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36화 (336/354)

336. 화룡점정

“진행요원!”

필상은 놈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또한 직접 상대하지 않고 주변에 몰려든 진행요원들에게 전후 사정을 말했다. 이미 분위기를 파악한 그들이 가방에 든 카메라부터 확인하자고 했으나 놈은 거부했다.

당신들이 뭔데 개인 물품을 뒤지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신고가 접수된 현장범은 범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침 현장에는 질서유지를 위해 파견된 경찰들이 있었고 그들의 입회하에 열어 보기로 했다.

사법처리는 받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 필드에서 추방할 증거는 충분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장면을 중계 카메라가 찍고 있다는 거였다. 전국구 비매너 갤러리로 등극할 듯.

“그러게 좀 착하게 살지!”

필상은 결과를 보지도 않았다.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고 지금은 봄의 경기에 집중할 때였기 때문이다. 타 선수의 일로 시간이 지체된 것이 미안했지만 봄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좋아했다.

“저런 변태 같은 놈들은 사회로부터 격리가 필요해요.”

“하하하. 그냥 한 번의 실수라고 생각해 주자. 남을 미워해 봐야 내 마음만 상하니까.”

“그렇긴 그러네요.”

“쉿!”

그린 근처에 다다른 필상과 봄은 안 프로의 칩샷을 지켜봤다. 3온에 실패했으나 지금이라도 잘 붙여 파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글 찬스를 앞둔 봄을 의식했는지 백스윙부터 흔들렸다. 조금이라도 찜찜하면 멈춰야 하는데, 그녀는 휘둘렀다.

그 결과가 좋을 수는 없었다.

남들은 3야드도 잘 붙였다고 할지 모르나 그녀의 실망에 가득 찬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줬다. 이건 결코 본인이 바란 결과가 아니라고.

“이제 드디어 네 스테이지야!”

“춤을 추면 안 되죠?”

“이글 퍼팅을 넣고 추는 춤이라면 다들 기뻐하지 않을까?”

“흐흐흐…….”

괴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린에 오른 봄은 서두르지 않고 홀컵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공과 홀컵의 중간 지점에 다가가 다시 한 번 라이를 살피며 빈 스트로크까지 해 봤다.

빈틈이 없는 퍼팅 루틴이었다.

하지만 에임을 마치고 어드레스를 취하자 퍼팅은 과감했다. 지나지 않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너무도 단순한 진리를 실행한 것이다.

살짝 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공은 홀컵 뒷벽을 때리며 그대로 떨어졌다. 이 대회 14번 홀에서 나온 첫 이글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완성한 것이다.

“나이스 터치!”

“이글! 이글! 이즈카 파이팅!”

“으하하하하!”

이글을 축하하는 외침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웃음소리가 더 컸다. 이글이 들어가는 순간, 봄이 정말 그린 위에서 춤을 췄기 때문이다.

혹시 춤을 추더라도 예쁘고 섹시한 웨이브 정도일 거라 예상했는데, 익살스런 그 춤은 소위 ‘개다리 춤’이라는 것이었다.

퍼터를 두 손에 들고 다리를 폈다 오므리는 행동을 반복하는 그 귀여운 모습에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하하하! 정말 대단한 팬 서비스로군요.

-이러면 곤란합니다. 코미디언들은 이제 뭘 먹고 사나요? 필드에서 프로 골퍼가 저렇게 팬들을 재밌게 해 주는데.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걸요? 이제 모든 예능 프로그램에서 저 춤을 따라 할 테니까요. 저 춤은 저도 가능해요.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살짝 걱정되는 것은 저러고도 우승을 못하면 보수적인 분들의 비판이 거셀 것 같습니다.

-에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요! 이제 우리 일본도 퀴퀴한 생각은 버리고 보다 젊은 감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가 됐죠. 밝고 긍정적인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까운 이웃을 통해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편파 방송의 선봉장인 유우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해설자도 당황스러웠는지 쉬이 대꾸를 하지 못했다.

한국을 늘 부정적으로만 표현했으나 속으로는 명확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그렇다. 비록 한국에게 추월을 당했지만 일본인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릇된 교육과 통제된 정보에 갇혀 자국우월주의만 고집했으나 드러난 현실을 보며 왜 생각이 없었겠는가!

한때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고 조국에 대한 자긍심이 넘쳐 교만으로 비칠 정도로 똑똑하고 근면한 국민들이다.

추월당하는 두려움이 혐한으로 번져 기성을 부렸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수그러들었고 현실을 직시하자는 식자(識者)들의 제언이 줄을 이었다.

“어이쿠!”

다시 단독 선두를 되찾나 싶은 순간, 안 프로는 파 퍼팅도 놓쳤다. 극심한 심리 불안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다음 홀에서도 회복되지 않아 타수를 잃으면서 봄은 졸지에 3타 차 선두로 나섰다. 그걸로 승부는 사실 끝이 났다.

그런데도 16번 홀을 파로 막은 봄은 141야드 파 3홀인 17번 홀에서 또다시 홀인원에 가까운 묘기를 선보였다.

그런데 그 샷이 터지기 직전에 중계진에게 다소 당혹스러운 메모가 도착했다. 캐스터와 해설자가 내용을 확인했으나 서로 멀뚱히 쳐다볼 뿐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굿 샷이 터지는 순간, 봉인은 풀리고 말았다.

“와우! 바꾼 클럽이 손에 쫙쫙 감기나 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보통 성적이 좋은 선수들은 시즌 중에 클럽을 교체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잘 나가는데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바꿔서 홀인원을 잡아내고 우승까지 한다고요?”

“굉장히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 운으로만 밀어붙이기에는 너무 잘하는 거 아닌가요? 예를 들어 이즈카의 샷에 적합한 피팅을 했다거나 힘을 효과적으로 실을 수 있는 그 회사만의 비법이 있거나.”

“하하하. 한국이나 일본 제품이나 사실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유수한 일본 메이커들이 한국에서 OEM 방식으로 생산을 해 왔거든요.:

“…….”

클럽 교체 사실은 언급하려 했으나 유우키는 그게 한국 제품이라는 것은 입에 올릴 생각이 없었다.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고 생각했으나 자꾸 질문이 이어지자 솔직한 야마다는 한국산임을 밝힘은 물론 은근히 중요한 업계의 비밀까지 털어놨다.

TV 앞에 앉아 있던 일본 골프팬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뭐든 일본이 만드는 것은 다 따라 하고 심지어 더 좋은 제품까지 내놓아 일본 기업들을 파산케 만든 한국인들이 골프 클럽인들 왜 만들지 못하겠는가!

그건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한국에서 만든 제품에 메이커만 붙여서 막대한 이익을 창출해 온 일본 제조사의 영업 기술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용납될 수 없는 게 있었다.

‘왜? 대체 왜?’

이즈카 하루가 한국산 골프 클럽을 사용하느냐는 것이다.

충격에 따른 의문은 실시간 댓글 창에 뜨거운 논란으로 떠올랐다.

-진짜야? 하루가 한국 메이커를 들고 나온 거?

-에이. 그럴 리가!

-이건 방송 사고다! 거짓말이라면. ㅋㅋㅋ

-야마다는 진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진실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찢는 것 또한 사실……. ㅠ.ㅠ

-걱정 마시라! 그 메이커도 우리 일본 기업이 인수하면 그만이니까! ㅎㅎㅎ.

-넌 어느 시대에서 왔냐? 일본 기업이 인수를 해? 줄줄이 인수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17번 홀에서 버디를 기록하며 우승을 거의 굳혔지만 경기 내용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도 없어 보였다.

이미 한국 중계방송에서는 국산 클럽 교체로 인한 긍정적인 효과가 만발한 상황이었으나 일본 중계방송은 뒤늦게 불이 붙어 꺼질 줄을 몰랐다.

누군가 그 내용을 댓글에 달면서 봄의 우승 못지않은 큰 화제로 떠올랐다. 바로 필상이 원하던 그 그림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알 리 없는 봄과 필상은 마침내 마지막 홀에 도착했다. 이미 4타 차로 벌렸기 때문에 굳이 장타를 날릴 필요도 없건만 봄은 당당히 드라이브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로 올라섰다.

“아! 저거 좀 예쁘지 않아?”

“그래. 한국 애들은 뭐든 정말 그럴싸하게 만든다니까!”

“나도 이참에 세컨드 클럽을 한 세트 마련해 볼까?”

“그런다고 네가 짧순이 처지를 벗어나겠어?

“흥! 이즈카의 티샷을 보고도 모르냐? 쟤는 오늘 전보다 최소한 30야드 이상 더 날렸어. 나도 10야드는 더 나갈 수 있을 거야!”

“호호호. 만약 그렇게 되면 나도 한 세트 살게.”

필상은 두 중년 부인의 그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마침내 일본 중계방송에서도 봄의 클럽교체 사실이 언급된 것을 파악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봄의 장타는 ‘퍼펙트’의 화려한 등장에 화룡점정이 된 셈이었다.

“봄아. 시원하게 날려 봐.”

“크크크. 싫어요.”

클럽 헤드와 샤프트가 모두 무광 처리된 흰색이었다.

간혹 클럽 헤드가 하얀색인 제품은 있었으나 샤프트까지 하얀 디자인은 아직 없었다. 다만 집중에 방해가 될지도 몰라 빛이 반사되지 않는 무광 처리한 것이 주효했다.

단지 색상 하나 바꿨을 뿐인데, 예쁘다고 난리였다.

이미 한국산 제품의 높은 품질과 디자인에 대한 선입견이 봄의 월등한 경기력과 어울려 파격적인 효과를 낸 것이다.

까앙!

싫다고 말한 것은 귀여운 투정이었다.

실제 봄은 방향성을 담보할 수 있는 한계치 범위 안에서 가장 강력한 스윙을 휘둘렀다.

맞바람이 적잖이 불었지만 남자 프로들도 버거운 거리, 318야드를 찍고야 말았다. 페어웨이까지 지켜 냈기에 그 가치는 더욱 빛을 발했다.

“너 돈 좀 벌겠다.”

“차 떼고 포 떼면 우승 상금 얼마 남지도 않아요. 게다가 오라버니도 떼 드려야 하잖아요.”

“어? 갑자기 아까워진 거야?”

“그거 아니죠. 흐흐흐. 이렇게 즐기면서 돈까지 버는 직업이 어디 있다고.”

“내 말은 사실 그게 아니야. 지금 네가 사용한 클럽 때문에 난리가 났나 봐.”

“아! 우리 퍼펙트요?”

“그래. 저기 저 아줌마들도 산다던데?”

“어느 분이요?”

봄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필상이 긍정적인 대화를 나눴던 여성분들을 가르쳐 주자 필상에게 건네줬던 드라이브를 다시 뺏더니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 녀석이 대체 뭘 하려나 싶었는데, 다가간 그녀들에게 클럽에 대한 느낌을 전하면서 같이 수다스럽게 웃었다. 카메라가 그 장면들을 모두 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연출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오늘 사용한 드라이브를 한국산 클럽을 장만하겠다고 말했던 중년 여성분에게 선물했다.

깜짝 놀랐지만 봄이 오늘 드라이브를 다시 잡을 일은 없다는 것을 인지한 필상도 그녀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눴다.

봄에게 드라이브를 선물 받은 여성은 오늘의 기억을 평생 자랑하게 될 것이다. 또한 부족한 세트를 모두 장만하겠지.

팬들의 요청에 그 여성과 기념사진까지 찍었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에게 갤러리들의 축하의 말이 전해졌다.

“진정한 스타네!”

“스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게 잘 팔려야 한다는 거죠.”

“돈이야? 자존심이야?”

“둘 다요! 크흐흐.”

“항복!”

결국 봄은 우승했다.

위기가 있었지만 가볍게 극복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투자한 ‘퍼펙트’가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언론의 주목을 받은 장면이 있었다. 마지막 버디 퍼팅이 들어가 우승을 확정지은 봄은 그 공을 꺼내 들고 어딘가로 향했다.

“아빠!”

“그 공 나 주는 게냐?”

“네. 고맙고…… 또 사랑해요.”

그 말과 함께 봄은 부친의 품에 안겼다.

철이 든 이후 처음이다.

굳이 그럴 만한 뚜렷한 이유는 없다.

여성 편력이 심해 쉰이 넘은 나이에 딸을 낳은 것도 아니다. 전 부인과 사별한 지 오래된 그에게 먼저 다가간 사람은 작고한 봄의 모친이었다.

하지만 지병을 타고난 가엾은 딸의 모든 분노와 짜증을 그는 홀로 감당해 냈다. 어미 없이 자라게 해서 더 안타까웠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봄에게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봄에게만은 최고의 아버지였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너무 먼 길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자네도 이리 오게.”

“아. 네. 어르신.”

봄과 사토시 회장, 그리고 필상이 우승한 그린 위에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날 봄의 멋진 스윙 장면이 많았지만 우승 소식을 타진한 대부분의 기사 헤드라인은 이 사진으로 도배가 되었다.

시상식이 끝난 뒤에 이뤄질 파격적인 기자회견의 내용을 그때는 몰랐기 때문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상식이 진행되었고 대중 앞에 나서는 걸 꺼리는 사토시 회장도 봄과 함께 나와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휘휘 돌리는 겐가? 기자라면 당당하게 궁금한 것을 물어봐야지.”

사토시 회장이 봄의 곁에 앉은 효과는 대단했다.

질문하겠다고 손을 들었던 기자들은 자신이 지목되면 어김없이 말을 더듬었다. 우승 축하 인사는 수없이 전해졌건만 앵무새처럼 그걸 빼먹지 않고 종알거렸다.

그리고는 변변한 질문을 꺼내지 못했다. 그건 조심성이 많은 일본인들의 오래된 습성에 기인한다.

보다 못한 사토시 회장이 한마디 던진 후에야 상투적이지 않은 본론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이즈카 양. 기존에 사용하던 클럽을 교체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네. 이건 제가 투자해서 만든 작품이거든요!”

그 한 방에 장내가 술렁였다. 일본 선수인 이즈카가 왜 한국 클럽 제조사에 투자를 한단 말인가?

그 이유에 대한 생각은 모든 기자들이 일치했다.

-혹시 코치인 미스터 퍼펙트의 제안이 있었던 겁니까?

“아니요. 선생님은 오히려 저를 만류하셨지요. 그래서 아빠까지 나서서 설득하느라 무척 힘들었어요.”

-사토시 회장님께서도 한국에서 생산한 골프 클럽을 인정하셨다는 말인가요?

“허허허! 그 대답은 내가 해야겠구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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