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 네가 더 나빠
“그래도 잘 막은 거야.”
“고마워요.”
결국 모모코는 14번 홀에서 보기를 적어 냈다.
68개 홀만에 기록한 첫 번째 보기였기에 여러 가지 기록이 한꺼번에 무너진 아쉬운 순간이었다.
아무리 우승이 확정적이라도 마음먹고 노린 벙커샷이 턱을 넘지 못할 때의 기분은 정말 모래라도 삼킨 것처럼 답답하다.
그런데도 한 번 실패한 벙커샷을 깔끔하게 퍼 올려 원 퍼팅으로 마무리했다. 그녀의 멘탈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준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2타만 더 줄일까?”
“왜 2타죠? 3타를 줄여야죠!”
4개 홀이 남은 현재 모모코의 성적은 -29다.
2타만 줄이면 김세영 프로가 보유한 -31 최저타 기록과 타이를 이룬다. 하지만 그런 기록을 의식하는 순간, 타수를 줄이는 일은 절대 쉽지가 않다.
그냥 미국 진출 첫 대회 우승에 만족할 만도 하건만 모모코의 의욕은 꺾이기는커녕 활활 타올랐다.
너무 성적에 집착하는 것 아닌가 싶었으나 기필코 3타를 더 줄여 신기록 작성을 하고 싶은 이유가 드러났다.
“PGA 기록은 오빠가! LPGA 기록은 제가! 멋지잖아요!”
“아!”
듣고 보니 그랬다.
필상은 BMW 챔피언십에서 -32를 치고 난 뒤, 태국 로열 컵에서 기록한 -33까지 인정받아 72홀 최저타 기록보유자다.
하지만 여자 골프 기록은 별개로 인정된다.
남녀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김세영 프로의 -31은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릴 때마다 더불어 회자될 수밖에 없다.
어느 경기에 나가든, 하물며 은퇴한 멋 훗날이라도 기록이 깨지지 않는다면 그녀를 만나는 이들은 모두 그녀가 가진 수많은 기록 중에 그걸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한 번의 우승보다 그게 더 소중하다는 것을 모모코는 확실히 인지한 것 같았다.
“이 홀에 승부를 걸어야 할 것 같아요!”
“음……. 그래, 좋아!”
16번, 18번 홀은 파 4이고 17번 홀은 파 3다.
그렇기 때문에 신기록 달성을 위해서는 파 5인 15번 홀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를 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만치 않은 502야드의 긴 전장을 지닌 홀이라는 것이 문제이고 여자 프로들에게는 2온이 까다로운 레이아웃이었다.
페어웨이가 중간을 가로지른 개울로 인해 두 쪽으로 갈라져 있어 장타를 노리다 해저드에 빠지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순수한 캐리 267야드는 남자 프로들에게도 부담되지만 두 번에 그린을 노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었다.
“오빠! 제 손 좀 잠깐 잡아 줄래요?”
“손으로는 부족하지!”
필상은 강력한 샷을 준비하는 모모코를 꼭 안아 줬다.
정순한 기운이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이 애정을 드러낼 때마다 큰 웃음과 야유를 보내던 팬들도 이번만큼은 진심에서 우러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모모코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진지한 것은 좋지만 심각한 표정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가 지닌 긍정의 힘은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좋은 스윙 리듬을 가져갈 수 있는 소중한 열쇠였다.
까앙!
얼핏 봐서는 강하게 때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평소보다 느린 테이크백 때문에 잘라 간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임팩트 순간의 스윙 스피드다.
힘을 빼고 상체의 꼬임을 최대한 가져간 뒤의 다운블로우는 임팩트가 이뤄진 순간까지 가용한 최고의 가속이 붙었다.
그걸 감지한 필상은 바로 코멘트를 날렸다.
“굿 샷!”
-어디로 날아간 거죠?
-구름 속으로 파고들어 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높이 치솟았는지 하얀 공이 뭉게구름에 파묻혀 카메라맨이 타구의 종적을 깜빡 놓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방향을 잃은 화면이 잠시 흔들렸지만 아무리 높이 친들, 공이 구름 속으로 사라질 리는 없다.
곧이어 공의 궤적이 드러났을 때는 이미 예상을 벗어난 비거리를 날고 있었다. 모모코가 장타를 때렸음이 확인된 순간이기도 했다.
동시에 하늘을 찌를 듯 엄청난 함성이 터졌다.
-굉장히 멀리 날아가는군요!
-그렇게 보이지만 과연 저 개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전 가능하다고 봅니다. 모모코의 시원시원한 장타력도 신뢰하지만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마스터가 불가능한 샷을 허용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훨씬 공감이 되네요. 이럴 때는 그냥 백기사를 써서 마스터가 치면 좋을 텐데요. 하하하!
-미스터 퍼펙트라면 굳이 우드를 잡을 필요도 없지요. 하하하!
-그렇기는 하네요. 5번 우드 정도면 충분하죠!
느닷없이 필상이 거론된 게 아니다.
모모코의 존재는 필상이 곁을 지킴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다면 이후에는 위상이 달라지겠으나 아직은 필상에게 묻어가는 게 나았다.
지켜보는 이들도 선남선녀가 보여 주는 모든 장면들을 마치 퍼포먼스라고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처럼 받아들였다.
급기야 타구가 하강하기 시작하며 시선이 집중되었다. 혹자는 어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극성팬들은 당연히 그 정도는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구가 충분히 잘 뜨고 힘차게 날아갔지만 결과는 정말 아슬아슬했다. 캐리가 269야드를 찍으며 겨우 넘어간 것이다.
“으흐! 전 빠지는 줄 알았어요!”
“빠지기는! 런도 많을 거야. 잔디 결이 좋은 데 떨어졌거든!”
“정말이요!”
티 박스에서는 떨어진 지점을 확인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필상은 이미 넘어갈 것을 알았고 과연 어디에 떨어지는지를 주목했던 것이다. 개울 앞뒤로 제법 긴 풀이 있지만 그것도 넘었고 그린을 향해 누운 잔디 결에 맞는 것까지 확인했다.
모모코는 필상의 말을 듣고는 계속 구르고 있는 공을 쳐다보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가! 더 굴러가!”
“이젠 공이랑 대화도 하네?”
“치! 오빠도 얼른 주문을 거세요!”
“가지 말래도 갈 놈은 다 굴러갈 거니까 드라이브나 줘.”
탄도가 높을수록 런은 적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모코의 티샷은 많이 구를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미친 듯이 굴러 멈출 줄을 몰랐다.
좀처럼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모모코가 아마추어처럼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팬들도 덩달아 소리를 질러 댔다.
-우후! 런이 무려 40야드나 나오다니!
-간절함이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미 그녀의 포로가 된 팬들이 엄청나게 소리를 질렀거든요.
페어웨이 한가운데 우뚝 멈춰선 티샷의 최종 비거리는 307야드를 찍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장타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먼 거리를 보낸 기록도 많지만 꼭 필요할 때 터진 장타는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한국 선수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하하하. 그런가?”
유난히 이번 대회에 한국의 강자들이 주춤했다.
만약 고진영 프로나 박성현 프로처럼 장타로 맞서는 선수가 챔피언 조에 있었다면 이렇게 편한 샷은 어려웠을 것이다.
모모코도 한국 여자 선수들의 매서움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필상의 생각은 좀 다르다. 오히려 적당한 경쟁자가 있었다면 더 좋은 스윙이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기록이라는 것은 늘 치열한 경쟁의 부산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아쉬웠다.
“얼마나 남았어요?”
“음……. 205야드는 봐야 할 거야.”
“맞바람이 있나요?”
“바람은 그다지 세지 않지만 포대 그린이고 그린 앞의 잔디가 물렁물렁해서 런이 거의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럼 유틸리티 잡아야겠네요.”
“22도 좋다. 마음껏 질러 봐.”
중요한 샷일수록 컨트롤을 하는 것이 힘들다.
18도 유틸리티로 힘 조절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차라리 시원하게 날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전 샷도 시원하게 때렸기 때문에 같은 선상의 샷이 더 일관성을 유지하기 좋다는 점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모모코도 공감했고 또다시 시원하게 때렸다.
-와우! 제대로 때리기는 했지만 너무 짧지 않을까요? 그녀의 22도 유틸리티 거리는 190야드라고 나와 있는데!
-저는 너무 긴 것 같은데요?
데이터를 중시하는 캐스터 브라운과 실전 감각을 더 우선시하는 도널드의 예상이 엇갈린 가운데 팬들도 의견이 갈렸다.
하지만 짧지도, 길지도 않고 정확할 거라는 의견이 훨씬 더 많았다. 물론 팬심이 작용한 바람에 불과하지만 샷 결과는 단언하기 힘들게 나타났다.
그린 앞 러프에 떨어진 타구가 기형적으로 높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불규칙 바운드! 그게 나온 것이다.
“뭐에요?”
“걱정 마! 하하하!”
물렁한 러프에 박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재수가 없으면 엄청난 거리를 날아온 타구도 그냥 푹 박히거나 오히려 뒤로 튕길 때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높이 튀어 오른 타구가 훨씬 낫다.
부딪쳐 튕겨 낸 뭔가로 인해 방향이 틀어지더라도 공이 머금고 있는 힘의 방향을 완벽히 바꾸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주 절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우측 벙커로 향하던 타구를 본 팬들이 머리를 감싸 안았으나 약간 솟은 벙커 턱에 맞은 공은 벙커로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방향을 틀어 그린으로 향했다. 실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희비의 롤러코스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연출된 것이다.
“서! 서야지!”
“하하하. 설 거야!”
멈출 거라는 필상의 말에 모모코는 겨우 진정했다.
하지만 모모코의 바람처럼 홀컵 근처에서 멈추지는 않았다. 깃대를 훌쩍 지난 공은 에이프런까지 굴러서야 겨우 섰다.
붙으리라 기대했는지, 흘겨보는 모모코의 시선이 따가웠다.
“서긴 섰네요.”
“8야드밖에 안 돼.”
“내리막 라이라서 어렵잖아요.”
“가서 살펴봐. 당신이 못 넣을 라이는 아니니까.”
필상도 그녀의 공이 홀컵 근처에 서기를 바랐다.
그녀의 간절함을 알기에 하마터면 이능을 쓸 뻔했지만 겨우 참아 낸 필상은 모모코가 집중할 수 있도록 다독였다.
이글을 할 수만 있다면 남은 3개 홀에서 1타 정도를 줄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래서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꽤나 힘들었다.
다행히 그린에 오른 모모코는 쫑알거리면서도 라이를 꼼꼼하게 살폈다. 훈수를 두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그녀의 어드레스를 확인하고는 겨우 안심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잔디의 결까지 모두 고려한 정확한 라인을 그린 듯 보였기 때문이다.
스으으윽!
더 이상 부드러울 수 없는 스트로크였다.
8야드는 절대 짧은 거리가 아니지만 내리막을 탄 공에 붙을 탄력을 고려하면 그것도 세지 않을까 우려되는 세기였다.
내리막 경사를 타면서 붙은 가속 때문에 어림도 없을 것이라고 봤던 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중간에 살짝 솟은 마운드를 타면서 힘이 싹 빠지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지금 구르는 방향은 좌측으로 빠질 것 같았다. 그런데 홀컵 근처에서 힘이 빠진 공이 막판에 거의 60도 가량 휘면서 홀컵에 떨어지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았다.
텅!
청량한 그 소리는 공이 홀컵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음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티샷은 폼이요, 퍼팅은 돈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엄청난 장타보다도 더 끔찍한 전율을 자아내는 것이 바로 퍼팅이다. 스코어를 결정하는 마지막 행위이기 때문에 극적인 만족감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거리, 방향, 그리고 운까지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롱 퍼팅의 경우는 더더욱 큰 감동을 자아낸다.
바로 지금이 그 경우였다.
공이 떨어지는 순간, 모모코도 무릎을 꿇으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공을 바라봤고 들어가는 순간 벌떡 일어난 그녀는 공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필상에게로 달려왔다.
“어허! 공부터 빼야지!”
동반자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극적인 이글 퍼팅을 성공한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건 예의에 벗어난 행동이다.
기쁘면 기쁠수록 더 동반자를 배려하고 예의를 차려야 하기에 필상은 서둘러 움직였다. 그 바람에 모모코는 어정쩡하게 필상의 팔에 매달린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행이라면 워낙 힘이 좋다는 점이었다.
그녀를 한 팔에 매달고도 성큼 성큼 깃대로 다가간 필상은 공을 꺼냈다. 그리고는 얼굴이 벌게진 모모코에게 내밀었다.
“나빠요. 오빠!”
“네가 더 나빠!”
“다들 이해해 줄 거라고요.”
“일단 그린 밖으로 나가자.”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은 이기심의 발로다.
이미 10타 차로 벌어져 우승까지 확정되었다면 더더욱 맥 빠진 동반자들을 배려하는 것이 옳다. 본인에게는 소중한 기록이지만 그게 왜 배려를 받을 일인가?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때린 선수의 배트플립이 벤치 클리어링의 사유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역시 경험은 소중하군요!
-저런 행동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고 인성 자체가 좋은 겁니다. 투어 경기에서는 행동 하나하나가 상대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악용하는 선수들이 점차 증가하는 서글픈 현실이거든요.
-아! 사실 지금도 모모코의 행동을 제지할 방법은 딱히 없지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하지만 저걸 쳐다보며 기다리는 선수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가겠군요.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승자의 입장만 존중하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신사의 스포츠인 골프에서 좋은 매너는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 마스터가 보여 준 행동은 아주 바람직한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아내에게 받을 구박은 피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