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38화 (338/354)

338. 사랑스러운 여인

“그거 우리나라부터 시작하면 좋을 텐데요.”

“우리나라?”

“알고 보면 양으로 음으로 엄청난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알던 한 사람도 그놈의 스포츠 토토 때문에 직장 잃고 가족까지 다 떠났어요.”

“골프채도 없이 하이원을 드나들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게 다 한 길로 통하는 겁니다. 한 번 두 번 잃다 보면 나중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거든요. 그래서 도박 중독을 질병으로 구분하잖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나서봐! 가장 빠른 결과가 나올 걸?”

“에이! 제가 뭘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명분은 충분했다.

감히 필상의 인지도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농담처럼 건넨 이 대표의 말을 며칠 동안 마음에 담고 고심했다. 물론 워낙 바빠서 당장 움직이기는 힘들지만 이 또한 자신의 책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자신이 세상에 드러낸 일이지 않던가!

오지랖 넓히지 말고 골프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자신의 자그마한 노력으로 수많은 피해자를 줄일 수 있다면 그 또한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신소재를 쓴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검증되지 않은 제품으로 골퍼들을 시험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직접 시타를 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럴까요?”

퍼펙트가 버전 1을 내놓고 본격 판매를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개발팀은 전격적인 지원이 이뤄지자 다양한 시도의 결과물을 쏟아 놓았다. 창의적인 사고는 감히 한국인을 따라잡기 어려울 듯.

격려차 방문한 필상에게 연구실에서 면담을 요청했고 상품성이 충분하다는 평가되는 시제품들을 자랑스럽게 내놨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라고 생각한 필상은 일단 신중을 기하라고 말했지만 실제 시타를 해 보고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기대 이상이군요.”

“우리나라가 신소재 개발에 정성을 쏟은 결과입니다.”

“굉장히 만족스럽지만 더 특성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골퍼는 잘 변하지 않거든요. 30년 된 클럽을 그냥 사용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몸에 익은 스윙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죠.”

“저희가 고객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수요자의 니드를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다양한 라인이 필요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가볍게 내놓지는 말아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퍼펙트 1 시리즈는 최근 추세를 반영한 클럽이다.

새로 골프를 배우거나 피치 못해 다시 구입해야 하는 골퍼들에게 두루 어필할 수 있는 세트다.

하지만 필상은 신소재를 활용한 차세대 시리즈에 앞서 클래식 버전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과학적 성과를 반영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골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오래된 보기 플레이어들을 위한 클래식한 시리즈는 클럽 교체에 대한 심적 부담을 가진 그들의 불안감을 덜어 주는 것이 가장 큰 개발 모토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골프가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작은 변화마저도 거부한 것이기에 보다 편하게 다가가는 디자인을 유지하면서도 샷의 관용성이 향상된 클럽, 금방 입소문을 타고 효자가 될 것이다.

“1, 2, 3 같은 숫자를 매기는 것은 신제품에 대한 판매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지만 스스로 자사 제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구입 사이클이 너무 길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우리는 그런 사이클 따위는 아예 염두에 두지 맙시다. 진심으로 제품에 만족하면 굳이 광고하지 않아도 다시 찾을 겁니다.”

“하하하.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우리는 제품 라인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제품명 뒤에는 생산 연도를 붙입시다.”

“세 가지로 한정시킨다고요?”

개발 팀장은 무척 아쉬워했다.

그와 연구진에게는 하나하나가 모두 자식처럼 소중한 결실이기 때문에 각각의 이름을 붙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메뉴가 많다고 장사가 잘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라도 확실한 맛을 내는 식당이 돈을 번다. 줄을 서서 한 시간을 기다려도 꼭 먹겠다는 미식가들이 있는 한.

그래도 폭넓은 골퍼들의 수요를 감안해 최소한의 라인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필상은 그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이미 내놓은 제품은 추후 오리지널이라고 명명하고 주요 타깃을 초중급자로 잡았다. 가벼운 가격은 골프를 시작하는 부담을 줄여 줄 것이고 실력만 쌓으면 기필코 바꾸겠다는 의지도 부여할 것이다.

“전통적인 스타일의 제품은 클래식이라 명명합시다. ‘퍼펙트 클래식 2022’ 멋지지 않습니까?”

“30년, 40년이 지나도 건재한 클럽을 만들어 연식이 곧 훈장이 되게끔 노력해야겠군요.”

“하하하. 그래야지요. 클래식 시리즈는 고가로 가야 합니다. 기품 있는 디자인 아래 광고도 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과학을 덧입혀 필히 이전보다 스코어가 나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자랑하기 좋아하는 분들의 자부심을 자극할 수 있다면 성공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겠죠.”

“우리의 주력 상품이 되겠군요.”

“물론입니다. 중상급자를 위한 시리즈인 만큼 우리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이어서 언급된 마지막 시리즈는 첨단 기술이 총출동할 제품이다. 명칭도 챌린지라고 붙일 것이며 클럽 제조 기술을 선도하는 이미지를 가져가게 될 것이다.

이 시리즈에 대한 가능성은 이미 확인되었다. 안정보다는 도전을 좋아하고 즐기는 연구개발팀의 열정은 당장이라도 세계적인 클럽 제조사들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전체 그림을 완성하고 회사의 기틀까지 손을 본 필상은 토요일 밤, 하이원 리조트를 향해 달렸다. KLPGA에 출전한 모모코의 마지막 라운드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만사를 제쳐 두고 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아쉽게도 그녀의 성적이 5타 차 공동 9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일찍도 왔네요!”

“하하하. 삐쳤어?”

“삐치기는요! 실력이 없어서 그런 걸 누굴 탓하겠어요!”

모모코는 필상이 온다고 했음에도 기다리지 않았다.

침실에 들어가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자는 척했다. 확 덮치면 풀릴 줄 알았으나 정색하고 몸을 빼는 장면은 난감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부부는 몸이 닿으면 그 어떤 것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이기적인 생각이었나?

그녀와 함께하지 못한 이유를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오자 어이가 없었다.

“모모코. 나도 좀 피곤해.”

“그럼 가서 자요. 빈방 많으니까!”

계속 이어진 퉁명스런 반응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멀리서 한달음에 달려온 자신에게 각방까지 언급하나 싶었다. 하지만 모든 감정을 꾹 누른 필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 나왔다.

빈방에 들어가 푹 자고 싶었지만 그 행동이 불러올 여파를 생각하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세계 곳곳을 돌며 과분한 결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여주 집을 굳건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또한 앙증맞은 딸, 수미도 낳아 줬고 늘 기대 이상의 사랑을 주지 않았던가?

‘그래도 당장은 못 들어가겠어!’

미안하다고는 말을 하고 화해하고 싶었지만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필상은 일단 거실 소파에 앉아 토납을 시작했다.

마음의 평정을 찾으면 그녀에게 다가가는 일이 더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상은 이날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드르릉! 드르릉!’

가부좌를 틀고 앉아 코를 골며 잠이 든 것이다. 가부좌 자세가 이제는 너무 익숙했기 때문일까?

‘이 냄새는?’

비몽사몽이었으나 후각을 마비시킬 것 같은 향긋한 냄새는 수마(睡魔)도 쫓아냈다.

그리고 달콤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오빠 좋아하는 우동 끓였는데……. 저 혼자 먹어도 되죠?”

“으잉?”

눈이 번쩍 뜨였다.

모모코가 언제 투정을 부렸던가?

그녀는 거실에서 곯아떨어진 필상을 위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야식을 준비했던 것이다.

어찌 이리도 사랑스러운 여인이 있단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우동은 양보할 수 없지!”

둘은 머리를 맞대고 맛나게 음식을 먹었다.

달콤한 행복이 폭포수처럼 밀려와 견딜 수 없었던 필상은 우동 그릇을 비우자마자 모모코를 번쩍 안아 들었다.

왜 이러냐며 앙탈을 부리는 아내를 안고 지척인 침실까지 갈 수 없었던 필상은 소파를 스치다 말고 그녀와 뒹굴었다.

짐승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모든 생각과 감정을 초월하는 진정한 사랑의 꽃이 만개했다. 이미 숙면을 취할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사랑의 기운을 나눠야 했다.

* * *

“퍼펙트!”

“퍼펙트니까요. 근데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우리 둘이 뭉쳤는데 못할 게 있겠어?”

“흐흐흐! 좋아요.”

늦게 일어났지만 모모코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사랑보다 큰 자양분은 없는 듯.

필상은 아내를 위해 캐디백을 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오전 내내 샷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가장 중요한 자신감을 북돋은 것은 물론이었다.

-어젯밤 공 프로가 하이원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내의 성적이 기대에 어긋나는 바람에 오지 않을 수 없었겠죠?

-네. 이 필드에서 마스터를 보려면 모모코의 성적이 나쁠수록 가능성이 높다고 했던 첫날 제 발언 때문에 곤혹을 치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하하하! 이젠 웃으면서 말하지만 허 위원님 인생 최악의 이틀이었던 것 같더군요. 하지만 한결 밝아지신 표정을 보니 저도 오늘은 방송이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제 의도가 곡해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모모코의 팬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점은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사실 중계진은 필상이 첫날부터 모습을 보일 것이라 기대했다. 모모코의 우승 확률이 높다고 평가되었고 별다른 투어 일정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여러 모로 바쁘다는 것을 알 리 없었던 중계진은 필상이 정선에 나타나지 않자 아쉬움을 토로하며 다소 오버했었다.

그러다 예기치 못한 실언이 나왔는데, 안 그래도 경기가 자꾸 꼬인 모모코의 팬들은 그 발언에 대해 크게 격노했다.

이미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모모코에 대한 폄하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나 몇몇 팬들은 격렬히 방송사에 항의했다.

허 위원이 거듭 사과하면서 일단락이 되었지만 급기야 오늘 필상이 나타남으로서 이제 지나간 화제로 남게 된 셈이다.

-둘이 어떻게 연인으로 발전했는지 아시나요?

-연애요?

임 캐스터가 다소 뜻밖의 화제를 꺼내 들었다.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모모코의 빼어난 외모는 여전히 아름답다. 아이 엄마라는 느낌은커녕 발랄한 모습은 때로 여고생처럼 천진난만해 보인다.

숱한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이유라서 허 위원도 들은 게 좀 있지만 혹여 또 실언을 뱉게 되면 여론의 뭇매를 맞을 것 조심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임 캐스터는 실시간 채팅창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자신이 아는 것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시청자들로서는 경기 내용보다 더 솔깃한 얘기였다.

-우리 공 프로가 아마추어 시절, 일본 투어에 도전하기 위해 모모코의 캐디로 일했던 일화는 다들 아실 겁니다.

-아! 네. 돌이켜보면 모모코는 공 프로의 은인이지요. 단계를 생략하고 예선전부터 치러 우승까지 노리는 것은 정말 무모한 계획이거든요.

-성공한 사례가 없는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공 프로와 모모코의 만남은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운명?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물가도 비싼 일본에서 생활을 하려면 수입이 있어야 하는데, 다행히 공 프로의 능력을 단번에 인정한 모모코의 안목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공 프로의 지도를 받아 모모코도 여신으로 추앙받을 만큼 큰 성공을 거뒀으니 서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는 표현밖에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돌아봐도 보통 인연은 아니었다.

다른 선수와 조인이 되었다면, 또 필상이 모모코에게 특별한 호감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 같은 성공이 있었을까?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결과를 얻었기에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이보다 좋은 궁합은 있을 수 없다고.

-그런데 둘의 나이 차가 꽤 나지 않습니까?

-네. 띠 동갑이죠. 만약 공 프로가 먼저 대시를 했다면 둘은 이뤄지지 않았을 겁니다. 누가 봐도 모모코는 사랑스러운 존재니까요!

-그런 말은 저도 들었거든요. 모모코가 아주 심하게 들이댔다고. 아이고! 방송에서 적절치 않은 표현인가요?

허 위원이 얼른 눈치를 줬다.

필상의 팬도 많지만 모모코의 팬은 아주 극성인 탓이다.

특히나 민감한 언급은 아주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이 허 위원을 통해 증명된 마당에 사실이어도 가려서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흥미롭게 들었다.

결국 일본 여자 골프의 여신으로 추앙받던 모모코의 애정을 이끌어 낸 사람이 자신과 같은 한국 남자였기 때문이다.

-선을 분명히 그어도 하늘이 정한 인연은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그러니 나이와 국경을 뛰어넘어 좋아하게 된 거죠.

-만약 결혼까지 골인하지 못했다면 꽤 아픈 만남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공 프로는 목표가 뚜렷했고 그 길을 가는데 연애는 독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럼 항간에 떠도는 그 얘기, 모모코가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이 공 프로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말이 성립되는 거군요.

흥미와 관심도 좋지만 자칫 위험한 수위에 이르렀다.

얼른 담당 피디가 눈치를 주자 그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며 둘이 만나 행복하고 성공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서 보기 좋다는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늘 귀여움 덩어리인 모모코도 사랑을 할 때는 뜨거운 여인이라는 사실은 확인된 셈이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인가요? 사랑하는 두 남녀가 호흡을 맞춘 게.

-젊은 부부가 호흡을 맞출 일은 선수와 캐디가 아니더라도 허다하죠! 아이고, 제가 요즘 왜 이러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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