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부부는 용감했다!
대부분의 스포츠는 일대일로 겨룬다.
축구, 야구 같은 인기 종목도 일단 상대방만 이기면 승자가 된다. 아무리 약체라도 이변을 일으키기 쉬운 반면 동시에 여러 명이 경쟁하는 종목은 주인공이 될 확률이 극히 낮다.
육상, 수영 같은 종목은 기껏 올림픽에서나 주목 받으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1명만이 대중의 인기를 누릴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뒤늦게 올림픽에 추가되었으나 골프는 특이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이미 프로 투어가 활성화되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고가의 장비를 갖추고 훈련 과정에서도 상당한 비용이 발생하는 고급 스포츠이지만 막상 투어를 뛰고 있는 선수들의 상황을 살펴보면 열악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1/140.
0.72%. 채 1%도 되지 않는 낮은 우승 확률도 문제지만 더 큰 부담은 투어를 뛸 수 있는 자격을 유지하는 것이다.
많은 선수들이 어렵게 뚫고 올라온 최고의 무대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 보기도 전에 시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PGA, LPGA투어에 참가하고 싶은 도전자들의 뜨거운 열정과 노력은 늘 지속적인 위협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매 대회마다 목숨을 건다는 마음가짐으로 승부에 임한다.
팬들은 항상 유명 선수들 위주로 투어를 봐 왔기 때문에 우승자를 빛나게 만들어 주는 수많은 조연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도 모모코는 우승을 넘어 신기록에 도전하고 있지만 동반자들 중에는 1타라도 더 줄여야 시드를 유지할 수 있는 선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올 시즌 LPGA투어 대회는 이제 겨우 6개 남았어.”
“한두 개는 더 나갈 수 있겠네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내가 알기로 쟤는 올 시즌 처음으로 톱 10에 들어왔다는 거야.”
“아!”
그제야 필상의 말뜻을 이해한 모모코의 시선이 퍼팅을 준비하는 한 선수에게로 향했다. 시작할 때 서로 인사는 나눴지만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는 나이도 제법 많아 보였다.
리더 보드에 적힌 이름은 브리트니였고 챔피언 조에 편성되었으나 오늘은 1타를 잃어 겨우 공동 8위에 걸쳐 있었다.
대기 선수로 등록했다가 자리가 비어 어렵게 출전했으며 남은 대회에 출전이 보장된 선수도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번 대회에서 성적을 내지 못할 경우 시드를 잃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그녀의 플레이에 방해가 되면 안 되잖아.”
“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에요.”
“지금 버디 퍼팅이야.”
브리트니는 지금 살얼음판을 디디고 있었다.
시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제 기량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는 와중이기 때문에 모모코의 오버액션이 좋게 보일 리 만무하지 않겠나!
그녀는 무리하지 않고 3온 공략에 성공했지만 난해한 4야드 버디 퍼팅을 남긴 상황이었다. 버디에 성공할 경우, 꿈을 이어 갈 수 있는 중요한 시점에 와 있었다.
“1년에 1번만 우승해도 정상급의 선수로 인정을 받아.”
“워낙 경쟁이 치열하니까요!”
“그런 선수는 서른 명도 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해.”
“그렇게 적군요.”
힘겹게 최고의 무대까지 올라왔지만 우승 한 번 하지 못하고 추락하는 이들이 허다하며 대중의 인기를 누리며 후원까지 받는 선수는 더더욱 적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한 수입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투어에 참가하고 연습 라운드까지 진행하는 비용은 예산보다 훨씬 많다. 때문에 비행기를 이용하지 못하고 자동차를 이용해 미국을 종단하기도 하며 먹는 것도 절약하는 선수들의 열악한 환경을 간과하면 안 된다.
“투어 참가자들에게 최소한의 경비는 지불하는 상금 구조가 필요할 것 같아요.”
“선수들의 안정된 활약을 보장하려면 이제는 메이저리그처럼 선수협이 제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봐.”
“아!”
법적인 보장을 고려할 때가 된 것이다.
물론 거대 구단이 존재하는 야구와는 구조 자체가 다르지만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중계권을 판매하는 것부터 시작해 투어를 개최하는 스폰서들에게 의무적으로 일정한 자금을 확보해 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투어 활성화와 든든한 기반을 마련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다만 많은 선수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와 맞부딪치기 때문이다.
PGA 사무국이 가진 기득권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선수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한마음으로 모이기 어렵다는 것 등을 모두 고려해 신중하게 접근할 문제였다.
“와! 나이스 터치!”
브리트니의 퍼팅이 홀컵을 반 바퀴 돌며 아슬아슬하게 들어갔다. 팬들도 박수를 쳤지만 모모코가 그녀에게 먼저 다가가 하이파이브로 축하를 건넨 모습은 아주 보기 좋았다.
경기 내내 냉랭하던 모모코의 행동이 낯설게 느껴진 것 같았으나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이다. 가식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그녀가 감사를 표한 뒤로는 둘이 나란히 걸어 다녔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래도 터무니없이 서툰 모모코의 영어가 재미있게 느껴졌는지 까르르 웃으며 금방 친해졌다.
그 대목에서 필상도 은근슬쩍 수저를 얹었다.
“벤쿠버에도 좋은 코스가 많죠?”
“아! 네.”
필상이 자신의 고향을 언급하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미스터 퍼펙트가 그런 정보까지 알고 있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방금 전에 몰래 확인한 내용이다.
하지만 자신의 작은 배려가 그녀에게 의외로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정도 수고는 아낄 이유가 없었다.
모모코의 거친 질주로 인해 간접적인 피해를 봤다고 볼 수도 있어서 반대급부라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브리트니는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었다. 한국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그거다. 서구 여성들은 대부분 개방적일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는데, 필상이 만나 본 캐나다 여성들은 대부분 수줍음이 많았다.
-16번 홀을 파로 막은 것은 괜찮았죠?
-네. 버디를 노리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큰 홀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다음 17번 홀이 신기록 작성을 위한 고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죠? 오늘 아이언 감각이 아주 좋으니까요!
-멋진 샷을 기대해 봅니다.
15번 홀 승부에서 멋진 이글을 만들어 내면서 급기야 -31로 최저타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남은 홀 3개가 모두 쉽지 않지만 그래도 1타 정도를 줄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16번 홀에 이어 158야드 파 3홀에서도 버디를 기록하지 못하고 마지막 홀로 다가가자 긴장감이 팽배했다.
“그게 왜 빗나갔을까요?”
“퍼팅에 문제는 없었어. 나도 그렇게 읽었거든!”
“그래요?”
사실과 다르다.
필상은 모모코가 경사를 너무 많이 봤다고 판단했지만 규정에 따라 캐디인 자신이 그에 대해 지적할 수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틀리기를 바랐으나 모모코가 틀렸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로 인해 1온을 하고도 4야드 버디를 놓친 그녀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미 떠난 버스를 다시 불러올 수는 없는 법, 그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하얀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다만 어떤 말로 그녀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나 고심하던 차였는데, 브리트니가 정답을 제시했다.
“모모코. 그냥 즐겨!”
“네. 고마워요, 브리트니!”
18번 홀은 388야드 파 4홀로 전장도 길지만 페어웨이가 매우 좁아 정확성이 요구되는 홀이다. 우측의 커다란 호수에 빠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러프가 길고 거칠어 거리보다는 페어웨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클럽하우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코스라서 그런지 언듈레이션이 아주 심해 마치 파도가 치는 것처럼 잔디가 물결을 친다.
만약 다운 힐 라이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원하는 스윙을 만들어 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난점도 지닌 홀이다.
“3번 우드 주세요.”
“드라이브도 괜찮을 것 같은데?”
“235야드만 보내서 살짝 오르막에 서면 155야드를 8번으로 공략하면 딱 좋을 것 같아요.”
“오케이!”
본인이 그린 그림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장타를 노리다가 스탠스가 안 좋은 라이에서 샷을 하느니 차라리 20, 30야드 길게 남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자세에서 스윙을 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물론 3번 우드로 235야드를 보내면서 페어웨이를 지키는 것은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설정한 거리를 보내려고 스윙 크기를 조절하는 그녀를 보며 필상은 안도했다.
‘얻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네.’
우승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다.
신기록 달성 여부를 떠나 모모코의 기량을 모두에게 확실하게 인식시켰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이제 어느 대회에 나가든지 강력한 우승 후보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더해 모모코가 자신감을 얻었다는 점이 필상을 안도케 했다. 어차피 필상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는데,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만의 공략을 제안할 수 있다면 더없이 훌륭한 데뷔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스스럼없이 외국 선수와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한 점도 점수를 줄만 하다. 한국 선수들과는 달리 일본 선수들은 소통에 아주 소극적이라서 투어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짧은 영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려고 한 대목은 LPGA의 일원으로 활동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와우! 정말 깔끔한 스윙이네요!
-힘이 워낙 좋은 것 같습니다. 굳이 세게 치려고 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쭉쭉 뻗어 나가는 저 공을 좀 보십시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아주 좋은 스윙이네요. 하지만 교과서적인 스윙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 않나요?
브라운이 그런 언급을 한 이유는 모모코의 스윙이 한국 선수들과는 달리 파워풀하고 넓은 스탠스를 취하기 때문이다.
워낙 정교하고 일관된 스윙 폼을 보여 주는 한국 선수들로 인해 눈이 상향평준화되어 그와 다른 폼은 정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를 접은 것이다.
물론 전문가인 도널드는 그에 대한 적절한 해설을 붙였다.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고 운동 능력도 다른데, 어찌 정답이 따로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표준에 가까운 스윙을 배우지만 자신에게 가장 맞는 스윙으로 변형되고 발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죠!
-아! 하기야 현역 최고의 선수이자 코치인 미스터 퍼펙트를 남편으로 둔 그녀의 스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로군요.
-뭐 그렇게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녀에게 가장 적합한 스윙을 구사한다고 보는 것은 틀리지 않았을 겁니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 주니까요!
-하하하! 결과요? 할 말이 없네요.
등줄기를 관통하는 강한 전율이 일었다.
모모코의 타구가 보내고자 했던 지점에 정확히 멈췄기 때문이다. 신기록 달성에 한 발 더 바짝 다가간 것이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모코가 자신보다 브리트니와 먼저 하이파이브를 나눈 건 서운했지만 그 또한 바람직했다.
평균 타수가 4.24로 파는 많이 나오지만 버디보다 보기 이상이 훨씬 많은 마지막 홀에서 브리트니 역시 모모코와 비슷한 자리에 타구를 보냈다.
그러고는 둘이 발까지 구르며 같이 좋아하는 장면을 보노라니 골프가 참으로 대단한 운동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여자들의 친화력은 특이하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와아! 멋져요!”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당연하죠!”
브리트니의 세컨샷이 그린에 잘 올라갔다.
쉽지 않은 5야드 퍼팅을 남겼지만 가드 벙커와 해저드까지 위협적인 상황에서 그린에 올린 것만 해도 대단했다. 적어도 파는 보장되고 버디도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야드 더 짧은 거리에서 세컨샷을 날린 모모코의 샷은 판에 박은 듯이 브리트니와 똑같았다. 1야드를 더 날아가 4야드 퍼팅을 남겼는데, 홀컵을 기준으로 같은 선상이었다.
그게 바로 모모코에게 찾아온 멋진 행운이 되었다.
-아! 저게 안 들어가네요!
-홀컵 앞에 숨은 라이가 있었습니다. 저도 미처 보지 못한 걸 직접 확인한 모모코로서는 굉장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모모코가 아주 각별하게 축하해 주네요!
-동반자인 브리트니가 생애 최고의 순위를 기록했기 때문일 겁니다. 19언더, 단독 4위로 경기를 마친 그녀는 30만 달러의 상금을 확보하면서 내년 시즌 시드 확보에 청신호가 켜졌다고 봐야 하거든요.
-아! 그렇군요. 하지만 숨은 라이까지 보여 줬으니 그 고마움은 이루 말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죠. 하하하!
[여신 강림! 72홀 최저타 신기록 갱신!]
[-32. 11타 차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 절대 강자의 출현?]
[부부는 용감했다! 그리고 야했다!]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만 해도 대단하건만 4일 내내 하루 평균 -8을 쳤다는 것은 좀처럼 믿기지 않는 눈부신 기록이다.
하지만 모모코는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아내면서 급기야 신기록 달성에 성공했다. 필상은 보다 더 대단한 위업을 달성했지만 여자 골프와 같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어쩌다 하루 5, 6언더만 쳐도 난리가 나는데, 가장 못 친 3라운드 성적마저 -7이었다. 여신이라 불러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기적이라는 찬사가 줄을 이었다.
“이 사진은 너무 야한 것 같아요!”
“그러게 조심 좀 하지!”
시상식 중이었지만 모모코의 우승 소식은 이미 모든 언론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특히 많이 나온 헤드라인 사진은 우승을 확정지은 모모코가 번쩍 뛰어올라 필상에게 안긴 장면이다.
다리로 필상의 허리를 꽉 조인 모습도 야하기 그지없는데, 두 팔로 필상의 머리를 꼭 감싸 안는 바람에 그녀의 가슴에 얼굴이 폭 파묻혔다.
평소 핫팬츠를 즐겨 입어 바디 라인이 좋은 것은 알려졌으나 젊은 동양 여성의 가슴 사이즈에 대한 의문은 밝히기 어렵다. 여성 내의의 발전은 남성의 시각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상의 얼굴이 완전히 가려질 만큼 풍만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필상에게는 달갑지 않은 그 일로 인해 ‘부부는 야했다’는 헤드라인이 잡힌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