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 인과응보
“약속은 지켜야죠?”
“그럼!”
시상식 분위기는 정말 대단했다.
메이저대회도 아니건만 모모코의 신기록 달성이 필상의 등장으로 시들해진 LPGA 흥행에 돌풍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많은 강자들이 등장하고 주목받았지만 단연코 모모코보다 더 큰 관심을 받은 선수는 없었다. 필상의 아내인 것이 화제를 몰고 왔지만 실력과 미모를 겸비한 상품성이 널리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시아 골프를 리드하는 한국과 일본의 열렬한 지지도 한몫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것보다 필상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종용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좋은 집을 사 주겠다는 바로 그거였다.
“전 수영장 있는 집을 원해요!”
“그야 당연하지. 아마 전용 해변도 있을 걸?”
“끼아악!”
시상식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통에 또다시 기자들의 눈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 예쁘게 봐주는 분위기였기에 다들 크게 웃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건은 우승 인터뷰에서 터졌다.
그녀의 국적은 엄연히 일본인데, 스스로 한국인인 것처럼 가장 먼저 한국 골프팬들에게 감사를 표했기 때문이다.
참석한 일본 기자들이 그걸 물고 늘어지지 않은 이유는 더 큰 반향을 일으킬 말이 나올까 저어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오빠와 함께 미국 투어에 전념할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내년 시즌 목표가 있으신가요?
“으음……. 저도 오빠처럼 그랜드슬램을 하고 싶어요.”
‘오빠처럼’이라는 말이 문제였다.
보통은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의미하지만 필상은 1년 안에 모두 해치운 켈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였고 곁에 앉아 그 분위기를 그대로 읽은 필상은 걱정이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그녀를 닦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발언이 있은 뒤로 쏟아진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모모코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미 떠난 버스였다.
“저도 아내의 목표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힘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도전은 실현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필상이 적극적인 지원을 언급하자 어두웠던 모모코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매번 도울 수는 없지만 필상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대형 사고를 쳐 놓고 숙소로 복귀하는 내내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그녀에게 필상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코치로서 스윙 교정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캐디를 봐줄 수는 없고 대부분의 일정이 서로 엇갈리기 때문에 추후 더 강하게 훈련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운해할 줄 알았으나 그녀는 알겠다면 씩 웃었다.
“전 영국으로 건너갈게요.”
“영국?”
“네. 한 주 쉬고 브리티시 오픈에 참가해야죠.”
“아!”
필상은 다음 주부터 열리는 BMW 챔피언십과 투어 챔피언십에 연이어 출전해야 한다. 초대형 상금이 걸린 이 시리즈는 시즌을 마감하는 가장 큰 축제이기 때문에 거를 수가 없다.
때문에 모모코가 자신과 동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토에서 치러진 LPGA 대회는 처음이기 때문에 우승한 뒤로 당분간 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영국까지 건너가 브리티시 오픈에 참가하겠다는 말은 그녀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들렸다.
“난 일리노이로 가야 하는데 정말 괜찮겠어?”
“네. 걱정 말아요.”
한 주간의 여유가 있지만 코스 적응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코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지난 대회와는 달리 브리티시 오픈이 치러지는 스코틀랜드 코스는 그녀에게 큰 시험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떠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조언을 하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둘 다 하루라도 일찍 현지에 도착해 실전을 경험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모코는 씩씩하게 떠났다.
말렸어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워 이 대표에게 든든한 지원을 당부했지만 실제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3. 미야 모모코 1라운드 공동 6위]
첫날 보기를 2개나 기록했지만 버디를 무려 5개나 잡는 좋은 샷으로 톱 10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젠장! 마누라 걱정할 때가 아니네!”
같은 날 치러진 BMW 챔피언십 1라운드에서 4언더를 쳤지만 공동 13위에 불과했다. 대기록 달성 후에 출전한 첫 대회였기에 많은 이들이 주목한 것에 비하면 아쉬운 성적이었다.
하지만 모모코가 안정된 플레이를 펼친다는 것이 확인된 이후 필상의 스윙은 불처럼 살아나기 시작했다.
2라운드는 5언더를 치며 단독 8위에 올라섰고 급기야 3라운드에서는 6언더를 쳐 공동 2위로 치고 올라갔다.
-하루에 한 타씩 더 줄이며 어느새 -15까지 치고 올라왔네요. 1타 차라면 충분히 우승할 수 있겠죠?
-하하하! 오늘 -7을 친다면 우승은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골프가 어디 말처럼 되어야 말이죠!
-그래도 전 마스터의 우승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합니다. 내기를 해도 좋습니다!
총상금이 천만 달러에 우승 상금만 무려 200만 달러다.
이 대회 하나만 우승해도 웬만한 선수들은 몇 년을 버틸 수 있는 거금이 걸렸고 마침 필상의 경쟁자들은 명성이 높지 않은 젊은 선수들이었다.
하나 같이 필상에게 깍듯한 예우를 갖췄지만 그렇지 않은 겁 없는 선수도 있었다. 바로 1타 차 단독 선두인 호주 출신, 딜런이라는 신예 선수였다.
“쟤는 프로님한테 인사도 안 하네요?”
“하하하. 놔 둬. 건방진 게 아니고 떨고 있는 거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필상은 그의 심리 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정교한 샷이 장점이지만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가 300야드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필상과 한 조로 경기를 하는 것이 못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동반자와 인사도 나누지 않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걸 타박할 수는 없었다. 그 또한 당당한 실력으로 챔피언 조에 올라온 동료 골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이 첫 티샷에 367야드를 날리면서도 페어웨이를 잘 지키며 동타를 만들어 버리자 엉뚱한 짓을 했다.
2번 홀 티잉 그라운드로 올라가는 필상을 뻔히 마주 보며 눈을 찢는 어이없는 행위를 버젓이 취했던 것이다.
-마스터가 왜 저러죠?
-어? 무슨 일이 있었나요?
티 그라운드로 올라가던 필상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딜런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말하는 장면이 화면에 잡혔던 것이다.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확인한 중계진은 다른 각도의 화면을 살폈고 그자의 인종차별적인 행위를 찾아냈다.
문제는 딜런이 항의하는 필상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는 것이다.
팬들이 서구인이며 약자인 자신을 옹호할 것이라고 착각한 것 같으나 그자의 행동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것도 모르고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양 필상의 몸을 밀어 대는 모습에 다들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라면 프로답게 행동해!”
“너나 잘해. 이 원숭이 같은 놈아!”
“어허! 도저히 그냥 봐줄 수가 없는 놈이로군!”
당장이라도 혼 구멍을 내 주고 싶었으나 팬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위해를 가할 수는 없었다. 추후 얼마든지 응징할 수 있다고 판단한 필상은 일단 티샷을 위해 이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딜런은 한술 더 떴다.
“어이, 경기위원!”
갑자기 주변에 있던 경기 진행위원을 호출한 것이다.
대체 왜 그러나 싶었는데 하는 짓이 가관이었다.
“지금 이 작자 시간 초과된 거 알죠?”
그건 사실이다.
선수는 자신에게 배정된 시간의 한계, 40초 이내에 샷을 해야 한다. 항의하는 과정에서 40초를 넘긴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놈은 집요하게 그걸 물고 늘어진 것이다.
하지만 딜런의 항의를 접한 진행위원은 선수들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어딘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대회 주최 측과 이 사안에 대해 논의한 것 같았으나 필상은 그저 씩 웃었다. 시간 지체 행위는 2번까지는 경고하고 이후에도 반복될 경우 벌타가 주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며 통화를 마친 경기위원의 조치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딜런. 당신의 인종차별적 행위는 이미 방송까지 탔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그에 합당한 조치가 내려질 겁니다. 그러니 딴소리하지 말고 일단 경기에 집중하십시오. 물론 같은 행위를 반복할 경우 실격 처리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
말문이 막혀 버린 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설마 자신의 행동이 방송까지 탈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주최 측의 빠르고 단호한 대응도 자신의 기대와 많이 다른 것에 놀란 것 같았다.
필상의 위상이 어떤지 새삼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사이 필상에게 다가온 경기위원은 그를 대신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자의 행위는 주최 측이 이미 파악하고 있으니 경기력에 지장을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스터!”
“감사합니다. 하하하!”
“또한 진행위원들이 저자의 행동을 철저히 감시할 겁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고 좋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거듭 감사를 표한 필상은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일부 서구인들의 편협한 사고방식이 사회 저변에 남아 있음을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우월적 사고는 오랜 역사와 함께해 왔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던 역사는 부끄러운 일이건만 아직도 그걸 당당하게 자랑하는 작자들이 있지 않던가!
약소국을 힘으로 찍어 눌러 침탈하고 억압해 고혈을 짜내 자신들의 배를 불린 것이 어찌 자랑스러울 수 있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인종 차별이 적어도 스포츠에서는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봤다.
“일단 성적은 그대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겠죠?”
“아니!”
“경고만 했잖아요.”
“그건 그거고 하늘이 내린 벌은 피할 수 없을 거야!”
“치! 저도 그러면 좋겠네요.”
미사키도 분을 참지 못했다. 그런 자가 상위권에 들어 거액의 상금을 받는 것도 마뜩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의 3번 홀 티샷이 당겨져 해저드 근처로 갔는데, 어려운 스탠스를 취하고 샷을 마친 딜런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져 호수에 빠져 버린 것이다.
캐디가 얼른 달려 들어갔으나 한참 허우적거린 그를 부축해 나왔을 때,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의 하체에 선혈이 낭자했기 때문이다.
-뭐죠? 저 호수는 깊지 않은데, 날카로운 것에 찔리기라도 한 건가요?
-깊지는 않지만 저기에는 악어가 살고 있습니다. 물린 게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딜런은 정신을 잃어 쓰러졌다. 그리고 그의 다리를 물었던 주인공이 물속에서 고개를 디밀었다.
완전한 성체는 아니지만 족히 1m가 넘는 악어였다. 골프 코스 안에 있는 호수에 먹을 것이 많아 인간을 공격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뜻하지 않은 순간에 사고가 터진 것이다.
황급히 도착한 의료진이 응급조치를 취한 뒤, 그를 싣고 나갔다. 실격은 아니지만 부상으로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프로님!”
“왜?”
“설마…… 악어도 부릴 줄 아세요?”
“하하하! 내가 서커스 단원은 아니잖아!”
“아!”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미사키의 눈빛은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하늘이 내린 벌이 실제로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갑자기 경기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하지만 필상은 이후 자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한 홀 건너 버디와 이글을 기록하며 급기야 -10을 기록하며 최종 -25로 5타 차 우승을 결정지은 것이다.
[2년 연속 1500만 달러를 거머쥐는가!]
[안 그래도 비교 불가한 최강자 미스터 퍼펙트, 2타 차 단독 선두로 투어챔피언십을 시작하다!]
[노던 트러스트를 건너뛰고도 페덱스 컵 1위, 미스터 퍼펙트 전성시대! 그 누가 그의 질주를 막을 수 있을까?]
3개의 시리즈 중에 하나를 건너뛰고도 월등한 1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BMW 챔피언십까지 우승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 우승하면서 필상은 -10로 투어챔피언십을 출전하게 되었다.
추리고 추린 최강자 30명만 출전하는 별들의 전쟁이다. 하지만 필상의 우승을 의심하는 전문가는 없었다.
“축하해요!”
“이제 곧 출전할 시간이지?”
“네. 30분 남았어요.”
“자신의 샷을 믿어. 얼마든지 잘할 수 있으니까!”
“그럼요.”
필상이 있는 일리노이와 모모코가 있는 스코틀랜드는 5시간의 시차가 나기 때문에 필상은 경기를 마쳤지만 그녀는 지금 경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첫날은 제법 좋았으나 지난 이틀간 샷이 흔들리면서 공동 22위까지 내려섰기 때문에 우승을 넘보기는 어려웠다. 8타 차는 필상도 감히 장담하기 어려운 격차이기 때문이다.
시상식이 진행되는 와중이지만 필상은 모모코와 꽤 오랜 시간을 통화했다. 지난 이틀간은 괜한 부담을 줄까 싶어 자제했지만 그녀가 먼저 전화를 해 온 것이다.
“제 아내의 경기를 시청해야 해서 인터뷰는 최대한 간단히 끝내겠습니다. 그 대신 투어챔피언십이 끝난 뒤에는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우승이 너무 흔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즐거운 시간마저 스스로 줄이겠다고 밝혔는데도 기자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숙소로 돌아온 필상은 TV 앞에 앉았다. 미사키가 저녁을 겸한 음식을 거하게 주문했지만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워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전체적인 경기력은 좋았다. 다만 그것이 성적으로 반영되지 않는 미세한 아쉬움이 많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