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33화 (333/354)

333. 봄의 고집

-와! 지독하군요!

-하하하! 그런 표현보다는 명승부라고 불러야 합니다. 저도 적잖은 세월을 필드에서 보냈지만 한 조에서 홀인원이 2명이나 나오는 것은 처음 보거든요.

-아! 워낙 예상치 못한 홀인원이 나와서 제가 좀 흥분했나 보네요.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 한 선수가 홀인원을 하면 다른 선수들은 보통 기가 팍 죽지 않나요?

-그래서 한국 여자 프로들이 세계를 제패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저렇게 환상적인 실력을 보이거든요.

-하지만 저희에게도 모모코와 이즈카가 있으니 앞으로 기고만장한 한국을 꽉 눌러 줬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아무리 일본 국내 투어 중계라도 외국 선수들도 함께 출전한 대회다. 그렇다면 말을 좀 가려서 해야 하는데, 캐스터는 상당히 편협한 발언을 하고도 웃음으로 말을 맺었다.

해설위원도, 시청자들도 별 말이 없었다. 그런 걸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사회 전반에 걸친 한국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혐한이 날로 극성인 것은 그들의 저변에 잔존하고 있는 열등감의 표출이다. 한때 식민 지배를 했고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수만금을 벌어 갔으면서도 그들은 한국을 우습게 봤다. 민족 자체가 열등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눈부신 고도성장을 이룬 한국이 턱밑까지 추격하자 본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예상보다 훨씬 빨리 추월당하자 이제는 노골적인 반감을 표출하는 것에 익숙했던 것이다.

‘고런 심보로는 스스로 더 고립될 뿐이야!’

진즉에 필상이 그런 언급을 했다.

자신들의 독무대였던 동남아에서 한국에게 밀려 파산하는 기업이 속출하고 목을 매던 미국에게마저 팽을 당한 그들은 중국과 손을 잡으려다 세계적인 왕따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균형감과 시류를 읽지 못한 낡은 정치 세력이 투명성마저 확보하지 못했으니, 세계 2위를 고수하던 일본이 딛고 사는 불안한 열도와 함께 서서히 침몰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물론 과도한 평가다.

하지만 필상은 그들 스스로 한국과의 역사를 바로 잡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왜냐면 강자에게 유난히 약한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한반도에서 왔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아시아의 유럽인이라고 치부하던 작자들이잖아!’

얼마나 우스운 생각인가?

자신들도 아시아인인데 자신들보다 경제발전이 늦었다고 아시아 국가들을 무시하고 유럽은 동경하면서 스스로 유럽인을 자처하다니!

몽땅 걷어 내 유럽 한가운데 보내 버리면 너무 좋아하려나?

여하튼 그들의 위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만약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다면 훨씬 오래갔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더더욱 한국을 싫어하고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것이다.

그들처럼 근면하며 똑똑한 한국인들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늘 당당하게 치고 나가는 걸 보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던 자들이 겨우 뒤에서 욕이나 하는 셈이다.

아주 개떡 같은 근성이다.

“거의 한일전 분위기야!”

“그러게요!”

다른 선수였다면 상위권 순위에 대한 언급을 삼갔을 것이다. 팽팽한 승부의 순간에는 도리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봄은 그걸 봐야 투지가 끓어오르는 스타일이다.

한일전처럼 보이는 이유는 선두권에 위치한 6명 중에 한국과 일본 선수들이 똑같이 세 명씩 포진했기 때문이다.

-15 이즈카 하루

-14 안선주

-13 기쿠치 에리카, 하타오카 나사

-12 신지애, 이민영

“일본 팬들이 좋아하겠어. 간발의 차이지만 앞서서.”

“흐흐흐. 그것도 오늘로 끝인데…….”

“봄!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다는 거 잊지 마.”

“누가 뭐래요? 전 제 입으로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데?”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흐으으.”

그냥 그럴 것 같다니?

괜히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프런트 나인이 끝나 10번 홀로 이동하는 도중에 필상은 의외의 얼굴을 마주했다.

“어르신. 코스까지 웬일로 나오셨습니까?”

“딸 보러 나왔지. 우승하는 딸. 허허허.”

“아! 지난 번 도움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따 끝나고 얘기하자고. 자네랑 의논할 게 많아.”

“네. 18번 홀 그린에서 뵙겠습니다.”

“나 그린에 올라갈 준비하고 있어도 되지?”

“아빠!”

필상은 그런 말이 전혀 부담이 없지만 봄에게는 각별한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녀가 사토시 회장의 딸이라는 것은 이미 대중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본시 언론에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토시 회장은 가족들과 찍힌 사진이 한 장도 없다.

그런데 그 금기를 깨는 전격적인 행보를 선언한 것이다.

“드라이브 주세요.”

“회장님이 중대 결단을 내리신 건가?”

“캐디. 지금 경기 중이라고요!”

“캐디? 그래. 일단 우승부터 하고 보자고.”

대충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면 짐작은 가능하다. 봄이 먼저 입을 열지 않아도 사토시 회장이 밝힐 수도 있다.

하지만 평생을 일본인으로 살아온 그가 왜 이제 와서 자신의 출신을 밝힌단 말인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았다.

현재 일본은 기업체를 운영하기 최악이다. 게다가 사회 전반이 어수선하며 한국에 대한 반감이 극에 이르렀다.

모든 것을 털고 한국으로 오는 것이 그나 그의 사업을 위해서도 좋고 말년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으리라.

깡!

딴 생각에 잠겨 있던 필상은 봄의 강력한 타격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평소보다 훨씬 강한 임팩트가 들어갔다.

홀인원까지 기록하고도 경쟁자들을 따돌리지 못한 것이 답답했던 모양인데, 그렇다고 가용한 힘을 모두 동원한 샷을 날리는 것은 무모했다.

자신이 캐디로서 제 역할을 못하고 딴전만 부린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너무 의욕이 앞서 푸시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타구의 궤적이 기이했다. 딱히 드로우가 먹인 것 같지 않은데, 절묘하게 휘어 일반 구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 들어와!”

“흐흐흐…….”

아뿔싸!

OB가 나거나 깊은 숲에 들어갈 타구는 아니다.

러프에 떨어져 다소 까다로운 세컨샷을 할 정도였는데, 깜짝 놀란 필상이 안타까워 소리를 지른 게 문제였다.

갑자기 악성 훅이 걸린 것처럼 급격히 휘면서 페어웨이로 떨어졌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필상의 의념이 작용한 결과다.

엉겁결에 품은 바람이 자신의 경기 때도 범하지 않았던 샷의 결과를 바꿔 놓자 필상은 당황함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봄은 시시덕거리며 좋아했다.

“이빨까지 보일 건 없잖아.”

“오라버니가 저를 위해 이런 수고까지 해 주실 줄은 미처 몰랐네요.”

“실수야, 실수! 왜 무리한 샷은 한 건데?”

“한 번 질러 봤어요. 생각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속은 시원하던데요? 게다가 저렇게 누군가 도와주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겠어요.”

“으흐! 됐다. 됐어.”

더 말해 봐야 약만 오를 것 같아 입을 다물었지만 주변은 아주 시끄러웠다.

-대, 대체 얼마나 날아간 거죠?

-367야드입니다. 내리막을 탄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맞바람이 좀 있는데, 저도 믿기지 않아 기록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367야드면 JLPGA 공식 대회 신기록 아닌가요?

-맞습니다. 롱 드라이브 챌린지에서 400야드를 날린 여자 선수는 있지만 정식 투어 대회에서 350야드를 날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신기록이라는 말 외에 상세한 데이터를 언급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본 투어의 특성 때문이다. 전 세계 골프 대회들이 대부분 장타자들이 득세하는 추세인데, 일본은 그렇지 않다.

특유의 오밀조밀한 코스는 장타보다는 정교한 선수들이 유리하기 때문에 JLPGA에서 장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기적 같은 장타가 터졌으나 당사자와 캐디만 모를 뿐, 방송과 기자들은 난리가 났다.

“쟤들이 지금 뭐하는 거지?”

“공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것 같아요. 공이 이상하게 휜 걸 보고 누군가 지적했나 봐요.”

“여하튼 왜 난 너한테 당한 느낌이 들지?”

“모처럼 사랑하는 여동생을 위해 좋은 일 하시고 스스로 점수 깎일 말은 삼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라? 이제 아주 맞먹자는 건데?”

“오라버니. 저 홀인원 했어요.”

“헉!”

소원 하나를 들어주기로 했다.

어쩐지 그 얘기를 안 한다 했더니 결정적인 순간이 되자 여지없이 홀인원 이야기가 나왔다. 대체 무엇을 들어주어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티샷을 마치고 내려온 안 프로가 한마디 툭 던졌다.

“둘이 대체 뭘 먹는 거야?”

“무슨 소리야?”

“그러지 말고 나도 좀 가르쳐 줘. 내가 입이 좀 짧기는 하지만 저런 장타 신기록을 낼 정도라면 힘들더라도 먹어 볼게.”

“장타 신기록?”

“참 너무하네. 저 정도 거리는 언제든 칠 수 있다 이거지?”

“그게 아니고…….”

그제야 봄이 친 장타의 가치를 깨달은 필상은 더 찜찜했다. 이능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페어웨이에 들어오지 못할 타구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여자 투어의 기록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것이 경기의 승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안타까움이 얼굴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인데, 그런 태도가 봄의 신경을 건드린다는 것은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다.

“인간의 능력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해요.”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당장 159야드 남은 세컨 샷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봄이라면 충분히 붙일 수 있는 거리라고 생각했으나 이글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너무 길어 에이프런까지 굴러갔기 때문이다.

“아깝다.”

“그러니까요.”

왠지 음성에 한풍이 부는 것 같았으나 무심코 넘겼다. 하지만 11번 홀 티샷이 끝나자 필상은 알게 되었다.

인간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말했던 이유를.

봄은 350야드 파 4홀에서 1온을 노렸다. 평소 그런 무리수를 두지는 않는 이유는 장타를 때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공략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했는지 장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좋지 못했다.

-와! 정말 아깝네요. 조금만 덜 감겼다면 이번에도 파 4홀 1온이 되었을 텐데요!

-정말 대단한 파워입니다. 저 작은 체구에서 또 다시 350야드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하하하.

중계진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스스로 똑똑한 민족이라 자부하지만 작은 체격이나 부족한 힘에 관해서는 유독 자괴감을 가진 이들이 일본인이다.

장타를 날리는 선수가 거의 없다. 일본 투어의 장타자라고 해 봐야 한국만 건너와도 순위에 들지 못할 수준이다.

그러던 차에 모모코의 호쾌한 장타가 등장했고 오늘 그녀를 넘어선 봄의 무시무시한 기록이 나왔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뭐지?”

“왜요?”

“1온을 노릴 거면 나랑 상의해야지.”

“1온 노린 거 아니에요. 그냥 조금 강하게 쳤을 뿐.”

사실을 부정하는 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1온을 노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분명한 사실을 대놓고 부정하는 그녀를 혼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 남은 8개 홀에서 승부가 결정되고 필히 우승해야만 할 이유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봄을 설득해야 했다.

“신기록을 세우고도 이글이 나오지 않았어. 그리고 지금도 벙커에 빠진 공을 치느니 차라리 100야드 웨지 샷이 핀에 붙이기 더 쉽잖아.”

“전 아니에요.”

말을 했으면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벙커에 빠진 공을 퍼 올리기는 했지만 버디를 잡지 못했다. 너무 길었고 라이도 좋지 못해 파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버디를 잡아낸 안 프로에게 공동 선두를 허용했다는 점이다. 앞 조에서 선전하는 기쿠치 에리카도 1타 차로 따라붙었다.

지금은 장타에 대한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닌 것이다.

다행히 12번 홀은 파 3홀이다. 드라이브 장타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하필이면 이 홀이 나루사와 코스의 파 3홀 중에서는 가장 난해한 홀이라는 게 찜찜했다.

심란한 상황에서 182야드의 긴 파 3홀이 달가울 리 없다.

“5번 아이언 주세요.”

“봄아. 집중해.”

사실은 오늘 결과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녀가 들고 나온 국산 클럽 ‘퍼펙트’가 첫 선을 보이는 자리고 사토시 회장이 직접 나와 딸의 경기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그녀의 어깨를 굳게 만들 것 같아 꾹 참고 격려했다. 필상의 어색한 미소를 마주한 봄도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페어웨이의 언듈레이션이 심하고 그린 좌측의 가드 벙커는 그린이 한층 높게 조성되어 더욱 깊어 보인다. 그래서 선수들은 의식적으로 우측을 공략하는데, 봄의 샷은 과감했다.

-어? 저게 왜 곧장 튀지 않고!

-조금, 아주 조금 짧았습니다. 딱 1야드만 더 나갔어도 핀에 붙을 좋은 타구였는데 너무 아깝습니다.

봄은 핀을 바로 공략했다.

최근 스트레이트 구질을 가다듬었기 때문에 필상도 좋은 샷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린 앞 벙커 턱 상단에 맞은 공이 기이하게 튀어 좌측 벙커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벙커에 들어가면 아예 깃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 미리 방향을 체크해야 할 정도로 나쁜 결과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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