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26화 (326/354)

326. 미스 퍼펙트

‘봄!!’

이 대표는 괜히 따라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봄도 필상과 같은 초월적 능력을 지녔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도 쉽고 잔혹하게 적들을 처리하는 광경을 보며 소름이 돋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기우였다.

봄은 놈들을 발견하자 눈에 띄지 않게 크게 돌아 접근했다. 그리고는 놈들이 인파와 조금 멀어져 자신들끼리 시시덕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 놈을 먼저 쓰러뜨렸다.

‘컥!’

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짐작도 되지 않지만 그냥 하얀 손가락을 들어 놈을 지적하는 것만 봤다.

하지만 젊은 경호원 한 명이 갑자기 복부를 부여잡더니 푹 꼬꾸라졌다. 답답한 신음을 흘리는 그를 동료가 얼른 부축할 때 봤는데, 꽉 틀어막은 복부에서 피가 배어났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공격을 인지한 노인은 벙커에 들어간 필상을 한참 노려보더니 얼른 인적 드문 지점으로 이동했다.

의심스런 대상인 필상이 감행한 공격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인적이 거의 없는 곳으로 이동한 것이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악!”

이번에는 비명 소리가 꽤나 컸다.

동료를 부축하고 걸어가던 또 다른 가드의 옆구리에서 멀리서도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붉은 피가 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위급한 상황에서 노인의 반응이 놀라웠다.

그는 동료가 다쳤음에도 얼른 가까운 건물로 도망쳤다. 위험이 감지된 순간, 다친 사람을 돌보지도 않는 비정함은 그가 어떤 인간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목이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다친 두 놈이 노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위험을 분산하는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사전에 그런 지시를 받지 않았다면 나오기 힘든 행동이다.

‘봄아!’

핏자국이 선연한 공간에 서서히 다가간 봄은 도망친 놈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노인이 사라진 건물로 향했다.

간이 화장실.

누구라도 있을 것처럼 많은 인파가 모인 곳에서 가깝지만 다들 경기에 몰입하고 있던 터라 아무도 없다는 것이 노인에게는 불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봄의 살벌한 능력을 봤음에도 이 대표는 불안했다. 스물한 살 어린 여자가 위험인물을 제 발로 찾아가는 것이 무모해 보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1분도 지나지 않아 화장실을 걸어 나온 이는 봄이었다. 곧장 이 대표를 향해 다가오면서 씩 웃었다.

“왜 따라오셨어요. 위험한데.”

“너 괜찮은 거야?”

“그럼요. 어서 가요. 오빠가 벙커에서 어떻게 쳤는지 궁금해 죽겠어요.”

“그 노인은?”

“이제 더 이상 못된 짓은 못 할 거예요.”

대체 어떻게 노인을 처리했는지 자세히 묻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그 노인이 가장 혹독하게 당했을 것이라는 짐작만 가능했다. 자신이 행한 것도 아니건만 그 과정을 생생히 따라온 이 대표는 그냥 멍한 얼굴로 15번 홀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봄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모모코는 유부녀가 되어 ‘미스 퍼펙트’라는 닉네임이 어울리지 않지만 봄은 모든 면에서 그런 칭호를 받을 만하다는.

“2온은 못 했겠지요?”

“공이 벙커 턱에 바짝 붙은 것 같았어.”

“그럼 빼냈겠네요. 에이 진짜!”

거의 코스에 도달했으나 불만을 터트린 봄은 다시 한 번 간이화장실을 되돌아보며 코를 찡긋거렸다.

어찌 보면 귀엽기 그지없는 표정이지만 그 안에 포함된 강렬한 적의는 화장실을 폭발시키고도 남을 것 같았다.

실제 필상의 선택도 레이 업이었다.

골퍼가 공을 그린 가까이로 보내지 못하는 아픔,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나 필상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앓던 이가 쏙 빠졌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핀에 바짝 붙여 파라도 잡으면 되죠!

-물론입니다. 그런데 경쟁자들의 기가 한껏 살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셰인과 맥길로이의 세컨샷이 버디가 가능한 거리에 붙고 말았다. 무려 6타 차로 출발했건만 이제 곧 역전이 될지도 모를 상황이 닥치자 팬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물론 이곳이 고향인 두 경쟁자의 팬들은 난리가 났다. 반쯤 포기했던 우승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상의 샷도 이제 아쉬울 것이 없었다.

텅!

138야드에서 피칭을 잡고 날린 타구가 깃대를 정통으로 맞췄던 것이다. 조금 길게 친 뒤 백스핀을 기대했던 필상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야했다.

깃대에 맞은 공이 홀컵과는 꽤 먼 7.5야드 지점에 멈췄기 때문이다. 그냥 역전도 아닌 2명에게 모두 추월당할지도 모를 불운에 비명을 지른 팬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그린에 오른 필상은 경사를 꼼꼼하게 살핀 뒤, 자신 있게 스트로크를 가했다. 조금 길다 싶었지만 정확한 라인을 타고 구른 공은 뒷벽을 맞고 경쾌한 울림을 사방에 퍼트렸다.

탕! 탕! 타타타타당!

“와아! 나이스 퍼팅!”

“힘내라. 폭군!”

“그래. 이길 수 있다!”

너무 안쓰러웠던가?

오늘 처음 행운이 깃든 것 같은 플레이에 팬들은 응원의 고함을 질러 댔다. 좀처럼 갤러리들에게 반응하지 않던 필상도 홀컵에서 공을 꺼낸 뒤, 모자를 벗고 팬들의 응원에 호응했다.

중요한 것은 위기를 겪고 있는 선수의 표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소 어색했지만 눈가에 언뜻 비친 여유는 가히 절대자라 부를 만한 위엄이 느껴졌다.

그로 인해 잠시 시간이 지체되었던 맥길로이가 팬들의 반응에 영향을 받았는지 루틴을 밟다 자세를 푸는 진풍경도 연출되었다.

-어허! 넣으면 동타가 되는데, 긴장되나 보네요.

-아마도 공 프로가 보여 준 여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도 담담한 자태, 그건 아무나 보일 수 있는 게 아닌 것이죠!

-어? 하하하! 저걸 놓치네요!

-푸시를 하는 순간 퍼터 페이스가 조금 열렸습니다. 천하의 맥길로이도 역시 공 프로 앞에서는 하염없이 작아지는군요!

3야드 안팎이었고 라이가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필상과 동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맥길로이는 들고 있던 퍼터를 확 집어던지려다 말았다. 스스로 한심하다고 느낀 것 같았으나 그래도 마지막에 마음을 다스린 것은 다행이었다.

“나이스 터치!”

2야드가 남았지만 살짝 슬라이스 내리막 퍼팅이기 때문에 셰인 로리도 맥길로이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셰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부드럽게 밀어 라이를 태웠고 공은 홀컵 안으로 사라지면서 급기야 -15,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안방에서 펼쳐진 경기였기에 그는 벅찬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우승 퍼팅이라도 넣은 것처럼 두 팔을 높게 쳐들고 자신을 향한 팬들의 환호를 흔쾌히 즐겼다.

그 와중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나이스 터치’를 외친 사람은 필상이었다. 보통 경쟁자의 퍼팅은 잘 보지 않으며 멋진 터치가 나와도 그냥 고개를 돌리고 다음 홀로 이동한다.

하지만 그린 주변에 남아 끝까지 지켜보고 박수까지 보낸 필상의 행동은 마치 이 필드의 주인처럼 보였다.

“뭐가 좋다고 박수까지 쳐 주십니까?”

“하하하! 이길 거니까.”

“그렇다면야! 하하하!”

흑돈은 필상의 달라진 태도와 기운에 안도감을 느꼈다. 웬만해서는 흰소리를 하지 않는 성품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맞이한 16번은 382야드 파 4홀이다.

거리는 만만하지만 랜딩 지점의 좌측에 커다란 숲이 우거져 있어 페어웨이의 폭이 아주 좁다. 또한 240야드 주변에 항아리 벙커가 3개, 270야드 부근에도 1개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 우드로 안전한 공략하기도 애매하다.

“중요한 티샷이네요!”

흑돈이 그걸 강조한 이유는 어떤 클럽을 선택하겠냐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동반자들의 샷을 차분하게 지켜봤다.

앞선 선수들이 어떤 결과를 얻는지 지켜본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의미였다.

아너인 셰인은 드라이브를 잡았다.

앞서고 있어서 우드를 잡을 줄 알았던 필상은 그가 쐐기를 박으려고 마음먹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17번 홀은 타수를 줄이기 어렵고 18번 홀은 웬만해서는 버디를 잡을 가능성이 높은 극과 극의 홀이다. 고로 이 홀에서 버디를 잡는다면 이후 진행이 쉬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카앙!

“우이 씨! 좋은데요?”

“하하하! 그러네. 근데 왜 쌍시옷이 들어가는데?”

“좌우로 벌어질 줄 알았거든요!”

“마음을 곱게 써야 운도 따르는 거야. 진정하라고.”

“넵!”

셰인은 드라이버를 잡았지만 무리하지 않고 정확한 방향을 유지하려고 거의 스리쿼터 스윙을 했다. 결과도 나쁘지 않아 270야드 지점에 놓인 벙커를 가볍게 넘겼다.

따라잡아야 할 필상에게는 꽤 부담스러운 상황이지만 전혀 염려하지 않는 태도에 흑돈도 더는 떨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긴장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두 번째로 타석에 올라간 맥길로이의 타구가 악성 훅이 나면서 좌측 숲으로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잘나가다가 필상만 만나면 무너지는 습관, 그게 도진 모양이다.

“으! 저 친구 맛이 갔네요!”

“사람 품평은 그만하고 유틸이나 줘.”

“18도요?”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지.”

오늘 내내 비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평소 작정하고 때리면 270야드는 충분히 넘길 수 있다는 걸 알지만 흑돈은 아무래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4번 아이언으로 앞의 벙커들만 넘기고 세컨샷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어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다 멈췄다.

하지만 필상의 연습 스윙을 보면서 걱정은 달나라로 보냈다.

쉬이잉! 쉬잉!

어마어마한 헤드 스피드가 연신 터졌기 때문이다.

답답한 표정을 유지하던 필상의 팬들도 이번에는 뭔가 폭발적인 샷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눈을 부릅뜨고 쳐다봤다.

‘더도 말고 셰인보다 5야드만 더 보내자!’

그런 자신감을 가진 이유는 오늘 내내 희미하던 샷 이미지가 아주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봄과 이 대표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봤지만 결과는 장담하지 못했는데 방해자가 사라졌음을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과아아앙!

물론 이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들렸다.

왜냐면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임팩트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위력적인지 말을 잇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저거, 저거 300야드 나가는 거 아닐까요?

-하하하! 엄청나지만 유틸리티 우드입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장타자지만 300야드는 무리지요.

-에이! 전 넘을 것 같은데요?

-저녁내기 합시다!

-콜!

방송을 진행 중인 캐스터와 해설자가 나눌 대화는 아니다.

하지만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계를 책임지고 있는 PD도 싱긋 웃는 걸 보면 이런 대화가 시청자들에게 아주 나빠 보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한국 방송을 리시버를 꼽고 듣고 있던 이 대표도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타구를 보며 덩달아 가세했다.

“봄. 300야드 넘을까?”

“아뇨!”

“아니라고?”

“네. 제가 볼 때는 딱 셰인 로리보다 5야드 정도 더 나갈 거예요.”

“아!”

이 대표도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골프가 얼마나 심리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만약 유틸리티를 잡은 필상의 티샷이 드라이브로 때린 셰인보다 더 멀리 나간다면 동요가 없을 수 없다.

더욱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으며 방금 역전한 선수에게는 그런 결과가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와아아아! 나이스 샷!”

갤러리들의 함성 소리가 모든 것을 대변했다.

흥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리도 더 멀리 나갔지만 방향까지 셰인의 타구와 똑같아 하마터면 구르던 타구가 셰인의 공에 부딪칠 뻔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날아간 거죠?”

“야디지 북을 봐.”

“그것보다 형의 눈이 더 정확하잖아요.”

“289야드.”

“더 나간 것 같은데요?”

“289야드는 셰인 비거리고 난 8야드 더 날아갔지.”

“와! 미치겠네요. 지금 18도 유틸로 300야드를 보낸 겁니까?”

“297야드라니까!”

“그게 그거죠!”

필상과 흑돈의 대화는 중계진도 한창 열띤 토론 중이었다.

300야드를 넘길 거라던 임 캐스터는 정확한 타구 데이터가 나왔으니 자신이 진 것을 알지만 그래도 박박 우겼다.

이건 자신이 진 게 아니라고.

하지만 허 위원은 오늘 저녁 메뉴를 뭐로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약을 살살 올리면서.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필상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먼저 앞서서 잰걸음으로 걷고 있는 셰인 로리가 있었다. 뒤통수만 보여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그의 머리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봤다.

“어이구! 공치러 와서 숲에는 왜 자꾸 들어가지?”

“고마해라. 안 그래도 나만 보면 기가 죽는 아인데!”

“아이요? 형보다 두 살 어린데 너무 심한 말 아닌가요?”

“그런 놈이 계속 쟤만 씹는 이유는 뭔데?”

“안돼서 그러죠. 안돼서!”

맥길로이에게 필상은 미켈슨이 느끼는 타이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미켈슨은 그래도 가끔 이겼지만 맥길로이는 첫 만남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뒤 슬럼프를 겪었고 이후 중요한 고비 때마다 필상 앞에서 무너졌다.

한 번도 시원하게 이기지 못했는데, 오늘도 그 징크스는 그대로 적용되는 중이었다. 필상을 피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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