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퍼펙트
“시몬이 여론을 등에 업고 제대로 치고 나갈 거야!”
“그래야지요. 제가 조만간 불에 기름을 끼얹을 겁니다.”
“어떻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세한 것은 굳이 알려고 하지 마시고, 골프 필드 인수 건은 어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아! 그거?”
국산 클럽을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는 그동안 더 강해졌다.
한국은 IT를 필두로 한 첨단 기술력뿐만 아니라 조선과 철강, 심지어 무기 수출 분야에서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신소재를 다루는 기술 또한 일본에 뒤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골프용품에 대한 한국 골퍼들의 의식은 굉장히 보수적이며 심지어 사대적이기까지 하다.
“봄이 다음 주에 참가하는 JLPGA 대회부터 우리 새로운 메이커를 들고 나가도록 해 보시죠?”
“모모코가 아니라 봄?”
“네. 적진의 한가운데서 한국 클럽으로 우승하면 효과가 더 클 겁니다. 구태여 광고할 필요도 없고요.”
“우승하면 자연스럽게 알려질 거라는 거지?”
“네. 그러니까 일단 메이커 로고와 클럽 디자인부터 예쁘게 뽑아 보시죠.”
“그건 이미 준비해 뒀으니까 문제없지만 봄이 동의할까?”
“이미 언질을 했고 본인도 동의했습니다. 다만 기존 계약보다 2배의 대우를 해 준다고 약속했으니까 기왕이면 아주 길게 묶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즌 도중에 클럽을 교체하는 것은 금물이다.
하지만 봄이라면 적응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이 대표는 여전히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일본 용품 메이커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굳건한지 그녀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필히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 장면이었다.
“너무 서두르는 거 아냐?”
“대다수의 골퍼들이 장비를 중시하지만 어떤 클럽을 쓰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주 성능이 떨어진다면 모를까 국산 클럽은 그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입니다. 게다가 아쉬운 부분은 이미 채우고 있으니까요.”
기술력이 곧 정보력과 밀접한 시대다.
투자 여력이 부족하고 몰라서 못할 뿐, 방법만 안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이 있기에 필상이 직접 확인한 것, 사토시 회장이 보내온 자료를 통해 약간의 수정을 거쳤다.
그 결과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명품이라 자부하는 클럽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수요자의 구매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더하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단 보기 좋은 클럽이 손에 잘 맞기까지 한다면 가성비가 좋은 클럽을 쓰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이키와의 아이언 사용 계약도 해지 절차에 들어가세요.”
“올해는 지나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일단 한국 오픈에 우리 ‘퍼펙트’를 들고 나갈 겁니다. 그에 대한 양해를 받든지요.”
“퍼펙트?”
“네. 클럽 이름을 뭐로 할까 고심해 봤는데 그게 나름 심플하면서 귀에 박히는 것 같아서요.”
“아주 좋아! 공 프로 닉네임과 연결되기도 하고 모든 골퍼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테니까!”
“봄이랑 모모코에게 시타에 참가하라고 해 주세요.”
“공 프로는 참가하지 않고?”
“전 바람을 쐬러 가야 해서요.”
모든 상황이 원활하게 돌아가지만 상대는 권력의 화신이다.
정재계 인맥도 탄탄하고 필요하면 언제든 거액을 뿌릴 수 있는 재력도 넘쳐 나며 법이나 인륜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세력이다.
방심하면 다 된 밥에도 재를 뿌릴 수 있다고 판단한 필상은 놈들의 심장에 날릴 크로스 펀치가 필요했다. 그 핵심은 서로 믿지 못하는 세력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로 향할 계획을 면밀하게 준비했고 귀국한 뒤에 모든 일정을 거부하고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감쪽같은 역용 기술로 인해, 전자 장비로는 신분을 위장한 필상의 발길을 막을 수 없었다.
“더도 말고 딱 두 놈만 처리하자!”
놈들은 국적을 허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유럽은 하나의 경제권이 되었고 국경이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있는 곳에 세력이 모였고 그 세력은 국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세력이 충돌해 서로 제 살을 깎아 먹는 것을 확인한 필상은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러시아를 건드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미 더글라스의 자료를 통해 러시아에 기반을 둔 세력의 규모와 조직, 근거지까지 파악한 필상은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었고 두 놈을 바보로 만들었다.
“역시 경험은 무서운 거야!”
처음 더글라스를 잡을 때는 여러 부담이 컸다.
하지만 놈들의 추악한 실체를 알면 알수록 이들에 대한 분노는 성장했고 두 핵심 인물을 아작 내는 데 거침이 없었다.
최근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상당한 경계를 하고 있음에도 놈들의 저택에 잠입해 너무도 쉽게 하룻밤 사이에 두 놈의 지능을 어린아이로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놈들의 뇌리에 원한의 대상을 확고하게 심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추가한 것이 있는데, 그건 널리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행위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알렉산드르 로마노프. 전 세계 어린이 기아 해결을 위해 10억 유로 기부하다.]
[피터 더글라스가 시작한 인류의 상생과 번영! 악독한 기업인으로 이름이 높던 자들의 감동을 일으킨 것인가?]
그 시작은 더글라스였다.
심각하게 다쳐 생명이 위독하다고 진단받은 그가 병원에서 대수술을 받기 위해 대기하던 차에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변호사까지 대동한 채로 기자들을 불러 모은 그가 재산의 99%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기자들은 어리둥절했다.
더글라스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수술실로 이동한 뒤에 변호사가 밝힌 재산 내역을 듣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10억 유로?”
오묘하게도 두 사람이 기부한 금액이 똑같았다.
과거 가진 자의 사회 기부를 외쳤던 수많은 선각자들이 있었으나 실제 일시불로 기부한 금액은 이에 한참 못 미친다.
또한 기부를 통해 각종 세재 혜택을 받기 때문에 기업의 사회적 기부는 본인에게 경제적 손실을 보전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더글라스나 로마노프는 순전한 기부였다.
내막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두 명 모두 생명이 위태롭다는 말에 쾌유를 비는 찬사가 줄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바람직한 사회현상이 붐을 일으키게 된 점도 예기치 않았던 긍정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었다.
“대차게 머리 깨져라 붙어야 하는데!”
가진 자들일수록 지는 것을 싫어한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거나 당한다고 생각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그렇게 악착같기 때문에 남을 누르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필상은 놈들의 뇌리에 절제할 수 없는 원한의 씨를 심었다. 절대 당하고 그만둘 수 없는 놈들의 근본적인 욕망에 불을 붙인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밤, 이미 사건은 벌어졌다.
런던과 파리에 은밀하게 파견된 무장 괴한들이 반사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세력의 심장부를 곧바로 타격한 것이다.
“국가 간 분쟁으로 번지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필상이 염려하는 부분은 바로 그거였다.
유럽 연합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다양한 요인이 존재한다. 당장은 거대한 경제 블록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하나로 묶였으나 오랜 역사가 말해 주듯이 서로 먹고 먹힌 과거가 존재한다.
언제나 강자와 약자는 존재해 왔고 강자는 약자의 삶을 배려하지 않았다. 공평한 듯 보이지만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가 어울려 누가 득을 보겠는가!
국가를 움직이는 집단이 소수의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들 중에 상당수가 이번 사건과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필상도 그 점이 우려스러웠다.
“힘의 논리대로 결론이 날 거야.”
“중요한 것은 그 와중에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로펌은 다행히 그 점까지 고려해 다각도로 준비를 한다고 해.”
“이참에 스포츠 도박이 근절될 수는 있을까요?”
“적어도 잔뜩 위축되기는 하겠지. 그나저나 아무 일 없는 거지?”
“저야 거뜬하죠. 하하하!”
이 대표는 필상이 무엇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
사람을 해하는 행위가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알기에 심리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았는지 그걸 염려한 것이다.
“이제 그 문제는 떠나보내자고.”
“그래야지요. 제가 할 일은 그게 아니니까요.”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손에 피를 묻힐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용을 써도 놈들이 사라질 리는 없다.
법을 바꾸면 그 법의 빈틈을 파고들어 또 다른 형태의 악을 추구하고도 남을 놈들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파죽지세로 번져 가고 있는 스포츠 도박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전 세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프리미어 구단의 절반 가까이 그들의 광고가 적힌 유니폼을 입고 뛰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 *
“내일 새벽에 일본에 좀 다녀오려고.”
“아! 봄이 어제 3라운드에서 마침내 단독 선두로 나섰죠?”
“응. 무난하게 우승하면 우리 클럽 홍보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타이밍이잖아.”
“치! 저도 다음 중에 퍼펙트 들고 대회에 나갈 거라고요.”
“괜찮겠어?”
“그럼요. 봄이 하는데 제가 왜 못 하겠어요.”
“그렇기는 하지. 근데 나도 다음 주 한국 오픈 때 새 클럽을 선보일 건데?”
“그럼 잘됐네요. 우리 부부가 나란히 우승하고 퍼펙트를 홍보하는 거, 아주 멋질 것 같아요.”
모모코와 봄은 새롭게 시작한 클럽 제조 회사, 퍼펙트의 지분을 30%씩 나눠서 보유한 일대 주주들이다.
때문에 스스로 앞장서서 홍보하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에 필상이 힘을 보태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이후 필상은 PGA 투어대회를 포함, 3주간 일체 대회에 나서지 않던 상황인지라 팬들의 관심은 컸다.
하지만 공항 인터뷰도 사양한 필상은 곧바로 코스로 이동했고 최종 라운드에 임하는 봄의 연습을 도왔다.
연습장 뒤에 몰려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계속 터지는 바람에 영 신경이 쓰였으나 개의치 않고 집중했다.
“공이 자꾸 당겨지지?”
“네. 확실하게 밀어 치는데도 의도한 것보다 더 감겨요.”
“스윙 궤적이 너무 인 투 아웃이라서 그래. 너무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말고 그냥 스트레이트 구질로 쳐.”
“저도 그러고 싶어요.”
“자! 내 스윙을 봐.”
필상은 말이 필요 없이 직접 보여 줬다.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지켜본 봄도 그 차이를 금방 깨달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근육의 움직임까지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신의 문제점을 고쳐 일자로 쭉쭉 뻗어 나가는 구질을 만들어 냈다. 처음부터 익숙하지 않다면 모를까, 시즌이 길어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뀐 자세가 교정된 것이다.
“오늘 온 김에 제 백을 매시는 건 어때요?”
“수당만 확실하게 챙겨 준다면.”
“치!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원래 잘 아는 사람일수록 계산은 더 정확해야 하는 거야.”
“알았어요. 10%.”
“오케이.”
하루 캐디를 봐주고 10%나 먹는 것은 과하다.
하지만 봄으로서는 우승을 위한 보험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 또한 이능을 발휘하면 우승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필상처럼 봄도 경기 중에는 이능을 자제하고 본신의 능력만으로 경쟁하기 때문에 겨우 1타 차 선두에 불과했다.
-드디어 단독 선두 이즈카가 1번 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캐디백을 맨 사람이 남자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마스터가 오늘 자신의 애제자인 이즈카의 일일 캐디로 나선 모양입니다.
-우후! 갑자기 팬들이 확 몰리겠는데요?
-안 그래도 이즈카의 열성팬들이 많이 몰려 왔는데, 미스터 퍼펙트가 캐디로 나선 걸 알면 다른 조는 너무 썰렁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
-JGTO에는 참가하지 않은 마스터가 여자 대회에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필상이 화면에 비치자 처음에는 반색하던 일본 중계진은 1분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특유의 비아냥거림을 시작했다.
해설위원은 말을 아꼈지만 캐스터는 필상이 일본을 무시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고 실시간 댓글도 그에 동조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뼈를 때리는 댓글이 하나 달렸다.
-이렇게라도 우리나라 필드에서 그를 볼 수 있는 것을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해! 살아 있는 골프 전설을 험담하는 유우키, 과연 당신이 골프 중계를 맡을 자격이 있을까?
-위대한 골퍼, 미스터 퍼펙트를 존중하자! 그를 무시하는 일본 팬들의 무지함을 세계 골프팬들이 안다면 우릴 얼마나 비웃을 지를 생각해봐.
일본 투어 시드는 필상이 프로로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프로의 거친 경쟁을 어떻게 뚫어야 하는지 배운 곳도 이곳 일본의 골프 코스다.
장타보다는 정확한 샷을 더 좋아하는 필상은 솔직히 일본 골프 코스에 오면 가슴이 설렌다. 양탄자처럼 잘 관리된 푹신푹신한 페어웨이를 밟을 때는 천국을 거니는 기분을 느낀다.
오직 골퍼로서 경기 외적인 부분을 배제하면 한국과 가깝고 마음에 드는 이 코스에서 경기하는 것이 싫을 이유가 없다.
때문에 봄과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즐거운 하루를 보낼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피었다.
“1번 홀이 파 3야?”
“네. 161야드네요.”
“8번이면 충분하지?”
“멋지게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먼저 도착한 필상은 첫 홀부터 파 3로 시작하는 이색적인 나루사와 골프클럽의 아름다움에 한껏 매료가 되었다.
멀리 눈 덮인 후지산이 바라다 보이는 야마나시 현의 울창한 녹림에 조성된 코스는 수많은 인파가 모였음에도 자연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