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50화 (350/354)

350. 솔선수범

“주무셔야죠!”

“그래. 내일 아침에 보자고.”

“그래도 그 정도면 잘한 것 같아요. 톱 10에 들었잖아요.”

모모코의 경기 방송은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하루 종일 필상의 뒤치다꺼리를 했던 미사키는 피곤할 만도 하건만 끝까지 자리를 함께 지켰다. 필상은 속을 태운 반면 그녀는 5시간 내내 목이 쉴 정도로 열렬히 응원했다.

그런데도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종일 코스 세팅이 어려운 와중에 2타를 줄여 공동 10위로 마무리한 것은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아쉬운 결과였다.

“왜들 그렇게 비교를 하지?”

장타 여왕 박성현 프로가 이날 무려 4타를 줄이며 6타 차의 완벽한 역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중계진은 틈만 나면 박 프로와 모모코를 비교하며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실 이해도 되고 기분 나쁠 일도 아니다.

미국에 건너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인을 여자 골프 1인자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다만 모모코의 성적이 좋을 때 언급하면 좋으련만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진행된 비교가 공평하게 느껴질 리 없었다.

문제는 그게 자신의 일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는 거였다. 그래서 한참을 망설이다 모모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상식이 진행될 시간이기에 조심스러웠으나 곧바로 통화가 이어졌다.

“고생 많았어!”

“고생은 무슨 고생! 전 게임을 즐겼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오빠. 내일 아침에 애틀랜타로 가야 하잖아요. 제 걱정은 그만하고 얼른 주무세요.”

추후 모모코에 대한 계획은 이미 확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안타까운 경기를 직접 보고 나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어차피 자신은 소기의 목적을 이뤘고 차후 목표는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아내에게 보다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말이 나오기도 전에 모모코가 먼저 차단했다. 오롯이 제 힘으로 꿈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도 기특했지만 필상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 같아 더 안쓰러웠다.

‘정말 쉽지 않을 텐데!’

한 시즌에 2승 이상을 거두는 선수가 드물다.

그런데 4개의 메이저 대회를 어떻게 다 접수할 수 있겠나!

특히나 매년 대형 신인들이 쏟아지고 있는 한국의 무시무시한 낭자들과 경쟁해야만 한다.

정말 큰 벽처럼 느껴질 것인데, 도와 달라고 보채지 않고 오히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를 견지하는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기존에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이르렀다.

* * *

필상은 PGA 최종전인 투어챔피언십이 열리는 애틀랜타 이스트레이크 CC에 도착했다. 숙소를 잡기 전에 코스를 먼저 산책하는 것이 습관인데, 느닷없이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이번 대회를 끝으로 PGA투어가 휴식기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금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대회 전에 인터뷰를 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특별히 인터뷰를 자청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네. 시즌이 종료되기 전에 몇 가지 제 입장을 밝힐 사안이 있어서 번거롭지만 여러분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나 된다고요? 일단 지난 대회에서 실격당한 선수에 대한 입장도 포함이 되는 건가요?

“아! 의견이 분분한 그 화제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결론부터 밝히자면 저는 그의 실격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당히 충격적이고 단호한 발언이었다.

호주 출신의 딜런은 공동 7위로 경기를 마쳤지만 결국 실격 처리되었다. 사안의 위중함이 언론에 여과 없이 드러난 점이 영향을 미쳤는지 경기위원회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막상 실격이 확정되자 큰 화제가 되며 의견이 난립했다. 실격을 옹호하는 이들과 지나치다는 의견이 팽팽했지만 인종 차별의 피해자였던 필상에게는 부담스러운 사안이다.

이미 결론이 난 사안에 대해 굳이 그렇게까지 강하게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냥 한 발 물러서 안타깝다는 정도면 족할 것이라 여겼는데, 의외로 강한 지지를 천명한 것이다.

-한 선수가 며칠 간 수고하고 노력한 결과가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두 사라지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십니까?

“그런 말을 한 자는 분명 백인일 겁니다. 단 한 번도 차별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너무도 확고한 단언에 좌중은 일순 침묵에 잠겼다.

그들도 같은 생각을 했으나 그걸 입 밖에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정곡을 찔렸기 때문일 것이다. 다들 아무 말이 없자 필상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차분하게 풀어냈다.

“며칠간의 수고와 노력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에 평생을 고통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무슨 정당성을 따진단 말입니까! 골프가 그렇게 지저분한 스포츠였던 겁니까?”

말로만 떠들지 말자고 역설했다.

모든 스포츠에서 인종 차별을 엄히 다스리는데, 실제 그런 악습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걸 묵과하는 이들의 이기심과 편협함 때문이 아니냐고 따지자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배려와 존중!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게 갖춰지지 않은 선수는 이 숭고한 무대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다면 아예 투어시드를 회수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PGA는 인종 차별을 인정하는 조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겁니다!”

필상은 이미 실격 처리된 사안에 대해 재고하겠다는 의견을 밝힌 PGA 사무국을 공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부 몰상식한 이들이 거세게 항의한다고 어물쩍 넘어간다면 안 하니만 못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필상의 정확하고 당당한 의견에 호응하는 이들의 물결이 모든 기사에 포도송이처럼 줄줄이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필드에서 국적이나 피부색으로 인해 더는 차별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첫 번째 화제는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워낙 의외의 전개였는지 기자들이 미처 질문을 하지 못했음에도 필상은 과감하게 두 번째 화두를 꺼내들었다.

“이제 PGA도 주인이 제 역할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이라니요? PGA투어 사무국은 골프 투어에 관한 법적인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합법적인 체육 단체인데, 감히 누가 사유화할 수 있단 말이죠?

“하하하! 눈 가리고 아웅 하시는군요. MLB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기 프로 스포츠는 모두 선수들의 권익을 위한 조직이 있으며 그건 법으로 보장받는 노동자의 합당한 권리입니다.”

-아! 선수노조 말씀인가요?

“네. 주제 넘는 짓이라고 욕하셔도 저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여러 선배들과 의견을 나눴고 이번 오프시즌에 그 윤곽이 잡혔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해 봅니다.”

인기 프로 스포츠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필상의 등장으로 더욱 탄력을 받은 PGA 투어는 이제 남부러울 게 없는 최고의 스포츠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이득이 선수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엉뚱한 자들의 배만 불린다면 이건 그야말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챙기는 꼴’이 된다.

최소한 선수들의 안정된 생활은 보장되어야 장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가 있다는 점을 모두에게 각인시킬 필요를 느꼈다.

물론 투어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전문 인력들의 가치를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투어의 주체인 선수들을 배제한 운영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는 얘기였다.

-만약 단체 교섭에 실패하면 투어가 열리지 않는 경우도 생길 수가 있겠군요. 그렇다면 팬들이 크게 실망할 텐데요?

“지나치게 극단적인 사례를 언급하시는 기자 분은 어디 소속이시죠? 혹시 그 회사는 노조가 없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

다만 그동안 PGA 사무국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언론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게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팀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좀처럼 선수들의 단합된 힘이 모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무국은 규모와 권력의 팽창에 편중된 경향을 보여 왔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데도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왜냐면 선수 개개인은 당장 자신의 성적이 더 중요하고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충분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혹시 TPK 사단이 전격적으로 나서는 건가요?

“왜 우리들뿐이겠습니까! 은퇴를 앞둔 선배님들에게는 큰 혜택이 없을 수 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배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골프에 전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실천하고자 하는 데 이견이 없었습니다.”

물론 타이거와 미켈슨이 뜻을 같이하지 않았다면 필상도 이렇게 용감하게 공론화를 시킬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노조가 없는 와중에도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아쉬울 것이 없다. 하지만 투어의 더 큰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이제라도 선수들의 의견이 취합, 반영될 필요가 있다.

이 의견에 동조하는 동료들의 뜨거운 지지를 기대하지만 쉽게 성사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닐 것이다. 당장 필상도 그 일에 자신이 할애할 시간적 여유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바람은 있었으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만만치 않아 실행하지 못한 것 아닌가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간이든, 자금이든 저부터 솔선수범할 생각이라는 것을 여러분 앞에 밝힙니다.”

인종 차별에 대한 단호한 의견도 파격이지만 정작 골프 전문가들은 선수노조에 대한 필상의 발언에 더 크게 주목했다.

이건 권력의 분산에 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민감하다.

새로운 권력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권력을 지닌 자들이 나눔을 허용해야 하는데, 과연 실현 가능할지 그 누구도 감히 자신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밝힌 두 사안도 거의 핵폭탄이 터진 것처럼 대단한데, 아직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신 것 같군요. 그렇죠?

“다름이 아니라 개인적인 광고를 하나 할까 합니다!”

-하하하! TPK 골프코스나 레슨 프로그램이라면 이미 내년까지 예약이 다 찬 걸로 압니다. 뭐 새로운 것이라도 있나요?

필상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곁에 놔뒀던 골프백을 잡아 당겨 곁에 놨다. 그 순간 눈치 빠른 기자들은 알아챘다.

골프백에서 아이언 하나를 꺼내든 필상은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숄에 7이라는 숫자가 써진 그 클럽은 바로 한국산 클럽, 퍼펙트였다.

“모레부터 나흘 동안 이곳을 찾는 골프팬들을 위한 특별 레슨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곳에 특별 부스를 마련하신 건가요?

“아직 골프장과 협의가 끝나지 않았지만 만약 허용되지 않는다면 인근의 다른 코스에서 진행하면 되니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아! 더 큰 문제는 하염없이 몰려들 신청자들이겠군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참가 자격에 제한을 두고자 합니다. 첫날은 여기 오신 기자 분들에게 3시간을 할애할 생각입니다.”

-와우!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도 그럴 것이 골프를 전문으로 다루는 기자들은 당연히 골프광이다. 하루라도 공을 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이들이 많은데, 보는 눈은 높지만 정작 실력은 받쳐 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월급 생활자인 기자들로서는 거액을 투자해 좋은 코치에게 레슨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대박 찬스가 온 것이다.

기자들이 갑자기 사방을 두리번거린 이유는 인터뷰 룸에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와 있는지 확인하려는 행동이었다. 인원이 적을수록 레슨을 받을 기회가 커지기 때문이다.

물론 필상으로서도 노림수가 있다. 그런 특별 서비스를 받은 기자들이 퍼펙트에 대해 혹평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이틀째는 전문 코치와 캐디들을 위한 레슨을 준비하겠습니다. 역시 같은 시간을 할애할 예정이며 이후 이틀은 이곳 애틀랜타 주민들이라면 누구나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공간과 시간이 허용되는 범위여야 하기 때문에 선착순일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상이 직접 레슨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면 그 자체로 평생 기억에 남을 멋진 추억이 될 수 있다.

대회를 앞둔 선수가 이런 대형 이벤트를 계획한다면 무리수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필상의 우승을 의심하는 자는 없었으며 이렇게라도 팬들을 위한 서비스를 하는 것에 대한 칭송만 물결칠 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미리미리 얘기하면 얼마나 좋아!”

“그러게요. 제 클럽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적을 줄은 미처 몰랐거든요. 하하하.”

그날 밤 이 대표와 함께 여러 명이 애틀랜타에 도착했다.

함께 가져온 엄청난 양의 짐은 곧 열게 될 이벤트에 사용될 시타용 클럽, 퍼펙트였다. 그것들을 관리할 기술자들이 함께 오느라 일행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이벤트를 열게 된 이유는 필상의 우승이 클럽이 좋아서가 아니라 월등한 실력 때문이라는 인식이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슨 프로그램을 열어 퍼펙트의 우수성을 직접 알리고자 번거롭더라도 시간을 할애한 것이다. 모모코까지 합류했기 때문에 두 부부가 나란히 레슨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으흐! 프로님보다 모모코가 더 인기가 좋아요!”

“그러게. 아무래도 남자가 더 많이 참가했으니까. 호호호.”

첫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둘째 날은 첫날 보다 많았고 일반인을 위한 레슨을 진행할 때는 현장에서 갑자기 몰려든 팬들로 인해 결국 헤드셋 마이크를 끼고 레슨을 진행해야만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넷째 날엔 아예 클럽 예약 주문을 받을 수 없을 지경이었단 것이다. 안 그래도 공급이 수요를 겨우 따라갈 지경인데 이제 미국 팬들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다시 시설을 확장하고 직원도 충원해야 할 것 같았다.

* * *

“나이스 샷!”

투어챔피언십은 한 시즌 최강자 서른 명만 참가한 별들의 전쟁이다. 하지만 여타의 별빛을 모두 잃게 만드는 휘황찬란한 광채가 떠올랐으니 감히 태양이라도 해도 될 듯 눈부셨다.

2명씩 15개 조로 진행되었으나 대다수의 팬들은 한 조에만 유난히 몰려 발을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성황을 이뤘다.

첫날 단숨에 8타를 줄이며 합산 -18로 6타 차 단독 선두로 나선 필상의 조였다. 하지만 2라운드도 거침이 없었다.

초반에 퍼팅 감각이 다소 흔들렸지만 507야드 파 5홀인 여섯 번째 홀에서 2온에 성공해 이글을 잡으며 스스로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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