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 쫙 깔아 볼게요
-아! 이럴 수 있나요?
-경쟁자들이 모두 안전하게 온그린을 한 상황이라서 이번 벙커샷이 아주 중요합니다. 반드시 샌드 세이브를 해야죠!
-그런데 너무 깊어요. 벙커가! 하필 그렇게 튈 건 뭔지!
이미 나온 결과까지 자꾸 들먹일 만큼 승부는 팽팽했다. 아니, 지금은 역전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봄은 보기를 기록했고 안 프로는 7야드 롱 퍼팅을 구겨 넣은 신기를 선보이며 졸지에 2타 차 선두로 등극했다.
이제는 정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할 판이었다.
“후반에 파5 홀이 세 개죠?”
“그래. 아직 기회는 충분하니까 롱홀에서 승부수를 던지자.”
“치! 진즉에 그렇게 나왔어야죠.”
“좋아.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352야드 파 4홀부터 어찌 공략해야 할지 선택하자.”
“전 고(go)예요!”
“1온?”
“네. 이미 몇 차례 풀스윙을 했더니 자신감이 좀 붙었어요.”
“고!”
“흐흐흐!”
실은 녀석의 고집이 문제였다.
물론 캐디로서 선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실책이지만 설마 이렇게 생고집을 피울 줄은 미처 몰랐다.
언제나 순순히 잘 따랐었기에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여자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어찌 되는지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6개 홀이 남았고 그중에 롱홀이 2개나 되기 때문에 장타가 빛을 발하면 얼마든지 2타 차는 극복할 수 있다.
문제는 하늘 높이 치솟은 안 프로의 기세가 여간해서는 꺾이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때문에 11번 홀에서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도 파 4홀 1온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드로우 샷을 구사하면 딱 맞는 홀이네. 85% 정도만 때리면 좋을 것 같아.”
“83%정도면 될 것 같아요.”
“하하하! 그래. 자신 있게 휘둘러 봐!”
필상이 격려하자 봄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졌다.
그걸 보며 진즉에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해야 했다.
적어도 봄에게 자신은 절대적인 존재다. 말 한 마디, 표정 하나가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앞선 경쟁자들이 둘 다 안전하게 270야드 안팎의 페어웨이를 공략했지만 그건 이미 예상한 바였다.
‘자식! 아주 똑같이 따라 하네!’
물론 체격과 스윙 스피드가 다르다.
하지만 샷 루틴부터 시작해 표정이나 자세가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스스로 ‘미스 퍼펙트’라는 닉네임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루할 만큼 느린 테이크백, 그 누구도 숨을 쉬지 않는 고요한 침묵이 홀 전체를 휘감았다. 하지만 백스윙 탑에서 잠시 숨을 고른 클럽 헤드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공을 향해 쏘아졌다.
임팩트를 하는 순간, 부러질 정도로 휘면서 가속이 붙은 드라이버 헤드가 사정없이 공을 강타했다.
과앙!
“나이스 샷!”
필상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소리쳤다.
보통 선수의 캐디는 그렇게 오버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응원의 갤러리들의 몫이고 캐디는 선수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의 외침은 들은 봄은 봄이 떠난 자리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피니시를 풀고 필상에게 다가왔다.
“공 안 봐?”
“나이스라면서요?”
“그,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봐야지.”
“잘 맞았어요. 손바닥에 짜릿한 클라이맥스가 터졌다고요.”
“크! 표현하고는!”
스물한 살, 소녀의 태도 벗지 않은 봄이 쓴 표현이 너무 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배시시 웃으며 공의 궤적을 향하는 그녀를 보자 엉큼한 사람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느낀 그대로 표현했을 뿐인 것이다.
얼른 필상도 타구의 궤적을 쫓았다.
최고점에 도달하기 전에는 완벽한 스트레이트 구질로 보였다. 그대로 떨어지면 그린 우측 나무 사이로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에 기대가 컸던 팬들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이 얼굴 주변으로 올라갔다.
최악의 상황을 미리 대비하기 위한 예비 동작이었다. 그러나 얼굴을 감싸기는커녕 두 팔이 하늘로 번쩍 올라갔다.
-하아! 드로우! 드로우!
-진정하시죠. 힘이 워낙 좋아 회전이 늦게 걸린 겁니다.
-야마다 해설위원도 다리를 계속 흔들고 있던 거 다 봤습니다. 선수가 미스 샷을 할 때 나오는 습관 아닌가요?
-윽! 인정합니다. 저도 드로우를 걸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너무 쭉쭉 뻗어 나가자 좀 불안했지요. 하지만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장타였습니다.
-와! 온! 온그린! 파 4홀 1온에 성공했어요. 그녀의 이름은 이즈카 하루! 작년 하반기 신데렐라처럼 등장한 일본 여자 골프의 희망이자 등불입니다!
NHK 골프채널 캐스터 유우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치 봄이 우승을 확정지은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 입에서 주르르 나온 표현도 너무 진부했지만 TV 앞에 앉아 시청하던 팬들도 엉덩이가 들썩였다.
홀인원까지 성공하며 무난히 우승할 것 같던 봄이 느닷없는 실수를 반복한 가운데, 한국 선수가 무섭게 치고 올라와 역전 당하자 너무 안타깝고 울분이 가슴을 꽉 메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타는 그런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 주기에 충분했다. 여자 골프에서 이런 장면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강렬했다.
“스톱!”
“흐흐흐. 입으로만 외치면 어떡해요.”
“그런가?”
그린이 앞뒤로 길고 핀은 뒤에 꽂혔다.
그래도 그린에 바로 떨어지지 않고 그린 앞 페어웨이에 떨어져 튀어 올라갔는데도 드라이브 티샷의 관성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홀컵을 지나 에이프런까지 가서야 겨우 멈췄다. 1온에는 성공했지만 이글 기회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봄은 필상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자축했다. 중요한 것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아! 저걸 붙여 버리네!”
“붙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안 프로가 지지 않고 세컨샷을 버디 가능한 거리에 떨궜다. 기껏 때린 1온 시도가 무색할 상황이지만 봄은 침착했다.
역전을 당했고 상대가 맞받아치는데도 끄떡없는 모습에 필상은 봄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이 녀석! 정말 많이 컸네.’
그런 느낌이 절로 들었다.
자신이라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이렇게 냉정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봄은 아직 투지가 끓어올랐다.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이 가득했다.
삶에 대한 의지가 이제는 자신이 스스로 좋아한다고 밝혔던 골프에 완전히 녹아들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운틴 브레이크가 있는 거 알지?”
“네. 잔디 결이 우측으로 누웠네요. 그래서 조금 더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런 것까지 인지하고 있다면 못 넣을 것도 없지.”
“그쵸? 흐흐흐.”
봄은 데뷔 때부터 좀 특이했다.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외모지만 남자들이나 입는 짙은 색의 바람막이와 긴 바지를 늘 입었다. 또한 경기 중에 미소를 보인 적도 없다.
신데렐라라는 찬사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모모코처럼 화려한 색상은 아니지만 나름 멋도 부리고 특히나 오늘은 활짝 웃는 모습까지 자주 보였다.
-여하튼 표정이 밝아서 좋네요.
-네. 전통적인 일본 선수의 자세는 아니지만 확실히 요즘 젊은 선수들은 보수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난 것 같습니다. 자유분방한 감정 표현이 보기도 좋을뿐더러 경기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나 싶습니다.
-모모코는 본성이 그런 것 같지만 이즈카 하루는 늘 담담한 자세였는데, 한국 선수들의 영향을 받은 걸까요?
-뭐 그렇게까지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자신감이요? 그렇군요. 세계적인 선수들이 강하게 압박을 하는데도 밝게 웃는 모습은 참 든든하네요.
-으아아악!
대화를 나누다 말고 비명이 터진 이유는 봄의 퍼팅이 기가 막힌 라인을 따라 홀컵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퍼팅 스트로크를 했는데도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출발이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한 것보다 더 휘어진 공은 홀컵 바로 앞에서 힘이 빠지며 확 꺾였다.
그리고는 지면 아래로 쏙 사라지고 말았다.
공이 홀컵 안에서 통통 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팬들의 비명 소리가 이미 지축을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글 퍼팅이 성공하는 순간, 불끈 쥔 주먹으로 하늘을 찌른 봄은 폴짝폴짝 뛰어 필상에게 다가왔다. 이전 같으면 어색하게 피했을 필상이지만 기꺼이 포옹을 해 줬다.
“으으으! 봤죠?”
“응. 멋졌어. 근데 이 장면을 다들 보고 있지 않을까?”
“에이 진짜!”
김이 샌 봄이 확 떨어지려고 했으나 필상은 천천히 부드럽게 빼 주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족들이 보는 것은 문제될 게 없다. 모모코는 넉넉히 이해할 여유가 있고 굳건한 믿음을 가진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화끈한 포옹으로 비치게 행동한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함께 경쟁하고 있는 동반자들.
원래 봄이나 필상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만 집중하던 신 프로는 상관없지만 동갑내기 안 프로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쳐다봤다.
시기나 질투를 한 게 아니라 ‘너 어쩌려고?’였다.
‘너나 잘하세요!’
신 프로가 퍼팅하는 동안 그녀와 눈이 마주친 필상은 그렇게 말했다. 표정으로만 전했기 때문에 정확한 의사 전달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대략 알아들었을 것이다.
재차 흘겨보는 것을 보면.
하지만 그건 버디 퍼팅을 앞둔 선수에게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니다. 1.2야드 거리는 실패할 확률은 낮지만 그렇다고 모든 선수들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트로크를 가할 때, 퍼터 페이스가 살짝 닫혔다. 하지만 홀컵 좌측을 타고 한 바퀴 돈 공은 버디로 연결되고야 말았다.
“너! 너무하네!”
“뭐가?”
“일부러 나 약 올린 거지?”
“에이! 왜 이래. 선수끼리.”
“그러니까!”
“이제 1타 차야. 그리고 파 5홀이라고.”
“그게 뭐?”
“잘 보라고. 봄의 드라이브 티샷을.”
“됐거든!”
초반에는 필상의 격려에 확실하게 반응했던 그녀다.
물론 격려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최소한 긴장을 털어 버린 계기가 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젠 대놓고 도발했다. 규정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그다지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기에 그쯤에서 멈췄다.
“535야드야. 오르막을 감안하면 족히 550야드는 봐야지.”
“거리는 걱정 없는데 바람은 어때요?“
“아! 14번 홀이 이 코스의 최고 정상에 있는 거지?”
“네. 지난 3일 동안 바람이 각기 달랐어요.”
“보자…….”
필상과 봄은 14번 홀 티 박스로 이동하며 나란히 하늘을 응시했다. 이능을 사용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남다른 감각을 동원하면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람이 정말 기이했다.
앞에서는 맞바람인데 200야드를 넘으면 슬라이스로 변하고 그린 위쪽은 1시 방향으로 다시 바뀌었다. 하도 특이해 다시 한 번 살폈는데 그때는 또 달랐다.
“네가 왜 바람을 의식하는지 알겠다.”
“그쵸? 바람을 종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럼 탄도를 낮춰야지.”
“드라이브로요?”
“아니지. 3번이나 5번 우드를 잡아야지.”
“아! 그 샷이요?”
필상이 이미 여러 번 실전에서 보여 준 바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 페어웨이 우드가 아닌 유틸리티 우드를 잡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리를 내야 하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줄었다.
“요령은 알지.”
“네. 쫘악 깔아 볼게요.”
“스님이 냉면에 고명 깔듯이?”
“네?”
“아! 너무 어려웠나?”
“에이 정말! 캐디 오빠, 정신 좀 차리세요.”
“으윽! 항복!”
언제 이런 명랑 골프를 쳐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굳이 돌아보자면 여자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던 캐디 시절, 분위기를 맞추려고 실없는 소리를 일부러 던지곤 했다.
너무 빡빡하면 선수가 편하지 않다. 우스갯소리도 하며 기분을 맞춰 주느라 일부러 스코어를 오기하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는 투어 대회다.
하지만 봄이 방심하지 않는다면 이런 분위기는 경기력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다.
-와아아아! 저거 어디서 많이 본 샷이죠?
-네. 그 스승에 그 제자로군요. 사실 일본 투어에 나오지 않는 마스터를 칭찬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 실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코치로서의 재능도 훌륭하죠.
-모모코가 그랬고 지금 이즈카도 그렇고. 왜 우리 일본에는 저런 대선수가 나오지 않는 걸까요?
말을 해 놓고 보니 실언에 가까웠다. 이미 살아 있는 전설이 된 필상의 실력을 인정한 것까지는 무리수가 아니다. 그러나 일본에 적용한 것은 치명적인 잘못이다.
안 그래도 한국에서 쥐어 터져 나라꼴이 말이 아닌데, 인구가 배가 넘는데도 스포츠마저 이기는 종목이 없다.
“좋은데?”
“얼마나 나갔어요?”
“289야드.”
“에게!”
“하하하!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너 지금 3번 우드 잡았다고!”
“알아요. 그래도 300야드 정도 나갈 줄 알았는데…….”
그 대화가 유난히 거슬리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우승을 놓고 경쟁하는 두 프로들이다. 적어도 세계 여자 투어에서는 한국 낭자들이 장타 랭킹 상위권에 포진한다.
미국이나 유럽 선수들도 쟁쟁하지만 박성현을 필두로 주타누간과 같은 선수들은 다 아시아 선수들이다. 그런데 유독 랭킹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나라가 있으니, 그게 바로 일본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