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진격의 흑돈
85야드 서드샷을 남긴 타이거의 표정은 여유 만만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얼굴과 샷 결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웨지 샷이면 3야드 안쪽에 쩍 붙여 버디로 연결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그나마 핀 근처까지 잘 왔으나 그놈의 백스핀이 먹는 바람에 깃대에서 멀어진 것이다. 그래도 본인은 샷 감이 좋았는지 기분 좋게 쳐다보다가 결국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4야드,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필상이 어떤 샷을 하느냐에 따라 쉽게 느껴질 수도,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거리였다.
“5번 아이언!”
박힌 공을 꺼내 닦은 뒤, 드롭을 했다.
하지만 오른발은 벙커에, 왼발은 그보다 한참 높은 러프에 둬야 하는 열악한 자세였기에 정상적인 스윙이 불가했다.
기껏 2온이 가능한 장타를 날리고도 엉뚱한 박힘이 발생하는 바람에 난감해지자 의욕이 푹 꺾였다.
하지만 이대로 승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스탠스가 안 좋아도 정확한 임팩트만 이뤄질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 그래서 필상은 완벽한 타구의 궤적과 라이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굴리는 건가요?
-범 앤 런입니다. 러프의 저항과 그린의 라이까지 고려해야 하는 아주 까다로운 샷이죠.
-그는 공필상 프로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했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자라는 칭호를 받는! 전 칩인 이글이 나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간절한 소망을 표현한 것은 좋은데…….
방송용으로는 적절치 않다는 말을 하려다 그냥 삼켰다.
실시간 댓글 창에 나타난 뜨거운 반응 때문이다.
-그래! 얼마든지 가능해!
-맞아! 그의 이름은 공. 필. 상. 이라고! 진정한 마스터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최고의 골퍼!
-들어간다. 무조건!
-임 캐스터! 방송 쫌 할 줄 아네! ㅎㅎㅎ
-미스터 퍼펙트가 못하면 그 누가 하리요! 샷 이글 OK!
-타이거의 표정도 함께 보여 주시길! 저게 들어가는 순간, 공 프로님을 피해 달아났던 황제의 표정은 어쩔지?
-이 정도면 정신병인데……. 그래도 고고!
클럽을 건네받고도 필상은 다시 한 번 그린에 올라가 라이를 확인했다. 넣겠다는 의지가 태양처럼 뜨거웠다.
다시 내려온 필상은 오른발부터 모래에 확실하게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왼발을 디디면서 클럽의 길이를 조절했다.
짧게 잡은 클럽을 몇 차례 휘두른 필상은 어드레스를 취했고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테이크백을 거의 일직선으로 뺀 뒤, 헤드의 무게를 그대로 살려 툭 때렸다.
공이 나지막이 떠올라 에이프런에 맞았으나 그래도 길어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바운드가 된 공은 스핀이 걸렸다.
팅!
마음 같아서는 이능이라도 쓰고 싶었다.
정확한 라이를 타고 구르던 공이 깃대를 맞고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툭 튕겨 나왔기 때문이다.
들어갈 줄 알았던 갤러리들의 무거운 한숨이 18번 홀을 짓눌러 땅이 꺼질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걸어가 바로 탭 인 버디로 마무리를 지었다. 아쉬워한다고 달라질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아깝네요. 노리고 쳤는데 말이죠!
-그럼 이제 공은 타이거에게로 넘어갔습니다. 현재까지는 둘 다 -10로 18홀 코스 레코드를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타이거에게 기회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보통 저 정도 거리의 퍼팅 성공률이 얼마나 되죠?
-투어마다 차이가 있지만 우리 KPGA는 절반 정도입니다.
-50%나 된단 말인가요?
-PGA는 보다 낮기는 하지만 그린 스피드가 느린 한국의 그린은 선수들이 자신 있게 공략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래도 한국 오픈이 치러지는 이 우정 힐스는 보이지 않는 라이가 꽤 많다던데, 두고 봐야겠네요.
타이거는 진지하게 라이를 살폈다.
하지만 패할 수도 있는 필상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들어가겠죠?”
“보면 알지.”
“어? 뭔가 있군요?”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필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 것을 확인한 미사키는 비로소 안심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1달러 내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돈은 아니지만 필상이 타이거에게 지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어어어?”
마치 누군가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타구가 홀컵 바로 앞에서 멈췄다. 살짝 오르막 옆 라이라서 나름 강하게 밀었는데, 서 버리자 타이거의 표정은 또 한 번 일그러졌다.
더도 말고 딱 반 바퀴만 더 굴렀어도 들어갈 공이었는데.
“수고하셨습니다!”
“자네도 수고했어.”
“1달러 주셔야죠?”
“응? 동타잖아?”
“아! 선수끼리 왜 이러십니까! 백 카운트 룰 모르십니까?”
“에이! 그런 아니지. 사전에 말도 없었고.”
“선수가 경기에 나올 때마다 룰을 말해 주는 경우도 있나요?”
“여하튼 안 돼! 밥은 내가 사지만 1달러는 줄 수 없어.”
“오케이!”
필상은 얼른 동의했다.
어차피 지지 않은 것이 중요하고 1달러보다는 아끼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었다.
타이거와 필상이 그린을 벗어나자 정말 뜨거운 응원이 쏟아졌다. 그냥 움직이기에는 너무 열정적이라 필상은 타이거와 함께 팬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미국인이지만 한국의 예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타이거도 그런 팬 서비스를 거부하지 않고 이동하는 내내 팬들과 소통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 이 대표가 하는 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235명이나 온다고요?”
“네. 타이거 우즈에게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고 다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아! 당했어, 당했어!”
“저 흉측한 인간과 내기를 한 거부터 잘못이죠.”
“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대표의 말을 들은 필상은 눈을 부라렸다. 물론 장난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타이거의 배가 덜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해 필상은 타이거와 회복 운동을 하면서 아까 못 다한 얘기를 나눴다.
“나도 여러 번 당했어.”
“정말이십니까?”
“물론 증거는 없지. 하지만 유독 배당이 크게 걸린 대회마다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더라고. 그게 징크스가 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그래서 발본색원을 하려는 겁니까?”
“응. 이건 몇몇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뤄지지는 않을 거야. 시민단체와 정부 관련 부처, 그리고 투어 사무국이 한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자네도 귀찮아하지 말고 협조 좀 해.”
“네. 그럴 겁니다.”
대답은 했으나 그와 함께 움직일 의사는 없었다.
한국 투어는 스포츠 베팅이 성행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시민 의식이 높아 결과를 만들어 내기 수월하다.
하지만 악당들이 뿌려 놓은 씨앗은 의외로 끈끈한데, 미국을 비롯한 유럽 나라들은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면 좀처럼 한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이방인인 자신이 PGA나 유러피언 투어까지 관여할 필요도, 이유도 크게 찾을 수 없었다. 어차피 자신에게 들이대지만 않는다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우와! 이게 다 우리 직원들이야?”
“다가 아닙니다. 가장 큰 식당인 이곳에서 다 수용하지 못해 옆에 있는 두 식당도 모두 잡아 놨다고 합니다.”
“으으으! 그래. 일단 실컷 먹고 보자고!”
예상보다 더 많이 와 거의 300명을 다 채웠다.
하지만 퍼펙트 골프는 연락을 받고도 공장이 너무 바빠 올 수 없다고 했다. 야근에 주말까지 반납하고 전력으로 공장을 가동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좋단다.
일을 하고 싶어도 오더가 없던 시절과 비교하면 너무도 행복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추가 주문을 받지 않는데도 그 정도라서 직원을 확충하는 절차도 밟는 중이었다.
* * *
“시타 부스?”
“네. 다들 바쁜 거 알지만 이번처럼 광고하기 좋을 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최 측에서 허용할까? 사전에 협의도 없었는데.”
“그건 제가 처리할게요.”
필상은 퍼펙트를 광고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했다.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미 국산 클럽에 대해 듣고 있던 팬들이 많아 열기만 하면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인맥을 동원하려 했으나 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다만 퍼펙트뿐만 아니라 여타 한국산 클럽을 알리기 위한 홍보는 KPGA사무국에서도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2라운드는 평이했다.
필상은 오후 조였는데, 오전에 경기를 마친 타이거가 -1로 부진했다는 말을 듣고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트리플 보기를 기록한 굴레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에 코스 세팅을 살펴봤다. 그런데 선수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만큼 까다로웠다.
게다가 늦여름 비까지 구질구질하게 내렸기 때문에 안정된 플레이를 펼쳤다. -4에 그쳤지만 3타 차 단독 선두에 올랐으니 불만은 없었다.
-14 공필상
-11 타이거 우즈
-6 김수민, 장동규, 박일한, 김성호
눈에 띄는 점은 흑돈이 -4를 치며 서서히 페이스를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감각을 찾아가는 모습에 아주 흐뭇했다.
그런데 셋째 날은 데일리 베스트 -8을 때리며 단독 3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아직 필상과는 4타 차, 타이거와도 2타 차지만 좋은 기회를 얻은 셈이다.
무명에 가까운 흑돈에게는 최종 라운드를 챔피언 조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면서 얼굴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18 공필상
-16 타이거 우즈
-14 김성호
“좀 치네?”
“긴장하시는 건 아니죠?”
“하하하! 긴장되는데?”
“진심이십니까?”
“네가 쫓아올까 봐 긴장되는 게 아니고 네가 그 못된 성질을 참지 못하고 폭발할까 봐!”
“아! 진짜!”
그렇게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마지막 라운드에 임했다.
그런데 -10, -1, -5를 쳤던 타이거는 초반부터 심하게 흔들렸다. 그 좋던 컨디션은 어딜 가고 스윙 밸런스까지 흔들렸다.
“어젯밤에 혼자 어딜 갔다 오신 겁니까?”
“감기 기운이 있어서 일찍 잤어.”
“아! 몸이 안 좋군요.”
“응. 약을 먹고 잤어야 하는데…….”
농담을 정색하고 받는 그에게 더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흑돈이었다.
슬금슬금 버디를 잡더니 8번 홀에서 64야드 칩샷 이글을 성공하며 필상의 턱밑까지 따라붙었던 것이다.
-20 공필상
-19 김성호
-15 타이거 우즈
졸지에 필상은 흑돈과 우승 경쟁을 하게 된 셈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녀석도 퍼펙트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제발 중계진이 그런 사실을 알기 바랐지만 이 대표를 불러 확인 결과, 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 대표에게 관련 사실을 상세하게 메모해서 담당 PD와 중계진에게도 전하라는 말을 넣었다.
언급할지 말지는 그들의 몫이지만 기왕이면 한국산 클럽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젠 좀 긴장되시죠?”
“응.”
“안 속아요. 안 속아!”
“뭘 안 속아?”
“딴소리 하려 그러시잖아요.”
“제발 부탁인데 마지막까지 대차게 쫓아와라. 대회 흥행을 위해서도, 우리 이 클럽 홍보를 위해서도.”
“아! 진짜 너무하십니다. 내 기필코 따라잡고야 말 겁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투지를 불태우라고!”
이건 도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녀석이라면 역전을 당해도 크게 억울할 것 같지는 않았다. KPGA를 대표하는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면 한순간에 위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무 의욕에 불타 엉뚱한 실수가 나오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그건 정말 이기적인 착각이었다.
흑돈은 오늘 신이 내린 것 같았다.
늘 덤벙대는 것이 문제였는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스윙을 연이어 터트린 나머지 결국 3개 홀을 남긴 상황에서 동타를 허락하고 말았다.
-김성호 프로. 오늘 정말 대단하네요!
-한때 선수와 캐디였는데, 저런 자질이 아까워 다시 도전하라고 권한 사람이 바로 공 프로였다고 합니다.
-그럼 마스터가 지금은 그걸 좀 후회할 수도 있겠네요?
-그게 아니죠. 아마도 아주 흐뭇할 겁니다. 자신의 눈이 얼마나 좋은지 확인이 된 셈이니까요.
-아! 역전 불가의 대가라는 것을 제가 깜빡했네요. 하하하!
-저도 뒤집기는 어려울 거라고 보지만 골프는 장갑을 벗어 봐야 안다지 않습니까!
파 3인 16번 홀은 첫날 기가 막힌 온 그린을 성공하고도 타이거의 칩 인 버디에 놀라 버디를 놓친 그 홀이다.
그런데 아너로 나선 흑돈은 22도 유틸리티를 잡고 아예 그린 중앙을 스트레이트 구질로 공략했다. 덩치에 어울리는 파워풀한 스윙에 갤러리들이 크게 호응했다.
2승을 거둔 프로지만 아직은 모르는 팬들이 더 많은 듯.
샷 결과는 버디가 쉽지 않은 7야드 퍼팅을 남겼다. 물론 나쁜 결과는 아니었기에 필상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3번 아이언!”
“아이언이요?”
“응. 오늘은 뒷바람이 살짝 부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