중들이 격하게 흥분하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들 중 태반은 16강전에도 악튜러스에게 배팅했다가 큰 재미를 본 사람들이었다.
이번에도 또 이겼으니 그들의 기쁨이야 오죽할까?
“깡통! 릴리를 꺾었습니다! 이대로 4강전까지 진출합니다!”
홍길동의 목소리가 요란할 때 석민의 시야는 빠르게 올라오는 글귀들로 가득 찼다.
-악튜러스의 스트레스 게이지가 낮아지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게이지가 ‘관심’ 단계에서 ‘평상’ 단계로 격하됩니다. 현재 수치 38/100-오버하트가 종료됩니다.
-코어 가동률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옵니다.
-알림! 악튜러스 고유 능력에 대한 베타고의 분석이 끝났습니다. 해당 능력은 스트레스 게이지와 관련 된 오버하트 능력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베타고는 해당 능력을 ‘레이지 오버하트’로 명명했습니다.
-신규 기술 ‘레이지 오버하트’가 악튜러스가 가진 기술칸에 추가됩니다.
본래 악튜러스가 가지고 있었던, 하지만 주인인 석민조차 몰랐던 그 능력이 슈퍼컴퓨터의 분석으로 인해 드디어 그 실체가 드러났다.
석민이 보는 시야 상으로 레이지 오버하트와 관련 된 기술 설명이 떠올랐다.
[레이지 오버하트]<패시브>
오버하트를 끌어내는 악튜러스의 고유 기술.
스트레스 게이지가 60에 도달했을 때 발동되며 코어 가동률을 최대 41%(?)까지 상승시킨다.
-해당 스킬 정보가 완벽하지 않습니다.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선 레이지 오버하트에 대한 자료가 더 필요합니다.
경기에서 진 김현지는 입에서 한숨이 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악튜러스가 찌그러트린 릴리의 장갑이야 그다지 부담되지 않았다.
외부 장갑과 코어 캡슐까지는 보험처리가 가능했으니까.
문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코어였다.
코어는 보험처리가 안 됐다.
보험료가 비싸서 그녀가 보험항목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웬만해선 잘 망가지지 않는 부품이라 제외시킨 것도 있었다.
‘그게 얼마짜린데...’
코도 비스트 심장.
오우거 심장처럼 천만 원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 삼백에서 오백만 원 정도는 했다.
김현지는 짓이겨진 코도 비스트 심장을 보고선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 코어를 살 돈이면 저번에 봐둔 신상 백을 사는데...’
저번에 백화점을 갔을 때 매장 속 고이 진열 된 그 아이가 자기보고 미소 짓던 게 아직도 생생했다.
이번에 우승하면 상금으로 그 아이를 사려고 했었는데.
“하아...”
그것도 그렇지만.
“우리 김현지 선수, 그렇게 무리하게 공격하더니 결국 이런 사달을 만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장비가 안 좋으면 적당히 치고 빠지면서 상대를 간볼 줄도 알아야죠. 오 깡통! 이제 반격을 시작합니다!”
경기 도중 홍길동이 했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고 계속 머물자 김현지는 일순간 의욕을 상실했다.
자괴감이 든 것이다.
‘접자 접어. 애한테 질 거면 재능이 없나봐. 지금까지 릴리랑 국내 예선전에도 못 나갔으면 말 다했지 뭐. 더 늦기 전에 다른 일이나 알아봐야겠다.’
그녀도 16강전에서 패한 박상훈과 같은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