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37화 (337/354)

337. 커밍아웃

사토시 회장이 끼어들자 그의 입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대체 왜 그까지 나서서 한국 골프 클럽에 투자를 권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첫 마디부터 충격이었다.

“사실 나부터 일본에 있는 자산을 모두 처분하고 싶어.”

-그럼 그걸 한국에 투자하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사업가가 돈을 쫓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상도(商道)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허허허! 자네는 소속한 신문사가 서서히 망해 가고 급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계속 다닐 건가? 옆집 신문사에서는 자넬 아주 비싸게 쓰겠다고 제안까지 왔어. 어떤가?”

기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회피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이직은 너무도 쉬운 결정일 테니까.

사토시 회장의 말에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과 비약이 있다.

서서히 망해 간다는 표현은 공감하면서도 인정하기는 어렵고 한국을 잘나가는 옆집으로 비유한 것도 적절치 않다.

하지만 질문을 위해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눈치를 보는 분위기를 읽은 사토시 회장이 이번에는 더 큰 폭탄을 터트렸다.

“난 비겁한 사람이오.”

“…….”

느닷없는 자학적 표현에 기자들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노회한 사토시 회장이 그런 화두를 던진 것은 아무도 예상하기 힘든 내용을 말하기 위한 전조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옅은 긴장감마저 돌았다.

“일본에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들이 많지. 그건 단지 근대화가 이뤄지던 시대뿐만이 아니야. 훨씬 오래된 일인데, 묘하게도 이 땅에만 오면 다들 제 출신을 밝히기 꺼려하더라고.”

잠시 말을 멈춘 사토시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사토시 회장에게도 이런 말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보여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발언을 던졌다.

일본인의 혈통은 토착 원주민인 죠몬인과 북방에서 이주해온 이른바 도래인으로 구분된다. 생김새부터 확연하게 차이가 나고 언어와 문화적인 차이를 따라가도 그 흔적이 보인다.

문화적 우수성이 앞섰던 도래인들은 대부분 한반도에서 건너갔고 특히나 멸망한 백제 출신이 일본의 지배 세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하지만 오래 전에 정착해 이미 일본인이 되어버린 그들과는 구분되는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이 있다. 일제 치하에서 생존을 위해 도일(渡日)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흔히 재일교포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혹시 회장님께서도…….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이냐고 물으려던 한 젊은 기자는 뒷말을 삼키고 말았다. 사토시 회장은 일본 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엄연한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말을 꺼냈더라도 면전에 대고 그렇게 묻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피의 보복.

확인되지 않지만 그런 짓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위인이라고 들었던 기억 때문이다.

도중에 말을 삼켰음에도 주변에 있던 기자들이 자신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사토시 회장은 껄껄 웃었다.

“허허허! 세계가 하나인 글로벌 시대에 사는데, 그게 뭐 중요한가?”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시인하지도 않았으나 커밍아웃을 한 것은 틀림없었다.

설사 그게 진실이라도 언급하기 살 떨리는 극단적 일인데, 그다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이유가 밝혀졌다.

“난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하지만 일본에서 이룬 소중한 자산을 차마 처리하지는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우리 딸이라도 미래지향적인 투자를 할 수 있게 도와준 걸세. 그 정도야 뭐 어때!”

그렇게 적당한 암시를 주고 마무리가 되나 싶었다.

굳이 입에 담지 않아도 내용은 모두 전달된 샘이니까.

과거라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한국을 무시하고 우월주의에 잠식된 일본인들은 무서우리만큼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새 한국인들의 일제 불매 운동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실질적인 효과도 냈지만 일본은 더 오랜 기간 동안 한국 제품을 불매해 왔다.

그것도 아주 조용히,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성능과 가격경쟁력이 높은 세계적인 제품들도 깜짝 놀랄 시장 점유율을 보였고 하다못해 더 이상 크지 못하게 무역 규제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게 커다란 눈덩이로 불어 자신에게 덮친 꼴이 되었지만.

“난 아빠랑 생각이 좀 달라요.”

느닷없이 봄이 끼어들었다.

대체 뭐가 다르다는 것인지 불안했다.

그래서 제발 무리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려 했는데, 핵이 폭발하고 말았다.

“제 한국 이름은 봄이에요.”

-요즘 젊은 여성들이 한국을 좋아해 한국식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프로 골퍼로서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아닌가요?

“공인이라서 조심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어쩌죠. 이미 아빠가 힌트를 줬듯이, 제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전 일본이 싫지 않지만 한국이 더 끌려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봄의 손을 잡았다.

제발 적당히 하라는 것이다.

그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봄은 자신의 입장을 보다 선명하게 밝혔다.

“서로 미워할 이유가 있다면 미워할 수 있죠. 그게 자신의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면! 물론 그런 사람은 본 적이 없지만 난 미워할 이유보다 좋아할 이유가 훨씬 크거든요.”

-그래도 일본에서 나고 자라 이렇게 훌륭한 선수가 되었는데, 너무 편협한 생각 아닌가요?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다.

현재 봄이 누리고 있는 것들은 모두 일본 골프 투어와 그녀의 열성적인 팬들이 선사한 것이니까.

하지만 이어진 봄의 음성은 촉촉한 음성에 다들 녹았다.

“전 선천적인 질병을 앓았어요. 그 때문에 우리 아빠가 무던히도 고생하셨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사토시 회장님은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으시거든요. 그런데도 제가 스무 살도 넘기지 못할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어요.”

-아! 그런 과거가 있었군요?

“네. 자랑도 아니고 넋두리도 아니지만 저 또한 사는 게 무척이나 무미건조했어요. 그런 제가 이렇게 웃을 수 있게 된 게 다 우리 오빠 때문이거든요. 저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죠.”

오라버니는 정감 어린 한국어이고 일본어로는 그냥 오빠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본어 표현도 가능하지만 괜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정확한 단어를 선택했다.

그런데 기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봄의 형제자매가 어찌 되는지 아는 바 없고 필상은 코치라는 표현보다는 스승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적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닫게 되는 행동을 취했다.

아까 잡았던 손을 슬그머니 빼던 필상의 손을 봄이 덥석 잡아 보란 듯이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봄아!”

당황스러워 손을 빼려 했지만 봄은 더 세게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옆에 앉았던 사토시 회장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그러자 얼떨결에 누군가 따라서 박수를 쳤고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다들 손뼉을 마주쳤다.

실은 사토시 회장의 눈치를 본 것인데, 묘한 감동이 겹쳤다. 선천성 질병을 앓았던 이즈카가 병마를 이기고 성공한 스토리는 한 편의 드라마로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속보가 날기 시작했다.

[선천성 질병을 앓던 이즈카의 성공 스토리! 부친인 사토시 회장의 헌신적인 사랑과 마스터의 가르침이 있었다]

[JLPGA 신데렐라 이즈카 하루! 일본인인가? 한국인인가?]

[이즈카의 클럽 교체. 그 이유는?]

[미워할 이유보다 좋아할 이유가 더 많다는 한국, 이즈카 하루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인가?]

[일본은 없다? 모모코에 이은 이즈카의 한국 사랑.]

[충격적 고백! 재일한국교포는 일본인인가?]

[일본 골프의 자랑이자 희망이던 이즈카 하루. 한국에 대한 무한 애정 표현!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제목도 각양각색이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최대한 사토시 회장에 대한 언급은 자제했다는 점이다. 화두를 꺼낸 사람은 그였는데, 대중에게 어필하기 좋은 봄이 더 자극적이었을까?

후환이 두려웠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하지만 기사 내용을 살펴본 일본 골프팬들은 크게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인인 필상이 세계 골프계를 휘어잡는 놀라운 위업을 지켜보며 배가 아파도 참았다. 대형 신인인 모모코가 등장해 세계 최고라는 한국 선수들과 당당히 경쟁해 이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광했고 사모해 마지않던 그녀가 한국 남자와 결혼해 아예 한국으로 건너갔다. 갓 스무 살에 불과한 여신인데!

모모코는 한국에 대한 호감을 나타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KLPGA에서만 활동한다. 갓 낳은 아기가 있어서라지만 여신을 잃은 일본 골프팬들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아파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공백을 메워 줄 신데렐라가 나타났다. 시대와 상황이 맞아떨어졌는지 이즈카 하루는 이제 일본 스포츠의 자존심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마저 무너진 것이다.

* * *

“말 좀 해 봐요.”

“뭘?”

“저 잘하지 않았어요?”

“아니. 잘 못했어.”

“퍼펙트 광고 효과를 반감시켰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것도 그렇고 앞으로 너 어떡하려고?”

“으음……. 별로 걱정하지 않아요. 제가 한국을 좋아한다고 해도 어차피 국적은 일본이잖아요. 그래도 날 미워한다면 그냥 미국으로 건너가 LPGA를 뛰면 되죠. 아마 응원할 걸요?”

“그건 그렇겠지…….”

한국 낭자들은 국내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으면 거의 대부분 LPGA로 진출한다. 그리고 한국 최고가 되면 곧 세계 최고라는 것을 입증한다.

정말 무서우리만큼 대단한 실력인데, 일본은 어림도 없다. 일단 일본 투어에서 성공하는 자국 선수가 드물고 간혹 경쟁력이 있다는 선수들도 미국에 건너가면 파묻힌다.

그렇기 때문에 봄이 LPGA 진출해 성공 가능성만 보여도 그들은 국적을 들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지도 않았다.

다음 날 JLPGA 사무국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시즌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 투어에 전념해 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모모코와 비교되던 신예들이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하는 가운데 봄마저 일본 투어를 이탈하면 당장 흥행에 빨간불이 켜지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대박이야!”

이 대표는 만나자마자 퍼펙트 판매 상황부터 말했다.

아직 정식 판매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유통망도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예약이 쇄도하고 있었다.

“한국 팬들의 반응이 좋군요?”

“아니. 한국보다 일본이 더 극성이야. 이미 일본 최대 유통업체에서 대량 선주문을 넣었을 정도니까 말 다했지!”

“허! 봄이 초를 친 줄 알았는데…….”

“초를 치기는! 이게 다 봄이 극적인 역전 우승을 했기 때문이지! 게다가 한국 팬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아.”

“이번 주에 모모코가 하이원에 다녀오면 뜨거워지겠군요.”

“공 프로가 한국 오픈까지 먹으면 게임은 끝나겠지. 호호호!”

이미 한국산 골프 클럽 퍼펙트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다.

일본과 한국은 물론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유럽까지.

간절히 요청해도 진열조차 거부했던 유명 매장에서 전시 제품을 요청했지만 그것까지 소화할 여력이 없었다.

선주문 들어온 것만 해결하려고 해도 지금 공장 인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직원을 대량 확충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필상이 직접 나서 진두지휘하기에 이르렀다.

모모코가 하이원 리조트 여자 오픈에 캐디를 봐 달라고 요청했지만 들어주지 못해 구박을 감수해야 했다.

그게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퍼펙트를 많이 팔기 위한 노력인데, 그건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어차피 그 살림이 그 살림이라나?

“결국 다 드러나는군요.”

“이전투구를 하는 모양새니까!”

“자기 살겠다고 동업자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것은 멍청한 짓인데!”

“그게 다 본인 작품이면서 너무하는 거 아냐?”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스포츠 베팅업체들이 줄줄이 기소되었다.

돈이 될 때는 서로 짜고 치더니 위기에 몰리자 자국 우선주의, 극단적 이기주의가 발동한 것이다.

특히나 뒤늦게 거대한 자본으로 뛰어들었던 중국 업체는 안 그래도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벼르던 미국과 EU의 공동 타깃이 되어 공중분해가 되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공 프로를 처치하려고 했던 계획들도 다 드러났나 봐!”

“그건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닙니다. 어차피 대가는 치르게 했고 그런 지저분한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려 좋을 게 없으니까 되도록 그 점은 부각시키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오케이!”

하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뉴스라는 것은 접하는 사람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꼭지를 짚어야 한다. 그 점에서 볼 때, 필상을 언급하는 것보다 관심을 끌 수는 없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마스터를 겨냥했던 검은 돈의 실체!]

[골프 투어의 이면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 골프백을 훔쳐 간 것은 차라리 귀여운 수작이었다.]

[경기 방해, 교통사고, 클럽 도난, 회유와 협박! 그 어떤 것도 마스터의 위대한 승리를 막을 수 없었다.]

[상상 못할 돈 잔치, 스포츠 베팅! 이대로 괜찮은가?]

[도박 없는 세상을 위한 시민 연대, 국경을 초월해 똘똘 뭉치다! 그 시작은 정당하고 깨끗한 스포츠부터!]

[독일을 필두로 여러 나라가 스포츠 베팅 전면 금지 검토!]

[더는 합법의 탈을 쓴 도박과 착취를 용납할 수 없다. 스포츠 베팅의 현실과 추악한 폐해를 파헤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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