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43화 (343/354)

343. 깨름칙한 우승

필상 또한 스트레이트 구질로 승부에 임했다.

거리와 방향에 자신이 있고 바람도 우에서 좌로 불고 있기 때문에 굳이 드로우를 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2개의 고개를 넘어 뒤에 꽂힌 핀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파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시원하게 때렸다.

임팩트가 가해지는 순간, 짜릿한 손맛이 느껴졌다. 이 맛에 골프를 즐긴다고 생각했으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뒷바람을 고려했는데 생각만큼 불지 않았다.

그 결과 흑돈보다 조금 가까운 거리, 라이도 조금 편한 5.5야드 내리막 퍼팅을 남겼다.

“벌써 힘이 빠지신 겁니까?”

“나이도 어리고 힘 좋은 넌 그래서 유틸을 친 거냐?”

“에이! 급이 다르잖아요. 급이!”

“속으로는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러면 곤란하지.”

“여하튼 전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그 말에 필상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든 우승은 절실하지만 투어 프로가 되기를 포기했던 녀석이 오랫동안 꿈꿔 오던 길을 가며 정말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이 괜히 가슴 뭉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승리에 대한 열의가 식은 것은 아니다.

서로 최선을 다하고 난 뒤에 얻은 우승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우와아아! 기가 막히네!”

“나이스 버디!”

흑돈의 라이는 상당히 어려웠다.

오르막 뒤에 내리막이며 마지막에는 급격히 우측으로 휜다.

거리 조절도 어려울뿐더러 라이를 읽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림처럼 정확한 라이를 타고 그냥 홀컵에 빨려 들어가는 광경에 필상도 녀석의 얼굴을 다시 봤다.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광경에 드디어 코리안 투어에 강자로 자리매김할 기량을 갖췄다는 느낌이 왔다.

‘이제 속 편하게 PGA 투어에 전념할 수 있겠어!’

혹자는 필상이 이미 모든 것을 이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스스로 언급했던 목표,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배가 고팠다.

한국 골프가 살아나야 한다는 책임감에, 또 갓 태어난 딸아이 때문에 투어의 절반도 소화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모모코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면 적어도 격주로 대회에 참가할 생각이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한 시즌 두 자릿수 우승을 넘어 적어도 12개 정도는 우승을 거둬 절대자의 면모를 확실하게 새기고 싶었다.

-으흐! 저게 또 안 들어가나요?

-라이에 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 구르던 공이 살짝 튀면서 방향이 틀어졌거든요.

-이러면 역전인가요?

-네. 17번 홀은 타수 난이도 2위, 퍼팅 난이도 1위이기 때문에 타수를 줄이기는 어려울 것 같고, 다시 파 5인 마지막 홀에서 승부가 가려질 것 같습니다.

-아! 공 프로에게는 행운의 홀이었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쯤에서 짚어봐야 할 것이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역시 새로운 강자의 출현입니다.

-네. 김성호 프로. 정말 대단하군요. 저런 선수가 왜 자신의 꿈을 포기했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하하! 그건 임 캐스터가 한국 골프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얼핏 들으면 무시하는 것 같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투어 대회가 적다고, 또 상금 액수도 작다고 프로 지망생이 적은 것은 아니다. 이미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여자 골프와 비교해도 절대 남자 프로 지망생이 적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투어 규모가 작다 보니 관문이 좁고 성공할 가능성은 더 낮다. 때문에 수없이 많은 선수들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

투어 시드를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생활비도 벌지 못하는 선수들이 절반을 넘으니 어찌 버틸 수 있겠는가!

자의 반 타의 반, 생존을 위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다 정말 제가 우승하는 거 아닐까요?”

17번 홀에서 1타 차가 그대로 유지되자 흑돈의 표정은 급격히 붉어졌다.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샷에만 집중해 좋은 결과를 얻었는데, 우승이 머릿속에 들어온 것이다.

자신이 뒤지고 있는 경쟁자지만 이대로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성호야. 침착해야지!”

“저요? 괜찮아요.”

“생각만 그렇게 하지 말고 몸도 릴렉스 하게 평온을 유지하라고!”

“하하하! 걱정 마시라니까요.”

호언장담을 했지만, 나름 모든 신경을 쏟았지만 한 번 뇌리에 박히고 가슴을 설레게 만든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1타 차지만 그래도 무리하지 않고 2온을 노리지 않은 선택은 나무랄 게 아니었다. 그런데 280야드 정도만 안전하게 보내겠다고 가볍게 때린 공이 터무니없이 당겨졌다.

지켜보던 팬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저, 저게 뭐죠?

-경륜이 충분하지 못한 부작용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전 홀까지 빵빵 때리던 김 프로가 갑자기 힘을 뺀 것이 문제였던 겁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좌측 러프에 들어갔음은 물론 나무를 맞은 공이 좌측으로 튀었다. 원래 2온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거기서도 잘만 꺼내면 얼마든지 3온이 가능하다.

정확한 공의 상태를 확인해 봐야겠지만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른데,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필상과 교대하는 흑돈에게서 느껴진 감정은 그냥 새하얀 백색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한 상태,

얼마나 실망이 컸는지가 진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티샷을 해야 하는 자신이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기에 일단 장타를 때리기 위한 루틴을 밟아 나갔다.

깡!

이번에도 손바닥에 전해진 감각은 아주 좋았다.

하지만 결과는 또다시 기대와 다르게 나타났다. 원지도 않은 페이드가,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의도한 바가 없으니 슬라이스가 났다.

그래도 페어웨이에 떨어진 공은 러프에 멈출 줄 알았다. 하지만 하필이면 카트도로까지 튀어 크게 바운드가 되었다.

“있죠? 공.”

“가 봐야 알 것 같아.”

불안한 것은 그 지점에 갤러리들을 위한 라인이 쳐져 있다는 것이었다. 운이 없으면 라이가 안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상하게 그 근방에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물론 중계카메라가 비치고 있는 상황은 중계진이 먼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첫 마디부터 심각했다.

-아! 공이 저렇게 설 수도 있군요!

-갤러리들이 너무 몰리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런 지점은 수리를 해 놨어야죠. 모래라도 뿌리고 단단하게 다져놨어야 하는데, 정확한 임팩트를 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제와 그제 비가 온 것이 문제였다.

빗물이 움푹 파인 지점에 모여 진흙탕이 만들어졌고 오늘 새벽에 진행부에서도 그걸 깔끔하게 수리했다.

문제는 사람들이 오가며 밟다 보니 다시 아래에 고였던 물이 뿌린 모래와 흙을 흥건하게 적신 상태라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구제가 가능한 캐주얼워터라고 볼 수도 없다. 진흙에 박혔다 튀어나온 공은 이물질이 잔뜩 묻었지만 엄연히 지면 위에 올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기고 있다면 모를까, 1타 차로 뒤진 상황에서 흑돈이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는데, 자신까지 덩달아 미스 샷을 한 것이다.

“그린을 노릴 수 있을까요?”

“전혀!”

“그럼 잘라 가려고요?”

“그래야지.”

그 말을 한 필상은 일단 흑돈의 샷부터 지켜봤다. 경쟁자의 샷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시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이 나무와 비스듬한 자리에 서는 바람에 흑돈은 몸을 나무에 기댄 채 페어웨이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깔끔하게 쳐 냈지만 남은 거리는 대략 270야드, 좌측의 호수가 무서워 3온까지 물 건너가고 만 것이다.

-어허! 이러면 공 프로에게 기회가 오나요?

-네. 일단 3온만 한다면 최소한 비길 수 있는 상황은 된 거죠.

-아! 참 아이러니하네요. 둘은 굉장히 친한 사이 아닙니까?

-네. 숙소도 같이 쓸 정도로 친한 형제 같은 사이인데, 서로 실수를 번갈아 하다니! 김성호 프로 입장에서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것 같네요.

졸지에 티샷을 미스하고도 상황이 호전된 필상은 집중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샷을 마친 필상의 얼굴에는 흙탕물이 거나하게 튀었다.

클럽 페이스가 생각보다 깊이 들어가면서 공은 겨우 130야드 날아간 대신 오물을 옴팡 뒤집어 쓴 것이다.

“아! 진짜!”

“잠깐만요.”

미사키가 얼른 수건을 가져와 필상의 얼굴부터 닦아 줬다.

수없이 많은 트러블 상황을 겪어 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깔끔하게 공만 걷어 냈어야 하는데 바닥이 미끄러워 다운블로우를 할 때, 살짝 하체가 흔들린 대가였다.

그래도 남은 거리는 134야드, 얼마든지 핀에 붙일 수 있는 충분한 거리라는 점이 위안이었다.

문제는 필상의 샷이 아니었다.

연거푸 실수를 하고 있지만 3온이 불가하면 우승이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흑돈은 3번 우드를 잡고 말았다.

“저런 성질 급한 놈을 봤나!”

필상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온 이유는 3번 우드를 잡았기 때문이 아니다. 흑돈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270야드를 공략할 수 있다.

그런데 스윙 템포부터 너무 빨랐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백스윙부터 다운스윙까지 거의 하나 둘에 스윙을 끝마친 셈이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퐁당!

드로우가 먹지 않은 직진 구질이었다면 벙커나 러프에 맞고 그린으로 튀어 올라갔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훅이 걸린 공은 호수와 벙커 사이의 수풀에 맞더니 옆으로 튕기면서 그냥 물에 빠지고 만 것이다.

1타 앞서고 있기 때문에 3온은 못 하더라도 4번째 샷을 핀에 붙일 수 있는 지점에 보냈어야 하는데, 너무 서두른 나머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스윙이 나왔다.

그걸로 끝이었다.

필상의 세 번째 샷은 여전히 완벽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파를 기록할 수 있는 온 그린에는 성공했다.

러프에 드롭을 한 흑돈은 이미 실망이 극에 달해 결국 5온 2퍼팅, 더블 보기를 기록하며 자멸하고 말았다.

“축하합니다!”

마지막 우승 퍼팅이 파였다는 것은 영 께름칙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래도 우승을 거뒀다는 거였다.

팬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지만 그 기쁨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다. 어쩌면 져도 좋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자신이 잘 쳐서가 아니라 흑돈이 스스로 무너진 결과라서 못내 안타까웠다.

그런데도 가장 먼저 다가와 필상과 포옹을 했다. 결과가 나오고도 그 충격이 오래갈까 염려했는데, 의외로 녀석의 표정은 밝았다.

“축하할 맘이 나냐?”

“하하하! 목표 이상을 이뤘는데, 뭐가 아쉽겠습니까! 마귀가 씌여 스스로 복을 걷어찬 제가 잘못이죠.”

“알긴 아네!”

“그래도 2억 벌었습니다. 이제 장가갈 수 있게 되었다고요.”

“그건 다행이네. 너희 둘이 합칠 때 내가 확실하게 쏘마!”

“뭐 사 주실 건데요?”

“적어 줘. 다 사 줄 테니까!”

“차도 됩니까?”

“에이! 좋다. 사 주지 뭐.”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 와중에도 둘은 여전한 우정을 과시하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차가 아까울 필상이 아니다.

우승 상금은 무려 5억이다. 녀석이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그걸 벌었을 텐데, 3억은 공짜라는 느낌이 남았기에 아깝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뒤 출전한 첫 대회다.

우승은 했지만 자신이 감정에 휘둘려 정상적인 스윙을 하지 못했던 몇몇 순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흑돈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이런 저런 일로 연습을 소홀히 한 것도 사실이고 특히나 경기에 집중하지 못했던 점은 반성이 필요했다.

* * *

한국 오픈 우승 소식이 가시기도 전에 필상과 가족들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행은 무려 6명이었다.

캐디인 미사키는 당연했고 이번 기회에 LPGA 진출을 노리는 모모코가 필상의 옆자리에 활짝 핀 미소를 지으며 앉았다.

엄마가 수미를 데리고 앞좌석에 자리를 잡았고 서로 가겠다고 우기다 결국 제비뽑기로 당첨된 둘째 누나가 보모보조로 동행하게 되었다.

미사키와 죽이 맞아 되지도 않는 영어 회화로 수다를 떠는 바람에 필상은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필상아. 우리 집 사는 거야?”

“아니야. 굳이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빌렸어.”

“모양새 빠지게! 그냥 사지.”

“마이애미 해변에 있는 저택이 얼마나 하는지 모르지?”

“저택?”

누나는 가격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폼 나게 지내고 싶은 게 목표였는지 ‘저택’이라는 말에 다른 생각은 다 지워 버렸다. 적잖은 가족이 함께 지낼 집을 아무렇게나 구할 수 없었다.

당연히 수영장이 딸리고 해변이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최고급 주택 중에 하나를 골랐다. 이 대표가 나섰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수미가 좋아해서 다행이에요.”

“물에서 노는 거 제일 좋아하잖아.”

“그러니까요.”

“더 중요한 것은 30분 이내 거리에 멋진 골프 코스가 5개나 된다는 거지.”

“으아! 당장 가 봐요.”

“당연하지. 얼른 연습 준비하고 나와.”

“여, 연습이요?”

하루 이틀은 푹 쉬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투어 시드는 이미 일본에서 열렸던 LPGA 대회를 우승하며 확보했지만 미국 본토에서 출전하는 첫 대회이기 때문에 대충 준비할 수는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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