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양수겸장
“으아아악!”
놈이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초특급 호텔은 이럴 때도 아주 좋았다. 엄청난 성량으로 소리를 질러 댔지만 밖에는 전혀 흘러 나가지 않을 테니까.
온몸의 핏줄이 꼬이고 근육이 뒤틀리더니 급기야 뼈가 어긋나는데도 정신을 놓지 않는 자신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결국 구슬픈 항복의 메시지가 허겁지겁 터졌다.
“사, 살려 주십시오!”
“…….”
부탁을 넘어 아예 애원했지만 필상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봄이 앉아 있는 소파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필상이 공격을 풀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자 더 비굴해졌다.
“시키는 것은 뭐든 다 하겠습니다!”
같잖은 건방을 떨던 더글라스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런데도 놈을 방치했다. 자신과는 하등 연관이 없다는 듯.
5분여를 더 내버려 두자 놈에게서 더는 음성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핏줄이 터진 피부는 검붉게 물들었고 뒤틀린 근육과 뼈로 인해 몸이 기형적으로 틀어졌다.
게다가 입안에 피를 머금은 거품까지 가득 차면서 말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게 왜 개기셨어요! 쯧쯧쯧…….”
평소 대범한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냈던 봄도 슬금슬금 필상의 눈치를 보며 혀를 찼다. 자신도 처절한 응징을 행한 적이 있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한술 떠 떴다.
“저런 놈은 그냥 죽는 게 나아.”
“그럴 것 같기는 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았을까요?”
“아마 가족들도 놈이 죽으면 좋아할 걸?”
“흐흐흐……. 몽땅 챙길 수 있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넉넉한 자들의 삶이 여유로울 거라고 생각들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돈 앞에서는 신의와 명예 따위는 실종되고 부모 형제도 무시하는 패륜이 다반사다.
자신들의 부가 모든 가치를 앞선다고 믿고 행동하며 그것이 통용되는 사회를 살면서 아무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놈은 우리에게 이용가치가 있지 않나요?”
“이용가치? 필요 없어. 내가 원할 때 순순히 응했어야지. 제 주제도 모르는 놈은 그냥 저렇게 죽는 게 나아.”
“불쌍해 보이지만 좋은 일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앞으로는 저놈에게 억울하게 당할 사람은 사라질 테니까. 근데 저대로 두면 금방 죽지 않을까요?”
“절대 쉽게 죽일 수는 없지. 감히 나와 내 가족을 건드려?”
죽음의 문턱을 드나드는 와중에도 더글라스는 둘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생사가 결렸으니까.
하지만 귀에 박히는 한 단어가 있었다.
나와 내 가족을 건드렸다는!
분명 타깃이 되었던 미스터 퍼펙트는 아니다. 하지만 분노에 찬 그 말이 당장 자신에게는 죽음의 칼이 되고 있음은 확실하게 인지하고도 남았다.
제발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외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이런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극한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고 영원할 것처럼 길어졌다. 꿈처럼 찾아온 죽음의 신은 자신의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본인도 악랄한 삶을 살았지만 그 어떤 짓도 이와는 견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인 더글라스는 어서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저의 목숨을 그냥 거두어 주소서!’
“미친놈! 너 같은 놈은 신을 찾을 자격도 없어!”
진심인지 모호한 그 소망마저 들키고 말자 놈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상대는 정말 인간이 아닌 신이 보낸 사자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의 애원은 더 간절해졌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뭐든 따를 것이냐?”
‘네!’
음성을 뱉지도 않았으나 모두 알아들은 필상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거짓말처럼 끔찍했던 고통이 멈췄다.
물론 평소라면 무조건 구급차를 부를 만큼의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그 정도는 반창고만 붙이면 될 것 같았다.
“이 일을 주도한 자들에 대한 증거부터 내놔.”
‘그, 그것이……. 아아악!’
뭐든 하겠다고 말했던 놈이 불리한 상황이 닥치자 말을 더듬었다. 본능적인 행위였으나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그저 잠시 머뭇거린 대가가 너무 컸다.
자신의 오른팔이 몸에 떨어져 바닥을 뒹구는 장면을 직접 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금방 잡은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다 구석에 처박히는 화면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사지가 분리되는 극통과 함께 입안에 뜨거운 액체가 고였다. 시큼한 그것은 자신의 내장이 섞인 핏덩어리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다리가 사람이라면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휘면서 으드득 부러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멈춰!”
“모자란 새끼!”
너무도 다급한 더글라스는 명령하듯 소리쳤다.
찰나의 고통이라도 줄이고 싶었을 뿐이지만 진한 욕설을 한 마디 쏟아 낸 필상은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긴장하고 있던 봄은 필상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화들짝 놀라 물었다.
“어디 가세요?”
“와인이 어디 있을 텐데?”
이 와중에 와인을 찾다니!
잔인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봄의 감정은 서서히 바뀌었다. 그녀가 아는 필상은 천하를 덮을 이능을 지녔지만 그걸 함부로 사용할 사람이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외치지만 인간의 도리를 망각할 사람은 아니다. 대의를 위해 독한 행동을 보이지만 결코 마음이 편치는 않다는 것을 느꼈다.
와인을 가지러 가서 독한 위스키를 들고 들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필상은 절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으드드득!
연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뒤틀리는데도 더글라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팔이 잘리고 서커스 단원처럼 전신이 기형적인 형체로 꼬이면서 혀가 마비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극한의 고통은 오히려 감각을 잃게 만든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팔이 잘리는 것보다 더 강한 고통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리고도 점점 더 고조되는 고통에 이젠 정말 깨끗이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긴다고 해도 이젠 평생 스스로 움직이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죽여 줄까?”
‘…….’
방금 전까지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던 더글라스가 움찔거리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생에 대한 의지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객실 바에서 가져온 위스키를 천천히 음미하며 차가운 시선을 던지던 필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리는 것을 본 더글라스는 더 이상의 반항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신은 지금이라도 살고 싶었고 그 어떤 형태로든 이 자리가 최대한 빨리 끝나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마저 상대가 읽고 있다는 확신이 선 놈은 대화 재개를 강한 의지를 보냈고 필상은 이에 응답했다.
“네놈 재산이 얼마나 되지.”
‘10억 유로가 조금 넘습니다.’
필상의 질문이 떨어진 순간, 다시 몸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까와는 달리 잔잔한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음을 확인한 더글라스는 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상대는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니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놈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이도 있지만 무려 1조 30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지녔다는 말에 필상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걸 버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혈을 짜냈을지 그걸 생각하니 화를 억누르기 어려웠다. 다만 그 거액이 사회에 환원된다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일 뿐이었다.
“정확히 99%를 사회에 환원해.”
“그러겠습니다.”
필상은 곧바로 대답하는 놈의 눈을 한참 들여다봤다.
진심을 확인하는 것 같아 몸을 부르르 떠는 놈에게 따르지 않으면 더 강렬한 보복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이미 호되게 당했던 놈은 얼른 호응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증거를 내 놔.”
“객실 금고 안에 제 태블릿이 있습니다. 비밀번호는…….”
놈이 급기야 다 포기했다.
본시 악한 놈들일수록 도망칠 구멍을 깊이 판다. 놈은 이번 일을 주도하면서 관련 증거를 모두 수집해 놨던 것이다.
금고를 연 봄이 자료의 신빙성을 확인했고 필상에게 맞다는 의사를 전달하자 필상은 마침내 일어났다.
하지만 그냥 나가지 않고 더글라스에게로 다가갔다. 공포에 질린 놈은 필상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자 얼른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헛된 바람일 뿐 자신의 몸이 오히려 상대에게 빨리듯 쏠리는 순간, 생이 끝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이 끊어지며 축 늘어진 놈의 머리에 손을 올린 필상은 기도라도 하듯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까 뭐라고 한 거예요?”
“언제?”
호텔을 무사히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봄은 참기 힘든 궁금증을 풀기 위해 차에 오르자마자 그 내용을 캐물었다.
“기절한 놈의 머리에 손을 얹고 뭐라고 중얼거리셨잖아요. 제 청각이 나쁘지도 않은데 왜 들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놈의 기억을 다 지웠어.”
“기억을 지워요? 백치처럼?”
“응. 일흔의 나이에 몸도 가누지 못하고 어린아이 같은 지능만 남는다면 놈에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재산을 환원할 지능은 남겨 뒀어야 하지 않나요?”
“그건 아예 못을 박았지. 아마 치료 중에도 그걸 가장 먼저 처리하게 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지옥을 다시 봐야 될 거라고 각인시켰으니까.”
뭔가 엉성한 것 같지만 필상의 구상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대의 기억을 지우는 것은 자신도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하는 주문을 상대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것은 아무리 자신이라도 버거울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이라면 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뿌옇게 밝아 오는 여명을 보며 숙소로 돌아온 필상과 봄은 일단 충분한 수면을 취한 뒤, 때늦은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그 자리에는 시몬이 함께 있었고 건네준 자료를 차분하게 분석하던 그의 표정은 놀라움을 넘어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결국 마수의 정체를 확인하게 되었으나 그가 맡은 싸움은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해볼 만합니까?”
“네. 하지만 만반의 대비가 필요합니다. 더글라스가 당한 걸 알아채면 놈들도 그 즉시 방어를 개시할 테니까요.”
“너무 걱정 말고 당당하게 하십시오.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제가 하나하나 걷어 놓을 테니까!”
그때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날 이후 간간이 들려오는 기이한 소문은 시몬으로 하여금 이 일을 처리하는 데 큰 자신감을 얻게 했다.
왜냐면 검은 커넥션이 붕괴되는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이탈리아를 대표적인 스포츠 베팅업체의 대표가 돌연 정신이상자가 된 사건이었는데, 그게 세력다툼으로 번졌고 벌건 대낮에 시가지에서 총격전으로 발전했다.
[믿기 힘든 끔찍한 현실! 마피아도 이렇지는 않았다]
[유럽 각국 불법 도박과의 전쟁 선포!]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천문학적인 돈, 스포츠 토토의 세계! 이들은 누구이며 누가 이들을 옹호하는가?]
[토토 게이트! 그 실상은 파헤치다]
필상이 당한 일은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
몇몇 기자가 호기롭게 기사를 썼으나 그냥 묻혔다. 거대한 세력의 확실한 지원이 있었음을 짐작케 했으나 대항할 방법도 없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양수겸장이 터졌다.
“역시 여론의 힘은 강력한 것 같아.”
“남의 일이라고 애써 외면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피부에 확 와닿는 사건이 터졌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대낮에 총질을 하다니!”
시몬이 속한 클리포드 찬스는 세계적인 로펌이다. 그런 회사가 거대 스포츠 베팅 기업체 4개를 전격적으로 고소했음에도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시몬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밀어붙였다. 승리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 기자들이 서서히 관심을 드러냈다.
위험에 대한 부담보다 특종에 대한 가치가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 프로. 이탈리아 여행은 재미있었어?”
“그다지…….”
필상의 대답에 묘한 여운이 남았다.
봄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필상이 이탈리아에 들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출입국 기록이 남으니까.
그 기간이 하필 세력다툼의 빌미가 된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겹쳤다. 그 의미를 이 대표가 모를 리 없다.
굳이 입에 올릴 필요는 없지만 아무리 완벽한 법적 조치를 취해도 놈들을 박멸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박멸은커녕 도리어 되치기를 당할 수도 있을 만큼 놈들의 힘은 강력하다.
법마저 피해 나갈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권력을 지닌 자들과의 커넥션이 단단하기 때문에 놈들의 추악한 실체를 만인 앞에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은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그 누구도 그걸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잖아. 자책하지 마.”
“자책은 하지 않지만 무한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놈들을 완전히 무너뜨릴 명분이 더 강해진 거죠.”
자신을 건드린 CST를 치는 것은 어렵지 않고 언제든 가능하다. 때문에 그들을 먼저 때리는 것은 하책이었다.
그놈들을 먼저 치면 결국 자신의 존재만 드러내는 셈이라고 판단한 필상은 놈들의 탄탄한 연합을 먼저 깨고자 했다.
그래서 최근 가장 심한 타격을 입은 이탈리아 업체 대표를 눕히기 위해 직접 움직였고 정보의 혼선을 줘 서로에 대한 불신의 씨를 남겼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강한 대응이 발생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에서 수십 명이 총질하는 대형 참극이 벌어졌다.
과거 마피아들이나 저지르던 짓을 버젓이 행했는데, 서로를 향한 발포만 있던 게 아니라 무고한 시민도 여럿 희생된 것이 문제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