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32화 (332/354)

332. 핀빨

“어머! 공 프로님!”

풍성한 감정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

봄과 한 조에 편성된 2명의 경쟁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미 잘 알고 지냈던 선수라는 사실에 반가웠다.

“아! 안 프로!”

“맞아! 우리 친구하기로 했었죠.”

“친구끼리 존칭은 좀 그런데?”

“호호호. 워낙 유명하신 분이 돼서 그러지. 축하해 주려면 언제나 볼 수 있으려나 했는데, 여기서 만나네?”

안선주 프로였다.

87년생으로 동갑인 그녀와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말이 필요 없는 일본 여자 투어의 최강자 중에 한 명이다. 그런 안 프로와 경쟁한다는 생각을 하자 오늘 하루가 편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산 너머 산이었다.

“어머! 공 프로님!”

“뭐야? 공동 2위중에 다른 한 명은 신 프로였어?”

“이 반응은 뭐죠? 너무하시는 아닌가요?”

“아! 그게 아니고 오늘 우리 봄이 무척 고생할 것 같아서. 경쟁자들이 웬만해야지!”

다른 한 명은 신지애 프로였다.

두 명 모두 실력이나 커리어, 봄을 한참 앞서는 선수들이다. 게다가 이젠 여유 넘치는 경기 운영 능력까지 보유했으니 수심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두 여자 프로의 수다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말을 섞지 않고 외면하자니 서운해할 것 같고 그대로 말을 다 받아 주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았다.

그 대목에서 필상을 구한 사람은 의외로 봄이었다.

“언니들 모시고 경기하게 돼서 기뻐요.”

“어허! 한국말을 잘한다고는 들었는데, 정말 감쪽같네?”

“그래. 완전 한국사람 같아.”

“당연하죠. 저도 한국인의 피를 물려받았는데요.”

그건 아직 금기였다.

필상은 봄이 JLPGA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뒤에야 출신을 밝히라고 가르쳤고 봄도 그에 동의했다.

아무래도 사토시 회장과도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한 결정이다. 그런데 갑자기 터트린 것이다.

물론 동료들과 나눈 얘기가 다 드러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능숙한 한국어로 두 언니를 요리하는 봄의 태도는 그 누가 21살이라 할 수 있을까?

“정말이야? 공 프로?”

“쟤가 거짓말은 안 해.”

“어머! 어머! 일본 여자 골프계의 신데렐라가 결국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거잖아!”

“언니. 사실 오라버니랑 이 문제는 당분간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까 좀 봐주세요.”

“그야 어렵지 않지. 근데 정말 신기하지 않아? 신 프로.”

“네. 하지만 국적은 일본이니까 커밍아웃을 해도 달라질 것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런가?”

경기 외적인 면에서는 순진한 안 프로와 달리 신 프로는 다분히 상대를 의시하는 발언을 첨가했다.

워낙 한국 선수들이 많고 열띤 경쟁을 벌이는 투어이기 때문에 굳이 한국 선수라고 특별한 감정을 지닐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봄이 한국인이라도 그게 경쟁심을 떨어뜨릴 요인은 될 수 없다는 말에 분위기가 다소 썰렁해졌지만 필상도 그런 변화가 싫지는 않았다.

친분은 친분이고 경기는 경기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파이팅을 하자는 말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그 말이 끝나자 세 여인 사이에는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이즈카! 이즈카!”

봄이 아너로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자 팬들의 환호성이 하늘에 닿을 듯 드높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출신을 밝히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일본 골프팬들의 입장에서는 모모코의 갑작스러운 부재가 워낙 컸고 그 자리를 대신 메워 줄 걸출한 스타의 탄생은 아주 시기적절했다.

최근에는 보이시한 패션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누구처럼 원색의 핫팬츠를 입지는 않지만 자신의 장점인 늘씬한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었고 전체적인 색상 밸런스도 훌륭했다.

스스로 밝히길 골프가 좋아지면서 팬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하다고 말했는데 팬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 듯.

쉬익!

얼마나 임팩트가 좋았는지 타격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쌩하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청명하게 들렸다.

여자 선수들에게서는 좀처럼 그런 소리가 나지 않지만 역시 봄의 스윙 스피드는 탁월했다. 완벽한 체중 이동의 결과다.

-나이스 샷!

-타구의 탄도가 너무 높은데요?

-대신 힘이 있잖습니까! 핀 하이로 날아가는 걸 보니 버디 기회를 잡을 것 같습니다.

실제 필상도 해설자의 의견과 다르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높이 띄우지 않아도 핸디캡 16번이 말해 주듯이 핀에 잘 붙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높이 떠오른 타구가 공중에서 한 번 더 솟구치는 느낌을 받았다. 경이로운 장타를 구사하는 선수들의 타구에서나 봄직한 힘찬 비상에 필상은 타구도 확인하지 않고 다가오는 봄에게 미소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젠 아주 제대로 힘을 싣네?”

“네. 요즘 탄도에 따른 궤적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에 재미를 붙였거든요.”

“그래도 쉬운 길을 놔두고 왜?”

말을 다 맺지 못했다. 왜냐면 하강하는 공이 정확히 홀컵에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퍽!

아쉽게도 공은 깃발에 맞고 홀컵 앞 1.5야드 지점에 섰다.

만약 깃발에 맞지 않았더라면 조금 길었을 것이고 봄이 원했던 백스핀이 걸리면서 더 붙거나 홀컵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쉬운 길을 운운한 것이 쑥스러울 수밖에.

“깃발에 맞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해 봤어요.”

“그러니까! 잘하면 홀인원도 가능했는데, 아깝다!”

“홀인원은 7번 홀에서 해야죠. 어마어마하게 좋은 차가 걸렸던데.”

“그래?”

일단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1타 차 선두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선두가 먼저 치고 나가면 오히려 추격하는 선수들이 스스로 무너질 가능성이 높기에 필상은 하이파이브까지 나누며 격려했다.

하지만 경쟁자들의 샷도 무시무시했다.

비록 봄처럼 가깝게 붙이지는 못했지만 얼마든지 버디를 노릴 수 있는 거리에 떨어뜨린 것이다.

아쉽다고 말하기에는 좀 애매하지만 4야드 퍼팅을 구겨 넣은 신 프로와는 달리 더 가까운 3야드 퍼팅을 놓친 안 프로는 머리를 긁적이며 경쟁자들의 버디를 지켜봐야만 했다.

“친구! 파이팅!”

“그래.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혼자 버디를 놓친 것이 안타까워 파이팅을 불러 줬는데, 그 이후 안 프로는 신들린 듯 기가 막힌 샷으로 3개 홀 연속 버디를 잡아내며 졸지에 1타만 더 줄인 봄과 동타가 되었다.

-12 이즈카 하루, 안선주

-11 기쿠치 에리카, 하타오카 나사

-10 신지애, 시부노 히나코, 이민영

앞에서 플레이를 했던 선수들이 타수를 줄여 리더 보드 상단에 자리한 걸 보면 오늘 선두권은 지키려고 했다가는 경쟁에서 멀어질 처지였다.

-모처럼 우리 선수들이 선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네요.

-네. 한국 선수들의 선전이 대단하지만 일본 골프의 저력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더욱이 마스터가 돕고 있는 이즈카의 경우, 미스 퍼펙트라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올해 모모코가 세웠던 다승 기록을 갱신하고 내년에는 더 큰 무대인 LPGA에 진출하면 어떨까 싶어요.

-물론 가능합니다. 기량이나 배포, 그 어느 하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마스터가 그랬듯 이즈카도 그랜드슬램과 같은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 겁니다.

-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네요. 뭐든 한국에게 따라잡히고 있는 상황이라서 국민들이 더더욱 기뻐할 것 같습니다.

국수주의에 푹 찌든 발언만 해 대고 있었다.

하기야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한국과의 무역 마찰을 일으킨 뒤, 오히려 한국에게 추월당하는 실상이 현실화되면서 일본인들은 이미 자조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특히나 여자 골프는 점령이라도 당한 것처럼 폭삭 망한 모드였는데, 모모코가 등장하면서 일본인의 긍지를 겨우 살렸다.

하지만 한국 남자와 결혼하면서 아예 한국으로 넘어가 살면서 KLPGA에서 활약하고 그런 생활에 아주 만족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런데 그녀에 못지않은 대스타가 탄생했으니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인들은 봄에게 모든 희망을 얹고 있는 신세였다.

“하타오카가 따라왔네요?”

“남의 스코어는 왜 의식해? 그냥 내 경기만 하면 돼.”

“재미있잖아요. 전 치열하게 싸우는 게 좋더라고요.”

“제대로 싸우기나 하든지!”

“치! 무슨 캐디가 선수의 기를 죽이고 그래요. 저한테도 파이팅 좀 외쳐 주세요.”

“됐고. 이번 샷에나 집중해.”

필상이 보기에도 봄은 최선을 다했다.

1, 3, 5번 홀에서 징검다리 버디를 낚았다면 절대 좋지 못한 경기력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경쟁자들이 훨훨 날고 있다는 점이었다.

“드디어 왔네요!”

“뭐? 아까 말한 홀인원?”

“네. 저기 묵직한 차 보이죠?”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크면 안 되는 거 몰라?”

“그럼 내기 해요.”

“무슨 내기?”

“만약 제가 홀인원을 하면 소원 하나 들어주세요.”

“소원?”

“그 대신 홀인원 못하면 오라버니가 시키는 것은 무조건 할 게요.”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전혀!”

좀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기본 전제는 이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고 아무리 정확한 샷을 해도 홀인원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필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봄은 자신의 말을 다 듣는다. 때문에 딱히 바라는 것이 없지만 받아들인 이유는 그런 목적의식이 더 나은 결과를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 기인했다.

거리는 175야드, 3m 높이의 둔덕 위에 자리한 그린은 짧거나 길게 치면 온 그린도 어렵다. 앞뒤로 벙커가 자리했고 우측으로 밀리면 다운 힐 라이에서 칩샷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7번 아이언을 들고 티잉 그라운드로 향하는 봄은 한마디 더 보탰다.

“저 차는 특별 보너스로 드릴게요.”

“으이그!”

한심하다는 신음을 흘렸지만 필상의 눈빛에는 힘이 들어갔다. 뭔가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도 어렸다.

물론 장담한 홀인원은 그저 핑계일 수도 있다. 스스로 좋은 샷을 날리기 위한 자기 최면, 그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샷 루틴을 밟고 있는 봄의 진지한 태도에는 결연한 의지가 역력했다. 반드시 넣겠다는.

‘저놈이 이 홀에서 집중 연습한 거는 아니겠지?’

뭔가 의구심이 들었다.

진즉에 봄은 필상이 오늘 이곳에 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캐디를 해 줄 수 있고 누구나 꿈이라고 생각할 홀인원을 기점으로 뭔가 기획을 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쉭!

평소보다 강한 임팩트가 이뤄졌다.

그런데 타구의 궤적은 왼쪽으로 출발했다. 드로우 샷을 즐기는 봄으로서는 미스 샷이 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높이 치솟은 타구는 서서히 우측으로 휘었다.

슬라이스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확신이 들었다.

‘이 녀석! 단단히 벼렸군!’

하지만 느긋했다.

아무리 연습을 하고 모든 상황을 살폈어도 홀인원은 인간의 의지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실패했을 때 받을 실망감까지 고려하면 차라리 들어가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와! 완전히 핀빨인데요?

-하하하! 거의 홀인원에 가깝게 날아가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최소한 보디는…….

야마다 해설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핀 3야드 앞에 떨어진 공이 크게 튀면서 홀컵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 환상적인 샷을 지켜보고 있는 팬들은 난리가 났다.

‘인 더 홀!’을 외치는 갤러리들의 비명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공을 바라보고 있던 필상의 등에는 소름이 돋았다.

홀컵 바로 앞에 떨어진 공이 또르르 굴러 홀컵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홀인원이다! 홀인원!”

어이가 없었다.

분명 봄은 이능을 사용하지 않았다.

홀인원을 장담한 걸 보면 거리와 방향을 모두 계산한 대로 맞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게 된단 말인가?

캐디라면 당연히 기뻐해야 하지만 필상은 어안이 벙벙해 그냥 서 있었다.

“뭐에요? 축하 안 해 줘요?”

“아! 정말 집어넣은 거야?”

“봤잖아요.”

“그래.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약속한 거 잊지 마세요.”

“으으으! 알았어.”

동반자들도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경쟁 중이지만 상대의 행운마저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지라 기꺼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격려했다.

그런데 영 찜찜한 표정은 감추지 못했다.

필상과 뭔가 쑥떡거리는 걸 들었는데, 홀인원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났었다. 그리고는 투어 프로라도 평생 몇 번 나오지 않는 기적의 샷을 만들어 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안 프로도 지지 않고 버디 기회를 만든 와중에 1타 차로 추격한 신 프로의 공이 다시 홀컵에 쑥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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