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 그녀의 고민
진한 농담도 가볍게 넘길 만큼 이날 중계 분위기는 좋았다.
국내에서 여자 골프 투어의 인기는 이미 상종가를 쳤다. 하지만 필상을 필드에서 보는 것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골퍼라면 평생 자랑할 멋진 추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모코의 캐디로 활약하며 부부의 환상적인 호흡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더더욱 희귀하기에 1번 홀로 향하는 길목은 미어터졌다.
먼저 출발한 선수들을 따라다니던 갤러리들도 일제히 시간 맞춰 몰려드는 바람에 진행요원들이 긴급 출동했음에도 티오프 시간은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팬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필상도 그럴 겨를이 없었다.
“부담스럽게 많이 모였어요.”
“부담? 그런 것도 알아?”
“그러게요. 전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는데!”
쉽게 믿기지는 않았다.
늘 팬들의 시선을 즐기는 모모코가 돌연 부담을 가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게 말하는데 어쩌겠는가!
결혼 바로 전 시즌처럼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올해 무난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 KLPGA 대회에 7번 출전해서 2승을 거뒀고 상금 순위도 3위다.
시간적 여유만 허락되었다면 더 나은 성적이 나왔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성적에 대해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만약 더 출전했다면 다승, 상금 순위도 그녀 몫일 테니까!
필상의 생각뿐 아니라 전문가들도 다 그렇게 분석한다. 그런데도 대체 왜 불안해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왔잖아. 이제 확실하게 뒤집어 보자고.”
필상은 그녀를 독려했다.
하지만 그 대목에서 모모코의 묘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드러난 표현이었다.
“한국에서 우승하면 뭐해요!”
“언제는 한국 최고가 세계 최고라더니?”
“그야 미국에 갈 수 없는 형편이니까 그랬죠. 하지만 이제 곧 봄은 미국으로 건너갈 거 아니에요!”
“봄?”
대충 감이 왔다.
늘 언니처럼 편하게 대해 줘도 모모코가 봄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는 분명했다. 필상에게 과하게 들이대지 않는 건 기본이고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따라오는 것도 용납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아직 가 보지 못한 LPGA에 진출하는 것은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스스로 한국인의 피가 흐름을 밝힘으로서 한국에서의 인기도 절정으로 치솟았다.
그런데 미국에 건너가도 크게 성공할 것 같았다. 자신이 갔어야 할 길을 그녀에게 빼앗긴다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모모코. 우리도 가면 되지!”
“에이! 어린애를 두고 어딜 가요!”
“걱정하지 마. 함께 데리고 가면 되잖아. 엄마도 있고 누나들도 있는데 뭐가 문제야!”
“정말 가도 되요?”
“그럼. 이참에 다 같이 지낼 집도 한 채 알아보자고.”
“크크크……. 오빠!”
경기에 집중해야 할 상황에 느닷없이 애정을 과시하는 모모코의 행동에 갤러리들은 야유로 반격했다.
물론 그러지 못할 사이는 아니다.
젊은 부부가 서로 껴안는 것이 무슨 허물이겠는가!
하지만 워낙 뜬금없는 순간이었기에 필상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들뜬 기분으로 좋은 샷이 나올 리는 만무하다는 게 문제일 뿐.
그래서 본의 아니게 첨언을 해야 했다.
“이번 대회 우승하면 바로 가고 아니면 내년을 도모하자.”
“치! 그렇다 이거죠!”
일단 이 대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모코는 스윙에 집중하지 못했다.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판단했으나 샷이 아주 조금씩 어긋났다.
특히나 아이언 샷이 흔들리면서 좀처럼 타수를 줄이지 못했다. 선두권이 대부분 타수를 줄이지 못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단독 선두 임 프로는 초반부터 무섭게 치고 나갔다.
2위와 3타차로 벌렸고 모모코와는 7타 차까지 벌어졌다.
들어본 적도 없던 선수라서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역시 한국 여자 골프의 저력은 대단했다.
“당신보다 한 살 어린 2000년생이야.”
“예쁘기까지 하던데요!”
“미모는 당신 따라올 선수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이대로 우승하는 걸 지켜만 볼 거야?”
“그럴 수는 없죠. 그런데 왜 집중이 안 되죠?”
이미 5번 홀을 빠져나왔다.
남은 홀에서 기적적인 결과를 만들지 못하면 7타 차를 극복할 수 없다. 게다가 모모코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그냥 비나 확 쏟아지면 좋겠는데!”
일기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다.
대회가 열리는 한여름의 정선은 다른 지역에 비해 시원하고 바람까지 불어 경기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다.
그런데 필상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먹구름이 막 몰려들기 시작했다. 맑고 화창한 날씨였기에 비가 올 것이라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우승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생각에 툭 던진 말인데, 6번 홀 티 박스에 도달했을 때는 빗방울이 뚝뚝 흩뿌리기 시작했다.
“오빠! 정말 비가 와요!”
“하늘이 네 우승을 돕나 봐.”
“우후! 그럼 한 번 집중해 볼까요!”
똑같은 환경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비가 오는 것이 경기를 하는 골퍼에게는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추격이 필요한 선수라면 나쁠 게 없다. 평소보다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모모코는 날씨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실제 샷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굿 샷!”
“드로우가 제대로 먹었죠?”
“응. 퍼팅 라이가 좋은 것 같아.”
마운틴 코스 6번 홀은 164야드 파 3홀이다.
커다란 연못을 건너야 하지만 내리막이 심해 그건 별 장애가 되지 않고 앞쪽과 좌측에 놓인 5개 벙커가 문제인 홀이다.
게다가 핀을 좌측 앞에 꽂아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린 중앙을 공략했는데, 모모코는 과감하게 핀을 직접 공략했다.
탄도 높은 드로우 샷은 기가 막히게 휘어 핀 바로 앞에 떨어졌고 스핀까지 걸리며 핀 근처 2야드 지점에 멈췄다.
“모모코! 모모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팬들의 열렬한 응원 소리가 터졌다. 이미 산술적으로는 우승이 어렵다.
그러나 선수 본인보다 더 포기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저 응원에 보답해야지.”
“저 많은 응원보다 더 큰 지원이 있잖아요. 더도 말고 7타만 줄였으면 좋겠어요.”
모모코의 그 말은 이뤄졌다.
6번 홀 버디를 시작으로 8, 10, 12, 16번 홀에서 버디를 기록했고 496야드 파 5홀인 15번 홀에서는 이글도 낚았다.
-와! 정말 무서운 질주였습니다! 특히나 가장 어려운 마지막 두 홀을 파로 막은 것은 대단한 집념의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모모코의 우승 가능성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하! 그건 예측하기 정말 어렵네요. 지금 모모코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선수는 3명, 단독 선두 임 프로가 2타 차고 1타 차 공동 2위가 2명인데, 핸디캡 1, 2번 홀을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경기를 끝내고 기다리는 심정이 꽤나 답답하겠네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하지만 비를 맞아서 그런지 연습은 하지 않고 휴게실에서 대기하는 걸 보면 우승에 대한 기대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듯 보입니다.
-비가 점점 더 거세지는데요?
모모코가 추격할 수 있었던 것은 선두권의 플레이가 좋지 않았다기보다는 비로 인해 정상적인 경기 운영이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그 와중에 7타나 줄인 모모코가 신기한 것일 뿐.
필상도 모모코와 함께 대기실에서 남은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봤다. 그런데 공동 2위였던 선수 중에 한 명은 17번 홀에서 무너졌다.
티샷이 확 당겨지며 OB가 나면서 경쟁에서 멀어졌다. 문제는 선두인 임 프로였는데, 17번 홀에서 세컨샷이 벙커에 빠져 1타를 잃었다.
“이러면 1타 차인데?”
“18번 홀이 만만치 않잖아요?”
“그러니까!”
실제 임 프로는 마지막 홀 세컨샷을 그린에 올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파도 장담하기 어려운 가드 벙커에 빠뜨리고 말았다.
다들 이렇다 저렇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벙커샷을 붙이지 못하면 연장전까지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임 프로는 대단했다.
턱이 높고 비에 젖은 모래가 무거웠음에도 한 번에 꺼내는 것은 물론, 3야드 거리에 안착시켰다.
-아! 넣으면 우승, 실패하면 연장전이로군요!
-심적인 부담이 클 텐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정말 궁금하네요.
-재작년에 이 대회를 우승하면서 이 하이원 코스와 인연이 깊은 선수죠! 넣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입니다.
-아이고! 못 넣으면 좋아할 선수가 둘이나 있는데, 참 중계하기 어렵네요. 하하하!
커리어만 보면 임 프로가 가장 어리고 경험도 적다. 게다가 앞서다가 연장전으로 가면 심리적으로도 쫓길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을 잘 알지만 필상은 물론 모모코도 담담하게 지켜만 봤다. 승부는 이미 손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됐어!’
스트로크를 하는 순간, 들어갈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들어가지 말라고 기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승부는 공정하고 떳떳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이 홀컵에 빨려 들어가고도 한참을 쳐다보던 모모코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가요! 집에.”
“시상식은?”
“수미 보고 싶어요.”
“그래도…….”
굉장히 아쉬운 모양이었다.
필상이 캐디를 봤는데도 역전 우승을 하지 못한 것이 내내 속상한 것 같았다. 3라운드까지 샷이 좋지 못했고 오늘도 초반에 샷이 흔들린 것이 아쉬움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경기는 충분히 멋진 경기를 펼친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기로 했다.
“다음 주에 나 한국 오픈 끝나면 같이 미국으로 가자.”
“저도요?”
“응. 9월 초에 인디애나 주에서 열리는 Indy Women in Tech Championship에 참가 신청을 하라고 할게.”
“오빠!”
경기 결과는 아쉽지만 그만하면 잘했다.
어떻게 매번 우승할 수 있겠나?
공동 2위를 하면서 시즌 상금 순위도 2위로 치솟았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에 시상식에 참가하지도 않고 인터뷰도 생략한 것은 프로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때문에 미국으로 함께 가겠다는 선물을 받은 모모코는 이후 그에 대한 설교를 한참 들어야만 했다. 다행히 그녀는 잘 받아들였고 SNS을 통해 팬들에게 사과했다.
실제 그날 밤 감기 기운이 있어 적당한 핑계가 되기도 했다.
* * *
“파이널 시리즈 참가하지 않으려고?”
“아닙니다. 노던 트러스트는 건너뛰어도 충분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 기간에 모모코 캐디를 하겠다는 건 좀 심하잖아.”
한국 오픈을 마친 뒤 필상은 오랜만에 PGA투어에 참가한다.
파이널 시리즈 3개 대회가 기다리고 있지만 필상은 모모코를 위해 첫 시리즈를 생략하기로 결정했다.
무려 총상금이 950만 달러인 초특급 대회인지라 이 대표는 무척 아쉬워했다. 하지만 필상은 그보다 모모코의 LPGA 우승이 더 절실했다.
“모모코가 LPGA 우승을 해야 제가 편할 것 같아서 그래요.”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는데, 그보다 봄의 LPGA 진출 시기를 늦추는 것도 한 방법이잖아.”
“그 또한 그렇게 될 겁니다.”
“봄이 동의했어?”
“네. 올 시즌은 일본에서 마무리하겠다고 하네요. 녀석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기야 일본 골프팬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더라고. 고루한 보수적인 팬들의 억지 주장을 반박하는 젊은 팬들은 봄의 국적이 일본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들 하니까!”
“그래서 귀화하겠답니다.”
“귀화?”
그걸 만류하느라 애를 먹었다.
본인의 의지에 따라야 하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원하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 맞지만 기왕이면 시기를 잘 맞추라고 조언했고 봄이 겨우 동의했다.
모모코는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이고 그 정체성을 버릴 아무런 이유도 없지만 봄은 입장이 다르다.
일본보다는 한국을 좋아하고 자신의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다만 부친과 뜻이 다르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사토시 회장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는 말에 더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드디어 코리아의 내셔널타이틀이 걸린 한국 오픈이 개막되었습니다. 날씨도 청명한 것이 골프 치기 딱 좋은 날이네요!
-공필상 프로의 위대한 기록이 작성된 이후, 한국 프로 골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첫날부터 2만 명의 갤러리들이 몰려와 다양한 행사에 참여해 골프제전을 즐기고 있고 전과는 달리 여러 국적의 선수들이 몰려와 우승 경쟁에 참여했습니다.
-여자 골프에 이어 남자 골프까지 세계를 호령하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아직 젊은 선수들의 선전이 뒤따라야 하지만 주요 투어에서 KPGA선수들의 시드를 보다 확대 적용하겠다는 발표가 나왔죠?
-네. 아주 고무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나 먼저 간다.”
“네. 언더 파 치십시오!”
“에라이!”
“우정 힐스. 절대 만만치 않다고요!”
“너나 언더 파 쳐.”
“물론이죠. 정상에서 만나겠습니다.”
“제발 그러길 빈다.”
흑돈이다. 녀석과 한 대회에 같이 출전하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그 어느 대회보다 편하고 즐겁게 대회를 준비했다. 중요한 것은 둘 다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는 거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