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28화 (328/354)

328. 완벽한 아름다움

“어떨까요?”

“잘 칠거야!”

“그렇기는 해요. 형의 무지막지한 샷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걸 보면!”

역전을 당한 뒤부터 연이은 세 홀에서 필상은 모두가 경악할 만한 환상적인 샷을 이어 왔다. 워낙 인상이 강렬한 샷이었기에 웬만해서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셰인은 최고의 샷 컨디션을 보였다. 지금까지 이렇게 필상과 팽팽하게 승부를 이어 온 선수가 있었나 싶다.

-셰인 로리. 대단하네요. 저런 선수가 어째서 통산 6승뿐이며 세계 랭킹이 25위에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사실 대다수 투어프로들의 기본 기량은 상향평준화가 된지 오래입니다. 최근에는 한 해에 3승 이상 달성하는 선수를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그러고 보면 타이거 우즈는 정말 대단한 선수인 것 습니다. 참가한 대회에서 우승할 확률이 무려 23%나 되더군요.

-가히 골프 황제라고 불릴 만했습니다. 톱 10에 들 확률이 무려 56%나 되니까 나가기만 하면 우승하는 포스였죠. 물론 우리 공 프로가 나타나는 바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아직 은퇴한 것은 아니죠?

-네. 하지만 필드의 지배자가 현역으로 버티는 한, 복귀를 저울질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드디어 쐈습니다!

남은 거리는 59야드, 셰인은 60도 웨지를 잡았다.

나름 컨트롤 샷을 구사했지만 아까처럼 바람이 도와주지 않았다. 애초에 너무 띄운 것부터 실수였다.

시작은 좋았으나 높이 뜬 타구는 맥없이 바람을 타며 겨우 그린 좌측 에이프런에 멈추고 말았다. 필상보다 가깝게 붙여도 아쉬울 판에 그를 응원하는 이들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와중에 맥길로이는 까다로운 글라스벙커 라이에서도 핀에 바짝 붙인 뒤, 버디로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셰인도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퍼팅은 홀컵에 미치지 못했다. 오후가 되면서 그새 자란 잔디가 볼을 잡은 것이다.

이제 2퍼팅만 해도 위대한 업적이 달성된다.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팬들이 외치는 함성을 듣자 필상은 다시 한 번 라이를 살피며 요동치는 심장을 억눌러야 했다.

‘오른쪽 반 컵!’

이미 방향은 나왔지만 미세하나마 내리막이기 때문에 필상의 스트로크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겨우 토납을 운용하고 난 뒤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을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을 맞췄다.

뎅!

모양도 좋게 필상은 이글 퍼팅을 성공하며 2타 차 단독선두로 디 오픈 우승자가 되었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펄쩍펄쩍 뛸 것 같았으나 의외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엄마!’

모모코나 딸의 얼굴이 떠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간절히 그리운 사람은 어머니였다.

평생 아버지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고생했고 누나 셋에 필상까지 키우느라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하셨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들 하나는 번듯하게 키우고 싶어 갖은 정성을 다하셨는데,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못난 아들의 지독한 실패였다.

회사에서 잘려 소송까지 당하고 약혼했던 여자에게 버림까지 받았다. 자포자기한 아들이 고향에 내려와 알코올에 의존하는 한심한 모습까지 보였을 때,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감사합니다!”

뭇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으나 필상은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에게 감사의 마음부터 전했다.

비록 듣지 못할 테지만 TV 생중계를 보고 계실 것이기에 자랑스러운 아들이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한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작년에도 이 대회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천양지차였다.

결선에 오른 거의 모든 선수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필상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인사를 했음에도 팬들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들 오라고 해.”

“괜찮을까요?”

“그럼. 움직이는 데 아무 문제없잖아.”

필상이 미사키와 서 팀장까지 모두 데려오라고 했다.

아직 완치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코스에 나와 있기 때문에 불러오라고 한 것인데, 흑돈은 오해했다.

굳이 여러 사람을 불러도 괜찮겠냐는 의미였으나 그건 그가 착각한 것이다. 필상은 오늘 자신이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들의 정성어린 도움을 잊지 않았다.

이 대표와 봄까지 합류하니 대부대였다.

그들과 나란히 서서 팬들에게 인사를 했고 시상식이 준비되는 동안 우승인터뷰에 응했다.

-축하합니다. 소감부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를 아껴주시고 응원해 주신 팬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은 오로지 한 분, 어머님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아들이었으나 이제는 호강시켜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기쁩니다.”

-아내와 딸이 서운해할 것 같은데요?

“물론 제 현숙한 아내 모모코와 너무도 사랑스러운 딸 수미도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생명과 의지를 주셨고 아내와 딸은 보다 높은 목표를 향해 달릴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또한 누나들과 자형, 그리고 조카들도 보고 싶네요.”

웬만해서는 사적인 언급은 하지 않던 필상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한 번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곁을 지키고 있는 이 대표와 미사키, 서 팀장, 흑돈을 일일이 호명하며 고마움을 전했고 더 없이 좋은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인 미켈슨과 타이거도 언급했다.

-TPK가 벌이고 있는 사업이 엄청난 성공가도를 걷고 있다던데, 상장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시는 팬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연스럽게 TPK를 광고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필상은 다소 길게 이것저것을 설명하고 은근히 자랑까지 했다.

기자들도 알면서 그냥 웃으며 지켜봤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 쏟아졌다.

-이번 대회에 유난히 불미스러운 사고가 많았는데,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혹시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까?

“네. 하지만 함부로 예단할 수 없으며 그것을 입에 올리는 것도 적절히 않아 그 얘기는 다음으로 미뤄야겠습니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공 프로님의 성공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력이 개입한 것 같다던데, 일전에 언급한 적이 있던 스포츠 베팅 업체들 아닌가요?“

이렇게 대놓고 푹 들어올 줄은 몰랐다.

필상은 대답하기 전에 그 기자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혹시 사악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고 한편으로는 그가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할 텐데, 그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더 무겁게 생각하는 기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자신들의 목적을 수행하던 아비게일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고 필상이 결국 디 오픈을 우승하면서 큰 낭패를 봤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괜한 빌미를 줘 적들이 경계하게 만들 소지도 없애야하기에 상당히 전략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스포츠 도박의 역사는 거의 인간의 문명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흔적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현재를 사는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니까요.”

-폭군의 그 말씀은 이전과 달리 스포츠 도박을 옹호한다고 해석해야 하는 건가요?

소속과 이름이 궁금한 그 기자는 필상이 입장을 바꾼 것에 상당히 실망한 것 같았다. 적어도 그는 지금 만연하고 있는 스포츠 도박이 위험하고 결단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듯.

전략적으로 한 발 물러서려던 필상은 사태의 엄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자신의 말은 그냥 한 개인의 입장이 아니며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방송에서는 적절치 않게 느껴질 도박의 치명적인 부분을 언급하며 팬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야만 했다.

“도박 중독은 치료가 필요한 질병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어려운 이들도 그 수렁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해 파산하며 심지어 삶을 포기하는 자들도 많고 남에게 해를 끼치게 행위도 서슴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이미 상당수의 나라가 스포츠 도박을 허용하며 가장 큰 시장인 미국도 전면 개방하면서 그 시장이 천문학적인 돈 잔치를 하고 있는데, 대세는 바뀔 수 없지 않을까요?

“그게 참 안타까운 점입니다. 국민이 뽑은 국민의 대표자들이 서민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그런 일에 앞장서고 있지요.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이 허용하는 가운데, 제가 감히 뭐라 간섭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 나라에서 그런 일이 허용된다면 저는 만사를 제쳐 두고 촛불을 들 것입니다.”

한국의 ‘촛불’은 이미 세계가 알고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서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고 일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열강의 구호를 받아야 했던 가난한 나라가 70여 년 만에 이룩한 경제 성장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나아가 중요한 국가적 위기 때마다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난 시민들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민주주의의 산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는 모습은 큰 충격을 선사했다.

그런데 그 상징과 같은 촛불을 언급하면서 필상의 입장은 분명해졌다. 질문을 던졌던 기자는 물론 대다수의 기자들이 손이 바빠진 걸 보면 이건 또 다시 파격적인 인터뷰가 될 소지가 높았다.

이후 그와 관련된 질문이 마구 쏟아졌지만 시상식에 참여해야 한다는 이유로 인사를 마친 필상은 자리를 정리했다.

“영 껄끄러운 자리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야할 기쁜 자리였다.

하지만 또다시 스포츠 도박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함께 시상식장으로 이동하던 이 대표도 근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네. 그렇기는 하죠.”

문제는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갑인 거대한 권력과 힘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전 세계 부(富)의 절반 이상을 0.9%의 부자가 움켜쥐고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아!’

정의와 공정은 돈과 권력 앞에 한없이 작아진다.

그럴싸한 탈을 뒤집어 쓴 채 여전히 착취와 억압이 만연한 것이 사실이다. 과거처럼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는 시대는 아니라지만 법이라는 더 무서운 도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경제를 통한 지배가 더욱 악랄해졌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때문에 목표를 이룬 필상은 이 문제에 대한 책임감, 아니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꼈다.

하늘이 자신에게 각별한 이능을 선사한 것이 그저 혼자 잘 먹고 잘살라는 의미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사회에 공헌하고 모두에게 이익이 될 선한 역할을 감당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저도 남을래요.”

시상식이 성대하게 치러진 뒤, 오붓한 뒤풀이가 이어졌다.

서로 축하하고 격려하는 자리가 끝날 무렵, 필상은 이 땅에 잠시 머물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부분은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고 뭔가 일이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이 대표와 봄.

일단 잠자코 있었으나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필상에게 따라붙은 봄은 자신도 필상과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그녀라면 큰 도움이 되겠으나 그녀를 이 위험한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안 돼. 넌 네 일을 해야지.”

“다른 것은 다 오라버니 말을 듣지만 이건 그럴 수 없어요.”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그게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혼자 움직여야 마음대로 저지를 수도 있을 거고.”

“이미 제 손에도 피가 묻었어요.”

피라는 단어에 필상은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하지 못했다. 진즉에 스스로 해결했어야 하는데 미적대다가 봄을 끌어들인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자신이 설득해도 그녀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간다고 하고서는 혼자 남아 필상을 따라다니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까이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나도 들어가지 않을 거야.”

이 대표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봄과 필상이 어떤 말을 주고받을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남을 수 없었다.

극히 위험한 일이며 그녀가 필상을 대신해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대표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이 모든 일들이 완결되려면 법적인 뒤처리가 완벽하게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시몬과의 연대를 이어 가고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부분에서 이 대표의 역할이 있었고 밤이 깊도록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 모든 일들을 한 달 안에 끝내겠다는 약속도 했다.

* * *

“흐흐흐. 감쪽같죠?”

“그러게. 역시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는군!”

일행들이 먼저 떠나자 필상은 봄과 함께 숙소부터 바꿨다.

첫 번째 작업은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서 눈에 확 띄는 둘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노력부터 시작했다. 아무리 옷이나 모자 등을 통해 위장을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봄이 토납을 통해 외모를 바꿀 수 있는지 확인하자고 제안해 시도했는데, 터무니없게도 그게 이뤄졌다.

일단 피부색이 바뀌었고 얼굴 모양도 일부 교정이 가능했다.

“전 이 얼굴이 좋아요.”

“안 돼! 가는 곳마다 광고하고 다닐 일 있어!”

봄은 최근 가장 핫한 흑인 여배우의 얼굴로 역용했다.

원래 바탕이 훌륭해서 그런지 제법 그럴 듯했다. 스스로 아쉬운 점이 관능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는지 눈가와 입모양을 살짝 바꿨을 뿐인데, 느껴지는 인상이 확 달라져 섹시했다.

여자들이 화장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 능력이 더욱 성장하면 그녀는 이제 성형이 필요 없는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연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평범해 다시 봐도 특징을 기억하기 힘든 백인의 얼굴로 위장한 필상은 행복해 하는 봄의 위장을 반대했다.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미녀를 데리고 다니면 수많은 이들의 질투가 폭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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