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40화 (340/354)

340. 당신 탓

“저 친구. 샷이 아주 좋던데?”

“형이 보기에도 그렇습니까?”

“응. 자네 캐디였잖아?”

“프로 지망생이었습니다. 그냥 캐디로 묵혀 두기에는 너무 자질이 아까워 권했는데, KPGA에서 벌써 2승을 거뒀습니다.”

“한국 출신 PGA 선수가 한 명 더 나오겠군!”

필상과 함께 1번 홀로 이동하는 선수는 타이거 우즈였다.

골프 황제라는 칭호가 워낙 오래 따라붙었기에 필상에게는 잘 사용하지 않을 만큼 그가 골프계에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최근에는 태국에서 두문불출하며 TPK 사업과 자신이 하고픈 코스 설계에 전념했는데, 오랜만에 바람 쐬러 나온 것이다.

“연습은 꾸준히 하셨습니까?”

“연습이야 했지. 샷을 하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으니까!”

“그럼 오늘 제대로 붙어야겠군요.”

“에이! 왜 이러시나!”

엄살을 부렸지만 타이거가 아무 준비도 없이 한국까지 날아올 리는 없다. 본인이 밝혔듯 하루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사람이다.

바빠서라지만 미리 와서 준비하지 않고 어제 도착한 것은 나름 전력을 숨기기 위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5시간의 비행 뒤의 컨디션이 좋을 수는 없다는 게 필상의 판단이었다.

-타이거 우즈가 방한한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오직 우리 대한민국뿐일 겁니다.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당연하죠. 데뷔 2년 만에 그가 이뤘던 수많은 위업보다 더 큰 기적을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공 프로가 전무후무할 기록을 달성했지만 타이거 우즈는 오로지 그만이 이뤄 온 위업이 있으니까요.

-아! 그가 현대 골프에 공헌한 부분을 폄하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현역 선수 중에 그의 은퇴 전에 비견할 만한 선수가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전문가들의 예상을 깬 선수가 바로 우리 공 프로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제2의 타이거 우즈라는 호평을 받던 선수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1, 2년 반짝한 뒤에는 평범함 속에 묻혔다.

이는 곧 PGA 선수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가 되면서 타이거가 보여 줬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량을 갖춘 선수가 나오기 힘들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시아 선수가, 그것도 크게 주목받지 못한 늦깎이 프로 데뷔 선수가 각종 기록을 깨면서 툭 튀어나왔다.

편견과 선입견에 시달리고 차별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급기야 이상한 놈들의 테러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도 사상 최초로 캘린더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이젠 정말 타이거 우즈도 한 수 접어야 할 만큼 골프계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거대하다. 그런 저간의 평가를 받아들여야 하는 당사자라면 그냥 순순히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았다.

“준비 단단히 하셨죠?”

“오랫동안 편히 쉬면서 샷을 가다듬어서 그런지 컨디션은 아주 좋아!”

“그럼 좀 일찍 오시지 그랬어요.”

“하하하. 장거리 이동 때문에 염려가 되나 본데, 그렇지는 않아. 요즘 퍼스트클래스는 호텔보다 더 편하거든!”

“그럼 오늘 아주 재미있는 하루가 되겠네요.”

“1달러 내기할까?”

“좋습니다. 그 대신 이기는 사람이 오늘 저녁 쏘는 겁니다.”

“당연하지. 올 수 있는 사람들 다 오라고 해.”

“정말이죠?”

정말이냐고 물은 대목에 그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자신은 부를 사람이 별로 없지만 필상은 아니다. 물론 수백 명이 온다고 해도 그 정도를 감당 못 할 재력은 아니지만 그만큼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미였기에 천하의 타이거도 심적인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 하나로 필상은 심리적인 우위에 섰다.

승부라는 것이 묘해서 한 번 패한 선수에게는 오기가 발동하기도 하지만 주눅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가운 마음과 호승심이 함께 작동하면서 필상은 모처럼 전신에 옅은 긴장감이 어렸다.

-나이스 샷!

-둘이 한 조에 편성되면서 흥행은 이미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실제 경기도 보기 드문 명승부로군요!

-장군을 치면 멍군으로! 한 치의 양보도 없네요. 그런데도 서로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즐기는 모습을 보니 참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정말 팽팽했다.

우정 힐스는 절대 쉬운 코스가 아니다. 특히나 한국 오픈이 열리는 기간에는 좀처럼 언더 파가 나오지 않을 만큼 세팅을 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6 타이거 우즈

-5 공필상

-1 황인춘, 이수민

필상이 10번째 조로 출발했기 때문에 아직 1라운드를 마친 선수는 없다. 하지만 언더 파가 겨우 4명뿐이었다.

그런데도 아웃코스를 끝낸 필상과 타이거는 남들이 감히 따라오기 힘든 성적을 작성 중이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쉽게 버디를 낚는 걸 보며 역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은 다르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주목할 부분은 필상보다 타이거가 1타 앞섰다는 점이었다.

“대체 뭘 드신 겁니까?”

“나? 가리지 않고 먹었지. 태국 음식은 익숙하잖아.”

“음식이 문제가 아니겠네요.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게 더 결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허!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아직 절반이나 남았는데, 왜 나를 이렇게 붕붕 띄우지?”

“회사 직원들 다 불렀거든요.”

“회사 직원?”

“우리 TPK 직원, 그리고 퍼펙트 직원들도 올 수 있는 사람은 다 오라고 했습니다. 오늘 회식한다고.”

“저, 정말이야?”

“아마 퇴근하자마자 KTX 타고 달려올 겁니다. 이 대표는 회식 장소 잡느라 무척 골치가 아플 거고요.”

“하하하! 그 농담 정말 그럴싸하네!”

“농담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세요. 하하하!”

사실이었다. 하지만 타이거는 믿기 싫은지 믿기지 않는지 애써 부정했다. 이기면 적어도 수백 명의 식사를 사야 한다.

달랑 1달러 따고.

그렇다고 일부러 질 수는 없는 노릇, 다만 이름값이 있는 자신이 값싼 음식을 대접할 수는 없지 않겠나!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경기를 따라다니는 이 대표가 계속 핸드폰을 들고 심각하게 뭔가 지시하는 것을 보니 그럴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이기고 싶었다.

대회 우승은 둘째 문제고 동반 플레이를 하는 이날, 한 라운드라도 확실하게 이겨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너무 이를 악무는 거 아닌가요?”

“이겨야 하니까!”

“저도 이제 슬슬 발동을 걸어 보려고요.”

“어허! 이렇게 또 도발을 하나?”

“하하하! 좀 넘어 오십시오. 제 도발에.”

타이거는 대체로 농담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다.

특히나 경기 중에는 거의 모범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담담하면서도 좋은 샷이 나올 때는 그 감정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스스로 더 강한 동기부여를 할뿐더러 동반자들에게는 심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다. 실제 필상도 전반 내내 그 영향을 받았다.

‘기대 이상이야!’

바로 그런 생각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최고의 전성기가 지난 선수다.

단지 장타가 과거에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샷의 일관성이 한창 때보다는 떨어진다. 심리적인 것보다 이젠 체력적인 부분의 손실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나이다.

그런데 태국에서 대체 뭘 먹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샷은 정교했다. 가끔 장타로 흔들려고 했으나 뒤에서 먼저 그린에 쩍 올리는 샷을 보며 겨우겨우 평정심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인코스에서는 따라잡아야 했다.

그의 화려한 복귀를 바라는 팬들도 있겠으나 이곳은 자신의 안방이기 때문이다.

-하아! 정말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습니다.

-동반자들 말씀인가요?

-네. 마치 두 선수는 매치플레이를 하는 것 같아요. 절대 너한테만은 질 수 없다. 그런데 그 덕분에 하염없이 무너지는 선수 둘은 대체 무슨 죄입니까!

-극복해야 합니다. 프로로 뛰어든 이상 저런 압박감을 견딜 수 있어야 하죠.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말은 쉬운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아요. 경쟁하듯이 터지는 기가 막힌 샷에 얼굴이 하얘지는 것 좀 보십시오.

바람직한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본인도 저런 멋진 샷을 할 수 있다고 믿지만 막상 결과가 나오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샷 하나하나가 비교되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스스로 최고라고 자부하지 못한다면 프로가 아닌 것이다.

15번 홀이 끝났을 때, 필상과 타이거는 나란히 -9였고 동반자들은 +5를 기록하며 본선 진출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운명의 파 3홀에 도착했다.

“255야드에요.”

“길게도 잡아 놨네.”

“뭐 드려요?”

“19도 고구마.”

“고구마요?”

“응. 이제 승부 봐야지.”

드라이브를 잡는 선수는 없지만 대부분 3번이나 5번 우드로 공략한다. 하지만 필상은 유틸리티를 선택했다.

연습 라운드에서는 3번 아이언을 잡았지만 핀에 붙이지는 못했다. 거리도 멀거니와 우측에서 그린 앞으로 이어진 3개의 벙커가 꽤나 위협적이라 오늘처럼 우측 핀일 경우, 핀을 곧바로 노리기에는 위험하다.

그렇다면 그린 중앙을 노릴 것인가?

까앙!

경쾌한 소리가 터지는 순간부터 우려의 한숨이 들렸다.

왜냐면 타구가 너무 우측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은 필상의 멋진 샷을 기대했던 중계진도 마찬가지였다.

-어어! 너무 우측 아닌가요?

-드로우 샷을 구사하는 것은 맞습니다. 어설프게 페이드를 구사하다가 벙커에 빠지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굳이 저렇게까지 우측을 볼 필요가 있나요? 공 프로는 스트레이트 구질도 잘 구사하지 않습니까!

-두고 보시죠! 이유 없는 샷을 할 선수가 아니니까!

말은 그리 했어도 그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탄도는 예상보다 높았고 우측으로 출발한 타구는 좀처럼 휘지 않아 더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샷을 마친 필상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런데 필상은 피니시를 마치고도 공이 떠난 자리에 시선이 고정된 자세를 아직도 취하고 있었다. 한 장의 그림처럼 완벽한 자세를 보고 난 뒤에야 마음이 놓였다.

“나이스 샷!”

허 위원은 듣지 못했으나 타이거의 그 음성이 들린 순간부터 절묘한 커브가 먹기 시작했다. 얼마나 심하게 휘는지 구경하던 팬들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터졌다.

“우와아아! 드로우 샷!”

그래도 충분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피니시를 마친 필상이 떨어지는 공을 바라보는 순간, 타구는 벙커와 그린 사이의 좁은 러프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크게 튄 공은 깃대를 향해 날았다.

텅!

-와우! 저게 깃대를 맞고 튀어 나오네요! 조금만 짧았다면 그냥 박혔을 것 같은데요!

-아! 그래도 버디는 충분한 멋진 샷이었습니다.

-저 좁은 러프를 겨냥하고 때린 걸까요?

-그건 제가 감히 말할 수 없지요. 하지만 조금만 덜 휘었다면 벙커에 떨어졌을 것이고 더 휘었다면 그린에 떨어져 핀으로부터 한참 멀어졌을 겁니다.

사실 생각만큼 잘 맞은 샷이 아니었다.

필상은 드로우를 걸고자 했으나 이렇게 심한 훅을 구사할 의사는 없었다. 하지만 다운블로우가 너무 안쪽에서 출발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강한 드라이브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밀리지 않고 휘어져 들어온 것은 다행이었다.

실수였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필상은 머리를 긁적이며 티 박스를 내려왔다.

“아! 마음대로 되지가 않네요!”

“뭐야?”

“운이 좋았다고요.”

“…….”

사실이었고 굳이 감추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타이거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필상이 강력한 드로우 샷을 때렸다고 봤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색하게 되었으니 창피한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는 그의 티샷으로 판명이 되었다.

그는 필상과는 달리 페이드 샷을 구사했고 좌측에서 우측으로 휜 타구는 그린에 떨어졌으나 오히려 많이 굴러 그린과 벙커의 경계로 기어 들어갔다.

마침내 역전을 시키나 싶었으나 그게 그렇지 않았다.

타이거의 칩샷이 그냥 홀컵에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무리 멘탈이 좋은 필상도 그 대목에서는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어허! 저걸 놓치나요? 미스터 퍼펙트가!

-1.5야드 정도의 퍼팅은 놓친 적이 없는데, 아무래도 퍼터를 바꾼 것과 무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그렇게 해석해야 하나요?

-물론 타이거의 칩샷이 들어간 것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만 멘탈보다는 장비를 탓하는 것이 낫겠지요. 하하하.

그건 허 위원의 착각이자 실언이었다.

필상이 PGA 대회도 마다하고 한국 오픈에 참가한 이유는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봄이 길을 열었으나 모모코가 아쉬움을 남긴 국산 클럽, 퍼펙트의 성능을 한국 골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장비 탓을 한 것이다. 그 사실은 나중에 반박을 당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필드에서도 벌어졌다.

“공! 퍼터가 손에 익지 않은 거 아냐?”

“퍼터 탓이 아니라 바로 당신 탓이죠!”

“내 칩인 버디? 그런 거에 흔들릴 네가 아니잖아.”

“에이 진짜! 나 이거 팔러 나왔다고요!”

그제야 필상의 말뜻을 이해한 타이거는 다음 홀로 이동하는 내내 필상의 클럽을 유심히 쳐다봤다. 과연 한국산 클럽의 성능이 세계적인 선수가 사용할 수준이 되는지 궁금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품은 의문 자체가 상품에 대한 이미지를 손상시킨다는 생각이 들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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